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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5절~30절)

by 【고동엽】 2023. 7. 23.
목차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5절~30절)

 

 

어느 시골 교회의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자니, 늘 근심 걱정에 싸여서 세상을 불만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위로의 말씀을 해 주려고 해도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혼자서만 쉴새없이 이야기해 나갔습니다. 이야기는 전부가 근심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마을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서 살아 보고 싶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듣다못해서 "그런 곳이 있긴 있지요" 하고 일러 주셨습니다. "저쪽 언덕 너머로 가시면 근심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마을이 있습니다." 그 언덕 너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무척이나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피곤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된 셈인지 할 수만 있으면 도피하려 하고 쉬고 싶어합니다. 죽고 싶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남발합니다. 몸담고 있는 직장으로부터, 지니고 있는 명예로부터, 심지어는 가정으로부터도 벗어나 쉬어 보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심하게 부끄러움을 타고 있습니다. 헐벗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된 셈인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세상에 사람 만나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 만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누구에게 자기가 노출되는 것이 싫고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피곤한 일입니다. 병든 것도 아닌데 아픈 데가 많습니다. 의사들이 제일 골치 아파하는 환자가 이런 환자입니다. 아무리 진찰을 해 보아도 탈이 난 데가 없는데도 아픈 데가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내과 병원 진찰실에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사이신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진찰을 받은 환자 한 사람이 약을 타 가지고 오더니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것은 죄가 아닙니까?" "아, 뭔데요?" "저 사람은 아픈 데가 없거든요. 그런데, 아무 탈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요. 벌써 며칠째 찾아와 조르기에 마지못해서 약이라고 소화제를 지어 줬더니 돈을 많이 내고 갑니다. 이런 일은 죄가 안 됩니까?" 그래서 제가 "아, 그런 건 예수님께 여쭤 봐야지 나한테 물어 보면 어찌 알겠소?" 하고 말았습니다마는, 요즈음 이런 환자들이 상상 밖으로 많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는 그 수많은 환자의 절반 이상이 병이 없는 환자들이라고 합니다. 병이 없는데도 자꾸만 그렇게들 아프다고 한다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피곤해한다는 증거이며, 무엇인가 지금 무거운 짐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초청의 말씀이자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더라도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정치적인 억압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이스라엘 민족은 갖가지로 착취당하고 약탈당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빈곤에 허덕였고,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에도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그야말로 강도가 들끓고 악독한 죄악이 있는 대로 만연하고 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마비된 무법 천지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율법주의자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위선과 교만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멸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에서도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마는 이처럼 결정적으로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수고한다'는 헬라말로 '코피온테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능동태(能動態)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졌다는 말은 헬라말로 '페포르티스메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수동태(受動態)입니다. 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졌다'는 말씀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전부 두 개념으로 나누어서 총괄한 것입니다. 수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자기 책임 하에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고생할 것이 아닌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생은 모두 제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짐 지는 것이 곧 '수고하는' 것입니다. 한편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자의(自意)가 아닌 타의(他意)로 어쩔수없이 지고 나가는 짐을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피하 거나 모면할 길이 없어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원하지는 부득이 끌려가면서 억지로 당하는 그런 고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짐이 '무거운 짐' 입니다. 수동적이건 능동적이건 사람은 누구할것없이 다 이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쉬게 하리라, 즉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자의적(恣意的)인 응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저들에게 쉼을 주셨는지, 저들의 욕망을 채워 주셨는지,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자에게 빵을 넉넉히 주셨습니까? 오천 명 먹이신 이야기가 있지마는 그것도 한때의 일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배고프다고 합니다. 빵 문제로 제자들이 시험 당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정말로 빵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셨습니까? 노예로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해방을 주셨습니까?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약탈당하는 사람들에게 독립과 주권을 주셨습니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쉼을 주신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주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복음의 개념을 예수님 스스로 해석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에 예수님 스스로 당신에 대하여 그 정체를 설명해 주십니다. 복음의 성격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 온 소경이 눈을 뜬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환자 몇 사람 치료했다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까? 바로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서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쉬게 하신다는 이야기가 겨우 이런 정도의 이야기입니까? 적어도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쉬게 하신다는 복음의 성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과 함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 부르심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처지를 떠나서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해있는 처지로부터, 내 안일(安逸)로부터, 내 고정 관념으로부터, 내 그릇된 사상과 습관과 잘못된 행위로부터 떠나 당신께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리고 떨쳐버리고 나아오는 행동으로 순종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우라는 말은 헬라말로 '마데테 아페무'라고 합니다. '마데테스'라고 하는 말은 제자(弟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데테 아페무는 내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 제자가 되라---이것은 단순한 스승과 학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도(弟子道), 즉 'discipleship'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마음을 열고 따르며,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제자도 입니다. 그리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행하는 일을 보고, 그리고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도 곁에서 보고 듣고 배웁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해서 죽어야 참된 제자입니다. 또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순종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순종합니다. 그가 가라고 하시면 가야하고, 그가 오라고 하시면 와야 합니다.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 모든 것을 전인적(全人的)으로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을 것이다." 즉 내 지성과 감성과 뜻을 다하여 오로지 예수님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배우되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십니다(마 11:29).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십니다. 세상 멍에를 다 내어버리고 예수님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내 멍에'라는 말은 영어로 'my yoke'입니다. 멍에란 마소의 목에 걸쳐 얹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가로나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수였으므로 이런 멍에도 만들어 보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멍에를 바꿔 메라고 하십니다.

