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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기쁨

능욕 받음의 기쁨 (행 5:41-42)

by 【고동엽】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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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욕 받음의 기쁨   (행 5:41-42)

사람은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고 목적이고 지향점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주어진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다 합니다. 벨기에 작가 메트롤링크 라는 사람이 파랑새라는 아동극을 지었습니다. 두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서 헤매고 다녔습니다. 여러 날 동안 허기진 채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닌다고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두형 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와 보니까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집안에 있는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집 안에 있고 내 마음속에 있고 내 곁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게 살아가십니까. 오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취하는 삶”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뭔가 성취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하려고 애를 씁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계획하고 마음먹은 것을 성취하고 이룰 때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고시촌에 가면 조그만 방안에 갇혀서 여름이나 겨울이나 집밖을 모른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젊음은 돌아다니고 쏘다니고 활보하는 것인데 그들은 방안에 스스로 갇혀 살아갑니다. 뭔가를 이루겠다는 꿈 때문입니다.

또 사업가는 고생도 하고 때로는 밤잠을 설칠 때도 있지만 성공하면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그들을 내가 먹여 살린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도 행복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또 가르치는 사람, 얼마나 신성한 일입니까. 그래서 가르치는 일은 직업이 아닙니다. 직업 그 이상의 정신입니다. 가르치는 분들은 그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교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반대합니다. 노조를 만들려면 다른 용어를 써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이 왜 노동입니까.

건축가가 밤을 새워 설계한 설계도에 따라 건물이 세워져 올라가고 있습니다. 내가 설계한 작품이 만들어져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또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뭔가를 이루고 성취하고 도전하는 삶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소유하는 삶”도 행복한 일입니다.

매달 붙는 적금이 불어가고 있습니다. 절약하고 열심히 일해서 모은 적금이 늘어나는 기쁨, 그것도 분명 행복한 일입니다. 벌이 날만 밝으면 날아다니며 꿀을 날라다 쌓아놓습니다. 그것이 벌의 기쁨입니다. 샐러리맨들이 월급을 타서 쪼개 쓰고 아껴 쓰고 절약해서 매월 적금 드는 기쁨,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그 기쁨은 돈 많은 분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삶에서 얻어지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며 살려면 누구를 의지하지 말고 결혼해서 둘이 하나씩 만들어 가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모아서 냉장고 하나 바꾸고 조금 더 큰 TV로 바꾸고 그러다가 조그만 아파트라도 내 집으로 마련하는 날 그날 그 행복함과 기쁨, 이것이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기서 기쁨과 행복을 만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쓰는 행복”도 있습니다.

소유도 무조건 소유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유하는 일에만 기쁨을 느끼면 인생이 인색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 모으는데 목적을 두고 살게 됩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그 소유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돈버는 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기도할 한 시간의 의미도 상실해 버립니다. 생각하는 일, 묵상하는 일, 행복했던 마음, 좋았던 관계 모두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간에도 불화가 조성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물질에 더 갈증을 느끼고 노예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물질은 좋은 것이지만 노예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질을 맹목적으로 모으다 보면 누구든지 물질의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물질이 지니는 마력입니다.

그래서 소유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왜 모으는지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은 이 목적이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그 고생을 하며 모아놓기는 했는데 마침내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모으는 근본적인 목적은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용하는 기쁨, 쓰는 기쁨, 얼마나 좋습니까. 모으는 기쁨보다 쓰는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모으는 기쁨도 누려야 하지만 사용하고 쓰는 기쁨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와 식사할 때 먼저 나가서 밥값을 내는 기쁨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얻어먹는 기쁨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는 기쁨은 더 큽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얻어먹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더 많이 모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세련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무조건 모으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왜 모읍니까. 쓰기 위해서 모으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는 사용해야 합니다. 필요할 때는 기부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헌금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먹는 기쁨”도 있습니다.

저는 기쁨 중에서 먹는 기쁨이 참 좋은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먹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가끔 금식하다 보면 이 먹는 문제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고 먹는 일, 세상에 이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친교 중에 제일가는 친교는 먹는 일입니다. 그것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행복, 이것이야 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살쪄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상에서 입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행복하고 기쁜 일이 이런 것만 있겠습니까. 그런 기쁨들이라면 참으로 하찮은 기쁨이고 하찮은 행복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사람들이 그것을 누려보겠다고 애쓰고 수고하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제일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제일의 기쁨이고 제일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까짓 먹고 마시고 모으고 즐기고 무엇을 조금 이루었다고 이 보다 더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오늘 사람들은 모두 너무 이생적인 것에 골몰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서 잠을 설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허상을 좇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웃을 속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죽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모두 이생 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결혼을 앞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4대 기준이 조사되었습니다. tall 키가 크고, handsome 잘 생기고, rich 돈 많고, young 젊음입니다. 모두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입니다. 모두 10년만 지나면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모두 허상을 좇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습니다. 결혼해서 10여년만 살면 별것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어 후회하게 되는 그런 조건들에 사람들이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철들면 모두 후회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찾아서 인생을 허비하고 청춘을 허비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니까 시간이 다 지나간 후에 가서야 인생을 헛살았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터키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번에 가 보지 못했던 초대교회 때 핍박을 피해서 바위산에 올라가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는 갑바도기아지역을 갔었습니다. 그곳을 보고 느낀 것은 한마디로 경외감이었습니다. 신비감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신앙이 이렇게 위대한가를 새삼 느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피해서 600km나 떨어진 오늘의 터키 땅 내륙 깊숙한 오지 산속 계곡 바위산에 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지내던 그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일생을 살고 그곳에서 자식을 낳고 살아가다 죽고 그러면 그 자식들이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갔습니다. 그러니 그 환경의 열악함과 고난스런 삶이 얼마나 고되고 내일이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갔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느꼈던 그 행복함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신앙이 주는 행복감입니다.

