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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

사랑을 더하는 교인이 됩시다. (골 3:14)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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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기를 원하며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교인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나타내며 사랑을 공급하며 사랑을 격려하며 사랑을 계속하며 사랑을 더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생활 원리를 교훈한 사도는 골3:12절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열거하고 사랑을 말하며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속옷에서부터 겉옷에 이르기까지 걸치는 것이 여러 가지인데 마지막에 띠를 맴으로써 그 옷차림 전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속이건 겉이건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옷을 걸쳐도 바지에 허리띠가 없다면 나가다니며 자랑도 활동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3:8-10에서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했습니다.

고전13:13에서도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갈5:4-6에서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인데 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2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며 사랑을 그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교훈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른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가치체계 속에서 모든 것 위에 있으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삶에 반드시 더해져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앞서고 그 후에 사랑이 추가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과 삶의 동기요 근거요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명하면서 주께서 그들을 용서하심같이 하라고 교훈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것과 같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간에 서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되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으로서 최고의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 하심은 미덕의 실제적 적용을 말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적용은 용납입니다. 긍휼, 자비의 적용은 용서입니다.

  용납하며

혐의는 원망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의 원망이나 다툼의 책임은 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선 양편에 다 있는 것입니다. 원망을 받는 자 편에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망 거리를 묵과하지 않고 불평을 일으키는 자도 사랑의 표준에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해자 측에서는 용납하는 정신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잘못된 자의 짐을 져주는 의미에서, 혹은 자기 역시 그 사람에게 허물됨이 없지 않음을 자인하는 의미에서 그 범과 자에게 용납을 청하는 것과 근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갈 6:1-2).

그러므로 서로 용납을 청할 필요가 있음도 사실이고, 서로 용납해야 될 것도 사실입니다.  용납은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산물입니다.


   용납은 겸손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라 합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한센씨 병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다 합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합니다.

하나님! 제가 저 병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왜 그냥 지나쳤는데?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병자보다 나은 게 있었는 줄 아느냐? 너는 그 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그는 즉시 그 병자에게 뛰어갔다 합니다. 프란체스코는 병자의 손을 꼭 붙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겸손해져야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은 사람 중 이경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합니다. 후일 장로로 피택 된 그는 `작은 예수'라고 불렸다합니다. 이 장로가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설날 이었다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그 지방 교노였던 사람을 만나자 "형님, 세배합니다."하고는 절을 하고 나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합니다.

당시는 아직까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존재하는 때였는데, 진사며, 교회의 집사가 지방 교노에게 세배하면서 형님이라고 부른 것은 이 장로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세배를 받은 교노는 너무나 감격하여 전 가족 열두 명을 이끌고 교회에 나가 교인이 되었다합니다.

   용납은 온유해야 합니다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다합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합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팔 복중에 하나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 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용납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실락원’을 쓴 밀턴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합니다. 그는 왕당파 부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매리라는 여성과 결혼했다합니다. 그러나 매리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합니다. 그녀는 밀턴의 청교도적인 삶이 싫었던 것입니다. 나는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밀턴의 엄격한 청교도적 삶은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밀턴은 인내심을 갖고 아내를 기다렸다합니다. 2년 후,매리는 밀턴에게 돌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합니다. 당시 매리의 가정은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합니다. 반면 밀턴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합니다. 아내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남편에게 돌아왔다 합니다. 밀턴의 불행한 신혼시절은 ‘실락원’을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소재가 됐다합니다. 자신의 낙원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명작을 완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때로는 많은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 반드시 그 열매를 수확합니다.


간호원 폴로렌스 나이팅케일은 원래 이태리 사람이라 합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 문화적인 교육을 받은 가정에서 자랐다합니다. 부모는 그 딸에게 좋은 가정을 갖도록 행복한 결혼을 권유했지만, 나이팅케일은 거부하였다합니다. 그가 31세 때 허무감에 젖어 일기를 썼는데 ‘살아갈 의욕이 없다’라고 했다합니다. 그는 그 공허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합니다.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간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 젊은 여인은 전쟁터를 찾아갔다합니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전상자들을 붕대로 싸매 주고 닦아주고 사랑하면서 3년 동안 그들을 도왔다합니다. 외로운 군인들은 나이팅게일만 지나가면 마치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처럼 인사를 하고 경배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희생을 거쳐서 그는 현대 간호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원마다 간호원이 없어서는 안 되도록 제도화되었다합니다. 나이팅게일은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시체를 영국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기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 가족 묘지에 묻어 달라고 했다합니다. 나이팅게일은 31세 때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였지만 새로운 가능성과 전진의 의미를 찾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어 나갈 때에 결국은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며

신자들은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용납은 피동적이요 소극적이고, 용서는 능동적이요 적극적입니다,

용서는 긍휼과 자비의 열매로 볼 수 있습니다.


  용서는 긍휼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잘된 것은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된 것은 남에게 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바빠 있습니다. 긍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권면하시기를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아름다운 삶의 자세입니다.

<명예혁명>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의사이고 또 손자가 의사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손자가 책을 썼는데, 할아버지 의사가 손자 의사에게 늘 입버릇처럼 수없이 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환자를 만나면 늘 '미안합니다'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해야 한다." "왜요?" "왜냐하면 내가 부족한 탓으로 환자를 미병(微病)에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너는 환자를 대할 때마다 늘 마음속에 '병은 미리미리 막아야 되는 것인데 병이 중할 때까지 당신을 돌아보지 못해서 이렇게 병이 중해졌습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당신이 병든 것입니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라고 권면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깊은 의미가 담기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내가 환자일 때 의사가 이러한 마음으로 나를 치료한다고 하면 나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송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긍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자비입니다.

열네 살의 한 소녀가 나폴레옹을 찾아왔습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폐하, 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소서." 나폴레옹은 소녀에게 영문을 물었다. 소녀는 눈물을 거두며 애원했습니다. "저는 라욜라입니다. 제 아버지는 지금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나폴레옹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대역죄인이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소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당부했습니다. "폐하, 저는 지금 죄의 경중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일방적인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십시오." 나폴레옹은 잠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습니다. "너로 인해 네 아버지의 죄를 모두 용서한다. 이제 안심하고 돌아가라."

인간의 구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그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책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만한 최대 이유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더해져야 합니다.

영국의 공장노동자인 레이 크리스프는 1997년 딸 롤리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데려간 결과 뇌종양으로 진단을 받았다. 이후 병원에서 두 번씩이나 수술을 받았으나 완치되지 못하고 결국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고 또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무슨 일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레이는 공장 근무시간을 밤 시간대로 바꾼 후, 낮에는 도서관 컴퓨터에서 딸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합니다.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해 롤리와 비슷한 뇌종양 수술을 5,000여 회나 성공한 미국의 켈리 박사를 찾아냈다합니다. 레이는 롤리의 뇌 사진 등을 켈리 박사에게 직접 보냈고 켈리 박사로부터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는 답장을 받았다합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롤리는 성공적인 수술 끝에 나흘 만에 퇴원했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합니다. 딸의 목숨을 구한 레이의 이야기는 영국 BBC방송에서 아빠를 믿어다오. 내가 의사란다 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영국 시청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합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남아 있는 한 결코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은 내 앞길을 막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는 큰 기회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찬 서리를 이겨 낸 꽃이 더욱 향기롭고 겨울 눈밭에 보리는 싹을 틔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베풀어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 포기 하지 않는 사랑)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교인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나타내는 교인 사랑을 공급하는 교인 사랑을 격려하는 교인 사랑을 계속하는 교인 사랑을 더하는 교인이 되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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