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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선택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라 (고전 12:4~11)

by 【고동엽】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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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라   (고전 12:4~1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가 실시하는 가장 큰 행사, 5월의 축제가 이제 한 주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 주일 밤부터 구주대망 2003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기도하면서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주간의 마무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해서 제값을 못 받는 상품처럼 우리의 노력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마지막 축복을 하셔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벌써 모든 것을 단념하기로 결심하고 앉아 계신 분은 없습니까? 축제를 한 주간 남겨두고 그 동안 수고 했는데도, 아무래도 전도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어울리지, 나는 적격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분은 없습니까? 그렇더라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 첫 번째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개인 전도를 단념하고 시간과 정력을 다른 데 투자할 준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더 이상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복음은 중요하고 진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이 아주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향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뿐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왜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자기에게 너무나 벅찬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전도팀장으로 수고해 왔습니다. 정규적으로 그 일에 동참해왔고, 전도하는 일을 즐겼고,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사용한 전도방법이었습니다. 교회 초대장과 복음을 소개하는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심 없다는 표정을 분명하게 짓습니다. 차라리 급전을 쓸 수 있다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에게는 무표정하다가도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쪽지라는 것을 알면 인상을 씁니다.

그래서 아파트 문을 두드려 봅니다. 열어주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들었습니다.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문을 열도록 하는 전도팀도 있고, 아니면 아예 “물 한잔 마십시다. 화장실 좀 씁시다.” 이렇게 부탁을 해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일단 문만 열리면 발을 딱 문틈에 들여놓아 못 닫도록 하고 몇 마디를 해보지만 사실 이게 쉽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전도란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특별한 성격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확실하고 어울리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도의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는 이와 같은 오해의 문제입니다.

오해는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할 구도자 측에서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교인들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의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확한 하나님의 모습과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풍성히 주시고자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면 그 분과 교제 하는 것을 세상에서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면 누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을 마다 하겠습니까? 남을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신앙인을 보고 멸시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해는 신자들 측에서도 있습니다. 사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일수록 전도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승산 없는 전쟁에 소집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도하면 복 받는다는 소리만 들어도 복에 대한 생각은 없고, 부담이 되고,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죄의식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심이 있는 “전도자”하면 손에 메가폰을 들고 길거리에서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사람입니다. 곧 닥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을 듣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외쳐대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전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부정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오늘 우리가 갖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축제를 앞두고 여러분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교회가 제시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수고하시는 분들도 고생하셨고, 손발로 움직이지 않은 분들이라도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며 나아가고 싶고 사실 전해주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에게 맞지 않는 전도방법을 받아들이느라 열정이 식어버린 분들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복음을 받아야 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신자들을 먼저 낙담시키고 탈진하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개발한 방식인지, 아니면 저쪽 적군들이 개발한 방식인지 저는 가끔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실을 좀더 정확하게 바라보고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좌우로 한번 둘러보십시오. 여러분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습니까? 기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자라난 배경도 다 틀립니다. 그리고 지금 처해있는 현장도 다 다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그 분의 특별한 목적에 맞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나름대로 개성을 살려서 그 분이 주신 임무를 세상에서 완수토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진리를 전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다양하게 만드셨기에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우리에게 맞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축제를 한 주간 앞둔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방법이 무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도에는 하나의 바른 길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이 놀라운 사역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이웃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 표준 새번역 개역판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 뜻대로”, 누구의 뜻대로 입니까? 성령의 뜻대로, 그의 역사하심을 더욱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설계하신 그대로 움직이십시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들을 주셨습니다. 지금 말씀드릴 여섯 가지의 유형 가운데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전도유형은 어느 것일까요?

첫째는 베드로와 같은 정면 대결형 접근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저하지 않고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주님이 물어보셨을 때 서슴치 않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아는 대로 대답하고 그런 대답을 함으로써 살면서 어떤 의미가 뒤따라야 할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부터 하면서, 뛰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고백은 백점짜리 고백을 하고나서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 자리에서 주님의 메시야 사역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옵니다.“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물 위를 걷는 일이라도 주저하지 뛰어내리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목이라도 베어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가 옳다는 확신일 뿐입니다. 그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돌진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그가 대변인으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인선입니다.

