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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인생

인생이 사는 의미 (전도서 9:7-10)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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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사는 의미 (전도서 9:7-10)

과외천국, 입시지옥

   어떤 외국인이 우리 나라의 입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국은 과외천국이고 입시지옥의 나라이다" 아마 과외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우리는 해마다 입시지옥의 현상을 겪게 됩니다.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중학생이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참 애처롭기도 합니다. 또 새로운 입시제도가 발표되었는데 모든 아이들이 이런 과외천국, 학원천국, 입시지옥의 교육환경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정현씨가 쓴 「아버지」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암선고를 받고 투병하면서 아버지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스토리인데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으냐 하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정수라는 아버지에게 지원이라는 아주 공부 잘하고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원이의 꿈은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겨냥해서 입시준비를 하는데 이 소설 속에서 그 당시 서울대 영문과의 정원이 35명입니다. 전국의 수재 가운데 35명만 뽑는 것입니다. 딸을 위해서 아버지가 어느 정도로 관심을 가지느냐 하면 그때부터 '35'라는 숫자가 이 아버지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고 모든 삶의 행동에 35라는 수가 항상 등장을 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줄을 서 있다가 35명안에 타고 택시를 잡을 때도 끝자리수가 35안쪽 숫자의 택시만 타는 것입니다. 신호등이 바뀌어 횡단보도를 지나갈 때도 꼭 35등 안에 들어가도록 걸어가는 것입니다. 35이상 뒤쳐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아버지의 몸부림입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딸이 35등 안에 들어가도록 서울대 캠퍼스의 땅을 밟으면서 우리 딸도 이 학교에 들어와서 이 땅을 밟도록 마음으로 기원을 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지원이가 서울대학에 합격을 합니다. 그러나 지원이와 그의 아내는 술꾼 아버지, 가정에 무관심한 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 제가 독자로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 그 소설에서 직접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는 그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버지는 실컷 일해도 칭찬은 어머니가 듣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밥해주고 입혀주고 자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조금 멉니다. 직접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이 직접적이지는 않고 세밀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지원이의 미래를 향한 아버지의 그 관심, 자신이 지금 암을 앓고 있으면서도 딸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그 행동들이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까지 이런 입시의 풍경이 묘사될 만큼 우리 나라는 입시민국입니다. 이제는 입시준비를 본격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크는 환경이 실제로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자

   제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보았는데 미국의 교육이 이 지상의 모든 학교교육의 표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미국 교육의 허점이 있습니다. 장점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모든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95%의 사람들은 정직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살 정도의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인력은 5%만 키워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모두 다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는 빗나간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이 미국의 일반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우등생과 일등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일반적으로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애가 미국까지 와서 일등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5%만이 세계에서 일등 짜리로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과정 속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목사로 살지만 제가 배웠던 수학, 화학, 물리, 생물 등 수많은 과목 중 많은 것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수학의 미분, 적분이라고 하면 그게 무엇이라는 것은 압니다. 우리는 이 좁은 나라에서, 또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이 뒤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실제 우리 아이들은 바쁘게 배우지 않으면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잘하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교육은 망할 교육이고 외국 교육은 좋은 교육이라 해서 외국으로만 가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 좁은 나라에서 바쁜 시간에 많이 배우는 우리의 현실은 우리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가 감당만 한다면 피아노도 배우고 태권도도 배우고 붓글씨도 배우고 수영도 배우는 게 좋습니다. 감당을 못하는데도 시키는 게 문제이지 적성에 맞고 역량에 맞도록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자라는 것은 좋다고 봅니다.

