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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인생

인생의 가뭄에 닥쳐올 때 (창12:10~20)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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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뭄에 닥쳐올 때  (창12:10~20)

  지난 주간 톱뉴스는 무엇보다 런던 테러 사건일 것입니다. 도심 한 가운데서 연쇄폭탄 테러가 자행되어 무고한 시민이 50명 이상 사망하고 부상자도 7백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7월 9일 현재) 정말로 황당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깝고 기가 막힌 것은 바로 그 전날 런던은 2012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해서 한참 축제 분위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린 환호하는 모습과 비통해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 저게 바로 세상사는 모습이로구나. 저게 바로 바로 인생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항상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만 생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 생각지도 않던 슬픈 일,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에 불쑥 불쑥 닥쳐옵니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런 일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결코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없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것보다 시련이 닥쳐올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닥쳐오는 시련 앞에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큰 축복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실패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닥쳐오는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에 닥쳐오는 시련을 넉넉히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초생 달처럼 생긴 메소포타미아 지방(지금의 이라크 남부) 출신입니다. 그것은 고대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살던 아브라함이 당시로서는 변방에 해당하는 가나안 땅(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믿음의 결단입니다. 한번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면 선뜻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큰 믿음이 없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히11:8 표현을 빌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할 정도로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 정도라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믿음의 소유자로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시행착오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닥쳐온 가뭄과 기근 : 인생에 상존하는 시련

  본문 10절을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 ”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땅에 기근이 닥쳐왔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은 본래 강우량이 부족한 지방입니다. 적절하게 비가 내리면 농사가 그런대로 잘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부족해지면 가뭄이 들고 농사를 망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가뭄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면 농사를 망치고 기근이 닥쳐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실타래 풀듯이 하나하나 펼쳐질 줄로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 닥친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창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는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은 이랬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를 견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 저리 쫓겨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7:5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가나안 땅을 통째로 주신다는 약속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땅 한 평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기근이 닥쳐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감안하지 않으면 세상 살기가 정말 피곤하고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영혼의 맷집! 웬만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한 영혼의 맷집, 즉 굳센 믿음이 필요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영혼의 맷집이 좋지 않으면 인생길에서 수시로 닥쳐오는 시련을 버텨내기 힘듭니다.    

[2]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 원인 :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    

  10절을 계속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 ”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닥쳐온 기근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내려갔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애굽은 당시 문명의 중심지이므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겁니다. 그런데 굳이 내려갔다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가 잘 됩니다. 당연히 목축도 잘됩니다. 가뭄? 기근?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내려갔다는 표현을 쓴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가나안 땅까지 왔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다. 멀어져 있습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입니다. 어제까지 좋았어도 오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마치 자전거타기와 같습니다. 계속 페달을 밟고 달려가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뭄 자체가 아닙니다. 기근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고난 자체가, 시련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해결을 부탁하면 그것은 이미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말은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그건 문제도 아니죠. 하나님이 쉽게 해결해 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끌어안고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까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 어린 시절 라디오 조립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재료를 사다 납땜질을 하며 조립을 했는데, 그 조잡한 라디오에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큰 라디오가 고장 났습니다. 왠지 고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뜯었는데, 어디가 고장 났는지도 모르겠고, 다시 맞추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실컷 야단맞고 전파사가 갖다 준 적이 있습니다. 진작 전파사에 갖다 주었더라면 야단도 안 맞고 망신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괜히 문제를 부둥켜안고 해보다가 일만 그르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면 건드릴수록 꼬입니다. 인간의 손 떼가 묻을수록 골치 아파집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가 인간적으로 계산해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계산 착오였죠. 막상 애굽에 가까이 가니까 덜컥 겁이 났습니다. 11절 보니까, 그는 아내 사래 때문에 불안해진 겁니다. 그녀가 아리따운데 혹시 문제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좀 이상합니다. 그때 이미 아브라함은 75세가 넘었고, 사래는 65세가 넘었는데 ... 무슨 오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는 수명이 1백 수십 세입니다. 그러니까 65세면 중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애굽인들은 피부가 거무튀튀한데, 사래는 셈족으로 피부가 하얗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띄게 되죠. 그런데다가 미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긴장할 만합니다.  

  그래서 또 인간적으로 계산하고 아이디어를 냅니다. 12절~13절 보면 어떤 겁니까? 사래를  누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본래 이복누이기는 하지만(창20:12) 지금은 어엿한 부부인데 말입니다. 엄연한 거짓말입니다. 자기 깐에는 머리를 굴린 겁니다.

