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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성경 교육 지침

공감적 책읽기

by 【고동엽】 2022. 3. 4.

공감적 책읽기

김기현
SFC

1장 독서공감

나의 독서법

중국의 문장가인 구양수가 좋은 문장의 비결로 든 3다,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에서 그 순서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많이 읽어야 쓸 수 있고, 생각도 하게 된다. 읽은 것이 없으면 쓸 말도 없거니와 생각할 거리는 더더군다나 없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그 방향과 내용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독서이기 때문이다. 읽는 것에 그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출발은 독서다. 그래서 나도 마구잡이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신학대학원 다닐 적에 사회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시와 소설, 영화도 두루두루 섭렵하려고 애썼고 즐겨 보았다.

넷째, 주제별로 읽는다. 나는 대학 4년을 이렇게 정리한다. 술, 돌, 책, 학생운동 한답시고 열심히 뛰어 다니느라 데모도 많이 했고 그러다보니 술도 그럭저럭 많이 마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틈나는 대로 그리고 전공은 밀쳐두고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류, 그 중에서도 한국 근현대사 분야를 좋아해서 즐겨 읽었다. 그리고 신학해서 학자나 목사가 될 소명을 품고 있었으므로 신학 관련 책도 부지런히 탐독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억나는 몇 가지 주제 별 읽기로는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 나라, 한국교회사, 악의 문제, 기도, 사회 참여, 평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있다. 먼저 읽을 주제를 정하고 적어도 10권 이상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10권 이상을 읽다가 보면,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과 차이를 알게 되고, 그 분야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와 식견을 얻게 된다. 동일 문제에 대한 것이므로 읽는 중간에 여러 저자들이 인용하는 책들은 중요한 책이므로 따로 적어 두었다가 찾아서 읽는다.

다섯째, 줄긋기와 여백에 메모를 하면서 읽는다. 나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책을 읽을 때 반드시 붉은 색 펜과 연필, 그리고 자가 없으면, 괜스레 마음이 안정이 안 돼서 책 읽기가 힘들다. 간혹 이런 보조물이 없으면 책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두고 온 필통을 가지러 발품을 팔게 된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중요도에 따라 연필로 그 다음은 붉은 색 펜으로, 그리고 형광펜을 사용한다. 혹은 별표를 그려 넣게도 한다. 별의 개수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서평을 쓰기 위해 읽을 때는 인용할 쪽에 포스트잇을 붙어 둔다. 이런 도구들은 집중력을 높여주고, 내용 파악을 도와주고, 자료 활용을 용이하게 해 준다.

이런 말이 있다. “성경책의 깨끗함은 양심의 깨끗함과 반비례한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낡았다면 그만큼 그의 양심은 반대로 깨끗할 것이고, 한 번도 제대로 읽힌 적이 없는 성경이라면 그의 마음은 깨끗한 성경과 반대라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도서관이나 남의 책을 빌린 경우가 아니라면, 책에다 부지런히 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하고,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어가면서 읽으면 그의 성품과 지식이 쑥쑥 자라날 것이다.

오직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무엇을 위해, 왜 살아야 하는지도, 그 결과도 예견할 수 없으면서도 끝없는 무한 속도 경쟁에 내몰리는 지금 독서를 통해 조금은 천천히, 하지만 제대로 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독서와 관련해서 가장 좋은 명언은 요한 웨슬리의 것이다. “한 권의 사람, 만 권의 사람.” 그러니까 웨슬리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신앙과 함께 한 권의 책인 성경의 묵상과 만 권의 독서였던 것이다. 오직 한 책인 성경에 미친 사람, 만 권의 책에 파묻힌 또 한 사람의 웨슬리가 많아져서 교회가 부흥하고, 이 백성이 사는 날을 기다려본다.

제2장 공감 하나- 하나님을 보다

“아버지, 저예요. 저!” - 아바의 자녀

아버지를 만나다

진짜 내 모습은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자”이다(3장). 비어 있던 내면이 온통 그분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했으나 이제 사랑하는 분과 함께 있으니 행복하다. 침묵과 고독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즐겁다. 이미 사랑받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이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기에 내속의 거짓 자아는 멀찌감치 물러선다(6장). 그러면 왜 우리는 사랑받는 자인가? 매닝의 답은 간명하다. 아바의 자녀이기 때문이다(4장). “아바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이야말로 내 가장 응집된 지아상이다”(74). 기독교 고유의 하나님 경험의 핵심은 아빠로서의 하나님이다. 신약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간혹 유대교의 경우처럼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아빠”라는 칭호는 유일하다. 갓 언어를 배우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살갑게 “아빠”라고 부른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아빠의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이다. 아바의 자녀는 정죄와 미움이 판치는 세상에서 긍휼과 용서의 반문화적 생활방식을 산다. 사랑 받은 자로 그 사랑을 살아낸다.

아바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다. 쉴 새 없이 위장된 자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목소리들에 저항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거짓 자아가 내 안에서 날마다 날뛰는 것을 보면서도 궁극적인 것을 주목하는 환상이 요구된다(8장). 날마다 조용히 그분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심장의 뛰는 박동소리를 들어야 한다(9장). 그 심장에서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하신 일을 듣게 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자애로운 음성을 듣는다. 끝내 “나는 아바의 자녀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아버지를 알다

우리가 만약 아바의 자녀라는 분명한 자아상을 확립하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예요, 저!”

가혹한 자비로 완성되는 고결한 이교도의 사랑- 잔인한 자비

사랑을 묻다

나는 종종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 이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생각에 잠긴다. 과연 이 뛰어난 문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영혼의 아름다움, 순수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베너컨의 매혹적인 언어들이 뿜어내는 고결한 힘과 감동은 이 부부의 사랑을 전제하지 않으면 말장난이다.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문장을 어디에 쓰겠는가? 여기에 더하여 「순전한 기독교」로 지난 20세기의 걸출한 기독교 변증론자의 반열에 오른 C. S. 루이스와 나눈 우정의 18편의 편지와 대화는 평범한 간증이나 수기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격조를 선보인다.

사랑은 영원속에

먼저 시간과 영원을 보자.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시간이 창조물이기에 그 본성상 무(無)로 되돌아가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동시에 선한 하나님이 창조자이므로 부분적으로 그분의 영원성을 탐지하고 있다. 우리가 동일한 시간대를 지내면서도 삶의 허무함을 체험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련하에서는 의미로 충만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동일한 한 사람이 불의의 병기도 될 수 있고,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듯이 시간 또한 영원 앞에서 한 점으로 축소될 수도 있지만, 영원에 다다르는 길목도 된다. 크로노스일 수도 있고, 카이로스일 수도 있다.

아내와의 사랑이 가져다 준 행복과 기쁨은 그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영원하다. 베너컨은 아내의 사별로 그만 끝나고만 사랑을 지상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고 천상의 사랑을 갈망하게 하는 사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의 사랑은 인간적 사랑으로부터 구제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화된다. 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갑자기 비어버린 방에서 데이비가 아직 여기 있다는 절대적인 앎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326). “데이비가 있다”(333). 죽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루이스처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잘 가라는 말 안 합니다”(230).

