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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만물을 새롭게(요한계시록 21:1-8)

by 【고동엽】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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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새롭게(요한계시록 21:1-8)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 것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전도서 1장에서는 날[日]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 풍습 속에 유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유행이라 하는 것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옛날에 유행했던 것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있습니까? 다만 새 경험이 있을 뿐입니다. 새 것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경험 속에 그것이 새 경험으로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더구나 시간에 의한 새 것은 없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시간에 의한 낡은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시간이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뒤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시간은 그대로 있고 사람이 자꾸 뒤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언어 개념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시간은 뒤로 간다고 의식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의식에도 이런 개념이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의 예로 우리말에 죽었다는 것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 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우리가 서랍 속에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듯이 미리 정해져 있는 그것을 우리가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낡아지고 있습니다. 새 것이 아니라 낡아지는 것이요 후퇴하는 것입니다.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은 사실을 두고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설날이 오면 한 살씩 더 먹었다고 손가락을 헤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른이나 노인네들은 똑같은 설날을 맞이하지만 지금 나이에 한 살을 더 얹어야 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금치 못하며 심지어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허무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결국 시간의 의미는 그가 체험하는 그 경험에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어떤 의미로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앞에는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경험이 있을 따름입니다.

새롭다고 하는 말에는 형용사와 동사가 있습니다. 본문의 성경말씀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이노스"라는 말과 "아나네오"라고 하는 말은 형용사가 동사로 바뀌는 과정을 말합니다. 동양의 철학 서적인「대학」(大學)에도 "신신"(新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 신(新)자 둘을 거듭 사용하는데 하나는 형용사이고 하나는 동사라고 풀이합니다. "새로움이 새로워진다", 혹은 '새로워지는 일이 새로워진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형용사로서의 동사를 기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새로움은 동사로 이루어져야 하며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새롭게 하는 자에게 새로움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새로워져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새로워지기보다는 낡아지고 이것을 거슬려 새롭게 함으로써 비로소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변화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움을 얻기 위해 하다 못해 옷장의 위치를 바꾼다던가 혹은 머리 모양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정신적인 변화로서의 새로움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외형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지만 내면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양 사람과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 살 때 특히 잘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옷을 사기 위해 상가에 가면 상점 주인은 저마다 자기 집 옷이 더 질기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기를 권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옷 한 벌로 몇 대를 입을 수 있다고 까지 장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귀가 솔깃하여져서 그 옷을 사고야 말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물건을 선전할 때 "Something New"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엇인가 좀 새롭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변화 혹은 바꾼다는 것(change)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흔히 하는 불평은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It does not make any difference)는 것입니다.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들의 세계관에 비해 변화를 꺼려하고 오직 안정과 평화만을 부르짖는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현대 문명의 경쟁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변화는 그런 의미에서 모험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변화는 전적으로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보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험한 것도 또 다시 경험하려면 자신이 없는데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경험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새해에는 과거에 엄두도 못 냈던 변화 혹은 안 된다고 포기했던 것까지 용기 있게 시도해 봅시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의 인격에도 변화는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로움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를 향한 미래 지향적인 변화가 새로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구습을 좇는 썩어져 가는 옛 것을 벗어 버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습을 좇는 과거 지향적인 생각은 언제나 옛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어 또는 타성에 젖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쌍한 심령, 그 노예 된 상태가 바로 옛것이며 옛 사람입니다. 새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변화와 생명적인 변화를 이 땅이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에베소서 4:23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 그것은 심령으로부터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가능성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을 보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51:10에는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이 저자들은 한결같이 어떤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 그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면 외형적으로 무엇인가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 전세계적으로 공식화된 것이 바로 삭발입니다. 옛 일을 모두 떨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결단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열 번 깎고 백 번씩 비상한 각오를 했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속으로 젖어드는 심령적인 새로움이 있어야만 그에게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은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곁 사람은 날로 늙고 추해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 무척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요구하는 새로움입니다. 외적인 변화로부터 내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서부터 외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정반대 위치에 있게 된 대결점입니다. 공산주의적 입장은 외적인 변화를 주면 인간의 내면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먼저 심령의 변화가 있고 나서야 외형적 변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 마음 중심의 새로움을 뜻합니다. 우주관․세계관 또는 가치관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 내면적인 새로움, 이런 동적인 새로움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형식이나 제도적 변화는 심령에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습니다. 새로움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은 낡은 것이요 하나님께 향한 역사는 언제나 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이란 구약성경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여기에서 새 계명이란 사랑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새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속하는 것은 새 것이요 미움에 속하는 것은 낡은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미워하는 마음은 낡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화목하게 하는 마음이 성경적으로 말하는 새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과 전쟁은 언제나 옛 것에 속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새 사람, 새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사랑에 들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 자체는 옛날의 그 사람이지만 그 마음속에 사랑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신지(新天新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합니다. 영원하고 미래적이며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곧 새로운 하늘과 땅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롭게 하노라. 그 중심에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때 만물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역사 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에 그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옥이나 병원에서 오래간만에 참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체험합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언제나 데모할 때는 선두에 서서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을 고발하는 데 대단한 소질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학생은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위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위암에 걸린 청년의 경우가 회귀하여 병원 의사들은 돈을 모아 수술을 해주려고 집도했습니다.

