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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지혜를 구하는 지혜(열왕기상 3장 4절~15절)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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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구하는 지혜(열왕기상 3장 4절~15절)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公義)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訟事)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택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계속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의 기회가 없다면 그 인생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선택의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선택의 지혜가 없다면 그 인격은 파산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늘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에덴동산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다음에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십니다.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입니다. 운명의 선택권, 자기의 생에 대한 선택의 권리--엄청난 특권을 인간에 주셨습니다. 모든 행위에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하도록 인간의 값어치를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디부터 인간의 삶 자체가 일련의 선택의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즉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따릅니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강제성을 띱니다. 선택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일 수 있으나 선택의 결과는 일평생입니다. 그 결과가 생애에 걸쳐 이어집니다.

선택을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큰 책임입니다. 평생토록 나를 따르는 책임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생각해보십시오. 심는 것은 자유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내 마음대로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어들일 때에는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심은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고 그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생을 사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심는 것은 자유로되 거두는 데는 강제성이 깃듭니다. 심판적입니다. 심을 때는 마음대로 심어놓고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참으로 비인격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거둘 것까지 생각하고 심습니다. 후속 하는 결과를 요량하고 심습니다. 봄이면 가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는 추수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멍텅구리인 수라에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뒤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지면서 원인을 제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바로 책임 있는 인격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말한 것도 책임을 지고 행동한 것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격자가 설 곳은 거기입니다.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배고픈 고통이 아닙니다. 추운 고통이 아닙니다. 병약해서 아픈 고통이 아닙니다. 후회란 지극히 인간적인 의식을 가진 지성인의 고통입니다.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후회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고 가슴아파합니다. '그 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스스로 선택해놓고 평생토록 심신이 고달픕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 옛날 중매해주었던 사람을 탓하겠습니까, 부모를 탓하겠습니까? 나의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후회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알고 보면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부득이하게 받게 되는 심판의 고통입니다. 이토록 애당초의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끊임없이 마음의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솔로몬의 바른 선택을 보게 됩니다. 일순간의 바른 선택으로 솔로몬은 저의 일생을 아름답고 복된 삶으로 이끌어갑니다. 이 한번의 바른 선택이 솔로몬으로 솔로몬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되었다고 으스대면서 축제나 벌이는 그러한 권력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 순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요즘도 보면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마는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사업에 성공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참으로 보기 힘듭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권좌에 앉게 되면서 그는 맨 먼저 산당(山堂)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무엇보다 앞서, 그리고 으뜸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기도를 선택합니다. 이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로 바른 선택이 되었습니다. 지혜의 근본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형통한 날에, 영광된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바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응답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입니까? 지금이야말로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의 앞날은 이제 무엇을 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 순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바른 선택을 합니다. 그 소중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바른 소원을 구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바른 선택이 과연 솔로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우선 솔로몬의 기본적인 지혜부터 생각해보십시다. 본문말씀을 보면 그는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하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6절 이하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는 은혜를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6절)." 입은바 은혜를 구구절절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밧세바, 그 여인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공짜라는 것입니다. 거저, 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 나의 능력으로써가 아닙니다.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 그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나된 것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만큼 인정하고 계십니까? 나의 행동, 나의 의, 나의 도덕성, 나의 부족함, 나의 허물, 나의 게으름…… 그럴진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생각하면 엄청납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요새 정치인들의 행태란 가위 꼴불견입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어떤 분야를 보아도 복 받을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온 세상이 전쟁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안정을 누리며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그 은혜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입을만한 그 무엇이 있기나 합니까? 복 받을만한 것이 어느 구석에 있습니까?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이만큼의 평화를 누리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인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가 왕이 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배경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7절에서는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일상 출입하는 길도 모르는 작은아이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있습니다. 연령이나 경험, 지식, 또 사회적 위치로나 인격적으로도 그러하겠습니다마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대체로 인생을 거진 다 살아버린 사람들은 뒤늦게야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그저 부족합니다'라고 쉽게 말합니다마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스물 한 살의 나이라면 겂 없는 소리를 많이 할 때입니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내가 가장 의롭고,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시건방지게 굽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생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왕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릅니다.