사랑은 죽음처럼 잔인하다

하지만 지상의 사랑이 하늘의 사랑으로 승화되기까지는 반드시 거쳐야 할 여정이 하나 있다. 고통이다. 고통 없이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복음 인식이 더욱 환히 드러난다. 사랑을 통한 지고의 기쁨은 언제나 크나큰 고통과 함께 온다(24). 그 기쁨은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누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기쁨은 고통을 통과할 때에 누릴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지만 밋밋하고 어중간한 기쁨의 길과 고통과 함께 오는 기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자유의지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근본 조건이지만 인간을 악과 범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주범이다.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없었다면, 오늘의 고통은 없다. 하지만 그 자유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와 하등 다른 점이 무엇이 있겠는가. 본능과 충동을 따라 사는 것이 동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가 인간인 한에 있어서 자유는 필연적이지만, 그 자유는 위험하다, 고통을 수반하기에.

신뢰 받는 아바의 자녀에서 신뢰하는 아바의 자녀로-신뢰

바로 내가 아바의 자녀

한 번은 딸 서은이가 두 살 즈음에 설교 강대상에 올려놓고 두 팔을 벌린 적이 있다. 혹시나 했는데 아이는 거침없이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놀란 탓도 있지만 나를 이다지도 신뢰하는 아이가 자못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나도 이렇듯 하나님을 신뢰하나’ 라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나를 보았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요리 조리 따져보고 재보고는 얄팍한 신앙살이를 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영적 선생님이다.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며 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도의 결정적 정신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22). 자신을 아바의 자녀로 믿고 거침없이 그 품에 안기는 어린아이가 바로 주님이 자신과 동일시(마 18:15)한 어린 아이이며,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눅 18:16)

거짓 신을 신뢰하지 마라

하여 매닝은 말하기를 ‘행여 내 아버지의 긍휼을 너희 긍휼로 측정할 만큼 바보가 되지 말라. 행여 너희 인간의 얄팍하고 인색하고 흔들리고 변덕스런 긍휼을 내 긍휼과 비교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말라. 나는 인간이자 곧 하나님인 까닭이다”(141). 이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술가, 신비가, 어릿광대로 부른다(5장).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와 가봇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밀하게 조사하는 과학자나 신학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매닝의 말처럼 ’아바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미쳐버린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건가? 예술가처럼 심미적으로 탐닉하며, 신비가처럼 직관으로 관조하며, 어릿광대처럼 춤출 따름이다. 바로 그가 하나님을 본 자다. 미갈의 후손들은 비웃더라도 오늘의 다윗들은 흥겹게 춤춘다.

거짓 자아를 신뢰하지 마라

매닝만큼 정직한 작가는 드문 것 같다. 매닝의 글은 그의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거침없는 신뢰에 관해 말하고 글을 쓰는 지금도 그는 주벽이 도져 다시 술에 취해 반쯤 찬 술병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를 가득 고인 눈물로 묻는다(69). 하늘에 닿지 못하는 메마른 오늘 아침의 기도라든지(190) 필립 얀시의 글재간에 주눅든 심정이나(179), 주말 피정에서 알량한 자존심으로 벗들의 충고를 고깝게 듣고 토라진 이야기(157)들은 “사랑받을 구석이 없다는 절망과 자기혐오로 평생 씨름”(133)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매닝이 말하는 바 자기 수용은 내 스스로 구축한 이미지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아바의 눈에 담긴 내 모습을 진정한 자아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나의 죄를 열거하는 검사의 논고가 아니라 나를 변호하는 하나님의 쉼 없는 사랑의 고백을 신뢰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거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수용에 뿌리를 둔 자기 수용으로 천천히, 꾸준히, 기적처럼 변”(14)해 간다. 이런 정직한 자기 인식의 수용 속에서 우리는 착해지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사랑받으려는 자세로 옮겨 간다(125).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라고 주문하는 매닝은 그저 자신이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붙들라고 조언한다. 예수님처럼 내면을 온통 하나님으로 채우라고 한다. 그것이 겸손이며 정직이다(9장).

참된 신뢰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구한다. 하지만 이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더 많은 은혜는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은혜를 따라 순종하지 않는다면 더 큰 책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더 많은 은혜가 아니라 받은 은혜대로 사는 것, 그것이 은혜를 구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뢰는 만족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다. “신뢰하는 제자의 으뜸가는 특성은 감사다”(45). 아버지의 손으로 이미 값없이 주신 과분한 사랑을 감사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주목하고, 그 받은 은혜가 크고 많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우리는 신뢰하는 신앙의 단계로 얼른 자라고 싶어한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빠른 만큼 변덕은 심하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신뢰는 그냥 생겨나지 않고 시련의 도가니에서 오랫동안 단련된다(3장)는 것을 모른척한다.

어디 나만 아바의 자녀이겠는가

이 책을 덮으면서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본다. 하나님을 거침없이 신뢰하는 나는 신뢰받고 있는가? 예수쟁이를 일컬어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신과 인간을 동시에 믿는다. 또한 믿음의 대상이다. 신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신용의 표식이다. 주님이 우리를 신뢰하듯이, 이웃들에게도 신뢰를 받는다. 가차 없는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자기수용을 거쳐서 이웃에 대한 신뢰로 확장된다. 신뢰하는 자는 신뢰받는 자다. 하나님께로 가는 가차 없는 믿음의 길은 동행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듯이 이웃에 대한 생각을 넓혀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확장되듯이 내 이웃의 범주에 들어올 사람의 폭도 넓혀야한다.

3장 공감 둘-자녀답게 기도하다

텅빈 광야에서 충만한 광야로-광야의 은혜

의도하지 않은 광야에서

이 책, 「광야의 은혜」는 제임스 패커, 고든 맥도날드, 존 맥스웰, 찰스 스탠리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광야 체험과 그 의미를 들려준다. 이 광야는 의도하지 않은 광야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영적 거인들 그 누구도 스스로 광야를 원하지 않았다. 광야는 피하고 싶은 시련의 장소이다. 그들에게 광야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마구잡이로 몰아닥치는 인생의 파괴적 재난을 가리킨다”(15). 이들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장소로 내몰리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니까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세상과 싸웠다면, 이들은 세상 한 복판에서 광야와 씨름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광야에서

광야를 떠날 때의 간증은 놀랍기 그지없다. 패커는 보다 더 강인한 신학적 확신과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소망하는 법과 용기를, 맥도날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무궁함에 대한 인식과 실망과 좌절로 속사람은 성숙하고 강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맥스웰은 말한다. 일 중독자들인 스탠리와 카마이클, 브리스코는 일을 즐기는 것과 휴식을 즐기면서 일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은혜로 승리한다.

우리 시대의 아홉 명의 영적 위인들의 광야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의 사람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는 예의 빛나는 진리 하나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광야에서 실망하고 상처받고 심지어는 찢어지는 아픔을 겪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2-13). 텅 빈 “광야에서 빈손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다”(187). 모세, 다윗, 엘리야, 요한,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랬다. 그들 모두는 빈들의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광야에 관한 모든 의문이 말끔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나는 맥도날드처럼 장차 천국에 가면 “왜 하나님이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내게 주셨는가?”(38)를 하나님께 여쭙고 싶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고 빈손으로 나온 신자가 없다고 해도, 그토록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그리도 모진 곳으로 밀어 넣었을까? 아무래도 이런 물음에 계속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욥처럼 말하게 될 것 같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죽는 날까지의 기도 제목-아굴의 기도

초대받지 못한 기도, 아굴의 기도

아굴의 기도(잠 30:7-9)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기도이다. 허탄과 거짓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신앙쯤이야 덮어두고 눈 한번 질끈 눈감는 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우리는 여긴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동원해서라도 성공과 축복을 쟁취하려는 우리의 본심은 아굴의 기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을 잊어도 되니 -말로는 하나님을 결단코 잊지 아니하겠다고 말하지만,-그 엄청난 부의 일부의 단맛이라도 보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는 내키지 않는 기도이다.

