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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미완성의 완성(빌립보서 3 : 10~16)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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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완성(빌립보서 3 : 10~16)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묻기를 당신이 지향하는 성공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뚜렷하게 대답할 말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항상 실패했다는 말만을 자주 하게 됩니다. 목표는 정해지지 않았는데 출발했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면서 항상 바쁘며, 인생의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고달픈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을 한 경주자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좌우명으로 여기는 요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기 이상대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바로 그것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잡혔다는 말과 잡으려고 좇아 간다는 말은 똑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는 과거사요 하나는 현대사이며, 하나는 단회적 사건이요 하나는 계속 반복되는 의미의 시칭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었다, 포로하셨다 하는 것은 완료형으로서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며 변함이 없을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자신도 그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취미나 성향이나 이상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면 자기 배를 섬긴 것이며 더러운 욕심을 위한 것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상이나 안일이나 향락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포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또한 그것을 이상으로 정하여 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쫓아간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끌려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항상 끌려가는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은 마지못해서 공부를 하며, 우리의 사회 생활은 죽지 못해서 하며, 마치 소가 코에 꿰어 끌려가는 것처럼 아주 억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불행하고 비참한 생입니다. 우리는 강제로 끌려가는 그런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이왕에 살 바에야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쫓아간다는 말은 따라 간다거나 시키는 대로한다고 하는 맹목적인 순종의 노예적이거나 인형적 인격이 아닙니다.

그 말의 원뜻은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번역을 하면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다시 말해서 막 뛰어 가는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에서 부르는 부름이 있고 목표가 분명하고 코스가 있고 상급이 있어서 뒤돌아 볼 것이 없이 달려가는 그런 모습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인생을 경기자의 모습에 비교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세 가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원어를 살펴보면 이미 받은 것도 아니요 완성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포로하신 것은 완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으나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은 계속 미완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사도 바울 외에 성격까지 고친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아도 수십 년 동안 예수 믿고, 수십 년 동안 목사의 생활을 했지만 성격은 여전히 고칠 수가 없어서 성경에서 그 누가 고쳤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사도 바울 한 사람 밖에 없는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 인격이 완전히 그리스도적으로 변화된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잡힌 그것, 그리스도가 내게 기대하는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미완성적이며 부족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미완성적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라도 사랑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미완성의 사랑이라고 하면 딸을 시집보낸 친정 어머니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시집가는 딸을 위하여 친정 어머니의 심정은 모든 것을 다 해 주고도 또 더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더 못해 줘서 미안하다는 것이며, 나중에는 된장, 고추장까지 꾸려 가지고 갖다 주는 것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이것이 사랑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다 해 주어도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같은 그 마음이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보면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옛날 다윗 왕이 도성을 쌓고 궁전을 짓고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인구 조사를 시켰다가 하나님께 크게 책망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그 근본 저의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한다는 마음과 자세로서 계속 훈련받아야 하며, 아직도 회개할 것이 많고 버려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는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교만하여질까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로써 아픈 상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완성자의 고백입니다. 아직도 고쳐야 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 가시로 인하여 계속 찔림으로써 겸손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자기를 작게 여기고 약하게 여기고 부족하게 여겨서 미완성 속에서 계속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완성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완벽주의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옛날 전통적인 유대인의 생활 즉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생활을 잊어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잊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되어진 모든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고등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서 건망증이라고 하는 소위 망각의 축복을 주신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고 했더니 학생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공부한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고민이기도 하지만,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잊혀지지 않고 자꾸 생각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지나간 쓸 데 없는 일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또한 기도를 어지럽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각이란 큰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들을 만나보면 지난 날의 일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지난날의 이야기를 좋아하면 나이든 줄로 알면 됩니다. 쓸데없는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이 내게 또 하나의 좋지 못한 타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로 나를 끌어 당겨서 새로운 일을 경험할 수 없게 합니다. 과거의 업적, 화려했던 생활, 이런 꿈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며 또 과거의 실패와 좌절되었던 때의 나약한 마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을 때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니 그가 일어나 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보통 앉은뱅이가 아니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어서 걸어 본 사실도 없고 일어서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듣는 순간 자기가 앉은뱅이로서 한 번도 일어나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할 때 벌떡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입니다.