  사람이 머리를 굴리고 인간적으로 계산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요즘 그런 말이 있어요. 하도 세상이 험해지고 어려워지니까 보통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도 좋아야 되지만 JQ도 좋아야 된다고들 합니다. 이게 뭐냐고요? 잔머리 지수! 요즘 같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는 머리 회전을 빨라야 살아남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 잔머리 굴려갖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잔머리나 굴리며 살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보다 믿음이 잘 돌아가야 합니다. IQ보다, EQ보다, JQ보다 FQ(Faith Quotient, 신앙 지수)가 좋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는 계산을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꼬이기 시작합니다. 14절~15절을 보십시오. 정말 사래의 미모가 애굽인들에게 주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소문이 왕궁에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이 불러들이죠. 황당한 것은, 16절 보니까, 그 덕택에(?) 아브라함이 바로 왕에게 하사품을 받아 부자가 된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방석에 앉은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시방석입니다. 아내를 빼앗기고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지금 밝힐 수도 없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입니다. 날마다 한숨입니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렵고 힘들 일일수록 절대로 혼자서 해보려고 애쓰면 곤란합니다. 사람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시 146:3~5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8:8~9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살다가 낭패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꼭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 : 아브라함을 수렁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

  불행 중에 참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이렇게 망쳐놓은 사태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수습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쥐어박고 내팽개쳐버리고 싶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잘못한들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 땀과 눈물로 키운 자식을 어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자식이 사고치고 경찰서 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떤 부모가 실컷 혼나봐라 하고 무관심할 수 있나요? 욕을 하고 매를 치더라도 일단은 가서 수습합니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를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수렁에 빠진 아브라함을 구하기 위해 드디어 하나님이 출동하십니다. 17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명시되지 않아서 뭔지 모르지만 대충 짐작은 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창세기 20장에 나오는데 아마 그런 식이었겠죠. 하나님이 바로 왕과 그 집안에 질병을 내립니다. 그리고 꿈이 나타나서 경고합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질겁했고, 이내 아브라함을 불러들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엄청 분했을 겁니다. 18절~19절 보면 3번이나 문책을 합니다. 어찌하여 그런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느냐 이겁니다. 그 문책 앞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답합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묵묵부답이요 유구무언입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자들 앞에서 아내 팔아버린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으니 ...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0절 보니까 바로 왕이 주었던 물건을 그대로 주고 보냅니다. 아마 하나님이 두려워서 얼른 아브라함을 쫓아 보내고 싶었겠죠. 이런 모습을 보시고 혹시 수지맞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건 축복이 아닙니다. 그까짓 것 때문에 그토록 망신을 당하고 마음고생하고 ... 그게 무슨 축복입니까? 뼈아픈 추억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렇게 무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보냅시다.  

[4] 항상 승리하는 비결 : 하나님께 밀착되어 믿음으로 살라

  그런 가정을 해봅니다. 가뭄과 기근이 닥쳐왔을 때 아브라함이 만약 믿음을 굳게 지키고 가나안 땅을 고수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가뭄과 기근 중에 굶어죽었을까요? 하나님이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계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분명히 도와주셨을 겁니다. 혹시 이렇게 말씀드리면 속으로 이런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진작 가뭄 들지 않게 도와주시지 않고 ... 그러나 그건 너무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연단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믿음을 굳게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난과 시련의 때에 잠시 기다리십니다. 오히려 시련의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크게 역사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위기는 ‘위대한 기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먹게 하신 그 하나님! 허허벌판 광야에서 이스라엘 수백만명을 40년 동안 만나로 먹여주신 그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분명히 지켜주셨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아쉽습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시련이 닥쳐와도 그 앞에서 당당하게 믿음으로 맞서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텐데 ... 인간이 망쳐놓아도 수습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간구하면 얼마나 더 흔쾌하게 도와주시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쓸데없이 고생하고, 망신당하고, 하나님 영광 가리고, 비싼 인생 수업료 지불하고, ... 도대체 이게 뭡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하십시다. 하나님께 밀착된 관계를 유지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없던 길도 열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이 없다고 낙심하고 인간적으로 세상길로 가는데, 믿음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은 없던 길도 새로 뚫어주십니다. 그게 기적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결단함으로 감사 기도하니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다니엘 6장) 사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 고통 중에도 한밤에 일어나 찬미하니까 차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간수장이 자결하려 드니까 옥에서 나가지 않죠. 그 후에 간수장 가정이 복음화되고, 그 가정과 루디아 가정이 합작해서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빌립보교회는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가되고 ... 놀라운 일들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탈옥을 포기했지만 다음 날 높은 사람들이 와서 굽실거리는 가운데 당당하게 출옥합니다.(사도행전 16장) 이게 크리스천의 멋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우직하리만치 믿음을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이란 영국인 육상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간증이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본래 100 미터 달리기 선수인데, 400 미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입니다. 1924년 빠리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100m 결승 경기가 주일 오전에 걸렸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할 수 없지 하고 출전했을 텐데, 그분은 자기 신앙으로 용납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고민합니다. 그러다 결국 불참을 결심합니다. 선수단과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불참 통보를 합니다.  금메달을 따 놓은 당상인 우승 후보자인데 말입니다.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인들은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 따위로 예수 믿느냐 그런 식이죠. 그렇게 결단하자 하나님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는 100 미터 대신 400 m 경기에 출전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건 상식적으로 무리였지만, 놀랍게도 우승을 합니다. 경기기 시작됐는데, 그가 100 미터 달리기처럼 질주합니다. 관중들이 염려합니다. 저렇게 달리다가 중간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달렸고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나중에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처음 2백 미터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백 미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뛰셨습니다.” 그제서 영국인들은 환호했고 그의 신앙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후 그는 평생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하면서 복음전도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에게 인생의 가뭄이 닥쳐올 때, 인생의 기근이 닥쳐올 때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세상으로 도망가지 말고, 사람을 찾아다니러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가십시오! 하나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 밀착하십시오!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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