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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다윗의 참회록(시 51:1~18)

by 【고동엽】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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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참회록(시 51:1~18)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이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죄란 언제나 세 가지 차원의 깊이를 더하면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를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죄를 반복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어떻게 해서든지 정당화해 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죄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르고 짓는 죄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는 알고 짓습니다. 그 다음에는 변명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죄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시작인 에덴 동산으로부터 지금까지 죄 없는 사뢰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는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근래에 와서만 죄가 만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죄로 인해 마치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보더라도 죄가 없었던 시기는 없습니다. 살인 죄, 간음 죄, 거짓 증거, 권모 술수 등 모든 죄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로마의 원형 극장이 이것을 말해 주고, 노예 매매가 그러했고, 갖가지 우상 숭배가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없는 죄들이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왔었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죄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같은 죄지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 현대인의 죄의 특징은 대개가 알고 짓는 죄입니다. 정말 많이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남을 충고할 때 보면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도 왜 그렇게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는 바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죄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알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둘째는 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어떤 이유로든지 정당화시키며 변명을 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인간인 고로"하는 문자들을 쓰면서 변명을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비슷한 내용 같습니다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를 전부 개인의 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악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라고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악이 있습니다. 사회악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회악을 내세움으로 개인의 악을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회악을 많이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회에 전가하고, 부모에게 전가하고, 이웃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는 빠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의해서 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필요악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합니다. 필요악이란 말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람인 내가 필요악을 말한다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언제나 죄는 죄입니다. 필요악을 운운하면서 당당하게 죄를 합리화해 버리는 것이 현대인들의 죄입니다. 또 위선적으로 위장적인 죄를 짓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회나, 어느 개인이든 간에 망했다면 그것은 죄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봅시다. 죄로 인해 모두가 멸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이제 죄로 인하여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째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 회개는 감상이나 후회나 뉘우침의 눈물 같은 후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결단이며 행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 왕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죄인의 대표자이며 회개한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의 이름이 구약성경에서만도 80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인물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다윗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곳곳에 내 종 다윗에게 복을 준 것처럼 내가 네게 복을 주노라고, 다윗이 복 받은 자의 대표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회개한 죄인이었습니다. 아니 회개로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시편 가운데 다윗의 저서가 태반입니다만 특별히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이 7편을 가르켜서 흔히들 다윗의 참회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눈물겨운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1편은 그 중에 대표적인 참회록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회개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회개는 곧 진실이었습니다. 참된 의미의 진실이었습니다. 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과,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은 다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true와 real의 차이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 그것이 곧 회개였습니다. 가장 큰 진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회개는 또 하나의 위선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죄를 짓는 나와, 의를 행하는 나중에 어느 쪽이 참된 나입니까? 의로운 내가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본래적인 죄인입니까? 다윗은 여기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는 참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을 알았고 또 인정을 했습니다. 나의 나됨의 존재가 곧 죄인이라고 하는 이 귀중한 사실을 그는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요, 회개의 정체였습니다. 본문 4절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딜 가나, 무엇을 생각하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내 앞에 죄가 있다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하고 있습니다. "아, 내가 누구, 어떤 놈이로이까? 내 한 일에 죄 아닌 것이 무엇이며, 일 아니면 내 말들, 아니 말이 아니었으면 내 마음속에 죄아닌 것이 무엇이더이까?" 그의 진실한 회개입니다. 죄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선을 생각하고, 때로는 대단한 것을 생각한 것 같은데 그 속에도 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고 즉, 내가 의를 생각하는 바로 그 곳에 죄가 함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만삭되어나지 못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날 때부터 죄인이란 말입니다. 