내가 메고 있던 멍에를 벗어 던져 버리고 예수님께서 메고 있는 그 멍에를 함께 메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어떤 것입니까?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수욕(羞辱)당하시고 비난받으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메신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시면서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쉽다'는 말은 헬라말로 '크레스토스'입니다. 이것은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마소는 멍에가 제 몸에 잘 맞아야 무거운 것도 가벼운 듯이 잘 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신 것은, 잘 맞는다, 가장 적합하다, 무겁지 않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뜻은 한 걸음 나아가, 잘 익은 포도주와 같이 달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지는 멍에가 아니라 기쁨으로 질 수 있는 그런 멍에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아침처럼 돌아가셔야 할 그런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참 평안이 있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2-3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안을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고 하신 말씀의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왜 쉽고 가볍다 하셨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여러분도 시골에서 밭갈이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요사이는 경운기다 트랙터다 해서 기계로 가는 일이 흔해졌지만, 옛날에는 소의 목에 멍에를 메서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저도 보습을 잡아 본 일이 있습니다마는, 밭갈이할 때에는 보습이 달린 쟁기를 소가 끌고 나아갑니다. 소 한 필이 끄는 쟁기를 호리라 하고, 소 두 필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합니다. 이 두 필의 소를 '겨릿소'라고 하는 데, 보통 암수 두 필이 쓰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두 필이 끌면 한 필이 끄는 것보다 힘이 덜 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가 쉽고 가벼울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참으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는 소설입니다. 말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背敎)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神父)의 고뇌와 회의---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비끄러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 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큰 원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욕심이요 교만이며, 하나는 증오(憎惡)라고 합니다. 이 증오가 사랑으로 바꾸어지면 짐은 가벼워집니다.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교만하다면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90세가 넘은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분이 80세가 넘어서도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아들 소생의 손자인데, 어리다고는 하나 이제는 걸어다닐 만큼 큰 아이였습니다.

무겁고 힘드신데 왜 그렇게 업고 다니시느냐고 하면 "예쁜 걸 뭐, 귀한 걸 뭐" 이러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니 무거울 리가 있습니까? 사랑으로 하는 일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내 짐이 무겁고 가볍고는 나의 사랑을 점검해서 가늠할 일이지 저울로 달아 가늠할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랑이 식었느냐 뜨거우냐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사랑을 느끼며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삶은 절대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짐은 무겁지 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는 짐은 그 성격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바꿀 때에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나서 메는 멍에, 곧 죄짐을 벗고 그리고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죄에 짓눌려 있으면 사람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사함받고, 죄사함받은 확신에서 지는 십자가, 그 고통이라는 것은 오히려 반가운 것입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형벌 의식, 저주 의식 때문에, 그리고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짐이 무겁고 피곤한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받고,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권한이라면 이 짐은 시련이요 기쁨이요, 영광이요 교훈이며, 나를 연단 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선교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무겁게 질 필요가 없는 짐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그를 따라가다가, 아마도 동정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왜 자꾸 때리느냐" 고 한마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로마 군인이 "그렇다면 네가 져라!"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주님 십자가를 대신 집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뜻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로 결국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 메었던 그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평생토록 감사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꿈만 같고 감격스럽고 행복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믿음의 여인으로,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어머니'라 불렀으며, 그 아들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 자신도 열심히 전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순교하는 영광을 입습니다. 순교할 때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처럼 바로 서서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너무나 무엄한 일이다. 나를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골고다 언덕으로 메고 가던 십자가가 그토록 무거웠는데, 지금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아 거꾸로 세워 놓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저 가볍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죄짐 벗고 지는 짐이요, 주님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미래와 소망이 있기에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옥을 앞에 둔 그것이라면 무겁고 피곤해서 한시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약속 받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바라보면서 사는 소망적인 생활이라면,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무겁고 피곤하지 않은 법입니다. 요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이상구 박사의 테이프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군대에 나갔다가 다리에 총알을 맞아 잘라내야 할만큼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약혼을 하고 입대를 한 터이라, 앞날을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힙니다.

