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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바라보며(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盜賊)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體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居)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떤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새해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하십니까? 먼저 생각되는 것은 세월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어느 결에 또 1년이 화살처럼 후딱 지나가 버리고 다시 새해를 맞았습니다.
성경은 시간 개념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천 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길다 짧다,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라도 천 년 같은 의미의 시간이 될 수 있고, 또한 천 년 같은 긴 시간이라도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시간 시간의 잡다한 문제가, 그 많은 사건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혹 이것을 물질로 환산해보세요. 1억 원이 10원 같고 10원이 1억 원 같고, 그 많은 지식이 무식 같고 무식함이 지식 같고…… 우리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 죽겠다 살겠다 해보아야 하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인식과 시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간에도 물리적 시간이 있고 심리적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왔다고 오늘 우리가 손꼽는 구분은 물리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심리적 시간이 그것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마는 길게도 느끼고 짧게도 느낍니다. 반갑게도 느끼고 지겹게도 느낍니다. 심리적 시간--사실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리적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다하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밖에도 우리에게는 신학적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간입니다. 땅에서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보시는 차원의 시간입니다. 청년의 시간이 다르고 노인의 시간이 다릅니다. 일하는 시간이 다르고 한가한 시간이 다릅니다. 건강할 때의 시간과 병들어 쑤시고 아플 때의 시간이 다릅니다. 참 빠르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이라는 말에 조금 더 깊이 생각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 분이 지금 하늘나라에 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내려다보십니다. 바로 그 분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사랑, 그의 소중함, 그의 인내하심, 그의 간절한 구속사적 시간, 그 신학적 시간 개념으로 볼 때에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여기에 성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구원받은 자가 있습니다. 성도가 있습니다. 이 구원받은 심령을 빨리 불러 가셔서 영원한 세계에서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고 싶지마는 아직 세상에 두십니다. 성도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런 고생 저런 고생을 다 겪습니다. 극단적인 예로는 순교를 합니다. 순교하며 매맞으며 위험 당하며 고생하는 성도들의 모습,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자녀들의 모습을 보실 때에 정말로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빨리빨리 불러와야 합니다. 그런 초조함이 있어요. 이렇게 하루가 천 년 같은가 하면,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이 사람들을 빨리 구원해야 되겠고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끔 해야 되겠는데, 이 큰일을 앞에 놓고 볼 때에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루가 천 년인 양 길게 길게 느껴지는가 하면 천 년이 하루같이 짧게 느껴지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학적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속사적 시간입니다. 미래학과 종말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 인간의 유토피아니즘, 이런 것은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가닥 과학주의적 우상, 이것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역사의 끝은 왔습니다. 생태학적으로나 우주학적으로나, 어느 모로 보아도 그렇게 밝은 미래는 없고 밝은 미래를 약속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는 18세기에 있었던 멍청한 꿈은 꾸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밝은 미래는 거짓말입니다. 어느 누가 약속을 한다 해도 지켜지는 약속이 아닙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가며 종말로 치닫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느낌이며 또 현실입니다.