지난 날의 일을 자꾸 기억하여 못하겠다고 하면 평생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집사님들에게 기도 인도하라고 하면 한 번 못해 보았다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을 해야 하게 되는 것이며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허물과 타락성을 더 이상 묻지 않고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이 사람은 체면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풀며 그를 맞이할 때 죄송하다는 한 마디로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다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를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어제까지의 자기의 모습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났을 때 지난날의 자기들의 소행으로 인하여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은 용서해 주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확실한 용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그들에게 당신의 후손들도 먹여 살릴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날을 깨끗이 잊어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복지로 향할 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뒤로 물러서면 더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가다가 앞이 막히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절대로 뒤돌아 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이 있고 준비된 상이 있고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대로 앞만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9:6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단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가족과 작별하고 오겠다고 할 때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고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쟁기를 손에 들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서 소 두 마리로 끄는 보습쟁기를 잡고 잠깐 밭을 갈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이 저 멀리 앞에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 바라보고 쟁기를 잡고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곧잘 나가다가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보려고 딱 한번 뒤돌아보았는데 쟁기가 획 돌아가면서 앞이 구불구불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되었더라도 그건 이미 끝난 것이며 앞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앞과 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위의 부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쫓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저 앞의 것을 보았습니다. 믿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잡으려고 쫓아갔습니다.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 쫓아가는 믿음입니다. 끌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달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는 것은 멀리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이요, 찾는 것은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며, 두드리는 것은 가까이 가야 두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소리만 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는 처지에서 저쪽까지 달려가서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번역을 바꾸면 믿음이 성숙한 자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바란다면 완성의 자만과 완벽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주께서 부르신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너무 크기에 나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것이 너무 귀하기에 우리는 조그만 일을 가지고 시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너무 깊어서 나의 부족을 주님 앞에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미완성의 겸손을 가지고 앞만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비하신 상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을 불러 주시고 포로해 주셔서 그 강한 손으로 오늘날까지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뒤에 있는 나의 모든 추악한 모습과 부끄러운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께서 부르시는 미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함으로 주님의 뜻만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미완성의 완성(빌립보서 3 : 10~16)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묻기를 당신이 지향하는 성공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뚜렷하게 대답할 말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항상 실패했다는 말만을 자주 하게 됩니다. 목표는 정해지지 않았는데 출발했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면서 항상 바쁘며, 인생의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고달픈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을 한 경주자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좌우명으로 여기는 요절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기 이상대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바로 그것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잡혔다는 말과 잡으려고 좇아 간다는 말은 똑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는 과거사요 하나는 현대사이며, 하나는 단회적 사건이요 하나는 계속 반복되는 의미의 시칭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었다, 포로하셨다 하는 것은 완료형으로서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며 변함이 없을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자신도 그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취미나 성향이나 이상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면 자기 배를 섬긴 것이며 더러운 욕심을 위한 것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상이나 안일이나 향락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포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또한 그것을 이상으로 정하여 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쫓아간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끌려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항상 끌려가는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은 마지못해서 공부를 하며, 우리의 사회 생활은 죽지 못해서 하며, 마치 소가 코에 꿰어 끌려가는 것처럼 아주 억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불행하고 비참한 생입니다. 우리는 강제로 끌려가는 그런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이왕에 살 바에야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쫓아간다는 말은 따라 간다거나 시키는 대로한다고 하는 맹목적인 순종의 노예적이거나 인형적 인격이 아닙니다.

