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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재난의 시작(마태복음 24장 3절~8절)

by 【고동엽】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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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작(마태복음 24장 3절~8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안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판에는 작자 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하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 하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재난과 지진과 기근이 있습니다. 큰 소리나는 전쟁, 큰 사건처럼 여겨지는 지진, 깜짝놀랄만한 사건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몸에 닿는 것과 내 피부에 부딪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모르는 채로 조용히 지나가는 많은 재난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세계 20여 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치 세계 평화가 정착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집계를 보면 군인이 300만 명 이상, 민간인이 그의 수십 배씩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캄보디아만 하더라도 같은 민족끼리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그곳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국제기아대책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에서는 1분에 20명이 (이중 18명이 어린이입니다)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1시간에 1,400명, 하루에 3만5천명, 1년에 1천300만 명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에 굶어죽은 사람만 해도 무려 지난 150년에 걸쳐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유혈투쟁, 유혈혁명으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흔히들 전쟁으로 죽는 것, 지진으로 인하여 죽는 것은 큰 사건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용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1년에 1천300만 명이나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또한 굶어죽는 것은 생각합니다마는 도덕적으로 죽어 가는 것, 인격이 죽어 가는 것, 그리고 종교적으로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끔찍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나 굶고 어렵다보니 살아남기 위한 장기(臟器)판매 시장까지 있습니다. Kidney Street라고도 합니다.

신장을 파는 거리입니다. 사람들이 줄지어서 눈이고 피부고 신장이고 간에 가리지 않고, 생명의 위험만 없다면 무엇이든지 팔겠다고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식량을 구하려는 것이지요. 인도 뉴델리에서는 신장 하나가 천 달러, 우리 돈으로 치면 팔십만 원에 팔립니다. 먹고 살아남기 위하여 말입니다. 이렇듯 지구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고 재난이 있습니다.

반대로, 먹을 것이 많은 미국을 생각해봅시다. 어느 보고서를 보면, 미국사람 한 명이 쓰는 자연자원이 인도사람 육십 명이 쓰는 양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네도 어지간히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또 어떤고 하니 그저 잘살 것만 같은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1년 동안 수면제가 무려 칠백억 정이나 팔립니다. 하루에 천구백만 정이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스피린이 1년에 천백만 파운드가 팔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먹고 배부르지만 잠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루에 천구백만 정의 수면제가 팔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도 평안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입니까? 역사학자 찰스 베어드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역사를 연구한 끝에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첫째로,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이기적인 생각과 권세욕에 사로잡히면 망할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기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권세를 얻기 시작하면 반드시 세상은 망하더라--그것이 결론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엄연히 존재하시고, 결국은 악과 불의를 의와 선으로부터 갈라놓으시는데 그 일은 아주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혼탁하고 아무 질서도 없는 것처럼 역사가 곤두박질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실현되고 하나님의 긍휼은 끊임없이 그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어드가 생각한 것은 이렇습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강탈하지만 그 결과로 꽃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사람을 강탈하고, 인권을 강탈하고, 갖은 죄악을 다 저지르고 있는 것 같으나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역사는 아름답게 열매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어드는 이렇게 역사를 달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이었다고 하는 이데올로기마저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그 누구도 앞으로 밝은 세상이 오리라고, 이러하면 아름답고, 저러하면 잘되고…… 그런 이야기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미래를 밝게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가르쳐줍니다. 오늘날의 과학주의와 향락주의, 타락한 죄악상, 그리고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또다시 종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재난이 있고 지진이 있고 고통하는 때가 오리라, 그러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재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난을 당할 때, 이 큰 사건을 만날 때, 없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예수님께서는 이 재난이 없기를 바라거나 또 없기 위해서 기도하라 하시는 말씀은 없습니다. 재난은 그대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또 하나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있어지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음도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사업에 실패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한 번 방문해본 일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도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채권자들이 집에 있는 냉장고, 심지어는 선풍기까지 다 집어갑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못담을 소리를 하고 욕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런 장면을 제가 보았습니다. 상심한 그 주인이 방에 누워 있습니다. 찾아갔지만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읽으니, 그가 결국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기서 일을 멈추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길,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죽어가지만 영적으로는 이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재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재난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내가 병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 병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재난을 당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재난을 당할 때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큰 재난의 소식을 들을 때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것은 목적적 재난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8절)"--고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의 시작'이라는 이 말씀은 헬라어로 '오디논' 이라고 합니다. '오디논' 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단어예요. 보통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표준번역에는 '진통의 시작'이라 번역하였고 RSV(Rivised Standard Version)에는 'the beginning of the birth-pa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birth-pang, 출산진통이라는 것이지요. 출산진통. 여인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 귀한 생명을 하나 출산하기 위해 모진 고통을 겪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산진통의 시작이다' -- 매우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 고난은 버려진 고난이 아닙니다. 이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작품을 만드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해산의 진통의 시작이다' --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여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시고,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십니다.