아버지께 구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에게 아굴의 기도는 기피 대상이다. 건강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기도,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 결혼 반려자를 찾는 아브라함의 사환의 기도,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야베스의 기도 등을 한꺼번에 기도해야 성이 차는 우리에게 단 두 가지만 구하겠다니 참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기도는 좀 멋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는 화려해야 기도하는 맛이 나지 않을까. 이굴의 기도 이후로 가장 위대한 단순한 기도는 아마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일 것이다. 홀로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토마스에게 십자가의 주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나에 대해 잘 썼더구나. 너는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오직 당신뿐입니다. 주님” Only yourself, Lord. 마음의 단순함과 더불어 단순한 기도 제목과 소박한 몇 마디 말로 드리는 기도는 영 싱거울 수밖에 없다.

어느 세계 최고의 갑부에게 한 기자가 물었단다. “만족하십니까?” “아니.” “그럼 얼마나 더?” 그는 대답했다. “조금만 더.” 우리는 얼마가 더 있어야 자족하게 될까?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대답한다. “조금만 더, 그것도 아주 정말 조금만 더요, 주님.” 그러니 아굴의 기도는 환영은커녕 초대조차 받지 못하는 기도이다.

반드시 응답받아야 할 기도, 아굴의 기도

이처럼 낯설고 생소하고도 거북스러운 기도를 우리가 드려야 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인생이 헛되기 때문이다. 인생무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수의이다. 죽은 자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져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생 뼈 빠지도록 일하고 허리가 휘도록 수고해도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구하는 것이 허탄한 기도이다. 필요한 것 이상을 구하는 것은 허탄한 기도이다.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은 허탄한 기도이다. 칭찬받고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해 구하는 것 높아지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허탄한 기도이다. 하늘에 쌓아둘 수 있는 기도, 어린 양 앞에 금 대접에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아굴의 기도이다.
그 외에도 아굴의 기도를 해야 할 이유는 많다. 내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기도라는 것, 물질의 형통함도 필요하지만, 결코 하나님 보다 앞설 수 없다는 우선순위를 명백하게 해주는 것이 아굴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 그리고 물질의 영역에서 만족하는 삶, 그리고 이 양자의 균형이 우리 평생에 구해야할 단 하나의 기도이며, 우리가 죽기 전에 꼭 깨달아야 할 단 하나의 기도의 철학이며, 우리 평생에 응답받아야 할 단 하나의 기도의 제목이다. 고로 아굴의 기도는 계속 되어야 한다. 쭈욱~

하우어와스와 함께 읽는 주의 기도-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하우어와스, 그와 함께 읽자

첫째, 기도와 신학은 노력이 아니라 은혜이다. 하우어와스는 철저하게 자연신학적 전통을 거부한다. 창조 세계에 언뜻 일별할 수 있는 창조주의 흔적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 교회와 신학이 타락했다고 그는 확신한다. 세상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 교회와 신학으로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경로를 열어주는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의 계시인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중 그 어느 것도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개입된 적이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선물이다.
기도는 신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주의 기도는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창안한 것도 아니다. 기도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며 기도하는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해야 할 무엇이다. 내 의지와 언어로는 할 수 없기에 그분의 행위에 의지하고 기반하는 것, 그분의 은총을 덧입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졸졸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대개 어수룩하고 아둔하고 불순종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거의 유일하게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단 하나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사이에 두고,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한다. 이를 두고 은혜라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라 말할까.
둘째, 기도와 신학은 교리가 아니라 이야기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합리적인 학문 혹은 사실적인 분야로 간주되어 왔다. 신학이란 말의 어원을 볼 때 하나님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풀어내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과학적인 사실과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려는 작업이었다. 이것이 근대가 이해한 신학이었다. 순수 추상으로서 객관적인 진리 입증. 성경은 살아내야 할 진리가 아니라 증명되어야 할 역사적이고 과학적 가설로 전락하였다.
여기서 간과된 것이 진실한 삶이다. 진리는 있으되 진실함이 없다. 기독교에 대한 신조나 교리를 잘 암송하는 것이 좋은 신자의 전형이었다. 그것들이 발생하고 자라난 삶과 역사라는 문맥을 떠나는 순간 기독교는 삶이 사라진 지식이 되었다. 물론 교리는 기도를 돕는 역할을 하지만 보조적이거나 후차적인 것이다. 하여, 그는 “기껏해야 신학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돕는 일련의 상기자에 불과하다”고 기포드 강좌 서문에서 대담하게 말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도란 우리가 알아야 할 일련의 명제들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그리고 배워야 할 이야기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고전적 정식이 말하는 바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김영봉 목사의 공식이 의미하는 바를 현대 신학적 개념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기도는 이야기란 말과 통한다. 예컨대, 주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과 우리 사이가 가족 관계라는 것을 말한다. 해서 아버지라는 말은 정보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한솥밥 한식구라는 관계와 삶의 이야기 속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셋째, 기도와 신학은 공동체적이다. 어거스틴과 데카르트는 신학을 개인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어거스틴은 그의 「독백록」에서 오직 자신이 알고자 했던 유일한 것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언했고, 데카르트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유일한 토대야말로 이성적 인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인간이란 개인을 지칭한다. 이렇게 신학과 철학은 공동체와 격리된 한 고독한 영웅적 행위가 되었다.

성경은 아무런 매개나 중재 없이 해석되지 않는다. 모든 신자와 교회 공동체는 성경을 실제 삶으로 구현하는 제자들의 무리이자, 세상을 향해 성경을 그 삶으로 해석하는 사회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교회를 통해서 증언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사사로이 한 개인이 마치 제 자신이 성경의 주인이자 해석의 최종 권한을 가진 양 제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성경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서는 둘이 아니다.
하우어와스는 주의 기도에서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가를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는 일반적인 그 누구나, 또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고, 일용할 양식도 내 것이 것이 아닌 가난한 자들의 양식을 위한 간구이며, 일방적으로 죄를 용서하고 받는 자가 아니라 서로 용납하는 것이고, 나뿐 아니라 공동체 식구들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한다. 이는 주의 기도가 얼마나 관계 중심이고 공동체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자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이자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자명하게 전제한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는 신자 공동체 모두가 함께 드려야한다.
넷째, 기도와 신학은 정치적이다. 신학적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해 상반된 입장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속적인 공공 영역에 대한 발언을 자유롭게 하는 측이나 그것을 꺼려하고 기피하는 측이나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신학의 정치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발언의 기반은 성경이 아니라 당대의 진보적 담론을 되풀이하거나 성경적 언어로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겉으로는 정치와 무관한 척, 담을 쌓고 사는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볼라치면 지배 이데올로기와 견고하게 밀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우어와스는 일관되게 신학은 정치적이라고 한다. 교회가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는 존 요더의 영향으로 그들은 교회가 국가를 대신하는 대안 공동체이며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사회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사역 캐치프레이즈였던 하나님 나라는 왕조 국가에서 감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기존 지배 세력의 눈으로 보면 두말할 필요 없는 반란이다. 현재의 권력자와 국가를 두고서 예수를 왕이라고 노래하고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토록 주기도문은 위험천만한 영적이고 정치 행위이다. 우리는 주기도문 곳곳에 기도가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볼 수 있다. 그 예로 하나님 나라뿐 아니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우리 중 그 어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기도도 정치의 하나이다. 기도는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으로 배부르면서도 하루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하는 이의 밥에 눈독을 들이는 강대국과 강자의 논리에 대한 저항의 정치이다. 일용할 양식이면 족하지 그 이상을 얻고자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기이한 행동이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역시 어떤 영적 전쟁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바대로 기도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들이 존재한다. 가부장적 구조,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주의 기도는 그것이 오히려 유혹자이며, 참 구원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망스럽게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보다 그 하나님을 십자군과 히틀러의 독일군의, 침략전쟁을 축복해 달라는 기도가 최고의 신성모독이다.

