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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의 용기(로마서 8장 31절~39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 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몇십 년 전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확실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벗어나 이를테면 중국이라든가 동남아시아 등지를 여행해보면 그곳 사람들의 가난하게 사는 모습에서 삼 사십 년 전의 우리네 가난의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때에 비하여 우리는 잘살고 있습니다. 문화도 경제도 지식도 훌륭하게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 불만스러운 것도 많고 전체적으로 마땅치 않은 점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꽤나 여유 있게 사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것이 틀림없고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두루 나아진 것은 사실인데, 두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용기가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 한번 개인적으로 솔직히 진단을 해봅시다. 그 옛날 어렵게 살 때에 비하여 지금이 과연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의 여유와 행복은 분명히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용기가 없습니다. 옛사람들은 가난한데다 무지(無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확신이 있고 고집이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의지적(意志的)인 생을 영위하고 외곬이라 할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기 삶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심지어는 자식에게까지 '나처럼 살라. 나를 본받으라'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벌을 지키고 가풍을 전승하도록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처럼 확신 가운데 서서 떳떳하게 자식을 이끌어 가는 부모님이 드뭅니다. 가능하면 나처럼 살지 말라고 밖에 말할 수 없도록 아주 비참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사제(師弟) 사이도 그렇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듯이 등록금이나 받고 지식을 판매할 뿐이지 나를 닮아라, 나처럼 살아라,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스승이 없는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너나할것없이 모두가 자신이 없습니다. 행복할 리가 없지요. 현대의 특징이 불확실성입니다. 모두들 확신 없는 시대를 애매모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니 비겁하고 나약할 수밖에요.
나아가 허무와 절망과 실의(失意)에 빠졌습니다. 몸이 병들기 전에 정신이 병들었습니다. 몸이 늙기 전에 정신이 늙어죽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오백 년전 종교개혁자들의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의 항의문을 내걸고 고독하게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나서던 그 용기야말로 위대한 용기로 우러러 보입니다. 자세히 연구해보면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을 외친 인물들이 없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글로나 말로 가르치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입을 벙긋했다가 누가 반대하거나 정치가가 반박하고 교황이 나무라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감히 어디라고!" 일갈하고 대들면 비겁해지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의 '창작'이 아니요 이미 여러 번 대두되었던 문제였습니다 마는 그에게만은 용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이라 하면 곧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 많이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은 잘하고 글은 잘 쓰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실천력이 없습니다. 비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글은 어디까지나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맙니다. 이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황제 앞에서 루터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95개조를 취소할 마음은 없느냐, 그대로 나가다가는 사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느냐고 심문하자 루터는 저 너무나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 못 하고 완전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떠한 태도로도 다른 선택을 취할 수 없습니다.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나 여기에 서 있습니다 ---- 참으로 위대한 태도입니다. 누가 성원을 보내주든 외면을 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누가 나를 도와주느냐 않느냐, 이렇게 되면 장차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든,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성실했습니다.
나는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가부를 말할 수 없습니다 ---- I have no choice.' 실로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는 밀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사람의 얘기를 다 듣고 사람의 지지 받아 보았댔자 물거품이지 여기에서 무슨 용기가 나오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 루터의 용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마르틴 루터의 설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지갑과 금고, 높은 신분, 그리고 가진 권세나 지혜를 의지합니다. 이것은 바보나 철부지의 무례한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주신 용기와 말씀에 뿌리박은 용기, 오직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용기뿐입니다. 그리고 독재자와 맞선 순교자의 용기, 이것이 우리의 용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용기가 없습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겁해야 합니까?
여러분, 변화에는 무의식적인 변화와 의식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자연적인 변화요, 또 하나는 변화시켜서 되는 변화입니다. 자연적인 변화는 스스로 되는 변화 곧 썩어지는 변화입니다. 죽어 가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변화는 창조적이요 선택적이요 역설적인 변화입니다.
