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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가정의달 설교

에덴의 가정 / 창세기2:18-22

by 【고동엽】 2022.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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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덴의 가정                창세기2:18-22

 

I. 행복의 비밀 - 가정․교회

 

오늘은 가정의 달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회사를 설립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학교를 세운 적도 없으시고 국가를 만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복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행복의 비밀을 가정과 교회 안에 숨겨 둔 것입니다.

 

이 교회와 가정은 그냥 만들어 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터져 피가 흐른 다음에야 교회가 세워졌고

아담의 옆구리가 터져 갈비뼈가 뽑혀진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가정의 중요성에 관하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부족, 우리의 죄악 등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 땅에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이 없는 세상, 교회가 없는 세상,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영원히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식적으로 행하신

첫 번째 일이 갈릴리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을 명하사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원인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들이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이 땅에 종교들 가운데 가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종교들이 허다합니다.

가정을 버리고 수도하기 위해 입산함으로 시작된 종교, 제도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신을 주장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기독교는 가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 행복의 비밀을 가정 안에 하나님이 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성령충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감사하며” (19-20)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부부간에 서로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해라. 자식을 복음으로 잘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22-24절)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의 행복이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참 신비한 곳입니다.

이 가정은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입니다.

밖에 나가면 높은 사람, 귀한 사람, 대통령 장관 대접을 받는 사람도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인사하고 낮아집니다.

 

제가 아는 사장님 한분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어린 손자의 말이 됩니다. 손자 녀석은 할아버지를 엎어놓고 등, 허리에 걸터앉아 “이랴” 낄낄낄 하고 할아버지를 타고 온 방을 돌아다닙니다.

이게 가정입니다.

 

또 밖에 나가서는 아주 낮은 자리에서 어려운 일을 하다가도

집에 들어오면 황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인류의 안식처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편히 쉬는 안식처 말입니다.

 

옛날 어느 농가에서 명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온가족이 둘러앉아 인절미를 만드는데 인절미를 만들다 말고 젊은 색시가 고물을 묻혀 사랑하는 남편 입에다 쏙 넣어주고 쏙 넣어 줍니다.

저만큼 시아버님이 바라보고 있는데 군침이 흘러갑니다.

체면 때문에 그것 나 하나 먹자 소리하지 못하고 먼 산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습니다. 때마침 시어머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아버님 드렸냐?”  “아니 다 만들어서 드릴려구요.”

그때 시어머니가 인절미를 한사발 담고 김치 국물을 곁들여서 남편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몇 개 잡수시더니 아들 쪽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색시있냐?

나도 색시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호텔같은 방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값비싼 침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편안히 누울 수 있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인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진수성찬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웃으며 밥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 아니겠습니까? 호화스런 저택에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화목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값비싼 보석을 선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 아내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훌륭한 교양과 인격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명성과 인물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가정공동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같은 가정, 가정같은 교회, 거기에서 행복을 누리고 주님과 더불어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게 이 땅의 분복 아니겠습니까?

 

II. 가정 = 에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주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가정이라는 에덴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에덴을 소중히 지키라” 여기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즐거움, 행복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정에 준 기쁨을 잘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행복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도 있었고 마귀도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먹기 좋은 과일 나무들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었습니다.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었습니다. 긍적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습니다. 흙도 있었고 생기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흙도 될 수 있고 영적인 존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죽으면 천국가는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 믿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때도 천국에서 천국같은 삶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져 가는 것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혼만 하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는 줄 압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행복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누군가 행복이란 옷을 만들어 놓고 결혼만 하면 누가 저절로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행복은 요술이 아니요 마술이 아닙니다. 예술입니다.

결혼만 하면 요술적으로 마술적으로 행복한 가정이 꽃 피어 나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훌륭한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 듯이 온 가족이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서로 인내해야 됩니다.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땀을 흘리며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피를 흘리는 희생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행복의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 몸을 마주치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쁨도 되지만 때로 상처를 주고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아내의 투정 한마디가 남편의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부모의 감정 섞인 징계가 상처가 되기도 됩니다. 자식의 반항 한번이 부모의 행복을 앗아갑니다.

