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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신앙

행동하는 신앙 (갈라디아서 2: 15-21)

by 【고동엽】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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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신앙    (갈라디아서 2: 15-21)


우리 교단의 창설자인 김재준 목사님은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오직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는 내면적인 신앙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역사참여적 신앙을 부르짖은 선각자였습니다.
1950년대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각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내면적 신앙에 머물고 있을 때 김재준 목사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행동하는 신앙’을 천명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의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아 복음을 비정치화하고 정교 분리의 원칙을 주장한 1950년대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복음의 ‘정치화’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교회 입장에서는 ‘이단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2차 세계 대전 말에 동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전쟁이 한창 일 때 전쟁으로 시달린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유학, 이민 등의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국행 배를 탔는데 위생 상태가 엉망이라 유행병 장티푸스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비상조치를 취하여 선실을 비우고 감염자를 그곳에 수용했지만, 적절한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던 터이라 많은 사람이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나갔습니다.
그때 김재준 목사님은 팔을 걷고 그 선실로 들어가 병자들을 돌보려 하였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장티푸스라 당연히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말렸습니다.
말리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김재준 목사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신학 공부하여 그것으로 우리 한국 교회를 돌보아야 될 역사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나를 유행병에서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의 이런 신앙이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4명중의 한 명이 기독교가 자신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이 ‘복음화’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이런 김재준 목사님과 행동하는 신앙인을 더욱 더 애타게 갈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장마 비에 먹을 물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 세계의 대형교회는 모두 한국에 있을 정도로 복음화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김재준 목사님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이 무엇이고 어떠해야하는지를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하여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알게 된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적으로 ‘사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모두 예외 없이 죽을 영혼으로 태어났습니다(창 2: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창 6:5-7)
인간은 ‘육체’가 되었고,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할 정도로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는 벌금형이나 금고형 같은 가벼운 형벌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저지른 죄의 댓가는 ‘사형’입니다(롬 1:32).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적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예들은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으로 태어나서 사망의 권세 아래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죄인’입니다.
원래 율법은 인간이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지침이었는데,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함에 따라 율법은 도리어 인간에게 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확인시키는 법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정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강도가 짐작만으로 막연히 알고 있는 자신의 죄를 법전을 통해 구체적으로 자각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지켜질 수 없는 율법의 구체적 조항 아래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자각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선을 위해 만들어진 율법은 이제 죄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은 죄를 알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은혜를 알게 하지는 않습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체험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하심은 전적으로 죄인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율법의 근본적 기능이 ‘심판’과 ‘정죄’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 즉 은혜에 있습니다. 이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를 경험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율법을 엄수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함으로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우리의 인간적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의롭게 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의롭게 되려는 우리의 인간적 의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신앙’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니 ‘행위’는 필요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없다, 신앙이 떨어졌다’라고만 말하지 ‘행동이 바르지 못하다, 행동이 굳건하지 못하다’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우리에게 ‘행위’는 부차적이라서 필요 없는 것일까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이단’이 되는 것일까요?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셨습니다.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의 빛깔이 희어져 영광스러워졌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예수 일행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았더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데없고 오직 예수만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 그리고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의 예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선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만 남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상징되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은 확실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행위는 필요없는 것이고, 믿음에 비해 언제나 부차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믿음’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3. 믿음 없는 행위는 ‘맹목’이고 행위 없는 믿음은 ‘공허’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재선포한 것이 16세기 루터의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이 믿음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율법주의화되어 믿음보다는 공로사상을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행위’를 약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의 대항의 과정 속에서 믿음만을 강조한 결과로 개신교는 결과적으로 행위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게 되었고, 마침내 행위를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시키게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신자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행위와 관계없는 믿음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성직자인데도 남의 돈을 빌려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한 것으로 ‘값싼 신앙’입니다. 신앙은 그 신앙에 합당한 행위가 뒤따라야합니다.
한국 교회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 참여와 분리시켜, 즉 그 당시의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책임 의식을 신앙 안에 편입시키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의 신앙, 곧 개개인의 내면적 신앙으로 국한시켰습니다.
한국 교회가 선교 초기에 삼일독립운동을 주도하기는 하였지만, 그 운동의 여파로 인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앙의 내면화를 강조하여 한국 교회는 신앙의 역사적 책임보다는 개개인의 내면의 신앙을 중시하는 것으로 기형화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풍토 위에서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은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가르침은 선교사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세 분 중 송창근은 6. 25 때 납북되었고, 한경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었고, 오로지 김재준만은 참된 복음은 이웃 사랑이 핵심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목사직에서 제명을 당하였습니다. 그 뒤 50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한국 장로교가 김재준의 선각적 가르침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을 반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재준의 역사참여적 신앙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포섭하지 못함에 따라 한국 교회의 신앙은 ‘행위’ 보다는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이신득의’의 신앙에 머문 앉은뱅이 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의 행위야 어떻든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은 참으로 허황된 진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바울의, 루터의 그리고 칼빈의 가르침도 아닌 역사참여적 신앙을 올바로 체화해내지 못해 기형화된 한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강남 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8:21"하셨습니다. 우리는 행함이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동시대의 역사에 대해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그에 걸 맞는 역사적 행동이 요청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각 없이 무조건 아멘! 아멘! 하고 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그 순간 그 말씀에 요청되는 역사적 행동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강남 교회 성도들은 행위 없는 믿음은 실천적 내용이 없기 때문에 공허하고, 믿음이 없는 행위는 실천의 목표가 없기 때문에 나찌즘에 대한 맹종이 보여주는 것 처럼 맹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강남 교회 성도들은 믿음 속에는 반드시 그에 걸 맞는 행위가 요청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에 수반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참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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