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강 순찰자의 외침(4:13-16)
4:13-16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 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이 10절에 이미 쓰였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같은 서두를 다시 한번 반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꿈에 본 장면이 새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본 장면은 전혀 두려움을 갖게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땅의 중앙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점점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잎사귀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이 열리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얼마나 평화스러운 광경입니까?
그런데 새로운 장면, 제2의 장면이 전개됩니다. 이 장면 때문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고 깊은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면이 새로이 전개되기 시작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느부갓네살 임금은 꿈에서 계속 정신을 차리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순찰자라고 하는 것은 잠자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주목해서 보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찰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도 역시 졸지 않고 잠자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한 순찰자, 거룩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천사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다. "그가 소리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사용했습니까? 첫째로 "소리질러," 둘째로 "외쳐서," 셋째로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분명하고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외치는 것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누구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여기에 보면 "순찰자들"이라고 해서 순찰자가 복수로 쓰였습니다. 한 천사가 외치고 그 주변에 다른 천사들이 듣고 있다는 말입니다. 꿈에 본 나무는 베어지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자기를 베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나무를 베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순찰자가 같이 온 순찰자에게 외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찰자가 소리질러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순찰자가 어떻게 하라고 외쳤습니까? 첫째로, 견고한 그 나무를 베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무수한 가지를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아름다운 잎사귀를 떨어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네번째, 그 많은 열매를 다 헤치라고 했습니다. 다섯번째,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여섯번째로,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더 이상 영향력 있는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신하들이 느부갓네살 임금 밑에서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어져서 다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권좌에서는 물러나지만 생명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나무는 생명이 있습니다. 또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나무가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다시금 그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다시 회복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정신병원에 가면 정신병이 심한 환자들은 쇠줄로 묶어놓지 않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동이고"라는 말을 "철과 놋줄로 두르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루터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에 철과 놋줄로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빠져서 미쳐 버렸지만 그래도 왕이고, 또 앞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을 시켜서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주변에서 지키고 보호해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시겠습니다.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들의 풀 가운데 거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나가서 자기 집이나 왕궁에 거한 것이 아니라 들의 풀 가운데 거하는 가련한 모습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들에서 거하기 때문에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짐승처럼 풀 가운데서 짐승들과 더불어 풀을 식량으로 삼아 분량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짐승이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정신이 빠져서 왕이 먹는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옵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텔레비전에서 "워 울프(Were Wolf)"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울프는 늑대입니다. 워(were)라는 것은 be동사의 과거형입니다. 자기가 늑대라고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다가 보름달이 뜨면 자기를 늑대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실제로 이런 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를 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없고 자기는 소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풀 가운데서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실제로 역사에 보면 종종 그런 병에 걸렸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때"는 것은 이것이 칠 일 일수도 있고, 칠 주 일수도 있고, 칠 계절 일수도 있고, 칠 년 일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 다 지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칠 일이라든지 칠 개월은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그 중한 병에서 고쳐지는 것이 칠 개월만에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 칠 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칠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지나갔을 때 그루터기에서 다시 움이 돋고 나무가 자란 것처럼 느부갓네살 임금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이러한 꿈을 주셨습니까? 다니엘 2장에서 이미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금머리였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상이 박살나 버렸습니다. 아무리 금머리였어도, 그만큼 위대하다 해도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내가 아무리 금머리같이 권세가 강하고 귀중한 존재라 할지라도 내 위에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전히 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또 3장에서 금 신상을 만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회개하고 두 손 들고 항복했어야 했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는데 제일 심한 건망증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9:15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면서 주님을 앞세우는 심정으로 살아가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 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이 10절에 이미 쓰였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같은 서두를 다시 한번 반복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꿈에 본 장면이 새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서 본 장면은 전혀 두려움을 갖게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땅의 중앙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점점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잎사귀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이 열리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광경이었습니다. 얼마나 평화스러운 광경입니까?
그런데 새로운 장면, 제2의 장면이 전개됩니다. 이 장면 때문에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고 깊은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면이 새로이 전개되기 시작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느부갓네살 임금은 꿈에서 계속 정신을 차리고 주시하고 있습니다.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순찰자라고 하는 것은 잠자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주목해서 보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찰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도 역시 졸지 않고 잠자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한 순찰자, 거룩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천사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다. "그가 소리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사용했습니까? 첫째로 "소리질러," 둘째로 "외쳐서," 셋째로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분명하고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외치는 것입니까? 순찰자,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누구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외치는 것입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여기에 보면 "순찰자들"이라고 해서 순찰자가 복수로 쓰였습니다. 한 천사가 외치고 그 주변에 다른 천사들이 듣고 있다는 말입니다. 꿈에 본 나무는 베어지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가 자기를 베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나무를 베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순찰자가 같이 온 순찰자에게 외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찰자가 소리질러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순찰자가 어떻게 하라고 외쳤습니까? 첫째로, 견고한 그 나무를 베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무수한 가지를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아름다운 잎사귀를 떨어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네번째, 그 많은 열매를 다 헤치라고 했습니다. 다섯번째,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여섯번째로,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엇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더 이상 영향력 있는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의 신하들이 느부갓네살 임금 밑에서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어져서 다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권좌에서는 물러나지만 생명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나무는 생명이 있습니다. 또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나무가 자라게 됩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다시금 그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다시 회복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정신병원에 가면 정신병이 심한 환자들은 쇠줄로 묶어놓지 않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 "동이고"라는 말을 "철과 놋줄로 두르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루터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에 철과 놋줄로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비록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빠져서 미쳐 버렸지만 그래도 왕이고, 또 앞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을 시켜서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주변에서 지키고 보호해 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시겠습니다.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들의 풀 가운데 거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정신이 나가서 자기 집이나 왕궁에 거한 것이 아니라 들의 풀 가운데 거하는 가련한 모습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들에서 거하기 때문에 이슬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짐승처럼 풀 가운데서 짐승들과 더불어 풀을 식량으로 삼아 분량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짐승이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정신이 빠져서 왕이 먹는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옵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마음이 짐승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텔레비전에서 "워 울프(Were Wolf)"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울프는 늑대입니다. 워(were)라는 것은 be동사의 과거형입니다. 자기가 늑대라고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다가 보름달이 뜨면 자기를 늑대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실제로 이런 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를 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없고 자기는 소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풀 가운데서 풀을 뜯어먹고 삽니다. 실제로 역사에 보면 종종 그런 병에 걸렸던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16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때"는 것은 이것이 칠 일 일수도 있고, 칠 주 일수도 있고, 칠 계절 일수도 있고, 칠 년 일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 다 지나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칠 일이라든지 칠 개월은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그 중한 병에서 고쳐지는 것이 칠 개월만에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 칠 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칠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지나갔을 때 그루터기에서 다시 움이 돋고 나무가 자란 것처럼 느부갓네살 임금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이러한 꿈을 주셨습니까? 다니엘 2장에서 이미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금머리였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상이 박살나 버렸습니다. 아무리 금머리였어도, 그만큼 위대하다 해도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내가 아무리 금머리같이 권세가 강하고 귀중한 존재라 할지라도 내 위에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전히 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또 3장에서 금 신상을 만들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 속에 던졌지만 하나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회개하고 두 손 들고 항복했어야 했는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는데 제일 심한 건망증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9:15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면서 주님을 앞세우는 심정으로 살아가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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