다섯째, 기도와 신학은 성품이다. 하우어와스는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를 따라 살 수 없다는 다소 기발하고 엉뚱해 보이는 논리를 펼친다. 요컨대 예수의 제자가 먼저 되지 않고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예수를 믿어야 제자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거늘, 왜 그는 이런 생경한 논리를 고집하는 걸까. 게다가 그는 어느 책에서 미국의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성경을 읽혀서는 안 되며 그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지 않고서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는가.
그의 생각은 이렇다. 제자가 되는 것은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정치 철학과 구조에 입각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성경을 들을 귀가 없으면 말씀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하고 불가능해 보여도 아브라함처럼 신실하게 순종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계속해서 성경을 독서하는 것은 성경 밖의 잣대를 뒷받침하는데 이용하자는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금도 그가 살고 있는 미국은, 그가 비판하듯이 전쟁의 합리화에 성경을 악용한다. 그러기에 주의 기도는 반복해야 하고 학습되어야 한다. 주기도문을 반복적으로 기도함으로 그렇게도 단단하기가 철옹성이던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그리도 밉던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동시에 원수의 얼굴이 다름 아닌 내 얼굴임을 감지하게 되어 나도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 또한 나도 누군가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를 용서하게 된다. 날마다 되풀이하여 기도할 때 기도한대로 행동하게 된다.
주기도문을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탐내던 고삐 풀린 욕망을 거두어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게 된다. 이 기도의 정신이 제2의 천성이 되고 습관이 되도록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기도하는 바대로 되어간다. 기도는 우리의 지성이 아니라 속사람까지 성숙케 한다. 우리말로는 성품, 품성, 개성, 성격 등으로 번역되는 ‘character'는 내가 보기에 ‘됨됨이’가 가장 어울린다. 그의 말과 행동, 심지어 작은 몸짓 하나와 얼굴 표정까지도 그의 됨됨이를 반사한다. 그가 기도하는 말은 그의 됨됨이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주의 기도는 우리의 됨됨이를 형성한다.

하우어와스, 그와 함께 가라

이 책을 집중해서 읽으면 저자들의 해석이 한편으로 주께서 직접 가르치신 그 기도를 복원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주의 기도가 문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기도는 은혜이며 예수와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주의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의 정치적 현존을 세상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고 증언하게 되며, 자신의 온 존재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멘’이란 말로 응답하고 결단을 공적으로 공포한다. 주의 기도의 마지막 말은 알다시피 ‘아멘’이다. 지적으로 ‘옳다’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는 확신이요 소망이며, 실천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결의가 담긴 말이다. 저자들은 계속해서 이 기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누차 강조하였다. 일용한 것들을 더 많이 축적하고 싶고 용서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그걸 버리면 끝장일 것 같은데 그만두라고 버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한 용서를 흉내라도 낸다는 것이 어디가 당키나 한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욕구, 성향을 거슬러 ‘아멘’이라고 외친다.

4장 공감 셋- 영성은 살아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와 함께 달려 가리이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는 영성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탁월성은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서는 해석되지 않는 실패의 삶에 진배없다. 그러나 부르신 자의 부름에 합당한 삶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시선에도 불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 흘릴 수 있는 영성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살아 있는 영성이다.

그래서 이 영성은 본회퍼에게서는 그리스도 중심적 형성으로 불린다. ‘신도의 공동생활’에 대한 공동체적 영성의 도전은 그의 마르지 않는 깊이 있는 영성이 현대가 회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영성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자녀로서 성숙한 성인이 되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헌신적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영성의 깊이, 뿌리가 흔들리지 않아야 살아 있을 수 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중 우리의 영성이 어디에 뿌리 내리고 있는가? 은혜의 지배 아래 사는 삶이야말로? 창조와 목적에 부합한 삶이다. 그럼에도 죄의 실존은 너무나도 분명하여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흔들어 놓는다. 죄와 은혜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영성과 맞닿아 있는 근본을 파헤쳐야 한다. 죄로 인한 심각한 공격의 실존과 현실을 처절하게 직시해야 한다. 영성은 죄의 실존과의 투쟁이다.

그래서 영성은 슬픔을 통과한 유쾌한 웃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통쾌한 희망사전의 기록은 더 이상 슬픔과 좌절과 고통을 무시하는 즐거움이 아니다. 따라서 매순간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 될 때 진정한 희망이 우리의 삶에 기록된다. 한바탕 웃는 웃음은 고뇌하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눈을 돌릴 때 찾아오는 영성의 일상화이다.

바벨론 강가에서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을까?

감옥에 갇혀도 옥문에 옥죄이지 않고 도리어 옥문을 열어젖히는 삶. 세상에서 떠나지 않으면서도 보내신 자의 뜻에 합당하게 진리로 거룩하게 사는 삶. 무제한의 속도와 경쟁이 휘몰아치는 세상에서도 낙오하여 피곤에 지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허망한 야망에 자신을 내던져 버리지 않는 삶. 이런 삶이 도대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누가 그런 삶을 살기나 했나? 이 질문에 대해 유진 피터슨은 온실이 아닌 거친 풍랑이 이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수월한 삶이 아니라 탁월한 삶을 산 모범과 멘토로 예레미야를 추천한다. 그가 보기에 예레미야는 그 탁류 속에서 표류하지 않고 한결같이 탁월성이 구현된 삶을 산 인생이다.

그런데 피터슨은 예레미야다. 예레미야의 삶을 지배하는 코드는 온통 실패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받았다. 그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자만심에 철저하게 태클을 거는 것이다. 23년 동안 열심히 전한 그의 메시지는 그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남들이 모두 희망에 들떠 있을 때 홀로 그만이 절망했고, 모두가 낙담할 때에 아나돗의 밭을 구입한 세상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게다가 전승에 의하면 그는 원치 않는 땅 이집트로 동족들의 손에 끌려가서 그들로부터 돌아 맞아 죽음을 당하였다. 인생을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 이 사람이 어떻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16)을 한단 말인가? 탁월함에 대한 기준을 바꾸면 된다. 세상의 기준을 버리면 된다. 탁월함이란 자신을 부르신 부름에 한결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생애동안 일구어 놓은 업적으로 치자면 보잘 것 없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평생 사역의 성적표는 성과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23년 동안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을 부지런히 꾸준하게 전하였다. 그는 사역으로 말하지 않고 인격과 삶으로 지금도 말한다. 꼭 필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외적인 상황의 변동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사명을 따라 올곧고도 한결 같은 것, 이것이 탁월한 인생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 포로기는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정체성 위기란 말조차 필요 없을 정도다. 성전이 없으니 제사도 없고, 더군다나 제사장도 없다. 어찌 그리고 어떻게 이방 땅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를꼬. 하지만 그들은 이 저주 받은 땅에서 약속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법,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하였다.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의 삶을 살라고 예레미야는 도전한다. 하늘의 시각으로 바벨론에서 사는 것은 유배당한 자를 향해 하늘이 지정한 몫이다. 도저히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 보이는 곳에서 예전과 다른 낯선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을 만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풍성하게 하나님을 체험한 곳은 출애굽 당시의 광야였고, 포로 생활을 한 바벨론이었다. 성전 체제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성경의 말씀으로 사는 신앙으로, 특정한 날의 제사에서 일상에서의 생활로 제사적 예배에서 성경의 교육으로, 제사장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하나님을 만나서 최선의 삶을 살았다.