'꼼짝없이 병신 되었구나. 절름발이가 되어 가지고 결혼하자고 하면 약혼녀는 어떻게 나올까? 그래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괴로워하는데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절름발이는 고사하고, 여기서 죽고 마는가보다.' 그러한 그를 동료들이 떠메어다가 병원에 입원을 시켜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깨어났을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넨 죽은목숨인데 전우들 덕분으로 늦기 전에 수술을 해서 이렇게 살아났다네. 다리도 괜찮아졌어. 수술이 잘 되어서 이어 놓았네 얼마동안 더 치료를 하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을 게야." 그러나 의사는 걱정이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를 이어 놓았으니, 낫기까지에는 하루에 모르핀을 네 번씩 맞아도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아프지 않다고 합니다. 정말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뻔했던 다리도 성하겠다, 앞으로 사랑하는 약혼녀와 떳떳이 결혼을 해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기만 한 것입니다.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으니 소위 '엔도르핀'이라는 것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도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고통을 모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는 짐이 무겁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죄책에서 벗어나고, 형벌 의식에서 자유하고, 허무와 목적 없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목적을 찾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향할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살 때에는 삶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에 이 짐은 영광스러워지며, 나를 행복하게 하며, 나에게 보람을 안겨 줍니다. 내 생의 의미가 이 멍에에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배우라.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쉼을 얻으리라"----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5절~30절)

 

 