'나는 작은아이입니다' '일상 출입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혜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에 비례하여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지혜로워진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배워서 알게 된 것보다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탈무드」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살아 있는 사람이니 가르치고,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면 이미 죽은 사람이니 내다버려라.' 자신이 무지하다는 그 사실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혜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도 모릅니다' ---- 여기서 출발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솔로몬은 '너는 구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을 공의롭게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나의 명예, 나의 욕망, 나의 충성에 매여 있는 사람은 우둔해집니다. 멍청해지고 맙니다. 내 안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들어오면 나에게서 정의감이 사라집니다. 내 명예에 연연하면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바보가 되고 맙니다. 추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맡겨진 사명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내가 있다' '백성들을 바로 인도할 봉사자로서 내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소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저에게 맡겨진 귀한 사명을 위하여, 저의 백성을 위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잘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무엇이 유익한지를 일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번영의 길을 묻고 있지 않습니다. 선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닌 선을 묻고 있습니다. 흔히 번영이 먼저요, 자유가 먼저요, 권세가 먼저라고 생각해서 문제가 됩니다. 권력이야 누구에게 돌아가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중요한 것은 선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의로운 길입니까? 이것이 먼저인데 순서가 뒤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나라의 번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선과 악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을 알게 해주십시오 ----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도덕성이 먼저요, 종교성이 먼저입니다. 결코 정치․경제․사회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이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끝으로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이나 지식이나 번영을 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여,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환경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자는 패한 가운데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사리(事理)를 거스려 패하게 마련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느라면 참으로 시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말씀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10절을 보면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2절). 또한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1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편 다윗 왕을 생각해봅시다. 사무엘하 7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선지자 나단을 불러 이릅니다.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2절)" ---- 나는 이렇게 좋은 궁전에서 사는데 여호와의 법궤는 천막 속에 있다, 이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 말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다고 나단에게 전합니다. 이 계획을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 아룁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사무엘하 7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시원스러운지 모릅니다. 누가 너더러 성전을 지으라고 했느냐, 내가 언제 불편하다고 했느냐, 어찌 그리도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며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13절)" ---- 은혜를 듬뿍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솔로몬도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 한가지만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11절)" ---- 기특하게도 어떻게 그것을 달라고 했느냐, 내 마음에 꼭 든다 라고 하시며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까지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시원한 마음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듯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데 문제는 아들의 소원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때로 부자지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는 아들이 제멋대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 실패한 다음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사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옳았습니다. 진작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뒤늦게나마 돌아온 아들의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 아버지는 기분이 좋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다면 "좀더 일찍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고 우리는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일치해야 되는데 이것이 어긋날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시는 그 순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에 이 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이고 '지혜롭다'는 말은 '쇼메'입니다. 쇼메, 듣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직역을 해보면 hearing heart, listening mind가 됩니다. 곧 듣는 마음입니다. 좀더 의역을 하자면 receptive heart, 수용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이것이 소원입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소원이라면 사람이라도 누구인들 거절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소원입니까?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게 하여주십시오, 아무리 방황하고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조간 신문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을 종식시키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의 큰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참모도 많고 협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마지막에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우리 대통령은 언제쯤에 저 사진과 같은 모습이 될까 해서 말입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 없이 결정하기에 앞날에 실책이 많고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지혜를 주십시오! 판단의 지혜를 주십시오!" 하고 함께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귀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이여,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어느 순간에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권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망하기로 들면 귀먹게 마련입니다. 지혜와 반대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카살'이라고도 하고 '나벨'이라고도 하고 '에윌'이라고도 합니다. 그 뜻인즉 고집, 어리석음, 우둔함, 건방짐, 무례함, 교만함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먼저 구할 때에 이 모든 것 ---- 번영과 자유와 평등을 그 다음에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그 지혜를 우리에게 주옵시고, 그에게 내리셨던 넘치는 지혜를 우리의 지도자와 우리 온 백성에게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주님께 지혜를 구하나이다. *  

지혜를 구하는 지혜(열왕기상 3장 4절~15절)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公義)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訟事)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택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계속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의 기회가 없다면 그 인생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선택의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선택의 지혜가 없다면 그 인격은 파산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늘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에덴동산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다음에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십니다.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입니다. 운명의 선택권, 자기의 생에 대한 선택의 권리--엄청난 특권을 인간에 주셨습니다. 모든 행위에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하도록 인간의 값어치를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디부터 인간의 삶 자체가 일련의 선택의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즉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따릅니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강제성을 띱니다. 선택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일 수 있으나 선택의 결과는 일평생입니다. 그 결과가 생애에 걸쳐 이어집니다.