이미 암세포가 가득차 손댈 수 없어 수술을 중도에 포기하고, 담당의사는 청년에게 "자네는 앞으로 6개월 정도 살 수 있네"라고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퇴원하게 되었는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청년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이렇게 빌더랍니다. "하나님, 1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겠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아!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마음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어제의 태양이 또한 오늘의 태양입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비상한 결단을 하고 참회와 결심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새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이 말은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고린도후서 5:17-19까지에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에게 맡겨진 역사는 사랑이요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이제 우리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나타내고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해의 역사를 이루고 땅을 섬기던 사람이 하늘을 섬기며 허무에 매였던 사람이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새해로서의 새 날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귀한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본받아가며 살아갑시다.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며 전진합시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심히 섬깁시다. 아브라함같이 세상 것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삽시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사야 같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안드레와 같이 형제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요한과 같이 주님의 품에 깊이 안기는 생활을 합시다. 어떤 여건에서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살아가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순교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로 보고 원수를 용서하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날 아침을 맞이하는 엄청난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풍전등화 같고 변화가 많은 현실 속에서도 안정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결단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중심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도와주옵소서. 묵은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예수님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경험을 얻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새해에는 온전히 그리스도 앞에 바쳐진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정 새해를 새해로 만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옵시고 새로운 축복을 내려주옵소서. 아멘.  

만물을 새롭게(요한계시록 21:1-8)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 것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전도서 1장에서는 날[日]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 풍습 속에 유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유행이라 하는 것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옛날에 유행했던 것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있습니까? 다만 새 경험이 있을 뿐입니다. 새 것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경험 속에 그것이 새 경험으로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더구나 시간에 의한 새 것은 없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시간에 의한 낡은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시간이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뒤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시간은 그대로 있고 사람이 자꾸 뒤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언어 개념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시간은 뒤로 간다고 의식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의식에도 이런 개념이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의 예로 우리말에 죽었다는 것을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 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우리가 서랍 속에 물건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듯이 미리 정해져 있는 그것을 우리가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낡아지고 있습니다. 새 것이 아니라 낡아지는 것이요 후퇴하는 것입니다.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똑같은 사실을 두고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설날이 오면 한 살씩 더 먹었다고 손가락을 헤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른이나 노인네들은 똑같은 설날을 맞이하지만 지금 나이에 한 살을 더 얹어야 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금치 못하며 심지어는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허무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결국 시간의 의미는 그가 체험하는 그 경험에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어떤 의미로 경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앞에는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경험이 있을 따름입니다.