몇 주 전에 예수님을 못 박았던 적대적인 도시 한 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할 사람으로 하나님은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수 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과 그 죄는 용서 받지 않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베드로 그가 적격자였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런 접근법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드시는 분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것은 못해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누구에게 진리를 바로 증거 하겠습니까?” 보니까 집사가 교회만 왔다갔다하지 도대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다면 이런 사람들은 딱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당신 언제까지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생활 할거요?”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말로 대면해서 직접 권면할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유형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만 주시면 저는 한다면 합니다”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도전적이면서 좀더 조용한 방법도 있습니다. 지성적인 접근행위입니다. 바울의 경우죠.

바울 역시 진리를 들고 언제든 사람들과 맞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접근 방법의 우수성은 복음의 메시지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제시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가 쓴 어떤 서신 서를 읽어보시면 여러분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로마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이 답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설득력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의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는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당대 유대나라에서 제일 알려진 스승 가운데 한사람에게서 사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타고난 논객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글로 썼을 때는 더 무게가 있는, 힘이 실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이론적인 대결을 해서 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테네에 있는 철학자들에게 보내실 이보다 더 적절한 사람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7장을 보십시오. 아테네 시민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가보니 그 비석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엄청 난 이름의 신들을 다 섬겼는데 그렇게 섬기면서도 아테네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아요. 혹시 섬긴다고 우리가 열심히 섬겼는데 우리가 알지 못해서 못 섬긴 신이 있을까 싶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비석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하면서 사시고 참되신 유일한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이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서 그는 아테네 사람에게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되어 주께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아테네의 청중들에게 베드로를 보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기 논지를 결정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테네 사람들을 코웃음 치게 했습니다. “우선 행동부터 해라 그러면 복 받는다”는 말이 먹혀들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아테네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청중들은 도대체 왜 믿어야만 하는지부터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구도자들은 복음 선포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설명을 기다립니다. 근거가 있어야 움직이고, 증거가 있어야 발걸음을 떼어놓는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가운데서도 있습니다.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무얼 믿습니까?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로 증거형 접근법도 있습니다. 어떤 소경의 경우죠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이 그 눈을 뜨게 한 소경이 나옵니다. 이 소경은 베드로나 바울만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확신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동전 한 푼 던져줄 줄 알았는데 동전은 던져주지 않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새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종교계가 발칵 뒤집혀진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인 그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 소경의 부모에게 바리새인들이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신, 대답 한번 해보시오. 정말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 아들의 눈을 뜨게 했소?” 아버지는 입장이 난처하여 “아 내 아들이 장성했으니까 직접 물어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유대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니까 아들에게 핑계를 하고 넘깁니다. 그 소경은 신학적 논쟁은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자기의 경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입니다.” 남과 논쟁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입니다. 다만 자기 체험에 근거하고 유대인으로 신앙적 상식에 기초한 논지를 펼칩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들 참 이상한 사람들이군요.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는데 왜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시오. 하나님이 죄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 봤소? 창세기 이후에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눈뜨는 일이 있을 수 있소?”

그렇게 다그치니 바리새인들은 할말이 없어졌습니다. “네가 온전히 죄 중에 캄캄한 봉사로 태어나서 누구를 지금 가르치려 하느냐?” 이러면서 그냥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들을 준비하시고 이런 사람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일을 하실지 들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기억하십시오. 효과적인 간증은 꼭 극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역사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 축제를 위해서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체험한 사람들만 이 복음 전하는 것이 축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교회에 다닌 지는 올해 3년째 다녔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요.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어봐도 별로 모르겠고, 눈만 자꾸 감겨요.” 그런 사람들은 전도하는 일에서 면제입니다. 축제에 한 사람도 안 데리고 와도 상관없어요. 데리고 올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야기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전도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한집안 식구들에게도 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마약과 폭력을 일삼다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간증보다는 오히려 진솔한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가 더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기 위주의 간증은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 거리를 오히려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 들어보니까 정말 놀랍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믿어야 돼. 나같이 착한 사람들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 얼마든지 이렇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술로 담배로 노름으로 헤매던 사람들은 신앙이 정말 필요할 것 같아.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아니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드라마틱한 죄를 짓지 않았어도 오히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동질감이 있는 그들도 내가 변한 것처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누구에게 얼마만큼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줘야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제가 다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크리스챤 분위기에서 자라났어요. 그런데 어떤 때는 내 부모님을 보면서 참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도대체 어머니는 저 상대방이 예수를 안믿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저렇게 말씀하실까? 나처럼 예수를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돼. 심지어는 교회의 어떤 집사 이야기를 하던지, 장로이야기를 하던지, 어떤 목사 이야기를, 험담을 해도 괜찮지만 안 믿는 사람을 데리고 저런 이야기를 하실까. 난 납득이 안 될 때가 많았어요. 그러나 그런 일은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 상대방 봐가면서 이야기해야 안 되겠습니까?

