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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신8:1-10(송년주일)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by 【고동엽】 2022. 4. 3.

신8:1-10(송년주일)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한 해를 마치는 송년주일입니다. 한 해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예수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소서” 라고 외치며 새 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사업을 하는 어떤 집사님이 새벽에 나와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보시기에 백만년은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했더니 하나님이 “백만년은 나에게 1초에 불과하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러면 백억은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백억은 나에게 1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업가가 말했답니다. “하나님, 그러면 나에게 1원만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했습니다. “알았다. 1초만 기다려라”. 하나님에게 백만년이 1초라면 지난 1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영원이 순간이고 순간이 영원입니다. 그 빠른 시간속에서 우리는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해를 보내는 여러분의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입니까?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여러분도 “우물쭈물하다가 여기 까지 왔어” 말하겠습니까? 중세의 어느 왕이 여러 가지 일로 걱정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혜로운 신하가 왕을 위로했습니다. “왕이여,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교훈합니다. 왕은 그것을 기억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으소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신하가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입니다”. 여러분도 힘들고 괴로웠던 한 해를 보내면서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하면서 위로를 받습니까? 그러나 만일 저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한 해, 아쉬움도 많았지만 감사할 일도 많았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를 돌고 돌아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는 것처럼 2010년 광야의 끝자락에서 뒤를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때 참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 성경은 세 가지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때문에 감사합니다

지난 한 해 광야생활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많았지만 가장 큰 은혜는 만나로 먹이신 은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만 60만이었으니 남녀노소 합쳐서 약 300만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무슨 수로 매일 먹이겠습니까? 빵을 먹이기 위해 공장을 지어야 한다면 수 백개는 지었어야 합니다. 비행기로 음식을 날라야 한다면 매일 비행기 수 백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빵을 만들 방법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겠습니까? 그때 하늘에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출16:4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더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만나가 하늘에서 내린 것입니다. 그나마 비처럼 쏟아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한 해동안 먹고 마신 만나는 모두 하늘에서 내린 것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한 달동안 수고해서 얻은 물질도 사실은 회사가 준 것이 아닙니다. 안되는 세계 경제를 내가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또 있습니다. 인도하신 은혜입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가 여기까지 오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고 에벤에셀,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앞서 행하셨다” 말합니다. 출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앞서 행하실 뿐 아니라 안고 가셨습니다.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의 행로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에벤에셀 하나님입니다. "감사하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감사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살아 계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여러분은 한 해를 무엇을 감사합니까? 별로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이지선 씨는 오빠의 차로 귀가 하던 중 교통사고로 전신 3도의 중화상을 입었습니다. 매일 진통제를 맞으며 하루에 두 번, 피부 대신 붙여놓아던 거즈를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했습니다. 아픈게 뭔지, 사는 게 뭔지,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이기게 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어느날 엄마가 “지선아, 우리 하루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몸은 힘들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불평할 일밖에 없는 데 신기하게도 감사할 것을 찾으니 감사가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갔던 날,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처음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입에 밥을 넣던 날, 제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손이 아파 문도 열지 못했는데, 처음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던 날, 내 손으로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처음 손가락으로 환자복 단춧구멍 채우던 날, 너무 감사했습니다. 걸어서 계단 몇 층을 올라가던 날, 자기 발로 계단을 오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물에 발을 담그고 발을 씻는 날, 그래도 씻을 수 있는 발이 있어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찾다보면 많아지고 안 찾으면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즐겨 보는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어느 추수감사절, 찰리 브라운의 가

족이 식탁에 모였습니다. 따뜻한 벽난로에다 먹음직스러운 칠면조 요리, 그리고 온

갖 선물에 둘러싸여 온 가족이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강아지 스누피는 창밖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홀로 고독을 씹고 있었습니다. 그는 브라운이 가져다 준 뼈다귀를

핥으며 생각했습니다. 스누피는 “나는 왜 이렇게 쓸쓸한가?”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

습니다. 그때 식탁에 올려진 칠면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아, 내가 저 식탁 위의 칠면조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칠면조였다

면 오늘 죽는 날인데.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잖아?”. 늘 감사는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이 나빠 보이지만 이보다 더 나쁠 수 있는

상황은 언제라도 있는 것입니다. 큰 것만 찾으니까 없어 보입니다. 작은 감사를 찾

으면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지선씨처럼 내 손으로 밥만 먹어도, 내 발로 계단만 걸

어 올라가도, 내 몸으로 직장에 나가고 내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볼 수 만 있어도