본회퍼의 영성 이야기-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요즘도 신학이 필요한가?

또 한 사람이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나는 본회퍼를 통해서 신학이 이성적인 분과이면서도 동시에 영성 깊은 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그 어떤 영성 작가 예컨대 헨리 나우웬이나 리처드 포스터의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영성의 마르지 않는 샘이다. 본회퍼를 읽으면 기도하고 싶어진다. 자연스레 무릎이 꿇어진다. 천재적인 학문 이력과 나치와의 투쟁과 순교의 아우라에 더해 그의 영성은 강력한 파워를 내뿜는다.

요즘도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오늘날은 같은 전환과 위기의 시대이다. 서양인들에게 기독교 없이 서양을 말할 수 없다. 신의 존재는 서구 형이상학의 화룡정점이었고, 도덕의 기초였고, 삶의 지표였다. 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제 의미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는 당연하지 않다. 본회퍼는 우리 시대를 기독교의 토대 붕괴라고 단언한다. 리플라스의 말마따나, 신이라는 가설이 없이도 세상은 잘도 설명이 되고, 잘도 돌아간다. 물질적 세계는 물질적 법칙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세계 밖의 초월적 존재는 거북하다. “요즘도 신이 필요한가?” 본회퍼는 신을 당연시하던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잘도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묻는다. 그분은 전혀 다른 새로운 토대요 기둥으로 해석한다.
첫째, 개인에서 공동체의 그리스도이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몸의 일부가 되지 않고서는 구원은 없기에, 교부들은 지당하게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나 홀로’ 신앙이란 없다. ‘다함께’ 신앙이 있을 따름이다.
둘째 형이상학적 초월자에서 세상 한 가운데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현실과 괴리된 피안의 저 세계 또는 도피처를 제공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삶의 모델이자 원형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한 복판에서 인식할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는 삶의 일부분이 아닌 전 영역에서 경험된다. 특정한 종교적 장소나 관습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곳에 계신다. 그러기에 기도가 아니라 전 삶의 영역에서 전방위적인 기도 곧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반사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는 고난 가운데 인식된다. 기독교가 가진 자의 편이 되었다. 자연히 고난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고통을 해결하려고 임시변통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고난 가운데 존재한다. 우리를 고난의 자리로 부른다. 우리는 타인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위의 기둥들은 세상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의인이 할 일은 그 바닥부터 갈라지는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의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신앙의 신비인 그리스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터가 무너지는 때에 의인이 해야 할 일은 신앙의 비밀 훈련, 보다 정확히 말해서 ‘신학 신비 교육’이다. 이는 고대 교회가 콘스탄틴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는 개종자들이 옛 관습을 따라 기독교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시행한 엄격한 훈련을 지칭한다. 신앙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불신자가 조롱하지 못하도록 감추고, 초신자에게는 천천히 가르쳤다.
철저한 훈련이 없는 세상 봉사가 되는 순간 교회는 사교단체나 클럽이 된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의 투신이 없다면, 교회는 수도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신자는 노동자의 일상과 수도자의 영성이 고루 겸비되어야 한다. 교회는 일터이자 쉼터다. 본회퍼는 세상 속의 신자, 타자를 위한 교회를 지향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음의 신비를 여전히 보존하는 방법을 궁구한다. 세상 한 가운데 있지만 세상과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 신앙을 간직하는 훈련이 절실하다.

요즘도 본회퍼가 필요한가?

백오십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교회가 7개 분야에서 75가지의 사역을 하면서 우리 돈으로 약 백억의 예산을 집행하는 작은 공동체인 세이비어 교회는 내적인 삶과 외적인 일의 조화를 어느 누구보다도 추구한다. 그 많은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그들은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조용한 침묵 기도를 드린다. 이들이 이렇게 세상을 향해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기도에 있다면 세상을 향한 섬김의 원리는 본회퍼에게서 빌려 오는 것 같다. 그곳에는 섬김의 리더십 학교가 항상 개최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과목과 과정이 본회퍼 읽기라고 하니 말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본회퍼 연구는 주기적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작년이 본회퍼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즈음 본회퍼에 관한 한두 권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을 지도 삼아 영성의 고전인 「신도의 공동생활」과 제자도의 텍스트인 「나를 따르라」를 꼭 읽어보기를…. 직접 읽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고품격 소설로 풀어낸 「진노의 잔」이나 본회퍼의 친구이자 제자요, 최고급 해설자인 에베하르트 베트게가 쓴 본회퍼 전기도 참 좋다. 누구라도 쉬 읽을 수 있는 아주 간결한 요약본인 이 책을 제일 먼저 읽는 것이 본회퍼 읽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바탕 웃음으로-통쾌한 희망사전

슬픔을 통과한 웃음

뷰크너는 웃음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자살, 몇 년 후 삼촌의 자살이라는 가족사의 비극, 내성적 성격에 비를 좋아하고 책벌레인 내면사의 우울, 그리고 소설의 대성공과 곧 이은 실패의 여정은 그에게 죽으리만치 지루하고 무서운 삶을 안겨 주었다. 교회 건물이 너무 멋지다는 시시한 이유만으로 찾아간 교회의 설교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다. “예수님의 즉위식에 따라와야 할 것은 죄의 고백과 눈물, 그리고 큰 웃음입니다.”(「내 영혼의 스승들 2」 필립 얀시, 좋은씨앗 l37)
이 말을 듣고 정작 자신도 왜 그랬는지를 알 수 없지만 순간 눈물이 와락 솟구친다. 그리스도가 호탕하게 웃으시며 그의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왕이 되는 순간이다. 인생의 비밀은 눈물인지라 눈물 없는 인생을 말한다면 그건 아예 빈껍데기일 게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이다. 그래도 그것이 불러내는 생각은 희망이다(116). 슬픔을 머금은 웃음만이 삶을 견뎌내는 동력인 동시에 삶을 극복하는 원천이다.

되레 뷰크너의 웃음은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철석같은 무신론자 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자라는 말에 좀체 웃음을 참기 어렵다. “무신론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자인 경우가 많다. 마치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무신론자인 경우가 많듯이 말이다. 따라서 신이 없다고 진지하게 믿으면서 신이 있는 듯 살기도 하고, 신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으면서도 없는 듯 살기도 한다”(53).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체계인 유신론이나 신이 부재한다는 신앙인 무신론이나 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한다는 점에서 모두 신자다. 누가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도통 헷갈리게 만드는 이 구절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둘 다를 겨냥한다.
하지만 날아온 돌에 맞는 것은 유신론자다. 무신론자들이야 애초에 신이 없다는 편에 모든 것을 걸었고 절대적 기준을 저버린 사람들이니 신이 없다면서 있는 듯이 좀 산다고 해서 무에 그리 나무랄 건가. 그러나 구원해 줄 신이 있으면서도 삶에 반듯한 기준이 있으면서도 그리 살지 않는다면 심각하다. 진정한 무신론자가 신의 무덤에서 춤추지 않는다면 유신론자도 자신의 무덤에서 춤출 수 없다. 불신앙의 어리석은 종말을 대놓고 큰 소리로 외치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온통 땅의 것을 사랑하고 배를 신으로 섬기는 내 한심한 모습은 무신론자다. 이렇듯 뷰크너의 유머는 예기치 못한 일격이 있고 ‘저건 바로 내 얘기’라는 공감어린 웃음은 진지한 반성을 촉구한다.

