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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약속 있는 첫 계명 (엡 6:1~4)

by 【고동엽】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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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있는 첫 계명 (엡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함정을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든다면, 하나는 동물화 되는 길이요, 또 하나는 물질화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함정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말한다면 우선 사랑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동물에게도 사랑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차이를 바로 깨닫고 바로 지켜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모성애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이성애가 있고 동족애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동물 중에 모성애가 가장 강한 동물은 곰이라고 합니다. 또 벌의 종류는 동족애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진화론자들이나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헉스레이 같은 진화론자는 사랑도 종족번식의 발로라고 형편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결코 동물적인 사랑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고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동물은 자기 새끼를 어릴 때에만 사랑합니다.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지극합니다. 음식을 먹일 때에도 자기가 먹었던 것을 다시 토해서까지 먹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지만 일단 크면 멀리합니다. 새끼들도 역시 어미를 잘 따르다가 크면 어미를 몰라봅니다. 전혀 관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어미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새끼들을 키웠습니다만 늙은 짐승을 봉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까? 늙은 짐승을 내버립니다. 돌아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어미들을 돌보지 않는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야말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 받는 것이 인간의 세계입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모자라는 인간은 동물과 같이 자식이 어릴 때만 사랑합니다. 어느 정도 장성하면 서로 미워하고 싸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동물적인 수준에 머문 인간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욕정이며, 동물적인 욕망의 발로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네 부모를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옳다는 말의 의미가 원어의 뜻으로는 선이 아니고 의라는 뜻입니다. 효는 선이나 공로가 아니며 덕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일을 굉장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효는 평균 수준이요, 수평 수준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를 계명으로 가르칩니다.

십계명에서 인간에 관한 계명 중에 첫 계명이 "내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뜻과 섭리와 깊은 마음의 계시입니다.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원하시고, 이렇게 하도록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효도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대로 바로 명령입니다.

계명에는 납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일단 순종하고 봐야 합니다. 순종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고 순종할 것입니다.

언젠가 비디오 테이프에 수록된 성경 이야기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서 퍽 재미있게 엮어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앞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마엘아, 내가 너 사랑하는 줄 알지?"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네,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좋아, 그러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지 이것은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느냐?"

"네, 믿습니다."

"그러면 집을 나가라."

그래서 이스마엘을 내 보냅니다. 또 이삭에게도 같은 말을 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사 드리기 전에,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알지?"

"네 압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지?"

"네, 압니다."

"그러면, 여기 누워라. 내가 너를 죽여 하나님께 바쳐야겠다." 이것이 계명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고 반문하신 주님의 말씀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율법이나 안식일이나 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라고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해 하고 왜 이렇게 힘들어합니까? 다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이것도 저것도 명령하시고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납득이 되면 순종하고 납득이 안 되면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계명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요, 명령이요, 계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고서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를 가르쳐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부모를 저버리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나 행․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효에 대한 비중은 이러합니다. 효는 십계명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의 중간에 있습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면, 효의 계명이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 제일 첫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계명들의 순서가 죄가 무거운 것부터 차례차례로 나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간음하지 말라보다 죄가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 살인죄보다 더 먼저 있는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살인죄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효하는 것이 이렇게 큰 죄이기에 이것을 범하였을 때 그 형벌 또한 막중합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즉, 부모에게 손대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사회학적인 이유에 의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에 "부모를 향하여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살인행위이므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9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 중에서도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하에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얼마나 엄하게 말씀하셨습니까? 그 죄가 크기에 그 형벌 또한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에는 순종해야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순종이 먼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떠나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 떠나야만 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동족을 구하러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순종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의 공경이란 무슨 뜻입니까?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 들이며 소화하고 있습니까? 헬라 원문에서 티마(TIMa)라고 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질적으로 높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세 종류로 나누어 보면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나와 같은 자를 대등하게 사랑하는 친애하는 사랑과, 그리고 나보다 높은 이에 대하여 우러러 존경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공경이란 존경에 속한 것입니다. 우러러보며, 마음으로 높이며, 마음으로 존경하는 높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늙은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용돈이나 드리고 효도관광이나 보내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신 자세가 틀렸습니다. 정말 효도하시는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돈을 버는 대로 많은 용돈을 어머님께 드리고서 매일 아침마다 자기가 쓸 용돈을 어머님으로부터 타서 쓴다는 것입니다."어머님, 오늘 제가 누구하고 점심 약속을 했으니 얼마쯤 필요한데요." 하면서 그날 그날의 일과도 말씀드릴 겸 용돈을 탄다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아들에게서 받은 돈을 다 내어 주십니다. 어머님들은 원래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체질입니다. 행복이 바로 여기 있는데 불쌍히 여기며 그저 몇푼 거지처럼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머니는 다 내어 주고도 기뻐하시는데 그 기쁨을 어머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쓰는 단위는 만 원이고 부모에게 쓰는 단위는 천 원입니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는 수십만 원의 돈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부모에게는 높이고, 우러러보며, 존경을 겸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옳음을 인정하고 더 큼을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 우러러 사랑하는 마음이 공경입니다. 그 분의 지혜를 높이고, 그 분의 명예를 인정하고, 그 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그 분의 인격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장점만 보고, 훌륭한 점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훼방하는 것은 큰 죄라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부모의 명예 훼손, 훼방하는 것, 업신여기는 것, 등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잠언 1장에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어머니의 말씀을 마치 금사슬처럼 면류관처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효도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노망처럼 생각하는 자에게 무슨 효도를 이야기하겠습니까? 부모님을 높이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의 자녀됨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요새는 좀 망칙한 자녀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단점만 보면서 저런 나쁜 피가 내게도 흐른다고 그의 자식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불효한 자식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자녀됨을 자랑스럽게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저의 어머님을 한번 기억해 봅니다.