감사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받은 고난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사는 그것만 감사가 아닙니다. 받은 고난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감사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주신 고난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신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여기에 “징계”란 말이 나옵니다. 이 “징계”는 “훈련”이란 뜻입니다. 광야는 훈련장소입니다. 하이킹하는 사람이 훈련하기에 가장 좋습니다. 극기 훈련으로도 좋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훈련은 생활훈련이요 영적 훈련입니다. 광야를 걷는 사람은 크게 다섯 가지로 훈련을 받습니다. 첫째 먹고 마시는 훈련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훈련인지. 애굽에서 배불리 먹던 채소와 고기는 먹지 못하고 오직 만나만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힘들지 않았습니까? 취업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두 번째 훈련은 단조로운 일상의 훈련입니다. 광야의 풍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매일 걸어도 그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중의 하나가 일상의 단조로움입니다. 오늘이 어제같고 어제가 오늘같은 삶은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여러분도 지난 한 해 그런 길을 걸어 왔습니다. 때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갈등하고 사는 것이 세 번째 광야 훈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사람이 40년을 함께 걸었다면 얼마나 많이 부딪치며 갈등하며 살았겠습니까? 상처는 늘 가까운 사람끼리 주고 받습니다. 여러분에게 지난 한 해 상처주고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은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고슴도치의 사랑때문입니다. 고슴도치는 가깝게 몸을 지댈수록 서로 찌릅니다. 가족이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광야의 네 번째 훈련은 대적들, 방해꾼들로 인한 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는 곳마다 방해를 받았습니다. 르비딤에서는 아말렉의 공격을 받고 요르단에서는 에돔족속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모압에서는 발람의 저주까지 받을 뻔 했습니다. 그 대적자, 방해군들 때문에 여러번 길이 막혔습니다. 민21:4입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땅을 둘러 행하려 하다가 길로 인해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러분도 한 해동안 마음이 상했습니까? 가려는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데 갑자기 방해군이 나타나 길을 막았습니까? 대학의 길을 막고 사업의 길을 막고 건강의 길을 막았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상했습니까?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생기는 마지막 고난이 소망을 사라지게 하는 고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고 하루 하루가 단조롭고 가까운 사람하고 부딛치고 대적자들이 길을 막으면 영혼은 지치고 소망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생기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리고 낙심하면 우리는 살 소망은 끊어집니다. 잠13:12절 말씀과 같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는 소망이 사라지는 위기입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를 지나오면서 이런 고난을 겪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왜 그런 고난이 오는가입니다. 2절입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함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우리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겸손해졌습니다. 배고파 보니 가난한 사람도 알겠고 아파보니 병원에 있는 사람도 알겠습니다. 눈물로 젖은 빵을 먹어 보니 인생도 알겠습니다. 경제학자 갈브레이스가 “풍요속의 빈곤”이란 책을 썼습니다. 70년대이후 90년대 중반까지의 풍요로운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I.M.F를 주시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우리가 훈련할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가난속에서 풍요로워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느 훈련이 더 어렵겠습니까? 가난할 때 부요하게 사는 훈련이 더 어렵겠습니까? 풍요로울 때 가난해지는 훈련이 더 어렵겠습니까? 풍요러울 때 가난해지는 훈련이 더 어렵습니다. 차라리 가난할 때 부요하게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사는 훈련, 어려워도 만족하는 훈련”, 그 훈련이 잘 되어야 풍요로울 때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검소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알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십니다. 6절입니다. 신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게 하는 것이 고난의 최종목적입니다. 인생 광야에서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의 현상만 보고 일희일비하지 고난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의 본질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누가 너의 참 하나님이냐?” 이것을 묻는 것이 고난의 본질입니다.

 

어떤 교우가 너무 힘들어 교회를 안 나옵니다. 이 분은 세상에서 잘 나가던 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교회를 안나옵니다. 제가 위로하며 전화했습니다. "집사님, 힘드시죠? 그래도 교회는 나오셔야죠“. 그랬더니 그 분이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힘들어 잠시 교회 쉬겠습니다“. "교회를 쉬다니요?” “목사님, 솔직히 사람 보기도 힘들고요. 하나님도 너무 하다 싶어요. 앞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나갈께요”. 저는 그를 이해했지만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그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난이 왔을 때 고난의 겉모습만 보고 고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네 사업만 보고 살았다. 이제는 나를 바라 보아라”. 이것이 고난의 메시지입니다. 고난이 없어도 하나님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 바라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닙니까?

