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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자유인의 자유(고린도전서 7:17-24)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열다섯 살난 침팬지 '와슈'에게 수화(手話)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 140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자기의사를 표현하도록 유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Let me out"----나를 좀 놓아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모든 생물, 모든 동물,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30여년 전 서울에 아주 큰 파동을 일으켰던 이른바 '십자매 파동'이 있었습니다. '십자매를 키워서 팔면 상당한 수입이 생긴다'는 소문에 집집마다 십자매를 엄청나게 키웠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한계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십자매 파동은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것으로 끝났고, 부득불 새 주인들은 십자매를 놓아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방면된 이 십자매들은 스스로 살지 못하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새장에서 새를 놓아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유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새가 새장에서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하여 푸드덕거릴 때에는 꼭 놓아주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놓아주어 보십시오. 스스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를 준 것입니까, 주지 못한 것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찾아달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애써 살려주었더니 왜 나를 살려냈느냐고 따집니다.
오죽이나 살기 어려웠으면 죽으려고 했겠습니까? 살려낸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의미와 그 한계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자유에 대한 개념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freedom from-----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의미의 자유입니다. 또 하나는 freedom for-----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형식적인 자유나 실천적인 자유와 같은 자유는 일단 어떤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자유를 준다고 자유가 아닙니다. 단지 풀어놓았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면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의 참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참 자유의 뜻을 알아야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란 단순히 자유로운 환경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인이 되고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피하거나 도피하거나 해방되거나 풀려나는 것만으로는 자유 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길, 진리의 길에 서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정 자유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결혼을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자유케 하는 것입니까, 속박하는 것입니까? 결혼을 고통과 속박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미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결혼을 하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자유를 주는 것이지 결코 누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 부쩍 '비혼시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결혼하면 자연 서로에게 매이게 됩니다. 그 매이는 것이 싫어서 결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기는 해도 결혼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부터 생각합니다. 이혼할 때에 서로 손해가 많으니까 아예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관계를 속박으로 여기는 자는 처음부터 결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불임시대'라는 말도 합니다. 자식을 낳음으로 그 자식에게 매인다고 여깁니다. 키우느라고 매이고, 가르치느라고 매이고 하니까 '아이고, 이것 참 번거로운데'라고 생각해서 자식도 안 낳겠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잘못해도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는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허무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역시 이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것, 그 안에 자유가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을 안 낳는 것이 자유라고 여기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미국사람들 결혼에 주례를 서본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어느 대학교에서 있었는데 하객 중에 오십여 명의 교수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신랑 신부를 비롯하여 그 부모님을 보고는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교수님들 대개가 독신이요, 설령 결혼했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의 자식 결혼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디다. 식이 끝난 후 제가 한 분에게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 왜 낳지 않았느냐?"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낳는 것을 속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되돌릴 수도 없고 그저 후회만 할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릴 때에는 당연히 그 사랑에 매이고 그 결혼에 매입니다. 이 점을 들어 노예 되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굳이 노예라고 한다면 행복한 노예요, 즐거운 노예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매이는 것을 자유라고 풀이할 수 있는 자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얼마를 매여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매이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속에 자유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무조건 무언가에서 풀려나야 하고 도망가야 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바른 길에 매이고 진리에 매이고 법에 매이고 의에 매이는 순간, 거기에 내 자유가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요즈음 경범죄 처벌기준이 무척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무단횡단은 물론 담배꽁초나 침을 함부로 길에 뱉는 것도 강하게 단속한다고 합니다. 그 벌금도 만만찮다고 하더군요. 담배꽁초 한 번 버릴 때마다 그 액수가 이만 원인지 삼만 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놓고 어떤 사람은 '너무 액수가 많고 비인격적이다. 왜 사람을 속박하느냐?'라며 불만입니다. 사실 속박이랄 것도 없습니다. 십만 원이면 어떻고 백만 원이면 어떻습니까? 담배 안 피우면 그만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벌금을 천만 원 받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보세요. 