어느 시골 교회의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보자니, 늘 근심 걱정에 싸여서 세상을 불만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목사님이 무슨 위로의 말씀을 해 주려고 해도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혼자서만 쉴새없이 이야기해 나갔습니다. 이야기는 전부가 근심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마을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서 살아 보고 싶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듣다못해서 "그런 곳이 있긴 있지요" 하고 일러 주셨습니다. "저쪽 언덕 너머로 가시면 근심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마을이 있습니다." 그 언덕 너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무척이나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피곤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된 셈인지 할 수만 있으면 도피하려 하고 쉬고 싶어합니다. 죽고 싶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남발합니다. 몸담고 있는 직장으로부터, 지니고 있는 명예로부터, 심지어는 가정으로부터도 벗어나 쉬어 보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심하게 부끄러움을 타고 있습니다. 헐벗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된 셈인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세상에 사람 만나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 만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누구에게 자기가 노출되는 것이 싫고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피곤한 일입니다. 병든 것도 아닌데 아픈 데가 많습니다. 의사들이 제일 골치 아파하는 환자가 이런 환자입니다. 아무리 진찰을 해 보아도 탈이 난 데가 없는데도 아픈 데가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내과 병원 진찰실에 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사이신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진찰을 받은 환자 한 사람이 약을 타 가지고 오더니 의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것은 죄가 아닙니까?" "아, 뭔데요?" "저 사람은 아픈 데가 없거든요. 그런데, 아무 탈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요. 벌써 며칠째 찾아와 조르기에 마지못해서 약이라고 소화제를 지어 줬더니 돈을 많이 내고 갑니다. 이런 일은 죄가 안 됩니까?" 그래서 제가 "아, 그런 건 예수님께 여쭤 봐야지 나한테 물어 보면 어찌 알겠소?" 하고 말았습니다마는, 요즈음 이런 환자들이 상상 밖으로 많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는 그 수많은 환자의 절반 이상이 병이 없는 환자들이라고 합니다. 병이 없는데도 자꾸만 그렇게들 아프다고 한다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피곤해한다는 증거이며, 무엇인가 지금 무거운 짐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초청의 말씀이자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더라도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정치적인 억압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이스라엘 민족은 갖가지로 착취당하고 약탈당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빈곤에 허덕였고,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가운데에도 누가복음 10장 30절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그야말로 강도가 들끓고 악독한 죄악이 있는 대로 만연하고 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마비된 무법 천지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율법주의자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위선과 교만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여 멸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에서도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마는 이처럼 결정적으로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수고한다'는 헬라말로 '코피온테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능동태(能動態)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졌다는 말은 헬라말로 '페포르티스메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수동태(受動態)입니다. 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졌다'는 말씀은 우리 인간의 고통을 전부 두 개념으로 나누어서 총괄한 것입니다. 수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자기 책임 하에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고생할 것이 아닌데 만들어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고생은 모두 제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짐 지는 것이 곧 '수고하는' 것입니다. 한편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자의(自意)가 아닌 타의(他意)로 어쩔수없이 지고 나가는 짐을 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피하 거나 모면할 길이 없어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원하지는 부득이 끌려가면서 억지로 당하는 그런 고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짐이 '무거운 짐' 입니다. 수동적이건 능동적이건 사람은 누구할것없이 다 이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쉬게 하리라, 즉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자의적(恣意的)인 응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저들에게 쉼을 주셨는지, 저들의 욕망을 채워 주셨는지,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셨는지를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자에게 빵을 넉넉히 주셨습니까? 오천 명 먹이신 이야기가 있지마는 그것도 한때의 일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배고프다고 합니다. 빵 문제로 제자들이 시험 당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정말로 빵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셨습니까? 노예로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해방을 주셨습니까?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약탈당하는 사람들에게 독립과 주권을 주셨습니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쉼을 주신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주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복음의 개념을 예수님 스스로 해석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에 예수님 스스로 당신에 대하여 그 정체를 설명해 주십니다. 복음의 성격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 온 소경이 눈을 뜬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환자 몇 사람 치료했다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까? 바로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서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쉬게 하신다는 이야기가 겨우 이런 정도의 이야기입니까? 적어도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쉬게 하신다는 복음의 성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과 함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 부르심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처지를 떠나서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말씀은 이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해있는 처지로부터, 내 안일(安逸)로부터, 내 고정 관념으로부터, 내 그릇된 사상과 습관과 잘못된 행위로부터 떠나 당신께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리고 떨쳐버리고 나아오는 행동으로 순종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우라는 말은 헬라말로 '마데테 아페무'라고 합니다. '마데테스'라고 하는 말은 제자(弟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데테 아페무는 내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 제자가 되라---이것은 단순한 스승과 학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도(弟子道), 즉 'discipleship'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마음을 열고 따르며,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제자도 입니다. 그리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행하는 일을 보고, 그리고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도 곁에서 보고 듣고 배웁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해서 죽어야 참된 제자입니다. 또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순종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가 하라는 대로 순종합니다. 그가 가라고 하시면 가야하고, 그가 오라고 하시면 와야 합니다.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 모든 것을 전인적(全人的)으로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을 것이다." 즉 내 지성과 감성과 뜻을 다하여 오로지 예수님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배우되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십니다(마 11:29).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십니다. 세상 멍에를 다 내어버리고 예수님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내 멍에'라는 말은 영어로 'my yoke'입니다. 멍에란 마소의 목에 걸쳐 얹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가로나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수였으므로 이런 멍에도 만들어 보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멍에를 바꿔 메라고 하십니다.

내가 메고 있던 멍에를 벗어 던져 버리고 예수님께서 메고 있는 그 멍에를 함께 메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어떤 것입니까?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수욕(羞辱)당하시고 비난받으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메신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시면서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쉽다'는 말은 헬라말로 '크레스토스'입니다. 이것은 몸에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마소는 멍에가 제 몸에 잘 맞아야 무거운 것도 가벼운 듯이 잘 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가 쉽다고 하신 것은, 잘 맞는다, 가장 적합하다, 무겁지 않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뜻은 한 걸음 나아가, 잘 익은 포도주와 같이 달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지는 멍에가 아니라 기쁨으로 질 수 있는 그런 멍에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아침처럼 돌아가셔야 할 그런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참 평안이 있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2-3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안을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고 하신 말씀의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왜 쉽고 가볍다 하셨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에 쉽습니다. 여러분도 시골에서 밭갈이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요사이는 경운기다 트랙터다 해서 기계로 가는 일이 흔해졌지만, 옛날에는 소의 목에 멍에를 메서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저도 보습을 잡아 본 일이 있습니다마는, 밭갈이할 때에는 보습이 달린 쟁기를 소가 끌고 나아갑니다. 소 한 필이 끄는 쟁기를 호리라 하고, 소 두 필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합니다. 이 두 필의 소를 '겨릿소'라고 하는 데, 보통 암수 두 필이 쓰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두 필이 끌면 한 필이 끄는 것보다 힘이 덜 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가 쉽고 가벼울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참으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는 소설입니다. 말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背敎)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神父)의 고뇌와 회의---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비끄러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 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큰 원인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욕심이요 교만이며, 하나는 증오(憎惡)라고 합니다. 이 증오가 사랑으로 바꾸어지면 짐은 가벼워집니다.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교만하다면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90세가 넘은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분이 80세가 넘어서도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아들 소생의 손자인데, 어리다고는 하나 이제는 걸어다닐 만큼 큰 아이였습니다.

