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by 【고동엽】 2022. 3. 26.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12:1-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참 많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은혜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것도 은혜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재 우리의 삶을 위해서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기도는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날 찾아와 내가 도와줄게” 하고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고민을 내놓고 상담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특히 오늘 현대인들은 내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이 더 고독한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다 털어놓고 상담하고 호소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 나의 앞길을 위해서,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또 마음 놓고 찾아가 탄원할 대상이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해도 한밤중에 찾아가서 붙잡고 넋두리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렇게 찾아갈 수 있습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마음에 쌓이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때는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풀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원이라는 곳을 찾아갑니다. 또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위급할 때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은 큰 빽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호신술이고 무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실감나는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의 죽음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우리 두 아들을 이 다음 예수님이 성공했을 때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야고보 형제는 자신 있게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그 잔이 포도주쯤 되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은 포도주잔이 아니고 죽음의 잔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말 그대로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그 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제자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철야를 하면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모두 한마음으로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탄원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신앙인의 무기 가운데 가장 강한 무기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적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밤에 제자들이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통성기도”입니다.

 

 

 

 

 

 

 

 

 

저는 묵상의 기도를 참 중요시하고 좋아합니다. 묵상의 기도는 마치 이슬비와 같은 기도입니다. 조용하면서도 깊고 위력 있는 기도가 묵상의 기도입니다. 이슬비가 옷을 적시듯이 우리의 마음을 흠뻑 적시는 기도가 묵상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때로 통성의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날 제자들이 한 기도는 그렇게 고상하고 조용한 묵상의 기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에는 지금 너무나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생결단하고 외치며 부르짖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때로 이 통성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냥 조용히 앉아서 고상하게 묵상기도만 하기엔 너무 살아가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오늘 같은 시대는 살아가는 동안 안타까운 일이 여기저기서 터집니다. 그런 때는 조용히 기도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통성기도가 중요합니다. 통성기도가 위력이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체면도 중요하고 남도 의식해야 하고 나의 품위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빠져있을 때는 고상함과 품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체면이나 품위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부르짖어도 시원치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밤에 제자들은 사생결단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7절을 보면 그 밤에 하나님이 베드로를 내보내십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때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막힌 담을 헐 수 있습니다. 막힌 현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산적한 문제들을 풀어가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이 통성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나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면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믿음이 생깁니다. 인간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함께 살고 모여서 살고 이웃하며 살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신앙생활은 더 함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모여서 함께 통성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모두가 입을 모아 함께 중보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더 귀한 기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라는 말은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 되는 모습입니다. 하나 된 단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능률이 있고 단결이 있습니다. 하나 된 찬송, 얼마나 화음이 부드럽고 은혜가 있겠습니까.  갈라진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하나 된 나라, 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나라가 갈라지니까 국론이 분열되고 우리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들까지 불화해집니다. 하나 된 가정, 얼마나 좋습니까. 거기에 안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고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진 가정은 이미 가정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 된 기도,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는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12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야고보가 순교를 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좋아하고 제자들은 별로 저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내친김에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삼엄하게 경비를 하게 합니다. 그러니 밖에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되었겠습니까. 그래서 5절을 보면 이 제자들이 그 밤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조용히 하는 묵상의 기도였겠습니까. 얼마나 큰소리로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의 기도제목으로 뜨겁게 기도했겠습니까. 이것이 통성기도이고 중보의 기도입니다. 목적이 아주 뚜렷한 기도가 통성의 기도이고 중보의 기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큰소리로 기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큰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누군가의 아픔을 생각하고 함께 기도해 준다는 것은 힘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돕는 방법 가운데 중보의 기도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웃이 아주 절박해할 때 함께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 이보다 더 좋은 도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두 모여 한마음으로 뜨겁게 한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면 듣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성경 7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밤에 갇혀있는 감옥의 문을 열고 베드로를 무사히 피신시킵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더라”. 그렇게 해서 그 밤에 베드로가 극적으로 석방됩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스릴있는 일입니까.

 

 

 

 

  저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도움이고 아름다운 일이고 협동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는 이 합심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듣고 응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이런 기도가 필요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최선으로 도울 길은 이렇게 합심해서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그릇된 기도태도”입니다.