며느리의 태도가, 시어머니의 한마디 충고가 상처가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사랑의 보자기로 덮어가며 서로 소중히 여기며 이 안에서 행복의 꽃을 피어가는 것,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독교 상담학자인 J. 아담스라는 훌륭한 상담학자가 있습니다.

한번은 한 부인이 찾아왔는데 자기 남편하고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요?” 라고 물었더니 꼬깃꼬깃 대학노트 한 권을 가지고 왔는데 지난 15년동안 남편의 어떤 말 한마디, 남편의 실수, 남편의 부족한 점, 허물을 깨알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적어놓았는데 남편의 실수를 색인표까지 만들었습니다. 통계 목록까지 만들었습니다. 빨간줄 파란줄 좍좍 그어놓고 보여주면서 이런 남편하고 어떻게 사냐는 것입니다. 아담스가 말을 하지요. “바로 모든 문제가 이 노트 안에 있군요. 이 노트를 깨끗이 당신의 가슴에서 태워버리기 전까지 당신은 가정을 가질 자격이 없는 여인이요.  돌아가시오.”

 

남편의 실수를 용서할 수 없다면 아내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아내의 허물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라면 남편의 위치를 포기해야 될 사람입니다. 부모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식, 자식의 서투름을 사랑으로 감싸줄 수 없는 부모는 가정의 행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될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가정의 완벽한 모습을 마지막 25절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그랬습니다.

너에게도 실수가 있고 나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노출되어지고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 않은 관계,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벌거벗었는데 왜? 부끄럽습니까? 감추고 싶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 실수가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내 연약함이 허물이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가정 공동체인 것입니다.

남편의 실수 때문에 내 행복이 무너져야 되고, 아내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 가정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III. 결혼 - 돕는 배필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무엇 무엇 때문에 because of의 사랑을 가지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고 나면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은 꿈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을 꿀 맛 같다 서양사람들은 그럽니다.

꿀이 아무리 달지만 무한정 먹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깨가 쏟아진다 그럽니다.

깨가 처음 털어보면 깨가 쏟아지지만 한달 두달 바싹 마른 다음에 털어 보십시오.

빈 껍데기만 나오게끔 되어있습니다.

사랑이란? 달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올시다.

고소하다고 해서 고통과 허무가 전혀 없는 낙원만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축하 편지 한 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뭐라고 편지 쓰나 아내가 궁금해서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남편이 편지 써 내려가는 것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씁니다. “결혼은 참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소중한 결단을 했다. 이 아버지가 행복하듯이 너도 반듯이 행복할 것이다.  아버지의 가정 생활이 멋있듯이 너도 멋있는 삶을 반드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내가 읽다가 말고 흐뭇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재빨리 P.S. 첨언을 했습니다. “방금 네 엄마가 나갔다.  이 바보 멍청아 결혼은 무덤이야. 너는 이제부터 죽었다.”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봉하여 얼른 우체통에 집어 넣었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결혼해도 후회하고 결혼 안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결혼해도 후회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멋진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독신자들이 있습니다. 결혼의 의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직 결혼의 기회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 사별해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재혼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거나 또 그 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독신으로 지내는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에게 특별한 은혜가 있음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독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저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저들의 신랑이 되고 한 가족이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혼자 살아가는 독신자가 있으면 여러분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주님께서 저들의 가족이 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저들의 기도에 절대적으로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자유로 감당할 때에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저들을 먹이고 입힐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오랫동안 살아가다 보면 고집과 아집이 생길 가능성이 있고 불같은 정욕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차라리 결혼해서 사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은 혼자 살아갈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말씀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2:18) 그랬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 신구약 성경 가운데 좋지 못하다는 얘기가 처음 나오는 부분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시고 바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아담을 이끌어 동산으로 나가시더니 생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물고기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20)

 번역이 뭔가 좀 신통치 않아요. 뭔가 이상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아담의 돕는 배필은 될 수 없었다.”  저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짝이 있었습니다. 짝이 없는 것은 나 하나 밖에 없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아내를 맞이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생물들도 아담의 배필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 땅에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을 좋게 만드시기 위하여,

행복하지 못한 것들을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기쁘지 못한 것들을 기쁘시게 만들기 위하여,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고 그랬습니다.