지난번 LA에 갔을 때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정말이지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목사님들끼리 이렇게 농담을 해보았습니다. "다음 주일날은 의자를 별도로 더 준비해두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터지게 사람들이 모일 테니까요." 여러분, 도대체 이 멀리간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끌어들입니까? 이 완악한 사람들을 무슨 방법으로 회개하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곁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양, 수양…… 다 헛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잘되고 출세하고 건강하고 돈 잘 벌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저 어딘가 무너져야 정신차리고, 하나님께서 손을 보아야 그 때에야 별수 없이 기어 들어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고 못돼먹었어요. 이 비상조치가 아니고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고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흔들어놓으셨습니다.

보세요. 이 지진이라는 것이 참 대단합니다. 뭐 좋은 집 나쁜 집, 부한 자 가난한 자 가릴 것 없이 여기에는 속수무책입니다. 한번 땅이 흔들리면 다들 그냥 와르르 무너집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것은 다 아이들 장난감만 같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1750년 영국 런던에 아주 큰 지진이 한번 일어났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 웨슬리 목사가 했던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더 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막을 수 있었으면……" 그 때, 지진으로 부상을 입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라운 헨리라는 의사가 그 사람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요, 죽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은데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이 무섭습니다." 솔직한 말로 표현하자면, 죽는 것 자체는 무섭지 않은데 지옥이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빨리 버려야 하고, 고쳐야 할 것은 빨리 고쳐야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13절로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모든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적인 좋은 모양으로,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하고…… 뭐 이런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2000년 역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과 재난을 통하여, 어려운 환난을 통하여 복음은 전파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길이, 이 비상적인 조치가 아니고는 복음 전파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도 보세요. 자유천지에 있는 교회들은 텅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환난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 속에서도 지하에서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잘 지어놓은 예배당은 텅텅 비어 있고, 예배당도 없는 사람들은 모여서 예배드리려 힘쓰고…… 이제 우리는 '환난과 재난 속에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을 보리라'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을 수밖에요.

마태복음 24장 21절로 22절을 보세요.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減)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아주 부드러운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이 환난이 워낙 극심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도록, 믿음을 지키도록, 믿는 자들, 택한 백성들은 구원을 얻도록, 여기에 적당한 만큼 재난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온유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날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 감하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 -- 재난이 있을 때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20절에 보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 재난을 겪겠지만 우리의 경건 생활은 잘 지켜지도록, 물질은 잃어버려도 경건은 지키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평생 경건하게 살았던 호라티우스 보나르라고 하는 분은 아침에 해가 뜨면 창문을 열면서 "주여, 아침에 오시겠습니까?" 밤에 커튼을 닫으면서 "주여, 이 밤에 오시겠습니까?"하곤 했다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기다리면서 주의 재림을 앞에 놓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난리의 소문을 듣습니다. 이제 소문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무섭게 재촉하는 바가 있습니다. 복음은 땅끝 까지 전해지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적인 인간으로 만드시고자, 우리를 복음화 하시고자 역사하십니다.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  