자신이 본래적인 죄인임을 시인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존재가 무엇입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의인인 내가 지금 실수를 하고 있습니까?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말합니다.(51:5) 그러므로 내 죄는 본질적이요, 본래적이며, 근본적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지은 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과하고 회개한다고 하면서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깜박 실수를 해서 죄를 지었노라고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이런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회개입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회개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유부녀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를 지어놓고도 내가 실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본래부터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인데, 이제 사건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기회만 있었다면 몇 번이라도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신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 중에 잉태하였다고 자기를 조금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많은 참회록 가운데나, 시편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전설에 의하면 밧세바가 요망한 여자였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절을 지켰다면 다윗은 이 같은 죄인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서는 밧세바가 나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적으로 이것은 내 죄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타락케 했고, 나 때문에 이 나라에 비가 오지 않으며, 나 때문에 이 나라가 전쟁에 패했다고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추호라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다고 본래적인 죄인됨을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겸손과 용기였습니다. 다윗의 죄는 나단 선지자만 알고 있었기에 그 선지자만 없으면 죄가 은폐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지자가 이 죄를 책망할 때 그대로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합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무릅쓰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힘듭니다. 특히 존경받는 사람이나, 지체 높은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힘듭니다. 어느 재벌가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님, 저는 죄가 많아서 예수 믿기 힙듭니다."라고 계면쩍어했습니다. 이유인즉 여자와 아들․딸이 수없이 많답니다. 회개는 왕복 거리가 필요합니다. 멀리 갔으면 그만큼 돌아올 왕복 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깊이 빠졌으면 그만큼 올라오기가 힘듭니다. 회개에는 비상한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쉽게 한마디로 되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회개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이 회개가 모든 과거와 명예와 체통이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로 인하여 무너지는 인격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이것을 만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시인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결코 저주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저주하는 그런 소극적인 의미나 부정적인 의미의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회개하고 나서, 망신하고 부끄러움에 다시는 왕으로 있을 수가 없어 모든 것 다 정리하고 옛날 목장으로 되돌아 갈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도피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도망가며 왕관을 버렸다면 이것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로 사는 자기를 발견하고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다시 세워져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왕의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회개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굴욕과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기에 떳떳하게 왕의 보좌를 지켜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전개되는 사건의 전부를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들 압살놈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 왕을 죽이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요, 충신이 배신을 해도 하나님의 일이요, 시므이 같은 사람이 저주를 해도 하나님이 하라 하셨기에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가뭄이 들든, 전쟁이 일어나든 전개되는 모든 환경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직 회개의 심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편 가운데는 수없이 같은 말이 나옵니다. "주의 의는, 주의 판단은 의로우심이라." 끝까지 겸손했고 끝까지 겸손의 용기로 그 앞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의 회개는 곧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51:4)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아닙니다. 나는 주께 범죄했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은총을 믿고 오직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회개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기에 "주야로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하며 고백하고 침상이 썩도록 회개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본문 말씀과 같이 "주께서 꺾으신 뼈로 하여금 이제 사죄의 은총을 입어 기뻐하게 하소서."(시 51:8) 즉, 죄로 인하여 꺾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하여금 이제 사죄의 은총을 입어 기뻐하게 하소서 하며 주님만이 사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회개와 사죄 그것은 진실에 있습니다. 옛날의 다윗 왕과 회개한 지금의 다윗 왕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존재로 살아갑니다. 주님만이 나를 사하시고 이제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살며 십자가 앞에서 죽고 그 앞에서 다시 삽니다. 회개한 그 현장 그 자리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참 된 사죄의 기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겸손입니다. 회개의 윤리는 용서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새로운 용기를 줍니다. 