무의식적인 변화 ---- 세상이 변하는 대로 내 생활이, 내 습관이, 내 태도가, 내 철학이 슬슬 바뀌는 것입니다. 뒤늦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고!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었나?' 깜짝 놀랄 만큼 변하고 말았거든요. 이런 변화는 죽은 변화입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변화는 의식적, 선택적인 변화입니다. 먼저 의식이 가고 신앙이 가고 고백이 가고, 그 다음에 변화시키는 그런 변화입니다. 나의 생활도, 남의 일도, 세상도 변화시키는 변화, 이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만이 개혁이 아닙니다. 사회에 개혁이 있어야 하고, 문화에도, 정치에도, 우리의 성품과 의식에도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신앙적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끝없이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적인 신앙에 살아가야 합니다. 개혁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에 근거하고 이 위대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가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약한 것과 근심하는 것은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불 신앙이기 때문이다." 사실입니다. 사건이 크고 뭐가 뒤엉켜서, 뭐가 잘못되어서 걱정이 많은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여러분은 어떤 용기에 살고 있습니까? 문제는 믿음, 개혁적인 신앙 ---- 그것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개혁자 사도 바울의 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근거가, 신령한 용기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네 가지의 질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33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34절)"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35절)"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네 가지 질문을 담대하게 내댈 수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신앙의 용기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인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리요 ---- 확실한 용기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하고 사람들의 인기와 지지를 의지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나를 지지해준들 무슨 소용입니까? 다 허무할 따름입니다. 함성의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딴소리가 울립니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 같지만 이것이 천하를 얻는 길이요, 모든 것을 얻는 충만함이 이 길에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밀어 주고 성원해준다 해도 그것으로 내 마음에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얽힌 에피소드를 또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종교 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나가다 보니 반대도 많고 배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근심걱정이 쌓여갑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잠자리에 들 때에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세상이 저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하나님 것입니까 저희 것입니까? 만일 당신의 세상, 당신의 교회라면 당신이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잘 부탁드립니다." 위트마저 넘치는 기도입니다.
당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돌보십시오, 나는 잠을 자겠습니다----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와도 같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합니까? 루터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으로 오는 용기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선한 일을 하고, 내가 의롭게 살고, 내가 깨끗하게 살고, 내가 진실하게 살아서, 그 보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처럼 불행하고 잘못된 신앙이 없습니다.
루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이 하시고 내가 변하는 대로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신다면 대체 몇 사람이나 살아 남겠습니까?
저는 결혼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보고 말합니다. "사랑 받으려고 사랑하지 말고 사랑 받는 만큼만 사랑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왜 사랑하느냐고 묻지도 말라.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혹 주부 여러분은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십니까? 내가 잘하면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고 잘못하면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음식의 간이 맞으면 나를 사랑할 것이고 간이 맞지 않으면 미워할 것이다 ---- 만약에 이런 생각으로 산다면 큰일입니다. 그래 가지고야 대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같이 죽기로 한 것입니다.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할 것입니다. 여기에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고요.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실 것이고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 마음이 아프시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있나? 사랑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나에게 밑천을 많이 들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전을 뽑으시려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없지." 자신만만합니다.
여러분, 내가 선하다고 사랑 받습니까? 언제 내가 착해서 사랑 받았느냐 그 말입니다. 꿈에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 십자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된 그 사랑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그 믿음이 용기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면 택함 받은 자의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33절)."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는 말은 한단 더 높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구원받은 자를 택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큰 플랜 ----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서, 그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 속에서 내가 지금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도 하고 쓰시기도 하고 버리시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이 있어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붙들어 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 여기서 내 자격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택함 받은 자기 자신을 알 때에 그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경륜을 다 이루시기까지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가 있고, 오늘도 내가 있으며, 본래 태어나기도 그런 의미에서 태어났다면, 선택받은 내가 가는 길을 누가 막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더욱 위대한 말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확신에 찬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사로 받아들이고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난날에 실패했던 것, 성공했던 것, 잘되었던 것, 못되었던 것, 가난했던 것, 부했던 것, 건강했던 것. 병들었던 것 ---- 이 모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내 믿음, 오늘의 내 이 시간을 위하여, 나에게 향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당하는 이 모든 현실도 은혜의 선물이요, 또다시 앞으로 내 앞에 전개될 많은 사건들도 은혜의 선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모든 사건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모든 일, 모든 지식, 모든 지혜를 다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셔서, 지극히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그런고로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 거침없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었습니다.