 

여기 돕는 베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이 된다고 그러니까 자존심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뭘 못나서 남이나 돕다가 죽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돕는 배필이라고 그랬습니다. 돕는 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  힘있는 자만이 도울 수가 있습니다.

강자만이 약자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보완의 관계, 성격적인 보완의 관계, 성적인 보완의 관계,

영적인 보완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송강 정철은 부부의 화목을 노래했습니다.

“한몸 둘에 나누어 부부를 만드시니 있을제 함께 늙고 죽으면 함께 간다. 어디서 망령의 것이 눈 흘기려 하느뇨.”

 

역으로 한국 속담에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된장 쉰 것은 1년이 원수요, 배우자 못된 것은 100년이 원수다.”

 

이 짝궁들은 시시한 것 가지고 잘 싸우기도 하고 시시한 것 가지고 쉽게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부딪히는 부부싸움의 논제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거창한 문제, 대단한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하게 되던가요?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 해 보신 분 계십니까? 삼위일체론이 아주 어려운데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때문에 이견이 생겨서 싸워 보신 분 계십니까?

밥 네가 해라. 설것이 좀 도와라. 조금 늦으면 전화 한통 주면 될 텐데 손이 없냐 발가락이 없냐? 이번달에 용돈이 많으니 적으니,

운전하다 말고 이리가라 저리가라, 운전대 맡겼으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유치원 얘들이나 싸울 수 있는 주제가 우리의 부부싸움의 주제 아니었습니까? 이게 부부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였습니까?

참으로 시시한 것 하나가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인들은 남편이 밥만 맛있게 먹어줘도 행복합니다.

거기다가 먹다말고 “야 맛있다. 끝내준다. 죽여준다” 한마디만 하면 온종일 피곤이 싹 가셔지는 것입니다. 그게 부부간의 행복 아니었습니까?

때로는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행복의 신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IV. 떠남의 원리

 

그래서 성경은 뭐라 그럽니까?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마보이 파파걸들이 결혼해 가지고 얼마나 젊은 신혼 부부들이 상처를 많이 받고 있습니까? 잠자다가 새댁이 그럽니다.

“자기 내 꿈 꿔” 그랬더니 “그래 자기도 내 꿈 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신랑이 뭐라고 하냐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그럽니다.

“그래 엄마가 뭐라 그러든” 그러니까 “엄마가 니 꿈까지 꾸어준데” 그러더래요. 이런 신랑하고 살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한심해 지는 거지요.

 

부모들도 자녀들을 떠내 보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원숙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부모와 다른 집에서 살아야 된다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한 집에 모셔야만 효도가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를 떠남으로서 더욱 심화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남의 원리를 몰라서 갈등과 불행을 경험하곤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여기 한몸이라 그러니까 육체적인 결합만을 의미하는데 물론 육체적인 결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영적인 하나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구원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는 영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불신자인 배우자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일 경우 현실적인 고통은 많이 감소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행복이나 참된 만족은 얻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불신자인 배우자가 인격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못한 경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60억 인구가 다 지옥간다고 할지라도 날 낳으신 내 어머니,

내 아버지만큼은 지옥 보내지 않는다.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몸부림해서라도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내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부부가 이 땅에서 한사람은 예수를 믿고 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십시다.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앞에 서게되면 그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짝 지어 행복을 누리며 살던 그 사람, 60억 인구가 다 지옥가더라도 내 남편만은 구원한다.

내 아내만큼은 구원한다. 내 자식만큼은 주님 앞으로 인도한다.

각오하고 기도하고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V. 남편을 인도하는 십계명

 

남편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몇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첫째, 남편과 논쟁에서는 지고 생활에서는 이겨라.