재난의 시작(마태복음 24장 3절~8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안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판에는 작자 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하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 하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재난과 지진과 기근이 있습니다. 큰 소리나는 전쟁, 큰 사건처럼 여겨지는 지진, 깜짝놀랄만한 사건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몸에 닿는 것과 내 피부에 부딪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모르는 채로 조용히 지나가는 많은 재난에 대해서는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세계 20여 개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마치 세계 평화가 정착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집계를 보면 군인이 300만 명 이상, 민간인이 그의 수십 배씩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캄보디아만 하더라도 같은 민족끼리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그곳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국제기아대책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에서는 1분에 20명이 (이중 18명이 어린이입니다)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1시간에 1,400명, 하루에 3만5천명, 1년에 1천300만 명이 굶어죽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에 굶어죽은 사람만 해도 무려 지난 150년에 걸쳐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전쟁과 유혈투쟁, 유혈혁명으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흔히들 전쟁으로 죽는 것, 지진으로 인하여 죽는 것은 큰 사건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용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1년에 1천300만 명이나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것뿐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또한 굶어죽는 것은 생각합니다마는 도덕적으로 죽어 가는 것, 인격이 죽어 가는 것, 그리고 종교적으로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끔찍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나 굶고 어렵다보니 살아남기 위한 장기(臟器)판매 시장까지 있습니다. Kidney Street라고도 합니다.

신장을 파는 거리입니다. 사람들이 줄지어서 눈이고 피부고 신장이고 간에 가리지 않고, 생명의 위험만 없다면 무엇이든지 팔겠다고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식량을 구하려는 것이지요. 인도 뉴델리에서는 신장 하나가 천 달러, 우리 돈으로 치면 팔십만 원에 팔립니다. 먹고 살아남기 위하여 말입니다. 이렇듯 지구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고 재난이 있습니다.

반대로, 먹을 것이 많은 미국을 생각해봅시다. 어느 보고서를 보면, 미국사람 한 명이 쓰는 자연자원이 인도사람 육십 명이 쓰는 양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리네도 어지간히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또 어떤고 하니 그저 잘살 것만 같은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1년 동안 수면제가 무려 칠백억 정이나 팔립니다. 하루에 천구백만 정이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스피린이 1년에 천백만 파운드가 팔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먹고 배부르지만 잠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루에 천구백만 정의 수면제가 팔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도 평안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입니까? 역사학자 찰스 베어드는 많은 시간을 들여 역사를 연구한 끝에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첫째로,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이기적인 생각과 권세욕에 사로잡히면 망할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기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권세를 얻기 시작하면 반드시 세상은 망하더라--그것이 결론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엄연히 존재하시고, 결국은 악과 불의를 의와 선으로부터 갈라놓으시는데 그 일은 아주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혼탁하고 아무 질서도 없는 것처럼 역사가 곤두박질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실현되고 하나님의 긍휼은 끊임없이 그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어드가 생각한 것은 이렇습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강탈하지만 그 결과로 꽃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사람을 강탈하고, 인권을 강탈하고, 갖은 죄악을 다 저지르고 있는 것 같으나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역사는 아름답게 열매맺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어드는 이렇게 역사를 달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이었다고 하는 이데올로기마저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그 누구도 앞으로 밝은 세상이 오리라고, 이러하면 아름답고, 저러하면 잘되고…… 그런 이야기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미래를 밝게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가르쳐줍니다. 오늘날의 과학주의와 향락주의, 타락한 죄악상, 그리고 집단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또다시 종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재난이 있고 지진이 있고 고통하는 때가 오리라, 그러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라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재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난을 당할 때, 이 큰 사건을 만날 때, 없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예수님께서는 이 재난이 없기를 바라거나 또 없기 위해서 기도하라 하시는 말씀은 없습니다. 재난은 그대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또 하나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있어지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음도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언젠가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사업에 실패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한 번 방문해본 일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도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채권자들이 집에 있는 냉장고, 심지어는 선풍기까지 다 집어갑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못담을 소리를 하고 욕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런 장면을 제가 보았습니다. 상심한 그 주인이 방에 누워 있습니다. 찾아갔지만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읽으니, 그가 결국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기서 일을 멈추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길,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죽어가지만 영적으로는 이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재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재난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내가 병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 병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재난을 당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재난을 당할 때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큰 재난의 소식을 들을 때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것은 목적적 재난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8절)"--고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난의 시작'이라는 이 말씀은 헬라어로 '오디논' 이라고 합니다. '오디논' 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단어예요. 보통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표준번역에는 '진통의 시작'이라 번역하였고 RSV(Rivised Standard Version)에는 'the beginning of the birth-pa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birth-pang, 출산진통이라는 것이지요. 출산진통. 여인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 귀한 생명을 하나 출산하기 위해 모진 고통을 겪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산진통의 시작이다' -- 매우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 고난은 버려진 고난이 아닙니다. 이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작품을 만드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해산의 진통의 시작이다' --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여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시고,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십니다.