 

 

 

 

 

 

 

 

우리들이 기도생활하면서 범하게 되는 아주 그릇된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 밤에 제자들이 모여 뜨겁게 기도해서 응답되어 옥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석방되어 돌아옵니다. 베드로가 풀려나 마가의 다락방으로 와 보니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자신이 이렇게 기적적으로 풀려난 것은 제자들이 기도해서 풀려났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밖에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나왔다가 밖에 온 사람이 베드로인줄 알고 그만 달려 들어가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밖에 베드로가 왔다”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하는 말이 15절을 보면 “네가 미쳤냐”고 혼을 냅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가 어떻게 여길 올 수 있다는 말이냐”고 혼을 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더 큰소리로 “밖에 베드로가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천사일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 제자들이 참 맹랑한 사람들입니다. 천사라고 믿었으면 빨리 밖에 나가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천사일 것이다 하고 말하면서도 그냥 앉아 있습니다. 그때 밖에서 베드로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비로소 제자들이 밖에 나가 보니 정말 베드로가 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입니다. 모든 기도자들은 기도할 때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주십시오. 주실 줄 믿습니다“하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여기 제자들도 그렇게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베드로를 이 밤에 석방시켜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랬으면 그날 밤 제자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었으면 “자 이제 몇 시에 베드로가 돌아올까 내기나 합시다”하고 기다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을 다 했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시나 기다려봅시다 하고 주시하며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그날 밤 그렇게 기도해서 그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감옥에 갇혀있던 베드로가 지금 문밖에 와 있습니다. 여자아이가 나가 보았더니 과연 베드로가 문밖에 와 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떨렸겠습니까. 그래서 뛰어 들어와 제자들에게 밖에 베드로가 와 있다고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하던 제자들이 하는 말이 “미쳤냐 감옥에 있는 베드로가 여길 오게”하고 나무랍니다. “아니라 정말 밖에 베드로가 와 있다”고 하자 “그러면 천사일 것이다”하고 소녀에게 핀잔을 줍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 쉽게 범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이 종종 나타납니다.

 

 

 

병원 입원실로 환자를 심방갑니다. 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묘지는 준비되었습니까”. 우리들이 늘 하는 습관입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종교사상가 내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나라 전체가 가물어서 큰 재난을 받고 있을 때 온 가족을 모아놓고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땅에 비를 주십시오, 나라 전체가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를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아이가 학교를 가면서 “우산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촌이 버럭 화를 내면서 “미쳤냐 청천하늘에서 비가 오게”하고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방금 비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나라가 온통 가물어서 야단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알렸습니다. “나라가 너무 가물어 야단났으니 오늘 오후에는 모두 산에 가서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두 나오십시오”. 그래서 교인들이 모여 산으로 올라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비를 주십시오. 오늘 당장 비를 주십시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런데 저녁때가 되면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기도회가 끝나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두 산을 내려오는데 그때 우산을 받쳐 들고 내려오는 사람은 오직 어린 아이 하나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식으로 기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오늘 밤 당장 베드로를 석방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그날 밤 당장 석방되어 문밖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하고 달려 나가 맞아야 했습니다. 아니 뛰어나갈 것도 없이 나가 기다리다가 맞이해야 했는데 오늘 밤 당장 보내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정작 베드로가 왔는데 반응은 “네가 미쳤냐” 이었습니다. 신앙인 모두가 범하는 모습입니다. 기도는 “너희가 세상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든 날 찾아와 내가 도와줄게“하고 약속하신 것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지가 “오늘 미국인들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응답이 87%. 반드시 응답은 없어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는 응답이 82%.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면 낫는다는 응답이 79%.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대답이 73%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미국인들의 기도생활이 아주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허어브 밀러라는 분이 “하나님과의 연결(Connecting with God)”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용하던 한동네에 나이트 클럽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나이트 클럽이 들어온 뒤로 시끄러워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몇 번 이야기를 했지만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모여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저 나이트클럽이 이 동네서 옮겨가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여 주십시요”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소나기가 내리면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그만 나이트 클럽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나이트클럽 주인이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교회가 불로 심판해 달라고 기도해서 나이트클럽에 불이 났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 화재책임자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판사가 양측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재판장이 양측의 의견을 다 듣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먼저 나이트 클럽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나이트클럽에 불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분명히 기도해서 불이 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교회의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나이트클럽에 불이 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명인 명설교편◑ > 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둠 속의 빛  (0) 2022.03.26
여인의 향기  (0) 2022.03.26
역사와 믿음  (0) 2022.03.26
영적성장과 시련  (0) 2022.03.26
영혼을 돌보는 중보의 삶(4)  (0) 2022.03.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