새롭다고 하는 말에는 형용사와 동사가 있습니다. 본문의 성경말씀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이노스"라는 말과 "아나네오"라고 하는 말은 형용사가 동사로 바뀌는 과정을 말합니다. 동양의 철학 서적인「대학」(大學)에도 "신신"(新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 신(新)자 둘을 거듭 사용하는데 하나는 형용사이고 하나는 동사라고 풀이합니다. "새로움이 새로워진다", 혹은 '새로워지는 일이 새로워진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형용사로서의 동사를 기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새로움은 동사로 이루어져야 하며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새롭게 하는 자에게 새로움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새로워져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새로워지기보다는 낡아지고 이것을 거슬려 새롭게 함으로써 비로소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변화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움을 얻기 위해 하다 못해 옷장의 위치를 바꾼다던가 혹은 머리 모양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정신적인 변화로서의 새로움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외형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지만 내면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양 사람과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 살 때 특히 잘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옷을 사기 위해 상가에 가면 상점 주인은 저마다 자기 집 옷이 더 질기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기를 권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옷 한 벌로 몇 대를 입을 수 있다고 까지 장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귀가 솔깃하여져서 그 옷을 사고야 말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물건을 선전할 때 "Something New"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엇인가 좀 새롭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변화 혹은 바꾼다는 것(change)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흔히 하는 불평은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It does not make any difference)는 것입니다.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들의 세계관에 비해 변화를 꺼려하고 오직 안정과 평화만을 부르짖는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현대 문명의 경쟁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변화는 그런 의미에서 모험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변화는 전적으로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보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험한 것도 또 다시 경험하려면 자신이 없는데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경험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새해에는 과거에 엄두도 못 냈던 변화 혹은 안 된다고 포기했던 것까지 용기 있게 시도해 봅시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의 인격에도 변화는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새로움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를 향한 미래 지향적인 변화가 새로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구습을 좇는 썩어져 가는 옛 것을 벗어 버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습을 좇는 과거 지향적인 생각은 언제나 옛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어 또는 타성에 젖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쌍한 심령, 그 노예 된 상태가 바로 옛것이며 옛 사람입니다. 새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변화와 생명적인 변화를 이 땅이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에베소서 4:23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 그것은 심령으로부터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가능성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을 보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51:10에는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이 저자들은 한결같이 어떤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 안에 정직한 영, 그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면 외형적으로 무엇인가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 전세계적으로 공식화된 것이 바로 삭발입니다. 옛 일을 모두 떨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결단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열 번 깎고 백 번씩 비상한 각오를 했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속으로 젖어드는 심령적인 새로움이 있어야만 그에게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은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곁 사람은 날로 늙고 추해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 무척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요구하는 새로움입니다. 외적인 변화로부터 내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서부터 외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정반대 위치에 있게 된 대결점입니다. 공산주의적 입장은 외적인 변화를 주면 인간의 내면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먼저 심령의 변화가 있고 나서야 외형적 변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 마음 중심의 새로움을 뜻합니다. 우주관․세계관 또는 가치관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 내면적인 새로움, 이런 동적인 새로움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형식이나 제도적 변화는 심령에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습니다. 새로움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은 낡은 것이요 하나님께 향한 역사는 언제나 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이란 구약성경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여기에서 새 계명이란 사랑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새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속하는 것은 새 것이요 미움에 속하는 것은 낡은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미워하는 마음은 낡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화목하게 하는 마음이 성경적으로 말하는 새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과 전쟁은 언제나 옛 것에 속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새 사람, 새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사랑에 들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 자체는 옛날의 그 사람이지만 그 마음속에 사랑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신지(新天新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합니다. 영원하고 미래적이며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곧 새로운 하늘과 땅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롭게 하노라. 그 중심에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때 만물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역사 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에 그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옥이나 병원에서 오래간만에 참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체험합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언제나 데모할 때는 선두에 서서 사회의 부조리와 죄악을 고발하는 데 대단한 소질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학생은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위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위암에 걸린 청년의 경우가 회귀하여 병원 의사들은 돈을 모아 수술을 해주려고 집도했습니다.

이미 암세포가 가득차 손댈 수 없어 수술을 중도에 포기하고, 담당의사는 청년에게 "자네는 앞으로 6개월 정도 살 수 있네"라고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퇴원하게 되었는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청년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이렇게 빌더랍니다. "하나님, 1년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겠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고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아!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마음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어제의 태양이 또한 오늘의 태양입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비상한 결단을 하고 참회와 결심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새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이 말은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고린도후서 5:17-19까지에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에게 맡겨진 역사는 사랑이요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이제 우리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나타내고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해의 역사를 이루고 땅을 섬기던 사람이 하늘을 섬기며 허무에 매였던 사람이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새해로서의 새 날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귀한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본받아가며 살아갑시다.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며 전진합시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심히 섬깁시다. 아브라함같이 세상 것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삽시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사야 같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안드레와 같이 형제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요한과 같이 주님의 품에 깊이 안기는 생활을 합시다. 어떤 여건에서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살아가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순교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로 보고 원수를 용서하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날 아침을 맞이하는 엄청난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풍전등화 같고 변화가 많은 현실 속에서도 안정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결단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중심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도와주옵소서. 묵은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예수님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경험을 얻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새해에는 온전히 그리스도 앞에 바쳐진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진정 새해를 새해로 만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옵시고 새로운 축복을 내려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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