또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선하게 살아서, 공로를 세워서 보상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인정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이미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아서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쌓아 가는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은총적 관계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벌벌 떨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상주실까 벌주실까 하며 눈치볼 것도 없습니다.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이 엄청난 개혁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미 의롭다 함을 입은 나 자신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바라고 하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의 기독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느니라.' 과거에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닙니다. 앞에 멀리 재림하실 그리스도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 나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 '볼지어다,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지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고 현재 여기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참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선교가 잘 되지 않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생이 한 백 오십 명되는 어느 시골 학교에 새로 전학 온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서 이 학생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가 그냥 먹기 시작하는데 이 학생만은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으고 한참동안 중얼중얼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나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처음 본 아이들이 그 학생을 수상쩍게 여기고 선생님에게 고발을 했습니다. "얘가 정신이 돌았나봐요.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 가지고 "너 무슨 짓을 했느냐?" 하니 "아, 별거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게 되어 너무 감사하므로 '하나님,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 소리를 듣자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사실은 나도 기독교인이다마는 나는 창피해서 기도를 못한다. 너는 참 위대하다. 너는 참 용기가 있구나" 하고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면 좌절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믿을진데 거기에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바로 그 용기, 그 증인된 생활, 그 자체가 개혁적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믿는 신앙, 바른 신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를 끊으리요?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 끊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용기에 살아야 합니다. 이 순교자적인 용기, 이 개혁자적인 용기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오늘의 성경 말씀이 주시는 대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승리를 만끽하는 그 영광이,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
종교개혁자의 용기(로마서 8장 31절~39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 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몇십 년 전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확실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벗어나 이를테면 중국이라든가 동남아시아 등지를 여행해보면 그곳 사람들의 가난하게 사는 모습에서 삼 사십 년 전의 우리네 가난의 모습을 더욱 실감나게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때에 비하여 우리는 잘살고 있습니다. 문화도 경제도 지식도 훌륭하게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 불만스러운 것도 많고 전체적으로 마땅치 않은 점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꽤나 여유 있게 사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것이 틀림없고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두루 나아진 것은 사실인데, 두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용기가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 한번 개인적으로 솔직히 진단을 해봅시다. 그 옛날 어렵게 살 때에 비하여 지금이 과연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의 여유와 행복은 분명히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용기가 없습니다. 옛사람들은 가난한데다 무지(無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있고 자신이 있었습니다.
확신이 있고 고집이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의지적(意志的)인 생을 영위하고 외곬이라 할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기 삶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심지어는 자식에게까지 '나처럼 살라. 나를 본받으라'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벌을 지키고 가풍을 전승하도록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처럼 확신 가운데 서서 떳떳하게 자식을 이끌어 가는 부모님이 드뭅니다. 가능하면 나처럼 살지 말라고 밖에 말할 수 없도록 아주 비참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사제(師弟) 사이도 그렇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듯이 등록금이나 받고 지식을 판매할 뿐이지 나를 닮아라, 나처럼 살아라,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스승이 없는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너나할것없이 모두가 자신이 없습니다. 행복할 리가 없지요. 현대의 특징이 불확실성입니다. 모두들 확신 없는 시대를 애매모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니 비겁하고 나약할 수밖에요.
