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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대강절 설교

대림절을 맞으면서 (요 9:1-12 / 대림절 첫째 주일 낮 예배) |

by 【고동엽】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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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비타협적이고 편협하다는 비판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생각조차도

우리 기독교가 너무 완고하고 꽉 막혀 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때문에 좀 더 문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들도 껴안아주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몇 년 들어서 부처님 오신 날에 사찰 앞에다가

교회의 이름으로 부처님의 오심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를 붙이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절에 가서 설교하는 목사도 있고

교회에 와서 불법을 설파하는 스님들까지 등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좀 더 멋지게 보이고 좀 더 수준이 높아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뭡니까?

호박에 페인트로 줄을 긋는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불교를 껴안고,

유교와 사랑하고,

천주교를 품어주더라도 기독교는 기독교일 뿐입니다.

플래카드 몇 장 걸고, 목사와 스님이 서로 왕래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달라지느냐는 겁니다.

전혀 달라지질 않습니다.

 

왜죠?

다른 종교와 교류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가치가

우리 기독교에는 진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가 스님과 밥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와 여타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합해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봉사활동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구원의 계획이 달라지질 않습니다.

한마디로 구원관이 달라지질 않는 겁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손을 잡고 가더라도

구원에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기적에 있어서

찾아 볼 수 있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은 날 때부터 시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밝은 빛으로 나와서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밝다는 말과 빛이라는 단어가 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밝음이고 빛입니다.

절대로 알 수 가 없습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런 상태로 죽을 때까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뜨고 살더라도 살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두 눈 감고 살면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힘들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강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찾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오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합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난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들과 전혀 다르다고 하는 이유는 뭡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사람이 주체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형편과 입장이 우선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사람 중심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 종교를 찾는 자기만 좋으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중심과 요체가 언제나 내가 아닙니다.

나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더러 하나님과 이웃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서 건져주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구원해 주신다는 겁니다.

 

1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분명히 예수님께서 먼저 이 시각장애인을 보셨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지금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찾을 생각을 했더라도 자신의 상태와 처지로 보면

전혀 예수님을 찾지 못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보시고 찾으신 겁니다.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처럼 우리가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겁니다.

찾아오시되 우리의 어떤 정성이나 마음이나 열정이나 간절함을 보시고

찾아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찾아오십니다.

 

구원에 있어서 어떤 가능성이나 구원받을만한 조건을

우리가 충분히 만족시켜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각장애인처럼 전혀 뜻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에 찾아오시는 겁니다.

때문에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행위에서 온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신앙적인 행동이나 마음이나 생각이 가져온 구원이 아니고

전혀 아무 생각 없을 때에 주신 선물의 구원이고 은혜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처럼 정성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는 사람들의 것을 무조건 받기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먼저 뭔가를 드려야만 하는 겁니다.

때문에 세상의 종교는 언제든지 물질적인 문제와 육체적인 문제에 치중하고 집중할 뿐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필요와 공급의 문제에만 목숨 거는 겁니다.

내세를 이야기하는 종교도 있지만 이 땅에서 그 신에게 잘해야만 내세가 보장되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관심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이미 들어가기로 예약이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천국을 들어가는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천국을 들어가는 백성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레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거룩의 문제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룩해야만 합니다.

거룩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면 이제 거룩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겁니다.

 

이제 우리들의 싸움은 거룩의 싸움입니다.

이 세상 썩어질  것들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인격의 싸움입니다.

인격의 싸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거룩은 행위가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존재와 관계의 문제입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5-7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빛입니다.

빛의 경지에 이르라는, 빛을 비추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격의 문제입니다.

삶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다 해야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진흙을 침에 이겨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순종입니다.

다른 이들은 뭐라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라야

오늘의 현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빛입니다.

빛으로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빛의 존재됨을 드러내고 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 존재에 어디 고장 난 곳은 없는지

한 번 우리 자신들을 확인하고 살펴보면서 이 기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무엇으로 확인해야하는지 모르신다면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깊게 생각을 하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계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 앞에 내가 해야만 할 순종이 있다고

오늘 시각장애인이 눈을 떠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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