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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712회] - 환자와 의사의 관계

by 【고동엽】 2022. 4. 17.
[오늘의 묵상 - 712회] - 환자와 의사의 관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1 3:18)
어떤 병원의 응급실 의사가 “환자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라고 쓴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한 고령의 여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채, 응급실에 실려 와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환자는 음독을 해서 몹시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빨리 처치를 하면 생명을 살릴 수도 있어서, 보호자의 동의를 얻기 위해 환자의 주머니를 뒤졌으나 cell phone도, 지갑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외투 안주머니를 뒤졌더니, 반듯하게 접힌 메모지가 하나 나왔는데, 삐뚤삐뚤한 노령의 글씨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였습니다. 수신자는 자기를 치료해주는 의사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저를 만날 선생님은 누구실까요? 저는 선생님을 모르지만 선생님도 저를 모를 것입니다. 저는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늙은이입니다. 온통 절망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헤쳐 나갈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어떤 치료도 거부합니다. 외람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발 저를 조용히 하나님 곁으로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소원이 있다면 이미 망가진 몸이지만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치 있는 몸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메모 편지는 환자 이름과 작정한 날짜로 끝나고 있었는데, 그 날짜는 이미 5년도 지난 때였습니다. 의사는 “그 노인은 삶에 지쳐,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고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남긴 글이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환자의 의지에 순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머니는 살아 날 것이다. 또 고통스러운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죽고자 하는 마음과 살려야만 하는 마음, 둘은 이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어떤 우열이나 승자가 가려지지 않은 채, 또 무엇이 선인지 영영 깨닫지 못한 채, 앞으로도 그 둘은 치열하게 다툴 것이다. 그래서 슬픈 삶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라고 글을 맺었습니다.
자살을 결단한 이 할머니의 형편을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영감님도, 자식도 없이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려, 오랜 세월 고통을 당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마지막을 결단했거나, 늘 의지하고, 자기를 돌 봐 주던 영감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자, 더 이상 살 희망을 잃고 마지막을 결행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이 할머니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이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 살 이유도, 희망도 없어 그런 결단을 하면서 혹 응급실에 실려 가면 의사가 자기를 또 살려 놓을까봐 자기를 담당할 의사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의사는, 공교롭게도 이렇게 살기를 포기한 할머니를 다시 살려 놓아야하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한 것입니다. 환자를 살려야 하는 것은 의사의 마땅한 책무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살아갈 방도나 수단을 의사는 제공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의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이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할머니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고, 또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도록 만든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지상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차후 삶에 대한 책임까지 질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자기가 해야 할 책무에 충실하고,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써의 의무를 다 할 뿐입니다.
이 할머니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짙어 보입니다. 그 중에 “조용히 하나님 곁으로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대목과 마지막 소원으로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고 싶다.”는 내용을 보면 기독자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이 출석했던 교회는 이 노인이 극단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을까요? 담임 목사, 교구 담당 부목사, 구역장, 이웃에 살고 있는 교인들은 이 노 교우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혀 몰랐을까요?
많은 의문이 생기는 사건입니다. 우리 교회에, 우리 교구에, 구역에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교인은, 노인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노인을 방치한 것은 교회로서 큰 죄를 짓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주변을 살펴, 고난 속에 살아가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만나겠습니다. 샬롬.
L.A.에서 김 인 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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