애매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단번에 우리의 거룩의 여정이 종결되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특히 잘 저지르는 실수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신령해지려고 하는 것이다”(101). 오히려 “지나치게 경건하려고 노력하는 나머지 오히려 넘어지는 수가 있다”(125). 신비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더 분명히 알 뿐”(28)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더 경건한 척을 하는 것은 우습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조종하는 기술”로 자신의 삶의 안전과 미래를 제 스스로 확보하려고 그 본래의 취지를 떠나 마술을 부리는 주문인양 호도하는 현실에 뷰크너는 넌더리를 낸다. 경건의 언어보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삶이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방식이다. 악보대로 연주한다고 좋은 음악이 되거나 옳은 연주는 아니다. 사람들이 흥겹게 발을 들썩이며 박자를(148) 맞추게 하는 것은 삶이다.



5장 공감 넷-세상 가운데 서다

유다야, 집으로 오너라-가롯 유다로부터 온 복음

우리는 모두 가롯 유다

‘유다야, 집으로 오너라.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 풀러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목회학을 강의하는 레이 앤더슨이 샌프란시스코 한 레스토랑의 남자 화장실 거울에서 본 문구이다. 이 도발적인 글귀는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이 이어진다. 유다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유다의 배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죄악인가? 만약에 유다가 용서를 구했다면,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취소될 수 있는가?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

하나님이 용서 못할 죄는 없다. 이것이 앤더슨의 요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조건도 없다. 그 어떠한 죄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을 취소하거나 폐기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자비보다 진노가 은혜보다 율법이 용서보다 죄가 더 강력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앤더슨과 함께 말해야 한다. “유다에게 하신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이 네가 나를 배신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말씀은 심오한 신학적 진리의 요약이다”(113).

하지만 앤더슨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너무 쉽게 용서를 선언한다. 유다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의 반열에 있었다고 해서 예수님의 밤샘기도 끝에 선택된 사도라고 해서,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관계의 기초는 유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택한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112)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회개없는 용서도 없다

앤더슨의 논리에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졌다. 회개다. 유다가 용서 받을 가능성마저 우리가 박탈한다면 십자가는 불필요하고, 부활은 무력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 가혹하다. 반면에 무턱대고 은혜를 빌미 삼아 죄인에게 사죄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본회퍼가 그리도 근심했던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기율을 무시한 침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값없는 은혜라 하겠다.”(「나를 따르라」, 25-26) 따라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만을 노래하고, 회개와 훈련, 고백과 순종을 말하지 않는 것은 값싼 은혜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교회사의 부흥 운동의 생생한 증거들과 거리가 멀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1907년 민족 대부흥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은 이랬다. 길선주 목사님이 자신이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회개의 고백과 함께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고 한다. 이에 연쇄적으로 교인들이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고 울며 회개했다. 그래서 부흥 운동을 회개 운동이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유다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와 함께 심리적인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학이 얼마간은 어긋나는 바람에 상실과 배신, 수치와 실패로부터의 회복은 의도와 달리 다소 빗나간 것 같다. 그럼에도 신자가 타락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주는 유다를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종교가 사랑할 때-종교가 사악해 질 때

미 남침례교에서 안수 받은 목사이자, 하버드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찰스 킴볼은 종교가 세상에 폭력과 고통을 불러오는 사고방식과 행동의 분석을 통해 종교가 사악해지는 다섯 가지 징후를 찾아내고 진정한 종교와 타락한 종교를 식별하는 요령을 제시한다. 종교가 특정한 이념과 해석을 절대적인 진리로 주장하는 것, 상호 대화와 건전한 의심을 배제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 이상적인 시대를 설정하고 국가에 실현하려는 것, 목적이 모든 수단을 승인하여 종교의 체제를 지키는 것, 때로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주는 목적이 되는 것, 마지막으로 전쟁과 폭력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나타나는 것이 왜곡과 변질의 징후라면 다소간에 편차야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종교 중 어느 종교가 예외에 속하랴.
내가 보기에 문제는 방향에 있다. 절대적 진리에 자신이 먼저 복종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강요하는 것, 이상적인 시대를 각 종교 안에서 먼저 구현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에 적용하는 것, 그래서 거룩한 전쟁이 바울과 같이 내속에 거하는 죄에 대한 탄식과 투쟁이 아니라 이웃을 대상으로 삼는 방향의 왜곡에 있다. 간단히 말해 기준을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적용할 때, 그것은 타락의 징후이다.
기독교 신앙의 본령인 십자가는 자기부인이자 타자의 긍정이다. 자기 승인과 타자의 부정은 십자군의 정신일 뿐 그리스도와 무관하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죽일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톨스토이 말처럼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섯 가지는 방향의 전도가 빚은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 대안은 종교 내의 긍정적인 힘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문제가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대안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최초의 120명과 같이 그분이 사신대로 살아가는 소수의 무리가 기독교에 있다면, 행복하고 희망은 있다. 사악한 종교로의 변질을 막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기독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다운 삶(276)을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무슨 대책이 있으랴.

아직인가? 결코인가?-마시멜로 이야기

아직

이 책의 원 제목은 “마시멜로를 먹지 마라, 아직”이다.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특단의 비결은 당장의 이익을 먼 미래의 보상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다. 요는, 곧바로 먹지 말고 조금만 자제하라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던 예전의 전자 회사 광고 카피처럼, 30초만 돌이켜 생각할 여유를 갖는다면 “나중에는 더 많은, 더 달콤한 마시멜로를 차지할 수 있다”(165). 목전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내일을 특별한 날로 만드는 지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스갓 펙은 삶을 고해라고 규정한다. 그는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네 가지 훈련 기술을 제시한다. 그 처음이 즐거움의 지연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먼저 한 연후에 즐거운 일을 하게 되면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 살아가는 삶의 유일한 기술이다.” 아이를 버릇없이 키우는 부모의 잘못은 바로 즐거움을 지연시키는 훈련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 역할 모델이 되어 주지 못한 것에 있다. 간디 이야기는 두 개의 마시멜로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한 개의 마시멜로를 뒤로 미루는 것, 그리고 부모와 교사의 역할 모델이 성공한 인생에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크다는 경험적 증거이다. “내가 모범을 보이면 엄청나게 큰 영향력 다시 말하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그것이 바로 성공에 이르는 가장 강력한 도구네”(71).