무겁고 힘드신데 왜 그렇게 업고 다니시느냐고 하면 "예쁜 걸 뭐, 귀한 걸 뭐" 이러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니 무거울 리가 있습니까? 사랑으로 하는 일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내 짐이 무겁고 가볍고는 나의 사랑을 점검해서 가늠할 일이지 저울로 달아 가늠할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랑이 식었느냐 뜨거우냐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사랑을 느끼며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가는 삶은 절대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짐은 무겁지 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는 짐은 그 성격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바꿀 때에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내 멍에를 벗어버리고 나서 메는 멍에, 곧 죄짐을 벗고 그리고 메는 짐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죄에 짓눌려 있으면 사람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사함받고, 죄사함받은 확신에서 지는 십자가, 그 고통이라는 것은 오히려 반가운 것입니다. 죄의식으로 인한 형벌 의식, 저주 의식 때문에, 그리고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짐이 무겁고 피곤한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받고,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권한이라면 이 짐은 시련이요 기쁨이요, 영광이요 교훈이며, 나를 연단 시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선교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무겁게 질 필요가 없는 짐입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그를 따라가다가, 아마도 동정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왜 자꾸 때리느냐" 고 한마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로마 군인이 "그렇다면 네가 져라!"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주님 십자가를 대신 집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뜻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로 결국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 메었던 그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평생토록 감사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나 같은 사람에게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꿈만 같고 감격스럽고 행복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독실한 믿음의 여인으로,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어머니'라 불렀으며, 그 아들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 자신도 열심히 전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순교하는 영광을 입습니다. 순교할 때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처럼 바로 서서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너무나 무엄한 일이다. 나를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골고다 언덕으로 메고 가던 십자가가 그토록 무거웠는데, 지금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아 거꾸로 세워 놓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저 가볍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죄짐 벗고 지는 짐이요, 주님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미래와 소망이 있기에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옥을 앞에 둔 그것이라면 무겁고 피곤해서 한시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약속 받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바라보면서 사는 소망적인 생활이라면,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무겁고 피곤하지 않은 법입니다. 요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이상구 박사의 테이프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군대에 나갔다가 다리에 총알을 맞아 잘라내야 할만큼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약혼을 하고 입대를 한 터이라, 앞날을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힙니다.

'꼼짝없이 병신 되었구나. 절름발이가 되어 가지고 결혼하자고 하면 약혼녀는 어떻게 나올까? 그래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괴로워하는데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절름발이는 고사하고, 여기서 죽고 마는가보다.' 그러한 그를 동료들이 떠메어다가 병원에 입원을 시켜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깨어났을 때, 의사가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자넨 죽은목숨인데 전우들 덕분으로 늦기 전에 수술을 해서 이렇게 살아났다네. 다리도 괜찮아졌어. 수술이 잘 되어서 이어 놓았네 얼마동안 더 치료를 하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을 게야." 그러나 의사는 걱정이었습니다. 끊어진 다리를 이어 놓았으니, 낫기까지에는 하루에 모르핀을 네 번씩 맞아도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아프지 않다고 합니다. 정말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뻔했던 다리도 성하겠다, 앞으로 사랑하는 약혼녀와 떳떳이 결혼을 해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기만 한 것입니다.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으니 소위 '엔도르핀'이라는 것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도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고통을 모를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는 짐이 무겁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죄책에서 벗어나고, 형벌 의식에서 자유하고, 허무와 목적 없는 일에서부터 새로운 목적을 찾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향할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살 때에는 삶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에 이 짐은 영광스러워지며, 나를 행복하게 하며, 나에게 보람을 안겨 줍니다. 내 생의 의미가 이 멍에에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배우라. 내 멍에를 메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쉼을 얻으리라"----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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