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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전도여행

3차전도여행 [제 3-11순례] 두로 : 제자들의 집에서 7일간 체류하다

by 【고동엽】 202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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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울 일행은 베니게(Phoenicia 페니키아)의 두로(Tyre)에 도착했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이 이렇게 점점 마무리 지어져 간다. 두로는 어떤 곳인가? 두로는 베니게의 중요한 해안 도시로 시돈에서 남쪽으로 4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두로는 고대에 세워진 도시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BC 2800년경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베니게는 항해, 조선술이 발달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해양국으로 국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사 23:8).




고스~로도~바다라~두로로 지나간 지중해 뱃길





지금의 베니게(페니키아)의 두로, 저 멀리 이슬람의 모스크가 솟아 있다.



두로의 주산물로는 자색 염료, 금속 세공, 유리 기구 등의 제조로 유명하였는데 두로의 배들은 애굽, 구브로, 로도스, 시실리,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과 다시스를 항해하며 자색 물들인 옷감과 재목, 밀, 기름, 포도주, 금속, 노예, 말 등을 수출하여 두로에 엄청난 부를 가져왔다(대상 22:4; 겔 27:3; 사 23:18). 두로는 신약 시대에도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동서 문화의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636년 아랍에 의해 정복되었고 지금은 ‘수르’라는 작은 도시로 남아 있다.





두로 가는 길


정치적, 지리적 면에서 두로는 지리적, 산업적 여건 때문에 힘 있는 나라들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1세에게 공격 받았으며(BC 1094) 살만에셀 3세 때는 조공을 바쳐야 했다(BC 853). 계속해서 디글랏 빌레셀 3세와 살만에셀 5세에 의해 공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고 결국 BC 722년 앗수르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베니게가 정복당하고 에살핫돈에 의해 시돈이 정복당하자 두로의 바알 왕은 에살핫돈과 협정을 맺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두로로 가는 길가의 무화과나무


그 후 신 바벨론 제국에 의해 계속 공격을 받았으며, 느부갓네살이 13년 동안이나 두로를 포위하며 공격하자 두로는 이때 힘을 상실하였다. BC 539년 바사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두로도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두로는 여전히 백향목과 다른 생산품들을 수출하며 무역과 해운업을 계속하였다. 알렉산더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했지만 알렉산더를 이은 셀류쿠스 왕조 때에는 이전과 같이 무역과 산업이 활발한 도시가 되었다. BC 126년 두로는 다시 독립하였으며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당했을 때(BC 64)도 계속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두로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두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무렵 견고한 성읍이었다(수 19:29). 그래서 이곳은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은 곳이었다(삿 1:31~32). 두로 왕 히람은 다윗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백향목과 목수, 석수들을 보내 다윗 왕의 궁전을 짓게 하였다(삼하 5:11).



솔로몬 때는 백향목과 잣나무를 보내 성전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고(왕상 5:1~10), 두로 사람 히람은 성전의 놋기둥과 바다, 제사용 기물과 성전 기구들을 만들었다(왕상 7:13~47). 이에 대한 보답으로 솔로몬은 갈릴리 20개 성읍을 히람 왕에게 주었으나 그는 흡족해 하지 않았다(왕상 9:11~14). 히람은 솔로몬 왕이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자 바다에 익숙한 사공을 보내어 오빌의 금을 실어 솔로몬 왕에게 가져가도록 하였다(왕상 9:26~28). 두로 왕 엣바알은 그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 결혼하게 했으며(왕상 16:31), 이세벨은 두로의 우상을 들여와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빠지게 하였다(왕상 16:31-33).

요엘과 아모스에 의해 두로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맺은 형제의 계약(삼하 5:11; 왕상 5:1~12; 9:10~14)을 파기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에돔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죄를 지적받았다(암 1:9~10; 욜 3:5~6).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에 의해서도 이들의 부와 교만 때문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사 23:1~18; 렘 25:22, 27:3, 겔 26:1~6; 29:18). 그리고 이들의 예언대로 두로는 BC 332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약 3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수천 명의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때 섬이었던 두로를 공격하기 위해 길이 800m, 폭 60m의 제방을 쌓아 본토와 연결시켜 반도로 만들어버렸다.




 



두로에서 수로보니게여인의 딸을 치유하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과 두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고집스러움과 완악함을 지적하시며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고 언급하시기도 하셨다(마 11:21~22; 눅 10:13~14). 또한 두로가 이방 땅이었지만 예수님은 친히 가셔서 수로보니게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셨으며(마 15:21; 막 7:24) 그곳에서도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막 3:8; 눅 6:17).




바울과 두로
사도행전 21:3~6,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만류함.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 가니라.





 지금도 쉽지 않은 뱃길인데..... 바울은 이 지중해를 관통해서 두로까지 갔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 이곳에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는데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의 막바지 중에 이곳 두로에 들러 7일 간 머물면서 두로의 제자들과 교제하였다(행 21:3~4). 바울은 이곳 두로에서 동남쪽으로 약226㎞ 지점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까지 가고자 하였다. 그때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내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간곡히 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머물 날이 다 찼을 때에, 바울과 누가는 그 곳을 떠나 예루살렘 여행길에 올랐고,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나와서 바울 일행을 전송하러 성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밀레도에서의 송별식처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는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 어떻게 겨우 7일간의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격적인 송별식이 있을 수 있었을까? 바로 이게 ‘사도행전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뒤에서 응원하는 자, 일선에 나간 자와 후원하는 자들의 만남, 복음을 들고 선포하는 자와 헌신적으로 밥을 지어 배를 채워주는 자들 간의 만남, 이게 사도행전적인 만남이다. 여기엔, 비록 바닷가 모래사장이지만 무릎을 꿇고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 눈물의 만남이 있다. 감격적인 만남이 있다.


우리는 왜 늘 외로울까? 사람을 만나지만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단절된 만남, 꿈과 연결되지 않는 만남,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나는 만남이기 때문에, 교회에 오면 도망가기에 바쁜 만남이기 때문에, 바울이 나누고 있는 이 ‘사도행전적인 만남’이 그리운 이유다. 내 심장을 꺼내 줄 대상이 없고, 내가 손해 볼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간의 만남은 ‘사도행전적인 만남’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도행전적인 만남’도 뒤로하고, 두로에서 배를 타고 떠난 후 돌레마이(Ptolemais)에 도착한다.

 

출처 : https://cafe.daum.net/ccm/6Km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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