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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입은 자들 (마22:1-14)

by 【고동엽】 202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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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입은 자들   (마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
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
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
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
업하러 가고....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
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
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장 1절-14절)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게릴라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게릴라 콘서트’란 콘서트의 주인공이 하루 동안 차를 타고 다니면서, 혹은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그 날에 있
을 콘서트를 홍보하게 되는데, 콘서트 장소에 5,000명 이상의 관중이 입장을 해야만 약속한 장소에서 콘서트
를 열수 있게 되는 프로그램입니다.
말이 쉽지 아무리 인기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하루 동안 홍보를 해서 5,000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한다는 것
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내고 있고, 실제로 5,000명이 아니라 10,000명이 모여서
콘서트를 벌인 적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온 사람들은 콘서트의 주인공이 그들을 일일이 지목해서 초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작위로 전단지를 뿌리면서‘와 달라’고 요청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이 한번의 초청에 열일을 마다하고 이곳에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초청하는 콘서트의 주인공도 5,000명 이 상의 관중이 동원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감동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초청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초청은 게릴라 초청과는 다른 것입니다.
다같이 1-4절의 말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임금이 자기 아들의 결혼식에 초청장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귀한 초대인지 모릅니다.
평범한 사람의 초청이 아닙니다.
임금님의 초청입니다.


지난번 미국 부시 대통령 취임식 때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많이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 중에는 정식으로 초청
장도 받지 못하고서도 마치 자기가 초청을 받은 것처럼 국내에서는 그렇게 알리고는 정작 취임식 자리에는
들어도 가지도 못했다는 신문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왕의 초청이니 얼마나 귀한 초청입니까?
이것은 천국의 대한 비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천국 잔치에 모든 사람들은 다 초청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식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참석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아니면 너무 갑자기  초대를 받아서?
너무 부담이 되거나, 갑자기 초대를 받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결혼시즌이 되어 청첩장을 받으면 부담스러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아들의 혼인입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같이 5-6절을 읽어 주시 바랍니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
하고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특히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천국복음의 초대를 받고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일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영혼구원에 대하여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종들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다같이 8-10절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고 했습니다.
지금 이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바로 잔치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매 주일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예배의 행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혼인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닥치는 대로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누가 누군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란 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면, 주일날 이 자리에 오라면 올 수 있었겠습니까?
거리에서 밥 얻어먹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노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영적으로 갈급해진 사람이 아니고는 교회까지 들어오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육체가 깨지고, 죽을병에 걸리거나,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혼의 노숙자들이었기에
이 자리에 쉽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도리어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먹으러 오라는 잔치에 누가 제일 먼저 옵니까?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에서‘대통령이 잔치를 베푸니 청와대로 오십시오’하면, 누가 제일 먼저 오겠습니까?
거리에서 방황하며 배고픈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면에서는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우리가 복음의 초대를 받아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세 가지입니다.


1.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는 천국 비유입니다.
왕의 아들의 결혼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초청입니다.
영광스러운 초청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특별한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집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초청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정성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옷도 깨끗하게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결혼식에 오라고 할 때 아무렇게나 입고 갑니까?
정장을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갑니다.
더욱이 귀한 분의 초청에는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고도 자기 일들 때문에 불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아지면, 재물이 많아지면, 천국초청보다 자기일 보기에 바쁘다고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우리는 뜻밖의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초청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리에서 방황하던 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불량자들이었고, 실패자들이었고, 혈기를 부
리며 주먹 힘으로 살던 깡패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즉 모두 모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이렇게 믿음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별로 잘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학벌이나, 문벌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력의 배경으로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초청에 기쁘게 응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것이 풍성한 잔치에 기쁘게 참석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3. 초청에 응할 때는 반드시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13절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예복을 입었는데 한 사람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왕이 그 사람을 보고 노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했을까요?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서 자기 옷이 깨끗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스스로 입고 있는 옷이 예식에 참석함에 모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왕은 대노하였습니다.
왕은 사환들에게‘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손발이란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정당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냄새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갈아입은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장로선거를 합니다.
누가 선택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말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옷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은 변화된 겸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장로의 직은 무거운 직입니다.
주를 위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들어가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처럼 교인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예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장로가 되었으면 도리어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예복의 교훈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성질도 죽여야 합니다.
입술도 닫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예복으로 갈아입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장로가 되어서 덕을 끼치지 못하고, 교역자를 도와 협력하지 못하고,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장로가 될 바에는 차라리 그대로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착하고 충성된 장로가 되어서 교회부흥과 교역자를 도와 헌신 봉사하는 축복의 장로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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