어머님은 늘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손톱을 깎으실 때 한 번도 손톱 가운데를 잘라보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다 닳아 없어져서 양쪽 귀퉁이만 조금씩 다듬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자들이 손톱에 칠하는 것이 좋게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국민학교도 못 다닌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시며 흘린 아름다운 피땀을 우리는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님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그 부모의 자녀됨을 부끄럽게 여겨서야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홀로 시골에서 땅마지기를 팔아 대며 아들을 서울로 보내 대학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보기 위해 상경해서 하숙집을 찾지 못하고 학교 교문 앞에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에 멀리서 나오는 아들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야, 아무개야! 하고 달려갔답니다. 그 때 애인하고 같이 나오던 아들은 그 어머니를 자기 집 식모라고 애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효도를 이야기해야 합니까?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저렇게 고생하신 훌륭하신 분이라고 왜 자랑할 수 없습니까? 그 말 한 마디에 어머님의 모든 노고는 다 풀어질 것인데 왜 못하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망언을 듣고 돌아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며 한참 고생하실 때에 정말 끼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셔서 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 다가 씻어서 국을 끓이곤 했습니다. 김 구 선생님은 너무 민망해서 "어머니,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하고 만류했더니 어머님은 당장 몽둥이를 들고 김 구 선생의 종아리를 쳤습니다. 매를 맞는 김 구 선생님은 자꾸 우십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님이 작년에 때리실 때 보다 힘이 많이 약해져서 어머님이 늙으신 것이 안타까워 운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아무 기대가 없습니다. 효도 또한 아무 바램이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에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질투가 있습니다. 남편을 칭찬하면 아내가 질투하고,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질투합니다. 질투는 사랑의 타락입니다. 질투 없는 사랑, 오직 하나, 부모와 자식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칭찬하면 부모들은 무한히 기뻐하십니다. 효도하는 자녀들은 부모가 자랑스럽습니다. 왜 입니까? 바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받은 마음으로, 이미 받은 것만 가지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효의 마음입니다.

