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인간 됨의 현주소 (행 10:23~33)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 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시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을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리는 대체로 인간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생리학적 인간입니다. 인간은 우선 육체를 가졌고 이 육체에 따른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결코 정죄해도 안되고 속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육체의 건강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여지기에 꼭 필요한 것이므로 더욱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이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느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값이 평가됩니다. 아무리 건강한 육체라 해도 그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세기에서는 이성이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이성이 밝고 또 많이 발달한 사람을 가리켜 철학자라 했고, 때로는 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다 더 인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이상 세 가지 차원이 동시에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되었고 또 그렇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인간화되는 점을 막아야 합니다. 즉, 인간이 인간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물질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소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행복과 소유는 같지 않습니다.
가난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부하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 쥐었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원한다고 다 가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다 사용하지도 못하는 극히 제한적인 인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물질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동물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동물화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먹고 싶다고 무엇이든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자고, 가고 싶다고 다 가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은 이성으로 양심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본능을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비신격화입니다. 결코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이 있고 또 역사 속에서도 우상을 봅니다. 우상이 생기게 된 근본적인 유래를 사회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인간이 인간 이상의 대접을 받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죄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 신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화의 역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되지 말아야 하고, 동물이면서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인간은 신성을 지녔지만 결코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 됨의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진실과 겸손은 하나입니다. 가끔 우리는 진실과 겸손이 별개의 것인냥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선이 되고 맙니다.
겸손은 진실에 근거하고 진실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과 겸손은 한 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 진실에 근거한 겸손, 바로 거기에 인간의 인간 됨에 현주소가 있습니다.
흔히 운동경기장에서 페이스라는 용어를 씁니다. 분수라는 뜻으로서 사람이 뛰는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페이스를 지키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꼭 지켜야하는 것이 자기 페이스입니다. 운동 해설가들은 해설할 때에 선수들이 자기 페이스를 잃었다 혹은 찾았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는 바로 자기 페이스에 있습니다. 자기 이상도 자기 이하도 아닙니다. 힘도 자기 페이스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어하고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도 바로 자기 위치를 알고 설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알고 다스리는 지혜입니다. 흔히 죄라는 말을 합니다만 죄란 못하는 것을 못했을 때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됨을 상실하여 할 수 있는 일을 못했을 때 죄가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성공도 놓여야 할 자리에 놓이므로 성공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놓일 자리에 놓일 때에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 심리에 대해서 참 자아(True ego)와 초자아(Super ego)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자아 사이에 간격이 멀면 멀수록 고민이 많다는 것입니다. 진짜「내」가 있고 또한 내가 바라며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또 하나의「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내가 간격이 멀면 멀수록 허황된 사람이 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나를 지켜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에게 진실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14살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나의 생활의 최우선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단할 때에 가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눈을 뜨니 새벽 5시였습니다. 예배 시작 시간이 5시인데 이제 일어났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였습니다. 만약 제가 안 나가면 부목사님이 대신 인도 할 것이고 몸이 좀 불편한가보다 라고 생각들을 하겠지요. 그리고 하루에 몇 번의 전화가 오겠지요. 그 때마다 저는 궁색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이라도 나가면 어떻겠습니까? 목사님 늦잠 자다가 늦었겠구나 그럴테지요. 잠깐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습니다. 사찰 집사님께 전화를 걸어 "지금 나갈터이니 찬송가 두 장만 부르시오"하고 부지런히 나갔습니다. 한 10분 늦었지요. 다 아는 일이니 가서 변명할 것도 없었습니다. 잠깐 괴로웠는데 예배를 보고나니 어떻게나 마음이 편한지 몰랐습니다. 약 한 달 동안이나 기뻤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의 현주소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말입니다. 진실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위에 진실은 세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어느 때에 자기 상실이 있습니까? 첫째, 지나친 굴욕을 당할 때에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나는 사실 한 가지를 잘못했는데 저쪽에서 열 가지를 비난합니다. 이제 아홉 가지가 억울하다고 변명을 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다 보면 마침내 한 가지 잘못도 잘 했다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친 굴욕을 당할 때나 욕망이 많고 욕심이 지나칠 때 나의 나됨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꿈이 많은 사람은 거짓말을 잘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에 이루고 싶은 것을 미리 꿈꾸고 벌써 다 이룬 것처럼 거드름을 핍니다. 출세하기도 전에 출세할 것을 미리 바라보고 으시댑니다. 힘든 가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지나치게 칭찬과 존경을 받을 때에 그 때에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처음 칭찬 받을 때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꾸 칭찬받고 계속 존경받다 보면 그것이 정말 자기인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인 척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위험합니다. 내 현주소를 잃었으니까요.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 함정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에게 돈을 쥐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나치게 칭찬을 했을 경우, 그가 교만해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볼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평가입니다.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자기 상실은 없습니다.