지난번 LA에 갔을 때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정말이지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목사님들끼리 이렇게 농담을 해보았습니다. "다음 주일날은 의자를 별도로 더 준비해두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터지게 사람들이 모일 테니까요." 여러분, 도대체 이 멀리간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끌어들입니까? 이 완악한 사람들을 무슨 방법으로 회개하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곁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양, 수양…… 다 헛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잘되고 출세하고 건강하고 돈 잘 벌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저 어딘가 무너져야 정신차리고, 하나님께서 손을 보아야 그 때에야 별수 없이 기어 들어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고 못돼먹었어요. 이 비상조치가 아니고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고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흔들어놓으셨습니다.

보세요. 이 지진이라는 것이 참 대단합니다. 뭐 좋은 집 나쁜 집, 부한 자 가난한 자 가릴 것 없이 여기에는 속수무책입니다. 한번 땅이 흔들리면 다들 그냥 와르르 무너집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것은 다 아이들 장난감만 같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1750년 영국 런던에 아주 큰 지진이 한번 일어났었습니다. 그 때에 요한 웨슬리 목사가 했던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더 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막을 수 있었으면……" 그 때, 지진으로 부상을 입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라운 헨리라는 의사가 그 사람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요, 죽는 것은 별로 무섭지 않은데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이 무섭습니다." 솔직한 말로 표현하자면, 죽는 것 자체는 무섭지 않은데 지옥이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빨리 버려야 하고, 고쳐야 할 것은 빨리 고쳐야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13절로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모든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적인 좋은 모양으로,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하고…… 뭐 이런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2000년 역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과 재난을 통하여, 어려운 환난을 통하여 복음은 전파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길이, 이 비상적인 조치가 아니고는 복음 전파가 불가능합니다. 오늘도 보세요. 자유천지에 있는 교회들은 텅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환난에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 속에서도 지하에서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잘 지어놓은 예배당은 텅텅 비어 있고, 예배당도 없는 사람들은 모여서 예배드리려 힘쓰고…… 이제 우리는 '환난과 재난 속에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을 보리라'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을 수밖에요.

마태복음 24장 21절로 22절을 보세요.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減)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아주 부드러운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이 환난이 워낙 극심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도록, 믿음을 지키도록, 믿는 자들, 택한 백성들은 구원을 얻도록, 여기에 적당한 만큼 재난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온유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날을 믿는 자들을 위해서 감하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 -- 재난이 있을 때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20절에 보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 재난을 겪겠지만 우리의 경건 생활은 잘 지켜지도록, 물질은 잃어버려도 경건은 지키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평생 경건하게 살았던 호라티우스 보나르라고 하는 분은 아침에 해가 뜨면 창문을 열면서 "주여, 아침에 오시겠습니까?" 밤에 커튼을 닫으면서 "주여, 이 밤에 오시겠습니까?"하곤 했다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기다리면서 주의 재림을 앞에 놓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난리의 소문을 듣습니다. 이제 소문만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무섭게 재촉하는 바가 있습니다. 복음은 땅끝 까지 전해지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음적인 인간으로 만드시고자, 우리를 복음화 하시고자 역사하십니다.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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