   네 가지 조건

   분문에 보면 가장 평범한 교훈으로 사람답게 사는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이 말을 더 쉽게 풀이하면 예배 마치고 집에 가셔서 저녁식사 맛있게 하고 사십시오. 이런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살아야 됩니다. 먹고 싶은 것을 제때 먹는 복이 아주 큰복입니다. 맛난 음식을 앞에 놓고도 입맛이 없어서 젓가락을 집었다, 놓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네가 하루하루 음식을 맛있게 먹는 가장 기본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도서가 가르쳐주는 가장 평범한 삶의 지혜입니다. 음식의 맛을 누리지 생존욕구는 복중의 또 하나의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8절에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단장은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에 향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는 환경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정신이 흐트러진 사람은 옷입는 것도 균형을 잃습니다. 몸단장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허점이 있는 것입니다. 외모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적인 측면인데 남들이 볼 때에 살아가는 자세가 발라야 된다는 것이지 의복을 단정하게 하라고 해서 여러분이 비싼 옷만 찾지 마십시오. 속옷이 200만원 짜리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입어야 인간답고 그렇게 입어야 현대인답습니까? 그런 측면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자기를 가꾸는 모습을 보면 남에게 무엇을 과시하기 위한 자기 단장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외형이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과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과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가정생활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10절에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라.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여기에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업에 관한 교훈을 우리 앞에 주고 있습니다. "음부에는 일이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는 것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힘써 일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음식, 의복, 가정 그리고 직업을 전도서가 우리 앞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이 중요하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삶의 질과 의미를 결정하는 선택은 직업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직업을 어디로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의 선택이 곧 그 사람 인생의 성격을 규정하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찍부터 체계화되고 준비된 선택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직업의 선택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점수를 어느 정도 잘 받느냐 하는 점수 싸움이 아닙니다. 직업의 선택에 인생의 싸움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직업의 의미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혈한혈루(血汗血漏)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땀과 피눈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피땀과 피눈물의 의미가 직업의 선택과 연관을 가질 때 뜻이 있습니다. 이 피땀과 피눈물이 아무렇게나 흘리면 안됩니다. 확실한 직업의 선택을 가지고 피땀과 피눈물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처칠은 정치가입니다. 그는 평생 정치만 한 사람입니다. 피카소는 화가입니다. 평생 그림만 그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토스카니니는 음악가입니다. 그는 음악을 위해서 한 평생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몇 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수한 예술가들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한번도 곁길로 간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처칠은 우리 앞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게 휴가를 즐긴 적이 없다. 나의 일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처칠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 자체 안에 휴가가 있고 보람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봅니다.
   "손이 일을 당한다"는 것은 직업의 선택을 말합니다. 우리는 직업의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직업은 몇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업의 수준이 있습니다. 일을 해야 먹고사는 생업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직업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업보다는 한 단계 높은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천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명감에 의한 또 다른 개념입니다.
   어떤 글에 신탄진에 사시는 장로님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 장로님은 매우 신실한 분인데 신탄진 담배공장의 직원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항상 다른 직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하지만 직책도 간부급이니까 갑자기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니까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생업을 위해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직이라고 할 때는 의미가 다릅니다. 생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직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직을 위해서는 목숨을 던지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직업은 여러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 가장 성공한 사람 중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직업인으로서, 전문가로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는데 이 사람이 남긴 명언이 한 마디 있습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는 것입니다. 포드의 집에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벽난로가 있는데 재벌 포드가 자기 집에 쓸 장작은 하인들한테 시키지 않고 꼭 자기가 패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늘 불을 지피려고 하면 직접 통나무를 잘라 장작을 패서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장작을 패면 몸에 열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불을 지펴도 몸이 훈훈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웅크리고 있다가 불을 피우게 되면 많이 피우지 않고는 온기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장작을 패면 몸이 배로 더워진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생활의 모든 면에 이 원리를 적용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공한 사람의 명예가 항상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천직이라는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부채감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모든 직업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천직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내 꿈은 이게 아닌데 왜 나는 이것을 해야 되는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할 수밖에 없는 이 일 자체가 힘써 해야 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 받는 자녀와 부모의 기도

   맥아더 장군이 남긴 아들을 위한 기도의 한 대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아들을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의 분투 항거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폭풍 중에서도 용감하게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맥아더 장군이 아들을 위해서 드린 이 기도를 묵상해 보면 오늘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표현은 거의 없습니다. 맥아더의 기도는 어떻게 보면 잔인한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아들보고 얻어터지라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이 기도 안에 놀라운 신앙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유명한 것입니다. 진정 아들을 위한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버지 맥아더가 우리 앞에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땅위에서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 의미 있게 살고 갈 것인가? 오늘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수정하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폭풍을 헤쳐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아들로 기도를 해야지 우리는 폭풍이 없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내가 가는 우리 아들이 가는 앞길에 폭풍이 없게 해 주시고…' 왜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기도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과 맞는 기도 속에서 내 아들이 굳건히 헤쳐나갈 수 있는 기도, 싸워서 이기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아들이 되게 해 달라는 고난과 도전에 항거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달라는 맥아더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자녀를 위해 드리는 기도와 너무나 수준이 다릅니다.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 세대는 바른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만큼 이제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무감과 부채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전도서가 우리에게 주는 이 교훈은 깊은 영적인 교훈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식생활 이야기와 의복과 가정과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알고 보면 전부 세상 이야기 같습니다. "해 아래서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날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여기서 전도자 솔로몬은 두 가지 영성을 우리 앞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 아래 있는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시간들은 다 헛된 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시간이고 해 아래 있는 이 시간은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차라리 안 누리는 것보다도 못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고 이끌어주시기 때문에 금년에도 살 의미가 있고 내년에도 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모든 것이 헛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모든 삶은 헛되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되지 않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12장 마지막에 하나님이 숨겨놓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서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을 숨겨놓았습니다. 창조자를 아는 삶은 모든 것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밥을 맛있게 먹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맛있게 먹는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의복을 단정히 하고 땅위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정생활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알면서 누리라는 메시지가 이 전도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도 이 우선권을 놓치면 안됩니다. 아이들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다른 것을 알아야 되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 세상 것으로 자녀들을 장식하면 그 아이의 장래가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맺는 말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다 헛됩니다. 권력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재물도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 아래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소유하고 하나님 없이 즐기고 하나님 없이 그것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전도서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모든 것은 전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 아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소유하고 활용하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사는 의미를 우리가 드러내야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과 피카소와 토스카니니처럼 그들이 일 속에서 인생의 보람과 즐거움을 누렸던 것처럼 성도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삶는 의미를 누리고 드러내고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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