길가다가 말고 중고등학생 보이니까 “너 중학교 다니니? 고등하교 다니니?”우리 집사님한분이 그렇게 물으시데요. 저는 지나오면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길가에 서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아이 입장에서는 황당한 아줌마 다보겠네 이러지 않겠어요? 뭔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지요.

어떤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잘 형성해서 전도하는, 마태와 같은 방법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리 마태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얼토당토않습니다. 세리들이 복음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마태에게 일어났습니다. 제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고 나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많은 친구들을 데려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몇 주 전 우리는 마태의 잔치를 집중적으로 살핀 바 있습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분이 주시는 새 삶을 얻게 하고 싶어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마태는 정면 대결이나 지적인 도전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기 삶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잔치하는데 먹으로 오라” 그 이야기만 했습니다. 본래 우리 팀미팅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정면대결이나 지적인 도전이나 개인적인 간증을 가지고 나서는 것은 자기에게 너무 부담스러웠을지 모릅니다. 마태는 지금껏 맺어온 우정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친구들을 참으로 염려해서 하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리스도의 요구를 신중히 받아드릴 기회를 주고자 한 일입니다.

관계를 맺고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3주 전에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우정이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의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자기 친구가 권하면 교회를 가겠다고 한 통계가 있습니다. 친구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정에 기초해서 이야기를 하면 들을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까? 그렇게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싶은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그러나 3년, 5년, 10년 동안 만나지 않다가 전화해서 불러놓고 커피만 끓고 나면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부글부글 속이 끓어서는 안 됩니다. 첫날은 아무 이야기를 하지 말고 친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물어보고 들어주십시오. 사람들마다 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연들이 많기 때문에 일단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잘 만났다 가자. 그리고나서 첫날은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니까요. 무엇을 말해야 될지 성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인내심 있게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다 들어주십시오.

전에 이수훈 목사님 오셔서 간증하신 것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동네 가장 완고한 대장 할아버지를 만난 이야기 말입니다. 만나서 계속 들어줄 만큼 들어주고 “이제 다음에는 내가 이야기할 차례입니다.”라고 하면 그동안에 들어준 게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대인 관계형 복음전도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식사를 함께 하고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방법입니다. 꼭 바깥에 있는 친구들만 전도대상에 포함시키지 마시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식구들이나 친척들에게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초대형 접근법입니다. 가보자, 우리 한번 가보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죠?

우리 하나님은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방법으로 평범하면서도 예사로운 사람들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자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사마리아 사람에, 여자이죠, 게다가 도덕적인 행실이 드러내 놓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 이야기를 누가 들으려고 그러겠어요? “너나 잘해라”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상 아닙니까? 유대인 남자 예수와 대화를 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점심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남자가 평범한 유대계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과 권위 있는 답변은 메시야라는 것을 믿기에 충분했습니다.

믿어지니까 그 여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물동이를 그냥 내버려 두고 동네로 쫓아 들어간 겁니다. 가서 “여러분 동네사람들 한번 가보자 우리 우물에 놀라운 분이 한분 계신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내 과거에 대해서 다 말해줬다고. 화려한 과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선동해가지고 동네사람들 다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예수님이 그 동네에서 이틀이나 묵었어요. 그러고는 이틀 후에 동네사람들이 그럽니다. 이제는 우리가 네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그가 세상의 구주신 것을 앎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동가들도 가끔 필요하거든요.