바른 길을 가는 사람에게 법이 어떻게 속박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법이 엄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더욱 자유할 뿐입니다.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이란 결코 누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자유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역설적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큰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여기에 큰 진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곧 자유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의 선언은 여기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하다'----스스로는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하고, 진리가 자유케 함으로 자유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옛날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자유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노예는 부자유합니다. 결코 스스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일단 전쟁에 나갔다가 패전을 하여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됩니다. 또 빚을 많이 져서 갚을 수 없게 되면 빚 대신 몸이 구속됨으로 노예가 됩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노예가 됩니다. 이렇게 노예된 뒤에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충성을 다해도 여전히 노예입니다. 노예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합시다.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해서 물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허우적거려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허우적거리면 그럴수록 맥이 빠져서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치러 자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바로 내가 실제화할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자유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진노로부터 자유하고,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이 자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거룩한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사신 존재입니다.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말씀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23절)"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종, 진리의 종이 되었으니 절대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자기 욕심의 종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특별히 학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인지적 차원에서 관심에 매이는, 그러한 부자유함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너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아라'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서로들 너무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말할까 하고 항상 신경을 씁니다. 간혹 누구를 만났을 때에 "아, 얼굴이 참 좋아지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 기분 좋아하고, "어디 아프십니까?"하고 물어보면 '내가 혹시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하며 걱정합니다. 좀 예뻐졌다고 하면 금새 안색이 좋아졌다가도 얼굴이 좀 상해 보인다고 하면 그날은 종일 어둡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남이 젊어졌다고 말해주니까 진짜 젊어진 줄 아는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늙은 것은 늙은 것입니다. 마사지하고 주름살 제거 수술한다고 늙지를 않는답니까, 죽지를 않는답니까? 대충 살아가세요. 남보다 잘 입고 칭찬을 많이 듣고 표창장을 받아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평판이라든가 인기라든가 사람들의 대우라든가 혹은 남들이 내게 얼마나 보상을 하는가에는 크게 매이지 말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눈치보느라 정신없는 아내도 있습니다. 눈치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입니다. 또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할까에 너무 신경을 써서 신경과민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비교심리에 빠져 시기 질투도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꼴입니까? 이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자유하세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제발 이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사람의 눈치보는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자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있는 것을 없는 척하라는 것도 아니요, 가진 것을 안 가진 척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못 가졌고, 사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있는 척합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에서 참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때에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대로(17절)"------우리에게는 나름대로 분복(分福)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누어주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도, 나이도, 지식도, 능력도, 재산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다 가진 것입니까? 내가 쓰지 못하면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그 한계 안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내게 향하신 뜻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은사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한계 밖으로 넘어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은사가 있습니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많든 적든 내게 얼마의 재산이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한여름 땀흘려 일하고 가을이 되어 추수하였습니다. 그 거두어들인 곡식이 얼마가 되었건 부족하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이대로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세요. 설령 내 마음에 족하지 않더라도 내게 주신 건강이 있습니다. 이 역시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사로 받아들일 때에 바로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주어진 신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씀입니다. 정말이지 믿음으로만 소화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은혜 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노예가 되었느냐? 노예로 족하다, 노예로 자유하라. 주인이 되었느냐? 노예될 것 없다. 할례자냐? 할례받은대로 지내라. 무할례자냐? 할례받지 말라' 합니다.