그 말의 원뜻은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번역을 하면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다시 말해서 막 뛰어 가는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에서 부르는 부름이 있고 목표가 분명하고 코스가 있고 상급이 있어서 뒤돌아 볼 것이 없이 달려가는 그런 모습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인생을 경기자의 모습에 비교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세 가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원어를 살펴보면 이미 받은 것도 아니요 완성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포로하신 것은 완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으나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은 계속 미완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사도 바울 외에 성격까지 고친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아도 수십 년 동안 예수 믿고, 수십 년 동안 목사의 생활을 했지만 성격은 여전히 고칠 수가 없어서 성경에서 그 누가 고쳤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사도 바울 한 사람 밖에 없는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 인격이 완전히 그리스도적으로 변화된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잡힌 그것, 그리스도가 내게 기대하는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미완성적이며 부족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미완성적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라도 사랑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미완성의 사랑이라고 하면 딸을 시집보낸 친정 어머니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시집가는 딸을 위하여 친정 어머니의 심정은 모든 것을 다 해 주고도 또 더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더 못해 줘서 미안하다는 것이며, 나중에는 된장, 고추장까지 꾸려 가지고 갖다 주는 것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이것이 사랑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다 해 주어도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 같은 그 마음이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보면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옛날 다윗 왕이 도성을 쌓고 궁전을 짓고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인구 조사를 시켰다가 하나님께 크게 책망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그 근본 저의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한다는 마음과 자세로서 계속 훈련받아야 하며, 아직도 회개할 것이 많고 버려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는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교만하여질까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로써 아픈 상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완성자의 고백입니다. 아직도 고쳐야 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 가시로 인하여 계속 찔림으로써 겸손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자기를 작게 여기고 약하게 여기고 부족하게 여겨서 미완성 속에서 계속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완성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완벽주의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옛날 전통적인 유대인의 생활 즉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생활을 잊어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잊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되어진 모든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고등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서 건망증이라고 하는 소위 망각의 축복을 주신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고 했더니 학생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공부한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또 그것 때문에 고민이기도 하지만,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잊혀지지 않고 자꾸 생각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지나간 쓸 데 없는 일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또한 기도를 어지럽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망각이란 큰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들을 만나보면 지난 날의 일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지난날의 이야기를 좋아하면 나이든 줄로 알면 됩니다. 쓸데없는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이 내게 또 하나의 좋지 못한 타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로 나를 끌어 당겨서 새로운 일을 경험할 수 없게 합니다. 과거의 업적, 화려했던 생활, 이런 꿈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며 또 과거의 실패와 좌절되었던 때의 나약한 마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을 때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니 그가 일어나 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보통 앉은뱅이가 아니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어서 걸어 본 사실도 없고 일어서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듣는 순간 자기가 앉은뱅이로서 한 번도 일어나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할 때 벌떡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입니다.

지난 날의 일을 자꾸 기억하여 못하겠다고 하면 평생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집사님들에게 기도 인도하라고 하면 한 번 못해 보았다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을 해야 하게 되는 것이며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허물과 타락성을 더 이상 묻지 않고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이 사람은 체면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풀며 그를 맞이할 때 죄송하다는 한 마디로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다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를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어제까지의 자기의 모습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났을 때 지난날의 자기들의 소행으로 인하여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은 용서해 주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확실한 용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그들에게 당신의 후손들도 먹여 살릴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날을 깨끗이 잊어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복지로 향할 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뒤로 물러서면 더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가다가 앞이 막히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절대로 뒤돌아 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이 있고 준비된 상이 있고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대로 앞만 바라보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9:6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단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가족과 작별하고 오겠다고 할 때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고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쟁기를 손에 들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서 소 두 마리로 끄는 보습쟁기를 잡고 잠깐 밭을 갈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이 저 멀리 앞에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 바라보고 쟁기를 잡고 나아가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곧잘 나가다가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보려고 딱 한번 뒤돌아보았는데 쟁기가 획 돌아가면서 앞이 구불구불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되었더라도 그건 이미 끝난 것이며 앞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앞과 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위의 부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쫓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저 앞의 것을 보았습니다. 믿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잡으려고 쫓아갔습니다.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 쫓아가는 믿음입니다. 끌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달려가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는 것은 멀리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이요, 찾는 것은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며, 두드리는 것은 가까이 가야 두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소리만 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는 처지에서 저쪽까지 달려가서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번역을 바꾸면 믿음이 성숙한 자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바란다면 완성의 자만과 완벽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주께서 부르신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너무 크기에 나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것이 너무 귀하기에 우리는 조그만 일을 가지고 시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너무 깊어서 나의 부족을 주님 앞에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미완성의 겸손을 가지고 앞만 바라보고 쫓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비하신 상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을 불러 주시고 포로해 주셔서 그 강한 손으로 오늘날까지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뒤에 있는 나의 모든 추악한 모습과 부끄러운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고,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께서 부르시는 미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함으로 주님의 뜻만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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