예수믿는 사람이 입만 늘어가지고 말은 졸졸 잘하는데 삶으로 모범이 되지 못하면 남편 전도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생활의 본은 오히려 남편이 더 됩니다. 그래서 하는 얘기가 “우리 남편은 예수를 안 믿는데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훌륭해요” 그쯤되면 남편 교회로 데려오기는 영 글렀습니다. 

 

두 번째, 가정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예수믿는 다는 것을 핑계로 교회 봉사를 핑계로 가정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남편의 눈에 아내가 교회 나감으로 가정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전도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녀 교육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요즘 어버이들이 수염을 잃어버려서 아이들 앞에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내 아내가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아이들을 알뜰살뜰 잘 돌봅니다.

남편은 감복하게끔 되어있습니다.

 

네 번째, 남편의 습관을 다른 사람 앞에서 문제삼지 마십시오.

남편의 인물됨, 성격, 교육, 배경, 나쁜 습관을 교우들이나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행여나 그것이 돌고 돌아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남편의 귀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부인을 신뢰하던 모든 신뢰가 무너지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철없는 개구장이가 돌멩이 하나를 우물에 던집니다. 그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내 말 한마디가 남편의 구원의 길을 영원히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교회내에서 있었던 좋지 못한 일들을 집에 가서 얘기하지 마십시오.

선교회장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여러분 심지어 교우들까지도 연약한 성도들에게는 좋은 얘기만 하는 겁니다. 나는 소화가 되어서 얘기할는지 모르지만 소화되지 못한 어린 교우들은 결정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불신 남편에게 교회의 험담을 얘기해 놓고 나면 그 교회에 가지마! 하고 당장 막고 나서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전도는 딴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겁니다. 내가 섬기는 한소망교회를 부지런히 자랑하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을 자랑하는 겁니다.  자랑이 전도인 겁니다.

 

여섯 번째, 남편 앞에서 내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남편은 싫어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등산 가자. 앞에서는 따라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등 뒤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거는 커다란 기대가 있습니다.

아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확고해 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산 졸졸 따라 나서면 “헤헤 니가 예수 믿는 다고 그러더니 신앙생활도 별 것 아니구나” 당장 그러고 마는 것입니다.

분명하고 강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면 아내가 믿는 신앙에 뭔가 있구나.

생명력이 있구나. 거기에 힘이 있어. 능력이 있어.

신앙의 경외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예수믿는 아내를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남편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그를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남자의 체질은 칭찬을 받지 못하면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맹추들입니다.

아내가 칭찬하지 않으면 스스로 칭찬하는 바보들이 남자들입니다.

칭찬할 거리가 없으면 찾아서 하십시오.

찾다가 찾다가 안되면 만들어서 하십시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칭찬을 하면 남편의 장점이 살아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단점을 얘기하면 묘하게 단점이 자꾸 부각이 되어지고 단점이 커져 보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점을 들춰내고 그 사람을 칭찬하게 되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칭찬하는 모습대로 바뀌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덟 번째, 항상 남편의 영혼 구원문제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때로 신경질이 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나면 행여나 내 남편 구원받는 길을 내가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란 말입니다. 

 

아홉 번째, 남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어떤 부인이 오랫동안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눈물 지으며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날 보고 어떡하라구요”

목사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이제는 남편 앞에서 하나님 얘기하는 걸 잠깐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남편 얘기 좀 하십시오” 기도하라는 얘기입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저의 영혼을 건져 주실 것입니다.

 

열 번째, 남편이 신앙인이 된 것을 믿고 가정에 모든 분위기를

        희망적으로 바꾸십시오.

 

온 가족이 훌륭한 신앙인이 된 것처럼 말하고 그렇게 믿으십시오.

남편이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훌륭한 교회 기둥이 된 것처럼

가정의 모든 분위기를 신앙적인 분위기로 바꾸어 보십시오.

 

에덴을 지키십시오. 구원공동체로 지켜가십시오.

가정의 행복을 지켜가십시오. 주님의 명령입니다.

지켜갈 수 있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지켜가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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