 

그래서 가장 큰 불행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할 때 하나님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누가 네 하나님이냐? 네 사업이냐? 나냐? 너는 지금까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네 사업을 내가 축복하고 내가 도와주었는 데도 너는 내가 잘해서 잘 된 줄 알고 있다. 앞으로도 내 사업은 내가 인도하겠다. 내가 복을 주겠다. 사업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나만 바라보아라”. 여러분, 고난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고난당할 때 교회 떠나지 마세요. 고난당할 때 사람 피하지 마세요. 고난당할 때 기도를 쉬지 마세요. 고난은 곧 하나님이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고난당할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힘들어 보여도 언젠가 끝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우리의 고난이 아니라 축복이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역사가 기록된 것은 출애굽기 12장부터 신명기 34장까지입니다. 모두 128장입니다. 그중에 가나안에 도착한 기록은 단 1장밖에 안됩니다. 128장 중에 127장이 광야이야기, 나머지 한 장이 가나안이야기입니다. 압도적으로 광야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좋은 일보다 어려운 잉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반드시 끝난다.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고 힘들어 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라에서 조금 가다보니 “엘림”이 나왔습니다. 실제 시나이광야에서 마라에서 엘림까지 약 2km밖에 되지 않습니다. 낙타로 가면 2시간정도, 자동차로 가면 15분밖에 안됩니다. 그 짧은 거리에 엘림의 종려나무가 있는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엘림의 종려나무가 그렇게 가깝게 있는 줄 알았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서 탄식하고 있었겠습니까? 금방 끝납니다. 곧 끝납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광야는 없습니다. 인생에 마라같은 고난이 많지만 언제나 마라는 아닙니다. 차로 15분 달려 고개마루 돌면 엘림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힘들었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광야 길 걸으시느라 애썻습니다. 그러나 엘림이 멀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겸손하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잠시 잊고 살았던 하나님 바라보았으니 은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

주실 희망 때문에 감사합니다.

광야같은 한 해를 살면서 감사한 마지막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희망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광야에서 혹독하게 훈련하신 데는 진짜 좋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7절 이하에 보시죠. 신8:7-20,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내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왜 그렇게 하나님이 40년동안 그 백성을 훈련하셨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래의 희망때문입니다. 찬란한 내일의 꿈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절로 힘이 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은 16절입니다. 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 말씀의 키는 “마침내”입니다. 왜 “마침내”가 중요합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당한 모든 고난은 마지막에 축복으로 마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고난 그 자체를 위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침내”, 가나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미래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광야에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이미 가나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우리는 살리고 죽이는 힘입니다. 사람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런던의 어떤 남자가 그랬답니다.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어 자살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호수로 가는 도중에 어느 미술가게앞을 지나게 되었는 데 그 가게앞에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한 여인이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세상 꼭대기에 앉아 있고 하프가 들고 있는데 줄이 하나밖에 없는 하프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 줄 밖에 없는 하프를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보니 “희망”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말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마지막 줄이 있어”. 그가 뛰어가면서 생각한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에게 마지막 남은 한 줄 하프줄임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붙드는 것은 이 마지막 한 줄, 희망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어로 “희망”을 “티크바”라고 합니다. 이 말은 “노끈”이란 뜻입니다. 노끈은 줄입니다. 여러 개 실을 머리처럼 땋아 놓은 밧줄 모양의 줄입니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붙잡는 마지막 노끈입니다. 줄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줄 다 끊어지고 마지막 한 줄 남았을 때 그것을 목숨을 다해 붙잡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끈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붙잡는 것이 희망입니다. 에레미아가 고백했습니다. 애3:21-22,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도 희망으로 갖고 삽니다. 세상을 구원할 희망,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희망, 믿는 자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보는 희망,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희망, 그래서 희망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희망없이는 못 삽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이나 인내한 것은 아들을 기다리는 희망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애굽에서 고생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대한 희망때문이었습니다. 한나가 눈물로 기도한 것도, 다윗이 유다광야를 쫓겨다닌 것도, 초대교회 성도가 로마의 카타콤에서 수백만이 죽은 것도, 우리가 고난많은 이 땅에서 굳세게 사는 것도 희망 때문입니다. 2005년 이후 5년, 우리 교회는 판교시대의 희망 때문에 살아 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민족구원의 희망 때문에 살아 갈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해를 마치며 희망가운데 새해를 기다립니까?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아름다운 땅을 희망하십시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내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과 함께 승리할 내일을 꿈꾸십시오. 지난 한 해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시는 길에 영원토록 동행하기를 축복합니다.

 

 

 

 

 

 

 

 

 

 

 

 

신8:1-10(송년주일) 2010.12.26(일)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하나님의 은혜때문에 감사합니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출16:4,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더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출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의 행로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

 

“감사하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감사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살아 계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받은 고난 때문에 감사합니다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신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민21: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땅을 둘러 행하려 하다가 길로 인해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잠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신8:2,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신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주실 희망 때문에 감사합니다.

신8:7-20,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내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애3:21-22,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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