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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인내를 배우라(야고보서 5 : 7-11)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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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인내를 배우라(야고보서 5 : 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는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흔히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일컬어 비인간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현대는 과학 기술의 시대요, 참으로 편리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한 크나큰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대단히 희한한 것을 보면서 옛날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오늘의 이 시대는 고귀한 인간성을 파괴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인간 존재 그 자체에 위협을 느끼는 그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영어로 쓰리 아이(three I)가 문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I)자로 시작되는 세 단어를 두고 하는 말인데, 첫째가 아이큐(I.Q.), 둘째가 인더스트리(industry), 그리고 셋째는 인스턴트(instant)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 세 단어가 문제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첫째 아이 큐란 지능지수를 말하는 것인데 아이큐와 창의력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아이 큐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 시험도 대체로 아이 큐 테스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거기에다 점수를 주는데, 사실 이것으로 인해 사람을 평가한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평가입니다. 천천히 깊이 생각하고, 오래 생각하는 거기에 창의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지혜도, 발명도 있는 것입니다. 빠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머리가 돌아간다고 하여 그것이 좋은 머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성과 인간됨과, 인간의 도덕성은 무시당하고 오직 머리 회전만 인정받는 그런 시대로 전락하고 있다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업(industry)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공업화하고 하는 것이 결국에 와서는 자연을 파괴하였고, 생태계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 세게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나라 어린이들에 비해 기계 문명이 발달한 미국의 어린이들은 대체로 암산력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저들은 계산기만 믿기 때문입니다.

그저 손으로 꾹꾹 찍는 것만 알았지 머리로 헤아릴 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교포 아이들이 미국으로 처음 이민을 가게 되면 말은 한 마디 못하면서도 수학은 전부 만점을 받아 수학은 천재라는 말을 보통 듣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계산기만 믿고 그것을 사용하는 동안에 사람의 암기력이나 계산 능력 같은 것이 점점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신력의 빈곤, 정신 세계에 대한 무관심, 이러한 것들이 오늘 이 세대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또 하나의 문제는 인스턴트의 대용품입니다. 인스턴트 때문에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정성도 기다림도 사라져 갑니다. 가짜에 밀려서 진짜가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조화를 잘 만들었는지 이제는 진짜 꽃을 보고도 저것이 조화가 아니냐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다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무엇이나 급하게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재촉! 그것이 공통점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찾아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을 찾고, 인스턴트라고 해서 3분 라면이라 하더니 요즈음은 1분 라면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보다 빨리 먹겠다는 것이지요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야 상상도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마님들은 바가지에다 쌀을 일어서 돌을 고른 후에 솥에 안치고 불을 지펴 익히고, 다시 뜸을 들여야 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끓인 물만 부어도 먹게 되어 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전자자다, 압력솥이다 해서 무엇이든지 삽시간에 처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많더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점점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안쳐 놓고 기다리는 그만한 인내도 없다는 말입니다. 농부의 인내는 고사하고 음식 끓는 그 시간을 못 참아서 1분 라면만 찾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것에서 인간성은 점점 없어지고, 소위 정성이라고 하는 것과 사랑이라고 하는 그 정신적 의미는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내가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유서라고도 하는 편지인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의 인간 특성을 여러 가지로 열거하는 중에 특별히 인간성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사납고 포악해지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조급하며 급한 마음들이 되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사실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농부의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농부처럼 기다리라! 농부로부터 인내를 배우라! 그런데 이제는 그 농부도 문제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비닐하우스라고 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름에는 여름 음식을 먹고, 겨울에는 겨울 음식을 먹었으면 되겠는데 겨울에 여름 것을 먹겠다고 비닐하우스를 만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겨울에도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제가 경험하는 대로는 계절의 진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자랄 때에 보면 봄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일 먼저 먹는 것이 감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이, 수박, 옥수수 이런 식으로 하여 가을이 되면 감을 먹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차례 차례 먹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단번에 먹어버리겠다고 하는 동안에 입맛도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먹는 재미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계절에 대한 기다림도 없어지고, 계절에 대한 감각조차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할 말을 잃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치룬 시험지를 들고 왔는데 보니 다 맞았는데 한 문제가 틀려 있었습니다. 이에 그 어머니가 어떤 문제였기에 틀렸나 하고 자세히 보니 수박은 어느 계절의 과일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그 답으로 겨울에다 O표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어째서냐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 집 냉장고에는 겨울에도 수박이 있지 않습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겨울에는 여름처럼 살겠다 하여 감기가 들고 여름에는 겨울처럼 살겠다 하여 에어컨을 달아 찬 공기를 만듭니다만 이것 때문에 몸뚱이가 말썽입니다. 겨울은 춥게 살고 여름은 덥게 사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만들어 놓고 살겠다 하니 우선은 편리한 것 같지만 그것으로 인해 체질이 약해졌음은 물론 인간성도 약해지고, 마침내는 인간 상실의 위기에까지 왔습니다. 체질에서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변질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간, 변질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대단히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나를 얻고 둘을 잃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얻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순간적인 것을 얻고 영원한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현상을 얻고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을 얻고 인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잃어버린 인간! 어디서부터 잃어 버렸는지 그쪽으로 다시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인내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인내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격자라고 하는 것도 인내에 있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는 자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내가 그 사람의 인간성을 결정하고 맙니다.