시험도 이 길로 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패했고 굴욕 당할 때만 시험이라 생각합니다. 진짜 시험은 성공입니다. 존경과 칭찬이 시험입니다. 실패해서 교회에 나와 울며 기도하고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고 칭찬 받고 동경 받고 할 때에 이 때가 위험하다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축하 파티로서 족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고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굴욕을 당하고 병들고 실패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세하고 존경받을 때에 자칫하면 위선자가 되고 자아를 상실하는 결과가 온다는 말입니다. 성공이 때로는 무서운 함정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가난을 이기는 힘은 있습니다. 그러나 분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돈푼이나 생기면 아주 몹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굴욕을 당할 때는 그런대로 참고 넘기는데 칭찬을 들을 때면 그만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어디에나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즉,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해도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귀함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함에도 처할 줄 알았습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욕을 먹어도 비굴하지 않고 칭찬을 받아도 교만하지 않는, 도가 통한 신앙이었습니다. 달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역시 위대한 신앙가요, 신앙적인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지금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는 본래 앞서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도 언제나 선뜻 먼저 대답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첫째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제자들처럼 출세욕도 있었고 정치적 욕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명예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정치적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소원 성취를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고넬료는 로마 군인 백부장이라고 하는 장교입니다. 그는 지금 식민지에 와서 점령지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 장교입니다. 훈장을 즐비하게 달고 있는 기세가 높은 군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불고기를 잡는 어부로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고넬료는 그와 일가 친척과 함께 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절을 했다고 우리 성경에는 표현하고 있지만 원문대로 보면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배를 땅에 깔로 손을 쭉 펴서 입을 땅에 대면서 하는 절입니다. 최고의 경례입니다. 이 때에 본래 가졌던 베드로의 성격으로 본다면 아주 출세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시간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에야 소원 성취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큰 기침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급히 내려가서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합니다. 이 높은 존경을 받는 순간 그는 자기 됨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옛날에 그는 분명히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 예수께서 그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또한 천국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놀라운 칭찬을 하실 때에 베드로는 으쓱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시험에 빠져서 예수께서 십자가 지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사탄이 됩니다. 칭찬듣는 순간에 자기 페이스를 잃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내일 아침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라." 즉, 근신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도 보통 인간이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는데 그는 깨어 기도하지 않더니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있게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을지언정 예수를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자기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특별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지난날의 뼈아픈 기억을 지금 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합니다. 초인간도 아니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자기 됨의 현주소였습니다.
같은 사람임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잠언 18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할 때 사람은 끝나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드는 겸손의 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하려면 첫째는 자기 죄를 알고 비천에 거하라. 둘째는 자기 죄를 통회하고 사실대로 고백하라. 셋째는 남이 내 결점을 알고 업신여길 때에는 달게 받아드리라. 넷째는 모욕을 당할 때에 참는 것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드리라. 다섯째는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라.
여러분, 참으로 진실한 사람은 변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변명이 많습니까? 말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를 알고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웬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조용하게 나를 살펴봅시다. 내 인간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어느 청년이 목사님께 울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머리가 좋은 편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거든 자네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비천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시오.
그러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베드로는 오늘 자기 인간 됨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내가 있고 성령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는 경건을 찾았습니다. 기도하므로 비로소 내가 나 될 수 있고, 오직 은혜 안에서 자신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나를 봅시다. 신앙적인 겸손이 있습니까? 신앙적 겸손에 인간 됨의 현주소가 있고 낮고 천한 바로 그곳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끓을 때 놀라운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 평화와 그 영광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오직 은혜로 살면서도 내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며 평생 믿을 것이 못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을 믿고 교만한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나의 나 됨에 진실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겸손하게 하시고, 십자가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인간 됨의 현주소 (행 10:23~33)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 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시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을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리는 대체로 인간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생리학적 인간입니다. 인간은 우선 육체를 가졌고 이 육체에 따른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결코 정죄해도 안되고 속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육체의 건강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여지기에 꼭 필요한 것이므로 더욱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이성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느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값이 평가됩니다. 아무리 건강한 육체라 해도 그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세기에서는 이성이 없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이성이 밝고 또 많이 발달한 사람을 가리켜 철학자라 했고, 때로는 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다 더 인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이상 세 가지 차원이 동시에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되었고 또 그렇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인간화되는 점을 막아야 합니다. 즉, 인간이 인간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물질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소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행복과 소유는 같지 않습니다.