선택을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큰 책임입니다. 평생토록 나를 따르는 책임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생각해보십시오. 심는 것은 자유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내 마음대로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어들일 때에는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심은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고 그대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생을 사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심는 것은 자유로되 거두는 데는 강제성이 깃듭니다. 심판적입니다. 심을 때는 마음대로 심어놓고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참으로 비인격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거둘 것까지 생각하고 심습니다. 후속 하는 결과를 요량하고 심습니다. 봄이면 가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는 추수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멍텅구리인 수라에 없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뒤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지면서 원인을 제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것이 바로 책임 있는 인격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말한 것도 책임을 지고 행동한 것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격자가 설 곳은 거기입니다.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배고픈 고통이 아닙니다. 추운 고통이 아닙니다. 병약해서 아픈 고통이 아닙니다. 후회란 지극히 인간적인 의식을 가진 지성인의 고통입니다.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후회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고 가슴아파합니다. '그 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스스로 선택해놓고 평생토록 심신이 고달픕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 옛날 중매해주었던 사람을 탓하겠습니까, 부모를 탓하겠습니까? 나의 일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후회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알고 보면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부득이하게 받게 되는 심판의 고통입니다. 이토록 애당초의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끊임없이 마음의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솔로몬의 바른 선택을 보게 됩니다. 일순간의 바른 선택으로 솔로몬은 저의 일생을 아름답고 복된 삶으로 이끌어갑니다. 이 한번의 바른 선택이 솔로몬으로 솔로몬되게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되었다고 으스대면서 축제나 벌이는 그러한 권력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 순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요즘도 보면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마는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일이 잘 풀려나갈 때, 사업에 성공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참으로 보기 힘듭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권좌에 앉게 되면서 그는 맨 먼저 산당(山堂)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무엇보다 앞서, 그리고 으뜸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기도를 선택합니다. 이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로 바른 선택이 되었습니다. 지혜의 근본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처럼 형통한 날에, 영광된 순간에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바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어여삐 여기시어 응답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입니까? 지금이야말로 소중한 순간입니다. 그의 앞날은 이제 무엇을 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 순간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바른 선택을 합니다. 그 소중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바른 소원을 구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바른 선택이 과연 솔로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우선 솔로몬의 기본적인 지혜부터 생각해보십시다. 본문말씀을 보면 그는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하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6절 이하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는 은혜를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6절)." 입은바 은혜를 구구절절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밧세바, 그 여인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공짜라는 것입니다. 거저, 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 나의 능력으로써가 아닙니다.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 그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나된 것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만큼 인정하고 계십니까? 나의 행동, 나의 의, 나의 도덕성, 나의 부족함, 나의 허물, 나의 게으름…… 그럴진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를 생각하면 엄청납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요새 정치인들의 행태란 가위 꼴불견입니다. 정치․경제․사회의 어떤 분야를 보아도 복 받을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온 세상이 전쟁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안정을 누리며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그 은혜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입을만한 그 무엇이 있기나 합니까? 복 받을만한 것이 어느 구석에 있습니까?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이만큼의 평화를 누리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인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가 왕이 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배경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7절에서는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일상 출입하는 길도 모르는 작은아이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있습니다. 연령이나 경험, 지식, 또 사회적 위치로나 인격적으로도 그러하겠습니다마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대체로 인생을 거진 다 살아버린 사람들은 뒤늦게야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그저 부족합니다'라고 쉽게 말합니다마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스물 한 살의 나이라면 겂 없는 소리를 많이 할 때입니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내가 가장 의롭고,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시건방지게 굽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생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왕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릅니다.

