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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용서

용서의 길잡이 (빌레몬서 1:15~18)

by 【고동엽】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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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길잡이   (빌레몬서 1:15~18)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천재적인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걸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중간에 앉아 계시고 각기 좌우편에 여섯 명씩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 빈치는 제자들의 얼굴부터 차례대로 한 사람씩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얼굴을 맨 먼저 그렸습니다. 그런 뒤 제자들을 차례대로 그려나가는 가운데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릴 때가 되었습니다. 다 빈치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자니까 그의 얼굴을 험상궂게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에게 한 사람의 모델이 떠올랐습니다. 다 빈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늘 원수같이 지내는 한 이웃이었습니다.
"옳다! 그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에 집어넣으면 되겠다!"
그는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 이웃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려 넣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상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고심을 했습니다. 한 주 두 주가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감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없이 그는 그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심정을 내 마음 속에 그대로 품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랑의 얼굴인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그 이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이미 그려놓은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금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웃을 찾아가서 화해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자기가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평안해 졌습니다. 절로 그의 머리 속에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마음 속에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내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니까 어떻게 일이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 일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죄인들의 용서를 위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유토피아」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5∼16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위대한 저술가였습니다. 정치가였습니다. 대법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참수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법관들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진술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 옛날 스데반을 돌로 치던 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다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스데반과 사울, 곧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영원히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시간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나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한 형제가 되어 저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함께 거하기를 위해 저는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이 그의 최후의 진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레몬서는 기껏해야 25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나의 오네시모가 도사리고 있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용서의 길잡이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길잡이에 따라서 "아, 그렇구나! 이러니까 내가 용서해야 되겠구나!"라고 깨닫고, 우리의 마음 속에 아직도 맺혀 있는 것을 다 풀면서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실을 덕으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오네시모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오네시모는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원색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도망쳤다, 달아났다"라고 말하지 않고, "떠났다"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떠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능동형으로 쓰지 않고,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1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잠시"가 "영원히"로 바뀌어졌습니다. "떠나게 된 것은"에서 "두게 함이니"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에서 맺은 주종의 관계는 그저 잠시잠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서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실보다 덕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빌레몬이 잃은 것은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잠깐 잃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대신 무엇을 얻었습니까? 사랑 받는 형제를 얻었습니다. 영원한 형제를 얻게 되었습니다. 실보다 덕이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을 사랑으로 잘 뒷바라지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특별히 사랑 받는 형제입니다. 바울과 오네시모의 사이는 기껏해야 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는 영적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 변화받아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는 육적으로도 자기 주인 빌레몬을 충성스럽게 잘 섬기는 종이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빌레몬을 잘 도와주는 사랑받는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잃은 실보다도 얻은 덕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과거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가 우리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도 기꺼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정말 원수같은 존재들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종살이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복주셔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형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꺼이 원수같은 존재들인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용서해 주었습니까? 요셉에게는 섭리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형들의 모든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45:5∼8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50:20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꺼이 선포해 버리십시다. "내가 오네시모를 용서했노라."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될 것입니다. 악이 바뀌어서 선이 될 것입니다. 실이 바뀌어서 큰 덕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오네시모를 보다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 자신이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의 빚을 많이 지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사랑의 빚진 자구나!"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사랑의 빚을 갚아나간다는 심정으로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나 바울을 영접하듯 하라."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지금 바울은 빌레몬을 "동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빌레몬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사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는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자기를 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내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까 오네시모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야지!'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에게 웬 낯선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전과7범으로 있다가 지금 막 교도소에서 출감하는 길입니다.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목사님이 제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저를 책임지십시오. 저는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이 필요합니다. 직장을 알선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교도소에서 한두 사람만 세례를 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하겠습니까? 거기다 전과7범에게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청년이 눈치를 챈 듯이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 봐요.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네들 입으로는 '사랑, 사랑!'이라고 떠들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나를 낳은 내 엄마도 나를 고아원에 내다버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지금 어느 하늘아래선가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도 나를 내어버리고 도망치는 판에 세상에 무슨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까? 나는 열네 살 때 고아원의 담을 뛰어넘어서 지금까지 전과7범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내게 누가 사랑을 베풀어주겠습니까? '사랑, 사랑!' 말로만 떠들지 마세요.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발길로 목사님의 책상을 힘껏 차고는 뛰쳐나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습니다.
"여보게, 잠시 앉아서 내가 하는 말 한 마디만 듣고 가게나."
목사님은 그를 차근차근 타일렀습니다.
"젊은이, 한 번 생각해 보게. 남이야 자기가 낳았으니까 자기 자식을 어쩔 수없이 먹이고 입히는 것이 마땅하겠지. 그러나 자네는 자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자네의 똥오줌을 다 받아내고 우유를 먹이면서 키우지 않았나? 그 사람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자네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었겠나?
그리고 자네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걸세. 한 번 생각해 보게나. 자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자네가 직접 만들었는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옷을 자네가 지금 입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언제 한 번 손수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땀흘려서 농사를 지었으니까 자네가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랑을 받고서 지금까지 살아온걸세.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네는 자네의 핏줄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까지 살아온 것일세. 이 한 가지를 결코 잊지 말게나."
그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친자식처럼 길러주셨던 고아원 원장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상하게 자기를 돌보아주셨던 고아원 아주머니의 얼굴들도 생각났습니다. 그는 급기야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놓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울고 나더니 눈물을 훔치면서 그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군요. 저가 알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저는 정말로 남들이 받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군요. 목사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급히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직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랬더니 그가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도 이제부터 열심히 살아보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해서 그것을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도망칠 생각을 했습니다. 도망치려면 엄청난 돈이 들텐데 그가 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돈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많은 돈을 썼을 것입니다. 가면서도 쓰고 로마에 있으면서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에게로 돌아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훔친 돈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는데 그에게 무슨 돈이 있느냐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행28:30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로마에 있는 한 셋집에서 유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2년 동안의 방세를 지불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자기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 지방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대 제일 가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모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에게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그는 자기 손으로 장막을 만들어서 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립보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정성어린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손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 뒤에 있는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로마의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가 석방이 되면 빌레몬에게 가서 오네시모가 그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저 말로만 듣기 좋게 말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자기가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전11:1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가 그 주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고 또 큰 빚을 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누가 대신 갚으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버려 피흘려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화평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한 토막을 인용해 봅니다.

"고 김태수 집사님이 유방암으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임종 예배 시간에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지난 가뭄때 논에 물을 대면서 제일 교회 모집사님과 본의 아니지만 험하게 싸웠다면서 화해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인 나더러 대신 가서 자기가 모집사님을 용서한다고 전해주고 또 그 모집사님더러 자기를 용서한다는 말을 대신 듣고 화해를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하고 약속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후일 모집사님을 만나 내가 그 말을 하며 용서의 말을 전하고 그 집사님의 울음 섞인 용서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말미에 "천국 가는 길"이라는 시 한 수를 덧붙였습니다.

"임종으로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초행길이라 누구나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용서받으며 용서하며 살아온 자는 영원한 소망의 길이다.
죽음의 길이 가장 힘든 사람은 화목하지 못하고 간 사람이려니….
미결 인생이 어찌 그 길을 평안히 갈 수 있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결 인생으로 남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 땅에서 맺히면 하늘에서도 맺힌 채 그대로 있습니다. 다 풀어 버리십시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십시다. 비록 오네시모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가 변해서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용서해 버리십시다.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이미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됩니다. 용서는 사랑의 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내 마음 속에 미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오네시모를 이 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 용서해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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