나아가 허무와 절망과 실의(失意)에 빠졌습니다. 몸이 병들기 전에 정신이 병들었습니다. 몸이 늙기 전에 정신이 늙어죽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오백 년전 종교개혁자들의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의 항의문을 내걸고 고독하게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나서던 그 용기야말로 위대한 용기로 우러러 보입니다. 자세히 연구해보면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을 외친 인물들이 없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글로나 말로 가르치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가 없었습니다. 입을 벙긋했다가 누가 반대하거나 정치가가 반박하고 교황이 나무라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감히 어디라고!" 일갈하고 대들면 비겁해지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의 '창작'이 아니요 이미 여러 번 대두되었던 문제였습니다 마는 그에게만은 용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이라 하면 곧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말 많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 많이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은 잘하고 글은 잘 쓰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실천력이 없습니다. 비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글은 어디까지나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맙니다. 이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황제 앞에서 루터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95개조를 취소할 마음은 없느냐, 그대로 나가다가는 사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느냐고 심문하자 루터는 저 너무나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 못 하고 완전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떠한 태도로도 다른 선택을 취할 수 없습니다.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나 여기에 서 있습니다 ---- 참으로 위대한 태도입니다. 누가 성원을 보내주든 외면을 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누가 나를 도와주느냐 않느냐, 이렇게 되면 장차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든,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든,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성실했습니다.
나는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가부를 말할 수 없습니다 ---- I have no choice.' 실로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는 밀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사람의 얘기를 다 듣고 사람의 지지 받아 보았댔자 물거품이지 여기에서 무슨 용기가 나오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 루터의 용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마르틴 루터의 설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지갑과 금고, 높은 신분, 그리고 가진 권세나 지혜를 의지합니다. 이것은 바보나 철부지의 무례한 용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주신 용기와 말씀에 뿌리박은 용기, 오직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용기뿐입니다. 그리고 독재자와 맞선 순교자의 용기, 이것이 우리의 용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용기가 없습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겁해야 합니까?
여러분, 변화에는 무의식적인 변화와 의식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자연적인 변화요, 또 하나는 변화시켜서 되는 변화입니다. 자연적인 변화는 스스로 되는 변화 곧 썩어지는 변화입니다. 죽어 가는 변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변화는 창조적이요 선택적이요 역설적인 변화입니다.
무의식적인 변화 ---- 세상이 변하는 대로 내 생활이, 내 습관이, 내 태도가, 내 철학이 슬슬 바뀌는 것입니다. 뒤늦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고!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었나?' 깜짝 놀랄 만큼 변하고 말았거든요. 이런 변화는 죽은 변화입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변화는 의식적, 선택적인 변화입니다. 먼저 의식이 가고 신앙이 가고 고백이 가고, 그 다음에 변화시키는 그런 변화입니다. 나의 생활도, 남의 일도, 세상도 변화시키는 변화, 이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만이 개혁이 아닙니다. 사회에 개혁이 있어야 하고, 문화에도, 정치에도, 우리의 성품과 의식에도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신앙적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끝없이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적인 신앙에 살아가야 합니다. 개혁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적인 변화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에 근거하고 이 위대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가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약한 것과 근심하는 것은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불 신앙이기 때문이다." 사실입니다. 사건이 크고 뭐가 뒤엉켜서, 뭐가 잘못되어서 걱정이 많은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여러분은 어떤 용기에 살고 있습니까? 문제는 믿음, 개혁적인 신앙 ---- 그것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개혁자 사도 바울의 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의 근거가, 신령한 용기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네 가지의 질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요(33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34절)"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35절)"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네 가지 질문을 담대하게 내댈 수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신앙의 용기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인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리요 ---- 확실한 용기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하고 명예를 의지하고 사람들의 인기와 지지를 의지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나를 지지해준들 무슨 소용입니까? 다 허무할 따름입니다. 함성의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딴소리가 울립니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 같지만 이것이 천하를 얻는 길이요, 모든 것을 얻는 충만함이 이 길에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밀어 주고 성원해준다 해도 그것으로 내 마음에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때에야 비로소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얽힌 에피소드를 또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종교 개혁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나가다 보니 반대도 많고 배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근심걱정이 쌓여갑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잠자리에 들 때에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세상이 저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까? 이 교회가 하나님 것입니까 저희 것입니까? 만일 당신의 세상, 당신의 교회라면 당신이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잘 부탁드립니다." 위트마저 넘치는 기도입니다.