효도하는 마음은 자기 사랑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을 알기에 내가 건강해야 하고 어머니의 소원을 알기에 죄를 짓지 말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개 아들이라고 어머니의 이름을 높일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효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효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고 효도해야 할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친 바 되었다 하면서 안 바쳤다는 말입니다. 효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위선자일 뿐더러 하나時님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효는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어떤 이유로도 핑계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불효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입니다. 불효한 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내가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효자가 출세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불효하면서 오래 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오래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효가 우선 입니다. 효도하고야 장수하고, 효도하고야 잘 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죽이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래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장수하고, 그리하면 형통하리로다." 약속 있는 첫 계명 바로 이 계명을 지켜 가는 중에 이 안에서 약속의 축복을 함께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귀한 가정을 주셨지만 잘 지키지 못하고 귀한 부모님을 주셨지만 효도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더 이상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입장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이제부터라도 참으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여 그 약속 그 귀한 축복을 함께 나누도록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약속 있는 첫 계명 (엡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함정을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든다면, 하나는 동물화 되는 길이요, 또 하나는 물질화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함정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말한다면 우선 사랑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동물에게도 사랑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차이를 바로 깨닫고 바로 지켜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모성애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이성애가 있고 동족애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동물 중에 모성애가 가장 강한 동물은 곰이라고 합니다. 또 벌의 종류는 동족애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해야 합니까? 진화론자들이나 유물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헉스레이 같은 진화론자는 사랑도 종족번식의 발로라고 형편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결코 동물적인 사랑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고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동물은 자기 새끼를 어릴 때에만 사랑합니다. 어미가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지극합니다. 음식을 먹일 때에도 자기가 먹었던 것을 다시 토해서까지 먹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지만 일단 크면 멀리합니다. 새끼들도 역시 어미를 잘 따르다가 크면 어미를 몰라봅니다. 전혀 관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어미들이 그렇게 애를 써서 새끼들을 키웠습니다만 늙은 짐승을 봉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까? 늙은 짐승을 내버립니다. 돌아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어미들을 돌보지 않는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야말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 받는 것이 인간의 세계입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모자라는 인간은 동물과 같이 자식이 어릴 때만 사랑합니다. 어느 정도 장성하면 서로 미워하고 싸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동물적인 수준에 머문 인간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욕정이며, 동물적인 욕망의 발로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네 부모를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옳다는 말의 의미가 원어의 뜻으로는 선이 아니고 의라는 뜻입니다. 효는 선이나 공로가 아니며 덕도 아닙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일을 굉장한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효는 평균 수준이요, 수평 수준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를 계명으로 가르칩니다.

십계명에서 인간에 관한 계명 중에 첫 계명이 "내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뜻과 섭리와 깊은 마음의 계시입니다.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원하시고, 이렇게 하도록 섭리하시고, 인도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효도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대로 바로 명령입니다.

계명에는 납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일단 순종하고 봐야 합니다. 순종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고 순종할 것입니다.

언젠가 비디오 테이프에 수록된 성경 이야기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서 퍽 재미있게 엮어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앞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마엘아, 내가 너 사랑하는 줄 알지?"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네,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좋아, 그러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지 이것은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느냐?"

"네, 믿습니다."

"그러면 집을 나가라."

그래서 이스마엘을 내 보냅니다. 또 이삭에게도 같은 말을 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사 드리기 전에,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알지?"

"네 압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지?"

"네, 압니다."

"그러면, 여기 누워라. 내가 너를 죽여 하나님께 바쳐야겠다." 이것이 계명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하여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고 반문하신 주님의 말씀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율법이나 안식일이나 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라고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해 하고 왜 이렇게 힘들어합니까? 다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이것도 저것도 명령하시고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납득이 되면 순종하고 납득이 안 되면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계명에 대한 자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엄한 말씀이요, 명령이요, 계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고서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를 가르쳐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부모를 저버리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문제나 행․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효에 대한 비중은 이러합니다. 효는 십계명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의 중간에 있습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면, 효의 계명이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 제일 첫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계명들의 순서가 죄가 무거운 것부터 차례차례로 나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간음하지 말라보다 죄가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 살인죄보다 더 먼저 있는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살인죄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효하는 것이 이렇게 큰 죄이기에 이것을 범하였을 때 그 형벌 또한 막중합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즉, 부모에게 손대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사회학적인 이유에 의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에 "부모를 향하여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명예에 대한 살인행위이므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9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 중에서도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하에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얼마나 엄하게 말씀하셨습니까? 그 죄가 크기에 그 형벌 또한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에는 순종해야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순종이 먼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떠나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 떠나야만 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동족을 구하러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순종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의 공경이란 무슨 뜻입니까?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어떻게 받아 들이며 소화하고 있습니까? 헬라 원문에서 티마(TIMa)라고 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질적으로 높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세 종류로 나누어 보면 나보다 못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과, 나와 같은 자를 대등하게 사랑하는 친애하는 사랑과, 그리고 나보다 높은 이에 대하여 우러러 존경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공경이란 존경에 속한 것입니다. 우러러보며, 마음으로 높이며, 마음으로 존경하는 높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늙은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용돈이나 드리고 효도관광이나 보내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신 자세가 틀렸습니다. 정말 효도하시는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돈을 버는 대로 많은 용돈을 어머님께 드리고서 매일 아침마다 자기가 쓸 용돈을 어머님으로부터 타서 쓴다는 것입니다."어머님, 오늘 제가 누구하고 점심 약속을 했으니 얼마쯤 필요한데요." 하면서 그날 그날의 일과도 말씀드릴 겸 용돈을 탄다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아들에게서 받은 돈을 다 내어 주십니다. 어머님들은 원래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체질입니다. 행복이 바로 여기 있는데 불쌍히 여기며 그저 몇푼 거지처럼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머니는 다 내어 주고도 기뻐하시는데 그 기쁨을 어머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쓰는 단위는 만 원이고 부모에게 쓰는 단위는 천 원입니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는 수십만 원의 돈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부모에게는 높이고, 우러러보며, 존경을 겸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옳음을 인정하고 더 큼을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 우러러 사랑하는 마음이 공경입니다. 그 분의 지혜를 높이고, 그 분의 명예를 인정하고, 그 분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그 분의 인격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장점만 보고, 훌륭한 점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모를 저주하고 훼방하는 것은 큰 죄라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부모의 명예 훼손, 훼방하는 것, 업신여기는 것, 등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잠언 1장에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어머니의 말씀을 마치 금사슬처럼 면류관처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효도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노망처럼 생각하는 자에게 무슨 효도를 이야기하겠습니까? 부모님을 높이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의 자녀됨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요새는 좀 망칙한 자녀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단점만 보면서 저런 나쁜 피가 내게도 흐른다고 그의 자식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불효한 자식입니다. 부모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자녀됨을 자랑스럽게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저의 어머님을 한번 기억해 봅니다.