거기 숨어 지내던 그리스도인들은 밖으로 나와서 “나는 지금부터 예수를 버리겠다.”고 말 한마디만 했으면 그 순간으로 자유함이 주어지고 이생적인 욕망도 누릴 수 있고 재물 모으는 기쁨도 맛보고 평안한 삶도 얻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살고 그곳에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그곳에서 대를 이어 신앙유지를 위해서 고난의 삶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보다 더 만족한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믿음의 사람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분들이 지녔던 그 뜨거운 가슴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분들이 누렸던 그 만족감과 행복한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마음을 소유가 채워주겠습니까 먹는 일이 채워주겠습니까 무엇인가 조금 이루었다는 일이 채워줄 것입니까. 결국 근본적인 문제로 파고 들어가 보면 지금 우리들이 세상에서 누리고 추구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모두 한때를 위한 것들입니다. 모두 조금만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피상적으로 살아갈 때는 소유도 좋고 뭔가 이루고 성취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명예도 좋습니다. 그런데 좀 궁극적인 삶에 이르게 되면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려 보십시오. 아주 심각한 실존의 자리에 처해 보십시오. 그까짓 소유가 무슨 힘이 되어 줍니까. 뭔가 이루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때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순간에 예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라야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기쁨을 찾고 행복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예수입니다. 소유나 성취나 먹는 일들은 어느 정도는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진정한 행복한 삶이나 감사함이나 기쁨의 삶은 그런 조건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의미에서 주어집니다. 뜻에서 주어집니다. 내 마음에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가는 곳 마다 능욕을 당합니다. 가는 곳 마다 예수를 전한다고 고초를 겪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능욕 받고 쫓겨나고 있으면서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즐거움과 행복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행복감은 소유나 즐김에서 나오는 행복감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행복감이고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신앙인은 마땅히 이 행복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그 삶에서 이 행복함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너무 편하고 부요하고 너무 세상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져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편안함, 부요함, 넉넉함 이것이 신앙의 적입니다. 신앙뿐 아니고 인간성을 상실시키고 인생의 의미와 뜻을 변질시킵니다.

여러분, 모두 추억을 가지고 있지요. 사람들은 모두 추억을 가지고 있고 그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들이 시골에서 살 때 순진하고 순박하고 가난하게 살 때 그때 얼마나 행복했었습니까. 그때는 인심이 후했었고 이웃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순박함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고 가난하지만 만족함이 있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과연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때가 사람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 넉넉하고 풍성하고 따뜻하고 큰집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때처럼 행복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삶이 더 피곤하고 갈증이 많고 허무합니다. 부와 편안함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이 이 좋은 것들을 모두 상실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 이웃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립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새벽에 새벽기도회 가자고 깨웁니다. 부흥회가 열리는 교회까지 가려면 5,6km를 걸어가야 합니다. 가서 한 시간 예배드리고 또 5,6km를 걸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밥 먹고 학교에 갑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따라 춥고 고생길인 그 길을 갔다 오면서도 참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행복함,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이 안일함, 평안함, 넉넉함이 모두 그 기쁨과 행복함과 진한 감동적인 영적 즐거움을 모두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 기쁨과 행복을 두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나는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복음을 전한다고 가는 곳 마다 능욕을 당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순전히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그들은 오히려 즐거워했고 행복해 했습니다. 또 하나는 소아시아 땅 갑바도기아에서 저는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600km떨어진 그곳까지 피난 가서 살았습니다. 그것도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계곡 요새 바위절벽에 굴을 파고 거기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세속적인 꿈은 모두 접고 온전히 예수만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곳에서 살고 아이 낳고 살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그곳도 안전하지 못하니까 인근지역에 땅굴을 아래로 100m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지하 동굴을 만들어 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었고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 심정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제자들은 능욕 받음에 감사하고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고 행복입니다. 이것이 영적 경이로움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쓸데없이 세상에서 허상을 좇아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더 갈증이 깊어지고 허탈해 집니다. 진정 기쁨과 행복의 삶은 예수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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