밤은 깊고 낮이 가까워왔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이 옵니다. 동시에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은 끝날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약속이, 구원의 약속이, 그 성취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에 끝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큰 환난이 있겠다, 인간성도 파괴되고 지진과 재난과 전쟁과 파괴와 폭력…… 모든 어두운 것들이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니니라, 그 모든 환난과 함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앙인들도, 심지어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성경을 잘못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 오해는 다름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 할 때, 그저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서 자유롭게 복음이 전파되고, 환난도 없고 기근도 없이 모든 사람이 다 평안하게, 마치 여의도광장에 백만 명 모인 것처럼 온 세계가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가운데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과 전쟁과 억압과 고난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 속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여러분,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실패, 우리의 원대로 안 되는 역경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성경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에서 큰 간증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이 1950년에 교회 문을 닫아버리고 말 때에, 저는 그 때에, 이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되나, 세계의 교회가 어떻게 되나, 선교는 어떻게 되나, 하고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꽉 막히고 마는데, 지도를 놓고 보면 전부 빨개지는데, 큰일났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복음 선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1980년에 중국이 열렸을 때에 들여 보다보니 1950년대에 3O0만 명밖에 안되던 교회가 1982년, 그 어려운 때인데도 오히려 6000만 명이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처럼 꽉 막힌 것으로, 암담한 것으로,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하지마는 저 북녘 땅도 이제 언젠가 저 장막을 열고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억압과 질병과 고난 속에서 오히려 아침은 가까워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물리적 현상과 신학적 현상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적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 그 상황이 어떻습니까?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말씀합니다(12절). 하늘이 꽝, 큰소리로 떠나가 버립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립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체의 대 이변입니다.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총소리가 나고,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나고…… 이런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주적입니다. 우주의 질서가 고스란히 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풀어진다'--'모데손타이'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금이 물에 녹듯이, 밀랍이 불 앞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용해되고 체제가, 모든 힘의 질서가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해체'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지구대로 달은 달대로 해는 해대로, 모두가 질서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우주적 질서가 해체되리라, 다 녹아지고 말리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밝아오는 것이다-----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성경이 증거 하는 미래입니다.
1945년 8월 달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폭탄 하나에 40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 불타버렸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늘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저는 일부러 가서 히로시마를 돌아보았습니다. 박물관을 가보고, 그 현장을, 이제는 오래 전 역사이지마는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그곳 박물관은 그 때에 있었던 것을 가급적 보존하려고 잘 챙겨놓고 있어요. 저는 여러 시간 동안 거기 앉아서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굉장합니다. 원자탄 하나 번쩍 하는 순간에 몽땅 타고 녹아 사라진 것입니다. 타버린 것이 아니라 삭아지고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집이고 사람이고 없습니다. 돌 위에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사람의 흔적은 없어지고 그림자만 남았어요. 그 그림자를 가진 돌을 떠다놓았어요.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삽시간에 흔적이 없어졌어요. 다, 모조리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불 속에서도 성당에 있던 노란 종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요한 조상(彫像)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더랍니다. 그것을 갖다가 보관해놓고 그 밑에다 뭐라고 썼는고 하니 '불가사의한 일이다'--저는 그 앞에서 30분 동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 엄청난 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 하셨다는 것을 물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확실한 일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갈 것이요 모든 체질이 풀어지고 말 것이다--그러나 주님의 백성에게 향한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 때에 나타날 것이다--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리라고. 그러면 이러한 시점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맞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우리에게 얼마나 주어질는지 모르지만 올해를 우리가 다 받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앞으로 며칠이 주어지든지 이 시간의 의미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떨어진다면 끝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참으십니다.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특별히 성도들의 고난을 향한 사랑의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있습니다. 또한 회개에로의 경륜과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재난을 통해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볼지어다, 주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서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시지 않습니까?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바로 환난이요 재난이거든요. 문을 열어라, 문을 열라고 오늘도 강하게 두드리고 계십니다. 금년에도 두드리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주님께서는 다시 또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바로 구원을 위한 시간이요, 구원을 원하시는 시간이요, 우리가 보다 더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시간이요, 이미 믿는 우리가 좀더 성실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좀더 바로 하기를 원하셔서 주어지는 훈련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통해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러운 자가 청결해지고, 게으른 자가 부지런해지고,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쓸데없는 욕심 부리는 자가 욕심을 버리도록, 그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도록, 그렇게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절)." 이렇듯 중요한 시점에서, 이런 시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서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절)"하고. 쫓기듯이 살 것이 아니요 기다리며 살 것입니다. 앞에 오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사모 열망하면서 지성으로 미래를 기다릴 것이요, 구원의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땅이 멀어진다고 아쉬워할 것 없습니다.
가까워지는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열망하면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할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행실로, 보다 거룩하게, 신령하게, 마치 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것처럼, 경건함으로, 이제 비경건적 요소는 다 제거하고 더욱 더 경건하게, 더 신실하게, 그렇게 미래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 어떠한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 바른 자세로, 더 충성되게 복음을 전하며, 소망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盜賊)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體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居)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떤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새해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하십니까? 먼저 생각되는 것은 세월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어느 결에 또 1년이 화살처럼 후딱 지나가 버리고 다시 새해를 맞았습니다.
