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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은? (골 3:15-17)

by 【고동엽】 2022. 3. 19.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은? (골 3:15-17)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양, 내용, 가치, 형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의 삶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믿음 안에서 살기 때문에 행복하고 늘 감사하고 항상 기쁘고 즐겁고 찬양의 삶을 살면 그 건강한 삶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고 확산되고 파급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삶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입니다. /믿/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나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무언으로 격려를 입게 됩니다. 그 삶은 결국 이 세상을 밝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치유하는 삶이 됩니다. 그렇게 사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①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15)
  이 말씀은 '마음을 잘 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행복하기로 결심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불행이 어디서 시작되는가 하면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행복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행복하다,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살면 마음 가득히 행복함이 싸여옵니다. /아멘!/
  원래 설교는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잔소리를 하면 '또 설교하느냐'고 합니다. '재미없다'고 행각하면 재미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시작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 안 된다'고 생각하면 곧 바로 잡념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듣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설교가 은혜롭고 재미가 있어집니다. /할/
  그렇습니다. 무엇이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행복은 마음으로 그렇게 결정하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하다'는 마음부터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아멘!/

 

  ②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여기 '감사하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될 수 있으면 감사하도록 하라'가 아니고 '너희는 반드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행복의 방법을 강구하고 만들고 연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 감사, 기쁨은 내가 만들고 연구하고 조성해야 얻어집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감사는 인격의 척도이고, 신앙생활에서의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혼자 사는 사람도 없고 혼자 힘으로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할 줄도 모르는 뻔뻔한 사람도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의 일화입니다. 아직 문명 사회를 접하지 못한 원주민이 거의 죽게 되어 실려 왔습니다. 열 내리는 약과 치료제 투여하여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그 원주민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 하는 말이 '죽을 목숨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오히려 '집에 돌아가면 먹을 것이 없으니 식량을 내 놓으라'고 했답니다. 우리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 노라'는 격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의 척도이고, 그 사람의 인격의 정도를 재는 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이 나에게 베풀어준 고마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것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사람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③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라!(16)
  마음에 찬송과 노래와 감사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태가 밖으로 표현되게 되고 보이고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이고 모습입니다.
  어떤 연탄장수는 매일같이 연탄마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늘 웃는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매일같이 검은 얼굴에 흰 이를 내 놓고 웃고 다니는 그에게 사람들이 물기를 '아저씨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워서 웃고 다닙니까?'고 하자 그 연탄장수 아저씨는 역시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설명해도 모를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 감사의 마음을 설명한들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16)고 했습니다. 그 말은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이 세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행복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때로 마음에 남모르는 아픔, 우울함, 쓸쓸함, 원망, 불안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표현하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픔들은 잊고 극복하고 늘 행복한 마음으로 행복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근심들은 그냥 물러가 버립니다.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내 마음속에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행복을 그려야 합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자주 외쳐야 합니다.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행동하면 정말 불행해집니다. '우리 집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생각하면 행복해집니다. ' 우리교회는 행복한 교회다'하고 생각하면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나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면 더 큰 은혜가 주어집니다. /'믿/아멘!/
  그래서 사람은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비전이 마음에 씨로 잉태되면 10년 20년 후 그 모습, 그 생각대로 됩니다. /할/

 

  ④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17)
  이 말씀은 나만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 이 행복을 전염시키라는 말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만 행복하다'하고 살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나를 행복하게 한 다음에 너를 행복하게 만들고 이웃을, 형제를,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삶이 중보의 삶입니다. /아멘!/ 먼저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더 큰 행복한 삶입니다.
  어느 여인이 차를 타고 달리는데 도중에 차가 멈추었습니다. 응급처치를 해 보았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했습니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보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암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차 한대가 다가오더니 신사 한 사람이 내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엔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신사는 한참 엔진을 만져보더니 '이제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합니다. 시동이 잘 걸렸습니다. 너무 신기했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사례하려고 지갑을 열었더니 한사코 사양합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니까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차를 설계한 헨리 포드입니다' 그리고는 차를 몰고 갔습니다.  이 얼마나 뒷맛이 상큼하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입니까? /할/
  어떤 분이 이 나라가 싫어서 이민 가려고 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거짓과 속임과 무책임과 부정과 이기주의에 신물이 났습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차해 놓은 차를 누가 긁어놓았습니다. 순간 또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차 유리에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운전이 서툴러 차에 금을 그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연락방법은 없고 시간을 없어서 그냥 갑니다, 연락처를 적어 놓았으니 연락주시면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 분이 그 쪽지를 받아들고 그 날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반갑고 행복했던지 '차에 금을 그었을 때는 빨리 도망가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가, 이 나라는 아직도 희망이 있는 나라구나' 생각하고 이 나라가 싫어 이민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의무이고 삶이고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삶입니다. 그렇게 살 때 병들고 오염되고 편견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치유하고 따뜻하게 하고 중보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17절에 보니까 감사의 원료, 행복의 원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성도의 인감도장입니다.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성도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인감도장입니다. 여러분, 인감도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떤 직함을 가진 사람의 인감도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인감도장을 우리에게 주셨고 무슨 일을 하든 이것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감사도 그의 이름을 힘입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너무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하더라도 내 사욕으로 남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로마여행을 했는데 어느 상점에 가보니 아주 값진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구라파에서도 귀족이 아니면 못 먹는 그런 포도주였는데 이것을 사가려고 하니 세관에 걸릴 것 같아서 꾀를 내었습니다. 허름한 병으로 그 포도주를 담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맑은 흰색 포도주를 담아서 생수인 것처럼 가장을 했습니다.
  공항에서 세관원이 '부인, 이 병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로마에 있는 성수인데 모두 사 가지고 와서 저도 한 병 샀습니다.' 이상해서 '이리 봅시다'하고 뚜껑을 열고 마셔보니 포도주였습니다. '부인, 이건 성수가 아니라 반입이 금지되어 있는 포도줍니다.' 그때 이 부인이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이 여기서도 일어났군요' 여러분, 예수의 이름을 이런 데에 사용하면 안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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