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목표 】예화 모음 14편

by 【고동엽】 2022. 6. 10.
[처음 목차 돌아가기]
 
 
1.위로 올라가려는 양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알아보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때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큰 교회를 찾는 신자는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힘들어도 작은 교회를 찾아 봉사하는 신자는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다시 찾은 삶의 목표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수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와 우편환이 동봉되어 왔다. 죽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달라는 한 여인의 부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색이 완연한 늙은 부인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아들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아 주려고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제가 앞으로 몇 주밖에 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관리인은 말없이 그 여인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부인, 저는 꽃을 사라고 보내주신 부인의 돈을 받을 때마다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유감이라니요?”
“유감이지요.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꽃을 보거나 향내를 맡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병원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꽃을 볼 수도 있고, 향내를 맡을 수도 있지만 이 무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인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 되돌아갔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인이 다시 찾아왔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나는 직접 꽃다발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몹시 기뻐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기뻐졌습니다. 의사는 어떻게 내가 다시 건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삶의 목표를 다시 찾았습니다.”
/ 김동문





3.삶의 푯대(목표)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htp://je333.com)





4.삶의 목표

본문: 빌3:12- 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아프리카에 주로 살고 있는 스프링 벅 이라는 산양은 보통 30마리 정도가 무리 지어 살지만 어떤 때는 갑자기 한 곳에 속속 모여 수천 마리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 격의 큰 양이 앞장을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양들은 몸을 맞대고 그 뒤를 따르며 도중에 있는 풀은 모조리 먹어치웁니다. 이기심이 많은 산양은 빨리 앞으로 파고 들어가 풀을 더 먹으려고 하지만, 맹수의 습격이 두려워 결코 대열을 떠나 옆에 있는 풀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자기를 보호하고 게다가 풀을 듬뿍 먹으려고 밀어닥치니 얼마 후에는 친구들을 마구 떠다밀면서 점점 빠르게 전진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양들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에 인도자 양은 자연히 뛰게 되고, 인도자가 뛰니까 뒤에서도 늦을 세라 더욱 뜁니다. 결국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게 됩니다. 인도자 격인 산양들은 아마 친구들이 늘어났으므로 풀이 많은 새로운 거주지로 데려갈 예정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뛰는 것 외에는 생각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돌진합니다. 모래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양떼들은 어느 새 사막을 건너 해안에 이릅니다. 그러나 앞선 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힘에 밀려, 냇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듯 많은 산양 떼들이 바다 속으로 밀려들어갑니다. 얼마 후 바닷가엔 가련한 양들의 시체로 가득 메어집니다.


이 양떼들의 죽음의 행진은 우리 인생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거나 위험한 바깥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데는 필사적입니다. 남보다 뒤지지 않는 좋은 대학, 좋은 차, 좋은 주택,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질주하고 있는 목적과 목표는 분명치 않고 결국은 죽음의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윤리교육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고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들 왜 사느냐?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대개는 목표가 없고 기껏 대답하는 소리가 먹기 위해서 산다느니, 부자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표들은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곡간을 지으려다가 그 날밤 그 영혼이 불리워 갔습니다.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htp://je333.com)





5.영원한 목표

옛부터 뱃사람들은 캄캄한 밤중에 배를 항해할때 그들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늘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별들은 시간이 지나는 대로 그 위치가 변하지만 오직 북극성만은 위치가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최신 전자장비를 갖춘 현대의 모든 함선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고 싶은 방향을 찾아 갈 수 있지만 일년에 한번씩은 필히 북극성에 맞추어 전자장비의 방향을 다시 정확하게 조정해 놓아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그의 생애의 목표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맞춰진 삶을 살았다.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표를 그리스도께 두고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이세상의 많은 위인과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업적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가치가 달리 평가되고 있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은 동일하게 구원의 대표자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운동장에서 막대기로 선을 그어본 적이 있는가? 막대기의 끝만을 보고 선을 긋는다면 어느새 선이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목표점을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선을 그으면 대체적으로 반듯한 선을 그릴 수 있게 됨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만을 생의 목표로 삼고 살때 우리의 인생은 창조주의 지으신 목적대로 반듯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6.삶의 목표

본문: 빌3: 12- 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옛날에 어느 시골노인이 서울 사는 딸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어찌나 변했는지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아서 노인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친절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딸네 집을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고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주소도 모른다는 노인의 말에 난처해져서 그럼 혹시 딸네 집에 다른 집과 달랐던 무슨 특징이 없었던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이제 됐다.' 싶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있었지, 있었고말고. 내가 그때 기억해 두기를 잘했지. 우리 딸네 집 담장 위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네."
노인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표적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비 본질의 것들에 현혹되어 삶의 목표를 그것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사랑, 믿음, 소망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크리스천 삶의 목표들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http://www.je333.com)





7.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표는 갖고 있지만 목적이 없습니다. 목표는 방향을 이야기한다면 목적은 의미를 묻습니다. ‘왜 사는가’ 하는 것은 목적을 위한 질문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목표에 대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와 목적을 혼동한 채, 그것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헤매다가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생애를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지금 당신은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목표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바쁜 일상에 쫓겨 때로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종착점을 알고 있다면 나는 헤메이지 않을 것입니다.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인생. 그 인생의 종착점은 오직 주님 곁입니다.