결코

어쨌든 이 책은 더 많은, 더 달콤한 마시멜로를 얻는 성공의 비결을 약속한다. 신자유주의 물결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오늘 이 아침도 아프리카의 가젤이든 초원의 지배자 사자이든 간에 무작정 뛰어야 히는 세상에 ‘성공’ 만큼 눈부신 유혹은 없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라 내달리지 않는 한 사자의 먹이가 되는 운명의 가젤이나 반대로 그 가젤을 따라 잡아야 생존하는 맹수의 왕 사자의 모습이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죽어라 일하다가 죽어버리거나,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전전긍긍하는 우리네 인생이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왜 달려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살기 위한 삶인 생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부흥을 제 삶의 목적삼은 제지들은 “왜”라고 물어야 한다. “나는 왜 남보다 더 많은 마시멜로를 얻고자 하는가?” “왜 나는 아침부터 달려야 하지? 그리고 어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는 마시멜로를 먹지 마라. 결코.
A. W. 토저는 “영적 성공의 삶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이라고 했다. 이재철 목사는 이 시대를 일컬어 “신앙을 자기 야망의 도구 삼는 시대”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는 그 하나님을 돈과 함께 섬길 수 없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르는 풀과 시드는 꽃이라 했다. 성공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일을 약속하지 못한다. 영원한 것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자는 영원히 남는다. 그만 달리고 한번쯤 생각해 보자. “성공, 좋다. 그렇지만 그 다음은 뭐지? 또 그 다음은?” 그 대답을 알기 원한다면, 그 다음을 얻고자 한다면,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기고 그 다음을 바라본 모세의 만나를 먹고자 한다면, 마시멜로를 먹지 마라. 결코.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누구인가, 나는

본회퍼는 누구인가, 내게

모든 신학과 신앙적 실천이 발생하는 곳이자 선포되는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지를 묻는 이에게 본회퍼는 모델이다. 다시 말해 “독일의 나치 정권 시대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39살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이 독일 신학자의 이름은 폭압적인 권력이 신격화되는 어느 곳에서나 억압적인 불의의 현실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곳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색되는 곳 어디에서나 오늘도 기억”(5)해야 할 신학의 모형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 앞에 있는 하나의 그림이다. 앞 사람을 보고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 눈도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다. “앞에 있는 그림을 따라가면서 배우다 보면 스스로가 따라 배울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226)게 하는 선배가 본회퍼다. 그리스도가 본회퍼의 모범이라면, 그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우리 시대의 증인이자 나침반이다. 그는 우리 당대의 실천과 영성을 추구하는 곳 어디에서나 호출되어 논의될 전형이다 내게 신학과 실천의 모범인 본회퍼는 누구인가, 채수일에게.


본회퍼는 누구인가, 채수일에게

채수일은 「옥중서간」의 두 시편을 통해서 본회퍼 읽기의 틀을 제공한다. “들어가는 글”의 시편 “나는 누구인가”를 통해 저자는 “분열된 자아와 철저한 복종 안에 견고하게 서 있는 자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에게 솔직한”(6) 본회퍼를 읽어낸다. 본회퍼의 삶과 투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절대적 확신을 갖는 근본주의자들과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 유다처럼 타인을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위해 예수처럼 자신을 희생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십자기를 선택한다. 함께 창조된 이웃을 내 한계로 받아들이고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될 것인지(1부), 벌거벗은 자신의 육체적 현존을 훌훌 벗어버리고(4부) 고난도 실패도 없는 피안의 세계에 몸을 던질 것인지 아니면 값비싼 은혜를 따라 순종하는 제자의 길을 갈 것인지(2, 3부)를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마치는 글: 자유의 도상에 있는 정거장”에서는 본회퍼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자신을 경건의 훈련과 정의의 행동과 무력한 고난 속에서 죽음을 자유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받아들여(283) 끝내 죽음으로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그는 영락없는 자유인이요, 투사요 전사다. 저 낮고 약한 세상의 한 복판에서 삶의 중심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타인을 위한 교회의 존재 양식으로 내면의 쾌락의 유혹과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긍정의 ‘아멘’을 외치는 새로운 삶을 산다(4-8부).

본회퍼는 누구인가? 히틀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경건한 수도원이 아니라 모독하고 배반하는 적들 한가운데서 살았다. 루터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수도원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더 큰 수도원으로 만들려고 했을지도”(242) 모른다는 채수일의 묵상은 수도원을 떠나 세상에 나온 것은 초대 교회 이래 가장 강력한 세상 공격이자 신앙 비판이라는 본회퍼의 말(240)을 한층 깊이를 더하면서 우리가 왜 그리고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분명한 것은 히틀러는 적이자 원수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비밀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자면 용서받지 못할 죄나 죄인이 없다. 그렇다면 본회퍼는 히틀러를 사랑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여한 본회퍼의 행동과 신학이 그가 예전에 가졌던 기독교 평화주의와 간디 사랑의 포기와 단절인지, 아니면 연속인지에 대한 구구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원수 사랑의 정신마저 버린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보다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본회퍼의 가슴을 사로잡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타인의 존재 자체가 은혜로 주어진 것을 믿는 본회퍼에게 그 사랑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지극히 간단한 진리가 그리스도인을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37)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의 인간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52).
본회퍼에게 신앙은 둘 중 하나다. “예수와 만나는 길은 근본적으로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죽든지, 아니면 사람이 예수를 죽이든지”(199). 성만찬 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먹히기를 원하시”듯이 “먹힌 분처럼 우리도 남에게 먹혀야 그분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175)다. 당시 수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이성과 원리, 양심과 자유, 덕성을 기준으로 ‘나’ 대신에 ‘너’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때 신앙 안에서 오직 하나님과만 결합되어 복종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책임적 인간에게 원수사랑은 원수와 같은 방식으로 타자를 잡아먹지 않음으로 도리어 원수에 굴복하지 않는다. 원수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되어 세상의 먹이가 됨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다.

본회퍼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그렇다면 각 복음서가 상정한 독자에게 그 책들은 읽기에 전혀 어려운 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신학자들의 글쓰기와 그 신학은 교회 공동체에 의해 읽혀질까? 평신도가 묵상할 수 있는 영성이 깃든 글과 실제적 삶의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학문의 정교한 합리성과 논문의 수미일관성 수사적 아름다움에 치중하느라 공동체성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영성을 놓치지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동시에 이 책은 평신도들의 독서 습관을 책망한다. 신자들 또한 신학자의 책이라면 덮어놓고 어렵다고 도외시하지 않았는지. 한번 읽고 다시 읽지도 재차 읽을 필요조차도 없는 경박한 경건 서적류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악한 지 오래다. 신학교에서도 신학과 신앙에 대한 깊은 사유보다는 졸업 후에도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실용적 과목이 인기다. 사실 예배 시간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성경을 읽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50%를 넘는 현실에서 그마나 경건 서적이라도 읽는 것에도 감지덕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은혜의 이름으로 지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죽였다면 독서와 묵상이 뒷받침하지 않는 열심의 끝은 자명하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과 세속성을 긍정하는 신자들은 본회퍼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를 읽을 때마다 땅 속에 숨어 있는 진주를 발견하는 것 같은 기쁨에 사로잡히는 채수일의 기쁨이 그만의 기쁨으로 그쳐서 되겠는가? 양날 선 칼처럼 타협할 줄 모르는 날카로운 비판에 자신의 신앙을 근본에서 부터 성찰하는 것이 어디 채수일만의 일이겠는가?(6)
채수일은 책 읽는 법에 대한 귀중한 모범을 제공한다. 말 그대로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책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보다도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더 힘든 때가 된 것 같다. 이럴수록 속도와 정보의 시대에 좀 느리더라도 한 권을 천천히 소화하면서 읽는 것이 더 낫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책에 의해서 읽혀지고, 드디어 저자의 영과 정신을 만나기까지 마르고 닮도록 읽고 또 읽는 것이 필요하다.

6장 공감 다섯-세상에서 길을 찾다

미련함의 지혜와 능력-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우리 시대의 멘토

웨슬리 뉴비긴은 우리 시대의 멘토이다. 본회퍼가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C. S. 루이스가 무신론과 회의주의 시대에서 존 요더가 제국과 폭력의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을 일러준다면 그는 다원적 사회에서 복음을 진리로 증언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큰 스승이다. 예수마저도 종교 시장에 전시된 신들과 종교들 중의 한 브랜드가 되어버린 다원적 사회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인지 왜 성경이 진리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인가를 부끄럼 없이 선포하는 용기와 지혜를 배운다.