친구들을 전략적으로 예배나 교회 행사에 데리고 나오십시오. 봉사활동도 좋고 친선체육대회도 좋습니다. 어떤 종류의 행사가 그 친구에게 어울릴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이런 걸 하니까 무조건 데리고 가겠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 프로그램에는 누가 가장 적합할 것인지, 이 멜로디에는 누가 춤을 잘 출 것인지 그걸 생각하라 그런 이야기죠. 예배가 어울릴 사람은 예배로 바로 모시고 오는 것이고, 음악회, 영화관람, 연극공연, 환자들 섬기는 일 등 상대가 관심있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연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각과 관심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번 주 수요일에는 교육부흥회를 갖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극동방송에서 전체적으로 주관하고 첫날 수요일은 우리교회에서, 목, 금, 토요일 각각 다른 교회에서 하게 됩니다. 혹시 교육부흥회 하면 작년 생각이 나서 좀 주저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같은 실수를 또 하겠습니가? 그러니까 부모님들은 안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미니 콘서트도 7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을 30분 앞당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물가의 여인처럼 사람들을 동원하는데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대형 전도방법은 수고한 자신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나 길 잃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복음진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이번 수요일 밤에 데리고 오십시오.

마지막으로 봉사형 접근법이 있습니다. 도르가, 다비다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봉사를 잘 했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같은 동네에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힌 일로서 알려져 있는 여인입니다.

봉사형 접근법에는 도르가를 능가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녀의 행위만 보아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들어 죽자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이 방법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몸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섬기는 기쁨을 맛보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일일이 다 인정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섬기는 그 자체가 기쁨인 사람들이 성도들 중에서는 반드시 있습니다.

종종 베푸는 물질로서 사랑을 표현하기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방법보다 섬기는 방법은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덜 주는 방법입니다. 다만 열매를 거두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법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봉사형 전도자들은 아무도 다가설 수 없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 다가가는 전도자들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완고한 사람도 이 사랑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이 모자랄 때 도와주고 아플 때에 음식을 해서 갖다 주고, 이런 일로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올데갈데없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기거하도록 해주고... 지난 금요일에 안 오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오신 분들은 야마모토 목사님 간증 들어보셨지요? 술파는 집에서 태어난 목사님은 완전히 긴자의 분위기에서 네온사인만 보고, 기생, 폭력, 술취함, 알콜중독자 많은 이런 곳에서 자란 청년인데 우연히 미국 선장한테 허락을 받아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이 청년은 일주일 동안 내내 갑판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보는데 (여러분, 도시에서는 별 본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네온사인에 찌들려 있던 그의 감각이 되살아 난겁니다. 마지막 날은 날씨가 흐려 침실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데 배가 워낙 흔들려 뭔가 떨어져서 보니까 성경책이 떨어진 거예요. 선실에도 있고 호텔 객실에도 있죠. 기드온 성경책, 첫 페이지를 보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일주일 내내 하나님 창조하신 별들을 보면서 밤을 보냈던 청년인데 그 말이 얼마나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미국에 내려서 히피 스타일로 교회 가서 그 교회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악수를 하고 돌아가는 그런 상황에서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데요.틀림없이 내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니까 교인들 보고 “다 악수를 잘 해주고 집에 가서 손 씻어라” 그렇게 말한 것 같다고. 너무 더러운 청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청년이 예수 믿는 집에 홈 스테이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오늘 목사가 된 것 아닙니까? 저는 그 이야기 들으면서 우리도 그런 방법이 있겠다 싶어요. 왜냐하면 동남아에서 온 많은 사람들, 우리가 친구로서 형제로서 식구로서 받아주면 싫어할 사람 없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같은 지식이나 베드로 같은 용기나 사마리아 여인 같은 동원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음식을 만들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놀거나 자동차를 고치는 데는 선수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데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학교의 교사가 전도하기 위해서 다른 학교 교문 앞에 가서 전도지 돌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반 아이들 있잖아요. 의사 선생들이 바쁜 의사 생활 하면서 따로 전도하겠다고 주일날 시간 내는 것 보다는 자기한테 날마다 찾아오는 오십 명, 백 명 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이런 다양한 접근 방법가운데서 여러분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섯 가지 중에 한 가지도 나한테 100% 맞는 것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제 7의 제 8의 방법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을 지금껏 여러분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지금 여러분의 환경 속에 세워 주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한번 순종해 보십시오.

그동안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제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다음주일 밤부터 여러분의 소중한 분들을 위한 잔치가 열립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수고가 이 축제동안에 아름답게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정근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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