용기 있는 회개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은혜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죄악 중에 살지만 죄를 깨닫지 못하며, 회개하나 진실하지 못하고, 모처럼 진실을 찾으려고 하여도 위선에 빠지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회개가 없기에 사죄의 은총을 모르고 진실이 없기에 용기가 없는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들의 생을 굽어보시고 오늘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 하옵나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회개의 진실을 주시고, 또 진실에 용기를 더하사 참 회개와 그 회개로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직 회개와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과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윗의 참회록(시 51:1~18)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이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죄란 언제나 세 가지 차원의 깊이를 더하면서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를 짓는 죄가 있고, 둘째는 죄를 반복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아니라고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어떻게 해서든지 정당화해 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죄가 점점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르고 짓는 죄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는 알고 짓습니다. 그 다음에는 변명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죄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시작인 에덴 동산으로부터 지금까지 죄 없는 사뢰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는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 근래에 와서만 죄가 만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죄로 인해 마치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보더라도 죄가 없었던 시기는 없습니다. 살인 죄, 간음 죄, 거짓 증거, 권모 술수 등 모든 죄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로마의 원형 극장이 이것을 말해 주고, 노예 매매가 그러했고, 갖가지 우상 숭배가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없는 죄들이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왔었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죄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같은 죄지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 현대인의 죄의 특징은 대개가 알고 짓는 죄입니다. 정말 많이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남을 충고할 때 보면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도 왜 그렇게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는 바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의 죄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알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둘째는 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어떤 이유로든지 정당화시키며 변명을 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인간인 고로"하는 문자들을 쓰면서 변명을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비슷한 내용 같습니다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죄를 전부 개인의 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악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라고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악이 있습니다. 사회악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회악을 내세움으로 개인의 악을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회악을 많이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회에 전가하고, 부모에게 전가하고, 이웃에게 전가하면서 자기는 빠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의해서 죄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필요악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합니다. 필요악이란 말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사람인 내가 필요악을 말한다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언제나 죄는 죄입니다. 필요악을 운운하면서 당당하게 죄를 합리화해 버리는 것이 현대인들의 죄입니다. 또 위선적으로 위장적인 죄를 짓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회나, 어느 개인이든 간에 망했다면 그것은 죄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봅시다. 죄로 인해 모두가 멸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이제 죄로 인하여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째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 회개는 감상이나 후회나 뉘우침의 눈물 같은 후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결단이며 행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 왕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죄인의 대표자이며 회개한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의 이름이 구약성경에서만도 80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인물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다윗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곳곳에 내 종 다윗에게 복을 준 것처럼 내가 네게 복을 주노라고, 다윗이 복 받은 자의 대표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인이 아닙니다. 그는 회개한 죄인이었습니다. 아니 회개로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시편 가운데 다윗의 저서가 태반입니다만 특별히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이 7편을 가르켜서 흔히들 다윗의 참회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눈물겨운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1편은 그 중에 대표적인 참회록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회개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다윗의 회개는 곧 진실이었습니다. 참된 의미의 진실이었습니다. 참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과,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은 다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true와 real의 차이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진실 그것이 곧 회개였습니다. 가장 큰 진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회개는 또 하나의 위선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죄를 짓는 나와, 의를 행하는 나중에 어느 쪽이 참된 나입니까? 의로운 내가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본래적인 죄인입니까? 다윗은 여기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는 참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을 알았고 또 인정을 했습니다. 나의 나됨의 존재가 곧 죄인이라고 하는 이 귀중한 사실을 그는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요, 회개의 정체였습니다. 본문 4절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딜 가나, 무엇을 생각하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내 앞에 죄가 있다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하고 있습니다. "아, 내가 누구, 어떤 놈이로이까? 내 한 일에 죄 아닌 것이 무엇이며, 일 아니면 내 말들, 아니 말이 아니었으면 내 마음속에 죄아닌 것이 무엇이더이까?" 그의 진실한 회개입니다. 죄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선을 생각하고, 때로는 대단한 것을 생각한 것 같은데 그 속에도 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고 즉, 내가 의를 생각하는 바로 그 곳에 죄가 함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만삭되어나지 못한 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날 때부터 죄인이란 말입니다. 자신이 본래적인 죄인임을 시인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존재가 무엇입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의인인 내가 지금 실수를 하고 있습니까?