당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돌보십시오, 나는 잠을 자겠습니다----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와도 같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합니까? 루터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으로 오는 용기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선한 일을 하고, 내가 의롭게 살고, 내가 깨끗하게 살고, 내가 진실하게 살아서, 그 보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처럼 불행하고 잘못된 신앙이 없습니다.
루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이 하시고 내가 변하는 대로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신다면 대체 몇 사람이나 살아 남겠습니까?
저는 결혼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보고 말합니다. "사랑 받으려고 사랑하지 말고 사랑 받는 만큼만 사랑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왜 사랑하느냐고 묻지도 말라.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혹 주부 여러분은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십니까? 내가 잘하면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고 잘못하면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음식의 간이 맞으면 나를 사랑할 것이고 간이 맞지 않으면 미워할 것이다 ---- 만약에 이런 생각으로 산다면 큰일입니다. 그래 가지고야 대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같이 죽기로 한 것입니다. 이래도 사랑하고 저래도 사랑할 것입니다. 여기에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고요.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실 것이고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 마음이 아프시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있나? 사랑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나에게 밑천을 많이 들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전을 뽑으시려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수가 없지." 자신만만합니다.
여러분, 내가 선하다고 사랑 받습니까? 언제 내가 착해서 사랑 받았느냐 그 말입니다. 꿈에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 십자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된 그 사랑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그 믿음이 용기의 근거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보면 택함 받은 자의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33절)."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는 말은 한단 더 높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구원받은 자를 택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큰 플랜 ----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서, 그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 속에서 내가 지금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도 하고 쓰시기도 하고 버리시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이 있어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붙들어 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 여기서 내 자격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쓰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택함 받은 자기 자신을 알 때에 그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경륜을 다 이루시기까지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가 있고, 오늘도 내가 있으며, 본래 태어나기도 그런 의미에서 태어났다면, 선택받은 내가 가는 길을 누가 막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더욱 위대한 말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확신에 찬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사로 받아들이고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난날에 실패했던 것, 성공했던 것, 잘되었던 것, 못되었던 것, 가난했던 것, 부했던 것, 건강했던 것. 병들었던 것 ---- 이 모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내 믿음, 오늘의 내 이 시간을 위하여, 나에게 향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당하는 이 모든 현실도 은혜의 선물이요, 또다시 앞으로 내 앞에 전개될 많은 사건들도 은혜의 선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모든 사건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모든 일, 모든 지식, 모든 지혜를 다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셔서, 지극히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그런고로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 거침없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었습니다.
또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가 선하게 살아서, 공로를 세워서 보상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인정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이미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아서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쌓아 가는 율법적 관계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은총적 관계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벌벌 떨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상주실까 벌주실까 하며 눈치볼 것도 없습니다.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는 이 엄청난 개혁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미 의롭다 함을 입은 나 자신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바라고 하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의 기독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느니라.' 과거에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닙니다. 앞에 멀리 재림하실 그리스도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 나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 '볼지어다,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지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고 현재 여기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참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선교가 잘 되지 않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생이 한 백 오십 명되는 어느 시골 학교에 새로 전학 온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서 이 학생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가 그냥 먹기 시작하는데 이 학생만은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으고 한참동안 중얼중얼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나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처음 본 아이들이 그 학생을 수상쩍게 여기고 선생님에게 고발을 했습니다. "얘가 정신이 돌았나봐요.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 가지고 "너 무슨 짓을 했느냐?" 하니 "아, 별거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게 되어 너무 감사하므로 '하나님,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 소리를 듣자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사실은 나도 기독교인이다마는 나는 창피해서 기도를 못한다. 너는 참 위대하다. 너는 참 용기가 있구나" 하고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따로 없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면 좌절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믿을진데 거기에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바로 그 용기, 그 증인된 생활, 그 자체가 개혁적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믿는 신앙, 바른 신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를 끊으리요? 아무도 끊을 수 없습니다. 끊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용기에 살아야 합니다. 이 순교자적인 용기, 이 개혁자적인 용기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오늘의 성경 말씀이 주시는 대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승리를 만끽하는 그 영광이,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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