자기의 있는 처지 그대로, 노예는 노예대로, 주인은 주인대로,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그 안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주인 되려고 하지 말고 무할례자가 할례자 되려고 하지 말라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는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분과 환경은 결코 자유와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어느 회사의 말단직원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과장만 되면 자유할 것처럼 보입니다. 과장되고 보니 부장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 되고 보니 이사가 되면 자유할 것 같습니다. 이사 되고 보니 사장이 되면 자유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이 되고나니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자살해버리고 맙니다. 자유함이 사장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요 회전의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위든 사장이든, 이 자리든 저 자리든,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얘기입니다. 내 자유함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내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부유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신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더 질적인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무할례자냐? 할례를 받지 말라. 종이라면 그대로 자유하라.'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환경에 끌려가지 맙시다. 내가 처한 환경 이외의 다른 환경에 자유함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처한 이 처지 이대로, 그 속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내 처지를 은사로 받고 내 처지를 부르심으로 받고 내 처지를 사명으로 받는 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합니까? 가난한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병이 들었습니까? 병든 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건강해야만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알아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처지 이대로, 여기에 엄청난 사명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행을 자유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일평생 참 건강하게 살아오신 권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몹쓸 병으로 인해 수술을 네 번이나 받고 무척이나 고생하셨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병원에 계시니까, 뵙기에도 민망하고 별반 위로할 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오히려 문병 온 저희들을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깨달은 것이 참 많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무얼 합니까? 그것이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오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으면서 생전처음 깨끗한 마음으로 전도해보았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전도지를 주면서 말을 건네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기 위해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나는 세 번이나 수술 받았답니다'하고, 입원한 지 한 달된 사람에게 가서는 '나는 삼 개윌째입니다'하고 이야기를 건네며 위안도 주고 조언도 하였지요. 그렇게 전도를 하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병들고 가난해지고 나이들면 아무 일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할일이 더 많아요. 더 소중하고 더 거룩한 일이 내게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경말씀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자유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유인이 되고야 자유하는 것이지, 자유하는 환경이 있기에 자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설혹 감옥에 있다 해도 자유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합니다. 그것이 나를 부르신 은사인 줄 알기에, 그 속에 나에 대한 소명이 있음을 알기에, 또한 더 높은 의미의 사명이 있음을 알기에 무한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우리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자유인의 자유(고린도전서 7:17-24)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열다섯 살난 침팬지 '와슈'에게 수화(手話)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 140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자기의사를 표현하도록 유도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Let me out"----나를 좀 놓아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모든 생물, 모든 동물,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30여년 전 서울에 아주 큰 파동을 일으켰던 이른바 '십자매 파동'이 있었습니다. '십자매를 키워서 팔면 상당한 수입이 생긴다'는 소문에 집집마다 십자매를 엄청나게 키웠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한계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십자매 파동은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것으로 끝났고, 부득불 새 주인들은 십자매를 놓아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방면된 이 십자매들은 스스로 살지 못하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새장에서 새를 놓아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유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새가 새장에서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하여 푸드덕거릴 때에는 꼭 놓아주어야 할 것 같지만, 막상 놓아주어 보십시오. 스스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를 준 것입니까, 주지 못한 것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찾아달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애써 살려주었더니 왜 나를 살려냈느냐고 따집니다.