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말합니다.(51:5) 그러므로 내 죄는 본질적이요, 본래적이며, 근본적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 지은 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과하고 회개한다고 하면서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깜박 실수를 해서 죄를 지었노라고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이런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회개입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회개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유부녀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를 지어놓고도 내가 실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본래부터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인데, 이제 사건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기회만 있었다면 몇 번이라도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신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 중에 잉태하였다고 자기를 조금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많은 참회록 가운데나, 시편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밧세바를 원망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전설에 의하면 밧세바가 요망한 여자였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절을 지켰다면 다윗은 이 같은 죄인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다윗 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서는 밧세바가 나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적으로 이것은 내 죄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타락케 했고, 나 때문에 이 나라에 비가 오지 않으며, 나 때문에 이 나라가 전쟁에 패했다고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추호라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다고 본래적인 죄인됨을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겸손과 용기였습니다. 다윗의 죄는 나단 선지자만 알고 있었기에 그 선지자만 없으면 죄가 은폐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지자가 이 죄를 책망할 때 그대로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합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무릅쓰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힘듭니다. 특히 존경받는 사람이나, 지체 높은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힘듭니다. 어느 재벌가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님, 저는 죄가 많아서 예수 믿기 힙듭니다."라고 계면쩍어했습니다. 이유인즉 여자와 아들․딸이 수없이 많답니다. 회개는 왕복 거리가 필요합니다. 멀리 갔으면 그만큼 돌아올 왕복 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깊이 빠졌으면 그만큼 올라오기가 힘듭니다. 회개에는 비상한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쉽게 한마디로 되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회개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이 회개가 모든 과거와 명예와 체통이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로 인하여 무너지는 인격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이것을 만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시인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결코 저주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저주하는 그런 소극적인 의미나 부정적인 의미의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회개하고 나서, 망신하고 부끄러움에 다시는 왕으로 있을 수가 없어 모든 것 다 정리하고 옛날 목장으로 되돌아 갈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도피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도망가며 왕관을 버렸다면 이것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 의로 사는 자기를 발견하고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다시 세워져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왕의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회개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굴욕과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기에 떳떳하게 왕의 보좌를 지켜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전개되는 사건의 전부를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들 압살놈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윗 왕을 죽이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요, 충신이 배신을 해도 하나님의 일이요, 시므이 같은 사람이 저주를 해도 하나님이 하라 하셨기에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가뭄이 들든, 전쟁이 일어나든 전개되는 모든 환경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직 회개의 심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편 가운데는 수없이 같은 말이 나옵니다. "주의 의는, 주의 판단은 의로우심이라." 끝까지 겸손했고 끝까지 겸손의 용기로 그 앞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의 회개는 곧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51:4)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아닙니다. 나는 주께 범죄했고,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은총을 믿고 오직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회개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기에 "주야로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하며 고백하고 침상이 썩도록 회개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본문 말씀과 같이 "주께서 꺾으신 뼈로 하여금 이제 사죄의 은총을 입어 기뻐하게 하소서."(시 51:8) 즉, 죄로 인하여 꺾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하여금 이제 사죄의 은총을 입어 기뻐하게 하소서 하며 주님만이 사하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회개와 사죄 그것은 진실에 있습니다. 옛날의 다윗 왕과 회개한 지금의 다윗 왕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존재로 살아갑니다. 주님만이 나를 사하시고 이제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살며 십자가 앞에서 죽고 그 앞에서 다시 삽니다. 회개한 그 현장 그 자리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참 된 사죄의 기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겸손입니다. 회개의 윤리는 용서입니다. 겸손한 믿음이 새로운 용기를 줍니다. 용기 있는 회개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은혜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죄악 중에 살지만 죄를 깨닫지 못하며, 회개하나 진실하지 못하고, 모처럼 진실을 찾으려고 하여도 위선에 빠지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회개가 없기에 사죄의 은총을 모르고 진실이 없기에 용기가 없는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들의 생을 굽어보시고 오늘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 하옵나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회개의 진실을 주시고, 또 진실에 용기를 더하사 참 회개와 그 회개로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직 회개와 오직 은혜와 오직 긍휼과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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