가난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부하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 쥐었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원한다고 다 가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다 사용하지도 못하는 극히 제한적인 인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물질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동물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동물화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먹고 싶다고 무엇이든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자고, 가고 싶다고 다 가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은 이성으로 양심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본능을 다스릴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비신격화입니다. 결코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이 있고 또 역사 속에서도 우상을 봅니다. 우상이 생기게 된 근본적인 유래를 사회학자들이 조사해 보니 인간이 인간 이상의 대접을 받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죄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 신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화의 역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이면서도 물질이 되지 말아야 하고, 동물이면서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인간은 신성을 지녔지만 결코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 됨의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진실과 겸손은 하나입니다. 가끔 우리는 진실과 겸손이 별개의 것인냥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선이 되고 맙니다.
겸손은 진실에 근거하고 진실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과 겸손은 한 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실, 진실에 근거한 겸손, 바로 거기에 인간의 인간 됨에 현주소가 있습니다.
흔히 운동경기장에서 페이스라는 용어를 씁니다. 분수라는 뜻으로서 사람이 뛰는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페이스를 지키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꼭 지켜야하는 것이 자기 페이스입니다. 운동 해설가들은 해설할 때에 선수들이 자기 페이스를 잃었다 혹은 찾았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는 바로 자기 페이스에 있습니다. 자기 이상도 자기 이하도 아닙니다. 힘도 자기 페이스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제어하고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도 바로 자기 위치를 알고 설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알고 다스리는 지혜입니다. 흔히 죄라는 말을 합니다만 죄란 못하는 것을 못했을 때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됨을 상실하여 할 수 있는 일을 못했을 때 죄가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성공도 놓여야 할 자리에 놓이므로 성공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놓일 자리에 놓일 때에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 심리에 대해서 참 자아(True ego)와 초자아(Super ego)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자아 사이에 간격이 멀면 멀수록 고민이 많다는 것입니다. 진짜「내」가 있고 또한 내가 바라며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또 하나의「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내가 간격이 멀면 멀수록 허황된 사람이 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나를 지켜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에게 진실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14살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나의 생활의 최우선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단할 때에 가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눈을 뜨니 새벽 5시였습니다. 예배 시작 시간이 5시인데 이제 일어났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였습니다. 만약 제가 안 나가면 부목사님이 대신 인도 할 것이고 몸이 좀 불편한가보다 라고 생각들을 하겠지요. 그리고 하루에 몇 번의 전화가 오겠지요. 그 때마다 저는 궁색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이라도 나가면 어떻겠습니까? 목사님 늦잠 자다가 늦었겠구나 그럴테지요. 잠깐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습니다. 사찰 집사님께 전화를 걸어 "지금 나갈터이니 찬송가 두 장만 부르시오"하고 부지런히 나갔습니다. 한 10분 늦었지요. 다 아는 일이니 가서 변명할 것도 없었습니다. 잠깐 괴로웠는데 예배를 보고나니 어떻게나 마음이 편한지 몰랐습니다. 약 한 달 동안이나 기뻤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의 현주소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말입니다. 진실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위에 진실은 세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어느 때에 자기 상실이 있습니까? 첫째, 지나친 굴욕을 당할 때에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나는 사실 한 가지를 잘못했는데 저쪽에서 열 가지를 비난합니다. 이제 아홉 가지가 억울하다고 변명을 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다 보면 마침내 한 가지 잘못도 잘 했다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친 굴욕을 당할 때나 욕망이 많고 욕심이 지나칠 때 나의 나됨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꿈이 많은 사람은 거짓말을 잘 합니다. 10년 후, 20년 후에 이루고 싶은 것을 미리 꿈꾸고 벌써 다 이룬 것처럼 거드름을 핍니다. 출세하기도 전에 출세할 것을 미리 바라보고 으시댑니다. 힘든 가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지나치게 칭찬과 존경을 받을 때에 그 때에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처음 칭찬 받을 때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꾸 칭찬받고 계속 존경받다 보면 그것이 정말 자기인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인 척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위험합니다. 내 현주소를 잃었으니까요.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 함정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에게 돈을 쥐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나치게 칭찬을 했을 경우, 그가 교만해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볼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평가입니다.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자기 상실은 없습니다.