! 이제 어디로부터 인간 됨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귀한 말씀들이 많이 있으나 구절 구절을 다 해석해 드리지 못하고 그 요점만을 거들어 드립니다. 먼저 인내하되 그 한계는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다 1, 2년이 아니라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참으로, 끝까지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우리가 부부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나오는 소리가 "10년을 두고 참았는데"하고 대듭니다. 하지만 그 말을 안 했어야 참은 것이지, 이제 그 말을 하고서는 참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벼른 것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참으라!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참으라!

그런데 멀지 않았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주께서 가까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문밖에 서서 계시느니라! 별로 오래 참을 것도 없어요,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 그때까지 참으라!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땀 흘려 수고하며 하늘을 쳐다봅니다. 비가 와야 합니다. 햇볕이 나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되 위로 주시는 축복, 위로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지요. 이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내 수고대로 다 되는 것입니까? 내 계획대로 다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 할 본분을 다하고 이제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 탓, 누구 때문이라는 원망이 없어야 심판을 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선지자, 많은 주의 종들이 다 참았습니다. 여러분! 진정 인내가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에서 인내의 교훈을 찾으세요. 욥기를 읽고, 에스겔서를 보고, 다니엘서를 보세요. 성경을 읽으면서 옛 믿음의 조상들이 얼마나 참았는가를 발견하고 그리고 본을 삼아 길이 참는 자가 되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3절에 보면 인내의 결정적인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 예수를 배반한 자를 끝까지 참아 주신 그 예수를 생각하라! 나를 참아 주신 예수를 생각하라! 바로 여기에서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말씀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주께서 마지막 결말을 해피 엔드(happy end)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 그것을 보고 나도 그러한 결말을 얻게 될 줄로 믿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계십니다. 이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병들고의 문제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떻게, 얼마만큼 참나 하는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참는 그 모습을 보십시다. 울고 있는지 한을 품고 있는지, 이를 갈고 있는지, 아니면 온유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는지,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참는 모습을 유심히 보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결말을 맺어 주십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감사함으로 주께서 주시는 결말을 볼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길이 참으라!

그러면 이제 어떻게 참아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는 생각에 있어서 인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너무 빠른 결론은 내리지 맙시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보아도 완전치 못하다면 남의 말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가 안다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도 불완전한데 내가 남을 아는 것이야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남에게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여야 합니다. 어쨌든 너무 속단을 내려서는 아니 됩니다. 마태복음 119절에 보면 예수께서 탄생하신 기사를 중심한 내용으로 흔히들 슬쩍 지나치고 맙니다만 자세히 읽어보면 정말 놀랄 만한 사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요셉이라는 총각이 마리아라고 하는 고운 아가씨와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약혼한 사이인데 얼마 후 소식이 들려오기를 이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요셉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 같으면 이 정도 되었으면 걱정할 것도 없이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가만히 생각하였습니다. 내 약혼녀 마리아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게 임신을 하였다면 아마도 피치 못할 무슨 일이 있겠지 하고 가만히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이 일을 발설하게 되면 그는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무슨 이유가 있겠지 생각을 하고 조용히 끊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이 의인입니다.