8. 노만 빈센트 필

Norman V. Peale박사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세가지 비결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림을 그리라(Picturize)는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설정했을 때 그 목표가 달성된 것 처럼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과학자들도 사람의 상상력은 레이저 광선과 같이 위대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불행과 재난을 늘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이 오고, 성공과 승리를 꿈꾸고 심상에 그리는 사람은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하라(Prayerize)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당기는 힘이 되고 채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이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실현하라(Realize)는 것입니다. 망설이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일도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작이 절반"입니다. 거북이도 전진할 때는 머리를 내밀어야 합니다.





9.목표지점이 보이면

플로렌스 채드윅이라는 유명한 수영선수를 아시는지요? 영국해협을 왕복한 최초의 여성이지요. 1952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에 채드윅은 캘리포니아 해안으로부터 35킬로미터 떨어진 카타리나 섬에서 해안까지의 수영에 도전했어요. 무려 16시간이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쉬지 않고 수영해야 하는 초인적인 한계에 도전한 것입니다. 상어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양편의 구조선을 제외하면 혼자서 외로이 태평양을 16시간이나 헤엄친 것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반 마일을 남겨두고 바다 안개가 꽉 끼어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자 그만 힘을 잃고 수영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확히 두 달 후 곧 9월 4일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바다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 여운학 / 사랑의편지 발행인 >





10.목표는 힘

마하트마 간디가 대영제국과 대결하여 승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막대한 돈, 막강한 무기, 철저한 군사조직을 가진 영국 정부를 간디가 이긴 것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설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를 구원하여야 한다는 목표는 이리저리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방향입니다. 오직 한길이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이 물러간 후에 말했습니다.
“목표의 힘은 군사력의 힘보다 강한 것입니다.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그는 늘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이미 장악하였다. 치밀한 목표 달성 계획은 이미 텐트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맛보았다. 나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볼 뿐이다. 목표를 향해 전진해가면서 장애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것을 없애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목표로 정하고 전진하고 있습니까.
/강문호 목사





11.굶어죽는 날벌레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는 날벌레들의 생태를 주의깊게 관찰하던중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날벌레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앞에서 날고 있는 놈만 따라서 빙빙 돈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이나 목적지도 없이 그냥 도는 것이다. 빙빙 돌고 있는 바로 밑에다 먹을 것을 가져다 놓아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돌기만 한다. 이렇게 무턱대고 7일동안이나 계속 돌던 날벌레들은 결국 굶어서 죽어 간다고 한다.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무런 목표없이 파브르가 관찰한 날벌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전체 인류의 87%에 이른다고 한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12.목적과 목표

한 추장이 나이가 들었다. 그는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기로 했다. 추장은 아들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추장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그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각각 물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장남이 먼저 대답했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차남이 대답했다.
'거대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는 뭐가 보이느냐' 그러자 막내가 대답했다.
'독수리의 두 날개와 그 사이의 가슴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곳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막내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리고 추장직은 막내에게 돌아갔다.
막내는 '목적'과 '목표'를 정확하게 보았다. 추장이 산에 나온 목적은 사냥이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후에는 독수리의 가슴을 목표로 삼았다. 그 다음에 화살을 쏘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목적'과 '목표'가 없는 인생은 고단한 여행일 뿐이다.





13.인생의 목표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 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빛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에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상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5)





14.목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한 방울 두 방울의 물이 무슨 힘이 있어서 바위에다 홈을 낼 수 있을까마는 수천 년을 두고 같은 곳에 부딪치다 보면 홈이 생기는 것이다.
바닷가에는 파도가 만들어낸 매끈매끈한 조약돌들이 있다. 한두 번의 파도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칠고 모난 돌들을 보드랍게 만들 수 있을까마는 수천 년을 두고 같은 돌에 계속 부딪치다 보면 보드랍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끊임 없이 노력하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영혼 구원이다. 이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이며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두 번에 안 되면 세 번, 세 번에 안 되면 열 번, 천 번이라도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못하면 다음 세대들이 해야 하는 목표다.
/윤여풍 목사(충성교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