'나는 작은아이입니다' '일상 출입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혜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에 비례하여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지혜로워진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배워서 알게 된 것보다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탈무드」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살아 있는 사람이니 가르치고,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면 이미 죽은 사람이니 내다버려라.' 자신이 무지하다는 그 사실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지혜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도 모릅니다' ---- 여기서 출발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솔로몬은 '너는 구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을 공의롭게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나의 명예, 나의 욕망, 나의 충성에 매여 있는 사람은 우둔해집니다. 멍청해지고 맙니다. 내 안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들어오면 나에게서 정의감이 사라집니다. 내 명예에 연연하면 모르는 사이에 나는 바보가 되고 맙니다. 추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맡겨진 사명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내가 있다' '백성들을 바로 인도할 봉사자로서 내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소원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저에게 맡겨진 귀한 사명을 위하여, 저의 백성을 위하여 지혜로운 마음을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잘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래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무엇이 유익한지를 일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번영의 길을 묻고 있지 않습니다. 선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닌 선을 묻고 있습니다. 흔히 번영이 먼저요, 자유가 먼저요, 권세가 먼저라고 생각해서 문제가 됩니다. 권력이야 누구에게 돌아가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중요한 것은 선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의로운 길입니까? 이것이 먼저인데 순서가 뒤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나라의 번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혼탁한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선과 악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을 알게 해주십시오 ----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도덕성이 먼저요, 종교성이 먼저입니다. 결코 정치․경제․사회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이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끝으로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이나 지식이나 번영을 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여,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환경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자는 패한 가운데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사리(事理)를 거스려 패하게 마련입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느라면 참으로 시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말씀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절)"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10절을 보면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2절). 또한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1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편 다윗 왕을 생각해봅시다. 사무엘하 7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선지자 나단을 불러 이릅니다.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2절)" ---- 나는 이렇게 좋은 궁전에서 사는데 여호와의 법궤는 천막 속에 있다, 이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 말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다고 나단에게 전합니다. 이 계획을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 아룁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사무엘하 7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시원스러운지 모릅니다. 누가 너더러 성전을 지으라고 했느냐, 내가 언제 불편하다고 했느냐, 어찌 그리도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며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13절)" ---- 은혜를 듬뿍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솔로몬도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 한가지만을 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11절)" ---- 기특하게도 어떻게 그것을 달라고 했느냐, 내 마음에 꼭 든다 라고 하시며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까지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활짝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시원한 마음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듯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까?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데 문제는 아들의 소원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때로 부자지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는 아들이 제멋대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 실패한 다음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사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옳았습니다. 진작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뒤늦게나마 돌아온 아들의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 아버지는 기분이 좋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다면 "좀더 일찍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고 우리는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일치해야 되는데 이것이 어긋날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시는 그 순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에 이 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이고 '지혜롭다'는 말은 '쇼메'입니다. 쇼메, 듣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직역을 해보면 hearing heart, listening mind가 됩니다. 곧 듣는 마음입니다. 좀더 의역을 하자면 receptive heart, 수용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게 하여주십시오, 이것이 소원입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소원이라면 사람이라도 누구인들 거절하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소원입니까?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게 하여주십시오, 아무리 방황하고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조간 신문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을 종식시키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의 큰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참모도 많고 협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마지막에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미국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우리 대통령은 언제쯤에 저 사진과 같은 모습이 될까 해서 말입니다.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 없이 결정하기에 앞날에 실책이 많고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지혜를 주십시오! 판단의 지혜를 주십시오!" 하고 함께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귀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이여,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어디에서나 어느 순간에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권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망하기로 들면 귀먹게 마련입니다. 지혜와 반대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카살'이라고도 하고 '나벨'이라고도 하고 '에윌'이라고도 합니다. 그 뜻인즉 고집, 어리석음, 우둔함, 건방짐, 무례함, 교만함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먼저 구할 때에 이 모든 것 ---- 번영과 자유와 평등을 그 다음에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그 지혜를 우리에게 주옵시고, 그에게 내리셨던 넘치는 지혜를 우리의 지도자와 우리 온 백성에게 주시옵소서.

이 아침에 주님께 지혜를 구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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