이제 생각을 좀 조용히 하세요. 그렇게 너무 급하게 판단하지 말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 중에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며 저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4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결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빨리 결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큰 잘못입니다. 간혹 어떤 경우에 저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누가 하더라면서 전해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고자질이지요. 그럴 때면 제가 "그 분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요"하면 "아니에요 제가 너무 분해서 왔습니다"하고 흥분을 합니다. 그러면 다시 제가 "분하면 혼자 분하시지, 나까지 분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 소식 제가 모르면 그 사람 옛날처럼 잘 대할 수 있는데, 제가 성자가 아닙니다. 모르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을 당신이 말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할 때 힘이 듭니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셨어요?"라고 이야기해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랬어야 할 이유가 있겠지, 내가 미워서 한 것도 아니고 나와 잘못된 관계도 아닌데 하고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명하지 마세요. 세상에 남의 말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생각을 늦추세요. 다 알기도 전, 상황 판단을 하지도 못한 채 흥분부터 미리하지 마세요. 생각하는 자체에 인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복과 저주를 너무 쉽게 말하지 마세요. 복받았느니, 저주 받았느니, 행복하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두고 보아야 알 일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생각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말에 있어서 인내하여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119절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전도서 52절에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말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모세가 견디지 못하여 "패역한 너희여"라고 저주를 합니다. 이를 지적하여 시편 기자는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106:33)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것이 결정적인 죄가 되어서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맙니다.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급하게 말하지 마세요. 축복도 저주도 말이니까 말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 중에 제게 말하기를 "목사님! 이 세계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큰일났습니다" 하고는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소리하는 지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큰일 가지고 살았지, 언제는 편했던가 말입니다. 어느 때 보면 당장 오늘이 끝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20년전 신문을 보세요.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나 오늘이나 매양 그렇게 살아 왔어요. 이만하면 훌륭한 것이지 무슨 딴 소리 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 너무 그렇게 아는 척도 하지 말고 속단도 하지 말며 더욱이 절망하는 말을 하지 맙시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정말 망합니다. 그것이 다 저주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속단은 금물입니다. 참으로 말조심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좀 서서히 행동하여야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정월 미국에 갔을 때에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마침 워싱톤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되었는데 눈이 많이 쌓였기 때문에 차들이 막혀 제대로 가지를 못하고 이삼십분씩 기다리며 거북이 걸음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저를 태우고 가던 목사님이 클락숀을 빵빵거리기 시작하는데 가만히 두고 보다가 나중에는 정 안되겠어요. 그래서 제 후배가 되기도 하고 제자이기도 하기에 "김 목사, 여기 빵빵거리는 사람,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번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전부 한국 사람이군요!" 합니다. 다시 제가 "그것을 좀 생각해야지, 그렇다고 빨리 가지는 것도 아닌데 유달리 조급해! 안 그러나?"고 했더니 그 김 목사 말이 "내 일생 동안 클락숀 누르지 않겠습니다"하고 아예 맹세를 했습니다. 정말 유달리 그렇게 조급합니다. 하지만 그것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래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의 운전 13년의 무사고 비결은 느긋한 것입니다. 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아주 급하게 가고 맙니다. 서두른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될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행동을 조금 늦추십시다. 우리는 급하게 서둘러 바로 행동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반면에 느리고 더디하면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좀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이요 인격이니까 말입니다. 굳이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행동의 너무도 조급함! 그것을 제거하여야 하겠습니다.

인내는 소망의 소신입니다. 미래가 보장되고 이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주의 강림을 믿고 주께서 주시는 결말을 보고 따라가는 자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자의 인내는 지옥의 고통입니다. 시간적인 유한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데에 인내 외에 무엇이 또 있겠습니까? 알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모르면서 따라가는 우리가 이 인내 외에 무슨 다른 길로 따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음으로, 무던히 기다려 보십시다. 급하게 판단하지도 말고, 급하게 말하지도 말고, 급하게 행동하지도 말고 주님을 기다리듯이 온유한 마음으로 기다립시다. 인내하여 인격을 회복하고, 인내하여 신앙의 사람이 되고, 인내하여 후회 없는 생을 삽시다. 이미 큰 성공은 못했어요. 이제 참지 못한 후회는 이상 더 하지 맙시다.

이제는 인내하여 힘있는 자가 되고 그로 인해 영광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주께서 아름답고 귀한 결말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인내 위에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과, 크신 위로를 더하실 것입니다. 참는 뒤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참는 일은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참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보상하십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참은 인내는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작은 참을성도 갖지 못한 저희들을 용납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참을성이 없기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함부로 하며, 해서는 아니될 행동도 마구 하였사옵고 그리고 또한 후회하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제는 믿음 위에 인내의 덕을 더하게 하시어 길이 참아 주의 약속을 받으며, 주의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주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게 해주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주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온전히 참을 수 있어서 주의 약속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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