어머님은 늘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손톱을 깎으실 때 한 번도 손톱 가운데를 잘라보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다 닳아 없어져서 양쪽 귀퉁이만 조금씩 다듬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자들이 손톱에 칠하는 것이 좋게 보이질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국민학교도 못 다닌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시며 흘린 아름다운 피땀을 우리는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님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그 부모의 자녀됨을 부끄럽게 여겨서야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어머니가 홀로 시골에서 땅마지기를 팔아 대며 아들을 서울로 보내 대학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보기 위해 상경해서 하숙집을 찾지 못하고 학교 교문 앞에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에 멀리서 나오는 아들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야, 아무개야! 하고 달려갔답니다. 그 때 애인하고 같이 나오던 아들은 그 어머니를 자기 집 식모라고 애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효도를 이야기해야 합니까?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저렇게 고생하신 훌륭하신 분이라고 왜 자랑할 수 없습니까? 그 말 한 마디에 어머님의 모든 노고는 다 풀어질 것인데 왜 못하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망언을 듣고 돌아서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며 한참 고생하실 때에 정말 끼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셔서 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 다가 씻어서 국을 끓이곤 했습니다. 김 구 선생님은 너무 민망해서 "어머니,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세요"하고 만류했더니 어머님은 당장 몽둥이를 들고 김 구 선생의 종아리를 쳤습니다. 매를 맞는 김 구 선생님은 자꾸 우십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님이 작년에 때리실 때 보다 힘이 많이 약해져서 어머님이 늙으신 것이 안타까워 운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아무 기대가 없습니다. 효도 또한 아무 바램이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에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질투가 있습니다. 남편을 칭찬하면 아내가 질투하고,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질투합니다. 질투는 사랑의 타락입니다. 질투 없는 사랑, 오직 하나, 부모와 자식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칭찬하면 부모들은 무한히 기뻐하십니다. 효도하는 자녀들은 부모가 자랑스럽습니다. 왜 입니까? 바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받은 마음으로, 이미 받은 것만 가지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효의 마음입니다.

효도하는 마음은 자기 사랑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을 알기에 내가 건강해야 하고 어머니의 소원을 알기에 죄를 짓지 말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개 아들이라고 어머니의 이름을 높일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효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15장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효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고 효도해야 할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친 바 되었다 하면서 안 바쳤다는 말입니다. 효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위선자일 뿐더러 하나時님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효는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어떤 이유로도 핑계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불효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입니다. 불효한 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내가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효자가 출세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불효하면서 오래 살려고 아무리 애써도 오래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효가 우선 입니다. 효도하고야 장수하고, 효도하고야 잘 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죽이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래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장수하고, 그리하면 형통하리로다." 약속 있는 첫 계명 바로 이 계명을 지켜 가는 중에 이 안에서 약속의 축복을 함께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귀한 가정을 주셨지만 잘 지키지 못하고 귀한 부모님을 주셨지만 효도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더 이상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입장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이제부터라도 참으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여 그 약속 그 귀한 축복을 함께 나누도록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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