오죽이나 살기 어려웠으면 죽으려고 했겠습니까? 살려낸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의미와 그 한계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자유에 대한 개념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freedom from-----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의미의 자유입니다. 또 하나는 freedom for-----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무엇을 향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보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형식적인 자유나 실천적인 자유와 같은 자유는 일단 어떤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자유를 준다고 자유가 아닙니다. 단지 풀어놓았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면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의 참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참 자유의 뜻을 알아야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란 단순히 자유로운 환경이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인이 되고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피하거나 도피하거나 해방되거나 풀려나는 것만으로는 자유 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길, 진리의 길에 서서 스스로 자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정 자유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결혼을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자유케 하는 것입니까, 속박하는 것입니까? 결혼을 고통과 속박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미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결혼을 하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자유를 주는 것이지 결코 누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 부쩍 '비혼시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결혼하면 자연 서로에게 매이게 됩니다. 그 매이는 것이 싫어서 결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기는 해도 결혼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부터 생각합니다. 이혼할 때에 서로 손해가 많으니까 아예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이라는 관계를 속박으로 여기는 자는 처음부터 결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불임시대'라는 말도 합니다. 자식을 낳음으로 그 자식에게 매인다고 여깁니다. 키우느라고 매이고, 가르치느라고 매이고 하니까 '아이고, 이것 참 번거로운데'라고 생각해서 자식도 안 낳겠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처럼 큰 착각은 없습니다. 잘못해도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는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허무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역시 이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것, 그 안에 자유가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을 안 낳는 것이 자유라고 여기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서 미국사람들 결혼에 주례를 서본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어느 대학교에서 있었는데 하객 중에 오십여 명의 교수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신랑 신부를 비롯하여 그 부모님을 보고는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교수님들 대개가 독신이요, 설령 결혼했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의 자식 결혼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디다. 식이 끝난 후 제가 한 분에게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 왜 낳지 않았느냐?"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낳는 것을 속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되돌릴 수도 없고 그저 후회만 할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릴 때에는 당연히 그 사랑에 매이고 그 결혼에 매입니다. 이 점을 들어 노예 되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굳이 노예라고 한다면 행복한 노예요, 즐거운 노예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매이는 것을 자유라고 풀이할 수 있는 자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얼마를 매여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매이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속에 자유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무조건 무언가에서 풀려나야 하고 도망가야 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바른 길에 매이고 진리에 매이고 법에 매이고 의에 매이는 순간, 거기에 내 자유가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요즈음 경범죄 처벌기준이 무척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무단횡단은 물론 담배꽁초나 침을 함부로 길에 뱉는 것도 강하게 단속한다고 합니다. 그 벌금도 만만찮다고 하더군요. 담배꽁초 한 번 버릴 때마다 그 액수가 이만 원인지 삼만 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놓고 어떤 사람은 '너무 액수가 많고 비인격적이다. 왜 사람을 속박하느냐?'라며 불만입니다. 사실 속박이랄 것도 없습니다. 십만 원이면 어떻고 백만 원이면 어떻습니까? 담배 안 피우면 그만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은 벌금을 천만 원 받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보세요. 바른 길을 가는 사람에게 법이 어떻게 속박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법이 엄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더욱 자유할 뿐입니다.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이란 결코 누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자유의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역설적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큰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여기에 큰 진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구원은 곧 자유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의 선언은 여기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하다'----스스로는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유케 하심으로 자유하고, 진리가 자유케 함으로 자유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옛날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자유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노예는 부자유합니다. 결코 스스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일단 전쟁에 나갔다가 패전을 하여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됩니다. 또 빚을 많이 져서 갚을 수 없게 되면 빚 대신 몸이 구속됨으로 노예가 됩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노예가 됩니다. 이렇게 노예된 뒤에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충성을 다해도 여전히 노예입니다. 노예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합시다.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해서 물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허우적거려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허우적거리면 그럴수록 맥이 빠져서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값을 치러 자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바로 내가 실제화할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자유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진노로부터 자유하고,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이 자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거룩한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사신 존재입니다.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말씀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23절)"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종, 진리의 종이 되었으니 절대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자기 욕심의 종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특별히 학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인지적 차원에서 관심에 매이는, 그러한 부자유함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너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아라'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서로들 너무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말할까 하고 항상 신경을 씁니다. 