성경은 시간 개념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천 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길다 짧다,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라도 천 년 같은 의미의 시간이 될 수 있고, 또한 천 년 같은 긴 시간이라도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그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시간 시간의 잡다한 문제가, 그 많은 사건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혹 이것을 물질로 환산해보세요. 1억 원이 10원 같고 10원이 1억 원 같고, 그 많은 지식이 무식 같고 무식함이 지식 같고…… 우리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 죽겠다 살겠다 해보아야 하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인식과 시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간에도 물리적 시간이 있고 심리적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왔다고 오늘 우리가 손꼽는 구분은 물리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시간이 있습니다. 심리적 시간이 그것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마는 길게도 느끼고 짧게도 느낍니다. 반갑게도 느끼고 지겹게도 느낍니다. 심리적 시간--사실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리적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다하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밖에도 우리에게는 신학적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간입니다. 땅에서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보시는 차원의 시간입니다. 청년의 시간이 다르고 노인의 시간이 다릅니다. 일하는 시간이 다르고 한가한 시간이 다릅니다. 건강할 때의 시간과 병들어 쑤시고 아플 때의 시간이 다릅니다. 참 빠르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님이라는 말에 조금 더 깊이 생각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 분이 지금 하늘나라에 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내려다보십니다. 바로 그 분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사랑, 그의 소중함, 그의 인내하심, 그의 간절한 구속사적 시간, 그 신학적 시간 개념으로 볼 때에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여기에 성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구원받은 자가 있습니다. 성도가 있습니다. 이 구원받은 심령을 빨리 불러 가셔서 영원한 세계에서 기쁨을 누리게 해주시고 싶지마는 아직 세상에 두십니다. 성도는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런 고생 저런 고생을 다 겪습니다. 극단적인 예로는 순교를 합니다. 순교하며 매맞으며 위험 당하며 고생하는 성도들의 모습,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자녀들의 모습을 보실 때에 정말로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빨리빨리 불러와야 합니다. 그런 초조함이 있어요. 이렇게 하루가 천 년 같은가 하면,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이 사람들을 빨리 구원해야 되겠고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끔 해야 되겠는데, 이 큰일을 앞에 놓고 볼 때에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루가 천 년인 양 길게 길게 느껴지는가 하면 천 년이 하루같이 짧게 느껴지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학적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속사적 시간입니다. 미래학과 종말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 인간의 유토피아니즘, 이런 것은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가닥 과학주의적 우상, 이것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역사의 끝은 왔습니다. 생태학적으로나 우주학적으로나, 어느 모로 보아도 그렇게 밝은 미래는 없고 밝은 미래를 약속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는 18세기에 있었던 멍청한 꿈은 꾸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밝은 미래는 거짓말입니다. 어느 누가 약속을 한다 해도 지켜지는 약속이 아닙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가며 종말로 치닫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느낌이며 또 현실입니다.