시험도 이 길로 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패했고 굴욕 당할 때만 시험이라 생각합니다. 진짜 시험은 성공입니다. 존경과 칭찬이 시험입니다. 실패해서 교회에 나와 울며 기도하고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고 칭찬 받고 동경 받고 할 때에 이 때가 위험하다고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축하 파티로서 족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고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굴욕을 당하고 병들고 실패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세하고 존경받을 때에 자칫하면 위선자가 되고 자아를 상실하는 결과가 온다는 말입니다. 성공이 때로는 무서운 함정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가난을 이기는 힘은 있습니다. 그러나 분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돈푼이나 생기면 아주 몹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굴욕을 당할 때는 그런대로 참고 넘기는데 칭찬을 들을 때면 그만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어디에나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즉,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해도 믿음으로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귀함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함에도 처할 줄 알았습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욕을 먹어도 비굴하지 않고 칭찬을 받아도 교만하지 않는, 도가 통한 신앙이었습니다. 달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역시 위대한 신앙가요, 신앙적인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지금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는 본래 앞서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도 언제나 선뜻 먼저 대답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첫째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제자들처럼 출세욕도 있었고 정치적 욕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명예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정치적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소원 성취를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고넬료는 로마 군인 백부장이라고 하는 장교입니다. 그는 지금 식민지에 와서 점령지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 장교입니다. 훈장을 즐비하게 달고 있는 기세가 높은 군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불고기를 잡는 어부로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고넬료는 그와 일가 친척과 함께 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절을 했다고 우리 성경에는 표현하고 있지만 원문대로 보면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배를 땅에 깔로 손을 쭉 펴서 입을 땅에 대면서 하는 절입니다. 최고의 경례입니다. 이 때에 본래 가졌던 베드로의 성격으로 본다면 아주 출세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시간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에야 소원 성취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큰 기침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급히 내려가서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합니다. 이 높은 존경을 받는 순간 그는 자기 됨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옛날에 그는 분명히 실수한 적이 있습니다.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 예수께서 그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또한 천국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놀라운 칭찬을 하실 때에 베드로는 으쓱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시험에 빠져서 예수께서 십자가 지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사탄이 됩니다. 칭찬듣는 순간에 자기 페이스를 잃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내일 아침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라." 즉, 근신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도 보통 인간이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는데 그는 깨어 기도하지 않더니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있게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을지언정 예수를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자기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특별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지난날의 뼈아픈 기억을 지금 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니 이러지 말라고 합니다. 초인간도 아니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자기 됨의 현주소였습니다.
같은 사람임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잠언 18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할 때 사람은 끝나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드는 겸손의 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하려면 첫째는 자기 죄를 알고 비천에 거하라. 둘째는 자기 죄를 통회하고 사실대로 고백하라. 셋째는 남이 내 결점을 알고 업신여길 때에는 달게 받아드리라. 넷째는 모욕을 당할 때에 참는 것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드리라. 다섯째는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라.
여러분, 참으로 진실한 사람은 변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변명이 많습니까? 말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를 알고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 웬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조용하게 나를 살펴봅시다. 내 인간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어느 청년이 목사님께 울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머리가 좋은 편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거든 자네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비천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시오.
그러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베드로는 오늘 자기 인간 됨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내가 있고 성령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는 경건을 찾았습니다. 기도하므로 비로소 내가 나 될 수 있고, 오직 은혜 안에서 자신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나를 봅시다. 신앙적인 겸손이 있습니까? 신앙적 겸손에 인간 됨의 현주소가 있고 낮고 천한 바로 그곳에 나의 나 됨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끓을 때 놀라운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 평화와 그 영광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오직 은혜로 살면서도 내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며 평생 믿을 것이 못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을 믿고 교만한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나의 나 됨에 진실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겸손하게 하시고, 십자가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의 얼굴(사도행전 7 : 54~60) (0) | 2024.08.17 |
---|---|
내 인생의 현주소(창세기 3 : 1~10) (0) | 2024.08.17 |
은혜의 승리 (롬 5:17~21) (0) | 2024.08.17 |
선택과 운명(창 13:6~13) (0) | 2024.08.17 |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24) (0) | 2024.08.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