간혹 누구를 만났을 때에 "아, 얼굴이 참 좋아지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 기분 좋아하고, "어디 아프십니까?"하고 물어보면 '내가 혹시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하며 걱정합니다. 좀 예뻐졌다고 하면 금새 안색이 좋아졌다가도 얼굴이 좀 상해 보인다고 하면 그날은 종일 어둡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남이 젊어졌다고 말해주니까 진짜 젊어진 줄 아는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늙은 것은 늙은 것입니다. 마사지하고 주름살 제거 수술한다고 늙지를 않는답니까, 죽지를 않는답니까? 대충 살아가세요. 남보다 잘 입고 칭찬을 많이 듣고 표창장을 받아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평판이라든가 인기라든가 사람들의 대우라든가 혹은 남들이 내게 얼마나 보상을 하는가에는 크게 매이지 말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눈치보느라 정신없는 아내도 있습니다. 눈치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입니다. 또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할까에 너무 신경을 써서 신경과민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비교심리에 빠져 시기 질투도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꼴입니까? 이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자유하세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제발 이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사람의 눈치보는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자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있는 것을 없는 척하라는 것도 아니요, 가진 것을 안 가진 척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못 가졌고, 사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있는 척합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에서 참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때에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대로(17절)"------우리에게는 나름대로 분복(分福)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누어주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도, 나이도, 지식도, 능력도, 재산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다 가진 것입니까? 내가 쓰지 못하면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그 한계 안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내게 향하신 뜻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은사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한계 밖으로 넘어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은사가 있습니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많든 적든 내게 얼마의 재산이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한여름 땀흘려 일하고 가을이 되어 추수하였습니다. 그 거두어들인 곡식이 얼마가 되었건 부족하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이대로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세요. 설령 내 마음에 족하지 않더라도 내게 주신 건강이 있습니다. 이 역시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사로 받아들일 때에 바로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주어진 신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씀입니다. 정말이지 믿음으로만 소화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은혜 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노예가 되었느냐? 노예로 족하다, 노예로 자유하라. 주인이 되었느냐? 노예될 것 없다. 할례자냐? 할례받은대로 지내라. 무할례자냐? 할례받지 말라' 합니다.
자기의 있는 처지 그대로, 노예는 노예대로, 주인은 주인대로,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그 안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주인 되려고 하지 말고 무할례자가 할례자 되려고 하지 말라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는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분과 환경은 결코 자유와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어느 회사의 말단직원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과장만 되면 자유할 것처럼 보입니다. 과장되고 보니 부장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 되고 보니 이사가 되면 자유할 것 같습니다. 이사 되고 보니 사장이 되면 자유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이 되고나니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그만 자살해버리고 맙니다. 자유함이 사장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요 회전의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위든 사장이든, 이 자리든 저 자리든,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얘기입니다. 내 자유함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지 마세요. 내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부유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 내 신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더 질적인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무할례자냐? 할례를 받지 말라. 종이라면 그대로 자유하라.'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환경에 끌려가지 맙시다. 내가 처한 환경 이외의 다른 환경에 자유함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처한 이 처지 이대로, 그 속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내 처지를 은사로 받고 내 처지를 부르심으로 받고 내 처지를 사명으로 받는 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합니까? 가난한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병이 들었습니까? 병든 대로의 사명이 있습니다. 건강해야만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알아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처지 이대로, 여기에 엄청난 사명과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행을 자유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일평생 참 건강하게 살아오신 권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몹쓸 병으로 인해 수술을 네 번이나 받고 무척이나 고생하셨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병원에 계시니까, 뵙기에도 민망하고 별반 위로할 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오히려 문병 온 저희들을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깨달은 것이 참 많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무얼 합니까? 그것이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오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으면서 생전처음 깨끗한 마음으로 전도해보았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전도지를 주면서 말을 건네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기 위해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는 '나는 세 번이나 수술 받았답니다'하고, 입원한 지 한 달된 사람에게 가서는 '나는 삼 개윌째입니다'하고 이야기를 건네며 위안도 주고 조언도 하였지요. 그렇게 전도를 하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병들고 가난해지고 나이들면 아무 일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할일이 더 많아요. 더 소중하고 더 거룩한 일이 내게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경말씀을 깊이 생각해봅시다. 자유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유인이 되고야 자유하는 것이지, 자유하는 환경이 있기에 자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설혹 감옥에 있다 해도 자유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합니다. 그것이 나를 부르신 은사인 줄 알기에, 그 속에 나에 대한 소명이 있음을 알기에, 또한 더 높은 의미의 사명이 있음을 알기에 무한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우리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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