밤은 깊고 낮이 가까워왔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이 옵니다. 동시에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은 끝날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약속이, 구원의 약속이, 그 성취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에 끝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큰 환난이 있겠다, 인간성도 파괴되고 지진과 재난과 전쟁과 파괴와 폭력…… 모든 어두운 것들이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니니라, 그 모든 환난과 함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앙인들도, 심지어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성경을 잘못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 오해는 다름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 할 때, 그저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서 자유롭게 복음이 전파되고, 환난도 없고 기근도 없이 모든 사람이 다 평안하게, 마치 여의도광장에 백만 명 모인 것처럼 온 세계가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가운데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과 전쟁과 억압과 고난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 속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여러분,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실패, 우리의 원대로 안 되는 역경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성경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에서 큰 간증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이 1950년에 교회 문을 닫아버리고 말 때에, 저는 그 때에, 이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되나, 세계의 교회가 어떻게 되나, 선교는 어떻게 되나, 하고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꽉 막히고 마는데, 지도를 놓고 보면 전부 빨개지는데, 큰일났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복음 선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1980년에 중국이 열렸을 때에 들여 보다보니 1950년대에 3O0만 명밖에 안되던 교회가 1982년, 그 어려운 때인데도 오히려 6000만 명이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처럼 꽉 막힌 것으로, 암담한 것으로,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하지마는 저 북녘 땅도 이제 언젠가 저 장막을 열고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억압과 질병과 고난 속에서 오히려 아침은 가까워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물리적 현상과 신학적 현상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적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 그 상황이 어떻습니까?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말씀합니다(12절). 하늘이 꽝, 큰소리로 떠나가 버립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립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체의 대 이변입니다.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총소리가 나고,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나고…… 이런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주적입니다. 우주의 질서가 고스란히 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풀어진다'--'모데손타이'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금이 물에 녹듯이, 밀랍이 불 앞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용해되고 체제가, 모든 힘의 질서가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해체'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지구대로 달은 달대로 해는 해대로, 모두가 질서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우주적 질서가 해체되리라, 다 녹아지고 말리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밝아오는 것이다-----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성경이 증거 하는 미래입니다.
1945년 8월 달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폭탄 하나에 40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 불타버렸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늘 생각하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저는 일부러 가서 히로시마를 돌아보았습니다. 박물관을 가보고, 그 현장을, 이제는 오래 전 역사이지마는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그곳 박물관은 그 때에 있었던 것을 가급적 보존하려고 잘 챙겨놓고 있어요. 저는 여러 시간 동안 거기 앉아서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굉장합니다. 원자탄 하나 번쩍 하는 순간에 몽땅 타고 녹아 사라진 것입니다. 타버린 것이 아니라 삭아지고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집이고 사람이고 없습니다. 돌 위에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사람의 흔적은 없어지고 그림자만 남았어요. 그 그림자를 가진 돌을 떠다놓았어요.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삽시간에 흔적이 없어졌어요. 다, 모조리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불 속에서도 성당에 있던 노란 종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요한 조상(彫像)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더랍니다. 그것을 갖다가 보관해놓고 그 밑에다 뭐라고 썼는고 하니 '불가사의한 일이다'--저는 그 앞에서 30분 동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 엄청난 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 하셨다는 것을 물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확실한 일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갈 것이요 모든 체질이 풀어지고 말 것이다--그러나 주님의 백성에게 향한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 때에 나타날 것이다--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리라고. 그러면 이러한 시점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맞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우리에게 얼마나 주어질는지 모르지만 올해를 우리가 다 받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앞으로 며칠이 주어지든지 이 시간의 의미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떨어진다면 끝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참으십니다.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특별히 성도들의 고난을 향한 사랑의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있습니다. 또한 회개에로의 경륜과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재난을 통해서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볼지어다, 주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서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시지 않습니까?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바로 환난이요 재난이거든요. 문을 열어라, 문을 열라고 오늘도 강하게 두드리고 계십니다. 금년에도 두드리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주님께서는 다시 또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바로 구원을 위한 시간이요, 구원을 원하시는 시간이요, 우리가 보다 더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시간이요, 이미 믿는 우리가 좀더 성실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좀더 바로 하기를 원하셔서 주어지는 훈련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통해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러운 자가 청결해지고, 게으른 자가 부지런해지고,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쓸데없는 욕심 부리는 자가 욕심을 버리도록, 그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도록, 그렇게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11절)." 이렇듯 중요한 시점에서, 이런 시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서 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2절)"하고. 쫓기듯이 살 것이 아니요 기다리며 살 것입니다. 앞에 오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사모 열망하면서 지성으로 미래를 기다릴 것이요, 구원의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땅이 멀어진다고 아쉬워할 것 없습니다.
가까워지는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열망하면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할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행실로, 보다 거룩하게, 신령하게, 마치 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것처럼, 경건함으로, 이제 비경건적 요소는 다 제거하고 더욱 더 경건하게, 더 신실하게, 그렇게 미래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 어떠한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더 바른 자세로, 더 충성되게 복음을 전하며, 소망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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