근대의 타당성 구조에 신학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였다(3장). 자유주의는 슐라이어마흐에게서 보듯이 사적인 감정의 공간 속에 하나님과 종교의 자리를 발견하였고 문자적 무오류설에 집착하는 보수주의는 성경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주장을 통해서 공적인 세계에서 인정받고자 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그 이분법 자체를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뿌리부터 근대적이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계를 향해 철저한 회심을 요구하기는커녕 세계의 일부분으로 편입이 되었다.
뉴비긴은 인격적 세계는 근대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만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할 것(5장), 정치의 영역에서는 전적인 동일시나 분리를 지양하고, 공적인 영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6장). 마지막 7장에서는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종교로 후퇴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와의 차별성을 유지하면서도 합당한 책임을 질 것을 요청하면서 7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레슬리 뉴비긴을 읽자!-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

뉴비긴을 권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로마와 헬라인의 사유구조에서 본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당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을 당대의 지성적인 틀에 맞추어 그 거칠고 투박한 면을 세련되게 만드는 넓은 길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복음의 미련함을 멸시하는 지들의 시각을 틀로 삼아, 뉴비긴이 즐겨 사용하는 피터 버거의 용어로 하자면 ‘타당성 구조’로, 기독교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읍소하는 전략은 복음의 본질과 신앙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 그분의 십자가를 프리즘으로 삼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의 경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제약에 갇힐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해석하겠다고 달려들고, 또 그런 식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는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뉴비긴은 각 시대의 지배 질서와 타당성 구조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뉴비긴을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다.

교회는 예수의 목적이며 선교의 방법이며,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하나님 나라다. 하지만 참람하게도 교회 안에서 맛보는 것은 맘몬이다. 세상의 성공과 정상이 거리낌 없이 매매되고 있다. 이것이 인도 선교 사역을 마감하고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뉴비긴이 마주친 서양 기독교의 현실이었다. 인도보다 영국을 더 힘든 선교 대상국으로 파악하는 뉴비긴은 한국 교회를 보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이 교회가 교회다워지기를 소망한다면 복음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기를 열망한다면, 죄 많은 이 교회를 어찌할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다면, 뉴비긴은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뉴비긴을 읽어야할 세 번째 이유다.

뉴비긴을 읽으며

2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진리이자 권위의 원천이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양식들에 대해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뉴비긴은 진리를 매개하는 네 가지 권위를 언급한다. ‘성경’과 ‘전통’, ‘이성’과 ‘경험’이다. 권위의 출처를 네 가지로 정식화한 것은 영국 성공회의 것으로, 대개 웨슬리의 공헌으로 인정되며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인간의 생산물이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점을 부정해서도 안 된다. 뉴비긴은 그 가파른 경계에 서서 이 네 가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를 중재하는가를 설명한다.
‘성경’은 역사와 문화의 일부분이면서도 그 문화를 해석하는 틀이다. 예수의 이야기가 특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와 문화이지만, 그 이야기는 모든 역사와 문화를 해석하는 틀이 된다. 예수 이야기 없이는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세 가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계시를 해석하고 전달되는 데 불가결한 ‘전통’도 시대적 한계가 있지만 뉴비긴이 말하는 전통은 예수 이야기를 살아내는 제자도의 전통을 말한다. 그 전통이 기독교 진리의 권위를 뒷받침한다.
‘이성’ 또한 마찬가지다. 마틴 부버가 말한 ‘나와 그것’의 이성이 아니라 ‘나와 너’의 이성은 적절한 계시의 중재자가 되며, 그렇게 되면 계시와 이성이라는 대립 관계조차도 종식된다. 네 번째 출천인 ‘경험’은 근대적 의미의 사적 경험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기독교에서 경험은 공동체 삶 가운데서 겪는 것, 이를테면 예배와 성찬의 경험으로 타인과의 공유가 가능하며 성경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의미 있는 사건을 말한다. 물론 이 네 가지는 분리되지 않고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최종적인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완전한 진리가 빼먹은 것, 몇 가지-완전한 진리

완전한 책은 없다

‘어떠한 책에도 한 가지쯤 장점이 있다’고 말한 것은 세르반테스이고, ‘어떠한 좋은 책에도 반드시 결점이 있다’고 말한 것은 「독서의 기술」의 저자인 모티머 애들러이다. 모름지기 책이란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그것이 사람의 작업인 한에 있어서 공존하게끔 되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치기를 학습해 온 우리에게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면, 모든 책은 장단을 갖추고 있기에 저자의 생각에 ‘공감’도 하면서 ‘공격’적인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독서법을 환기시킨다.

총체적 진리가 없다

이 책의 원제는 Tota1 Truth이다. 총체적 진리 또는 절대적 진리라는 뜻이다. 저자가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보편성 내지는 포괄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1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는 초지일관되게 “기독교가 그저 종교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총체적 진리”(67)라는 것을 역설한다. 기독교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현실을 그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행위에 입각해서 해석하고, 그 표준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과 사, 현세와 내세, 자연과 초월의 이분법은 주되심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거나 불순종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지 않은 영역은 없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 못할 현실은 애초부터 없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진리의 총체성을 주장한다.
성서적 진리가 없다

피어시는 성서의 창조 타락 구속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이야기의 성서 전체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성서 이야기는 특정한 정황을 배제하고서는 결코 읽을 수 없다. 예컨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물음 역시 그 물음이 던져지는 상황 속에서 이해되고 대답되어야 한다. 가깝게는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바로 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받게 될 십자가 죽음을 그리고 십자가로 제자의 길이란 성공과 영광의 길이 아니라 자기 부인과 섬김의 길임을 가르치려는 예수의 의도, 멀게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는 마태의 전체 서술 속에서 읽어야한다. 그 맥락에서 예수는 유대의 헤롯과 로마의 시저와는 비견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왕이며 그렇다고 임의로 주관하고 크고자 하는 그들과 달리 섬기는 종이 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왕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저자는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속이 세계관 논의에서 갖는 함의를 설명한다. “창조‧타락‧구속의 포괄적 비전에는 성/속의 분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171)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이다. 이 중 그녀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창조이다. 성서의 창조 기사는 그녀에게 진화론의 부당성을 알리는 논거이다. 전체 4부 중에서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중요한 주제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어떻게 기독교를 공략했고, 어떻게 기독교가 부적절하게 대응했는지를 또박또박 반박한다.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주의인데, 그 세계관이 초자연주의를 배격하게 만들었고, 기독교는 자연주의가 설정한 수평적으로는 공과 사, 수직적으로는 초자연과 자연이라는 이층적 진리를 어떻게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한탄한다.

일관된 진리가 없다

이 책 전체의 전개 과정은 결론과 불일치를 보인다. 저자는 책의 대부분을 창조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을 전개했다. 읽으면서 내심 서평을 쓸 때, 왜 구속의 틀, 그러니까 루터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신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를 지적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13장 “참된 영성과 기독교 세계관”은 내 예상을 깨고 배척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십자가의 신학에 의거해서 교회가 타당성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의 기대가 빗나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품의 변화와 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영하기까지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소음으로 세상에 들려질 것이다.

한국이 없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이 이 책에는 없다. 너무 지당한 말이다. ‘나는 미국인이에요’라고 피어시가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세계관 운동은 한편으로 교회 갱신과 함께 사회 변혁을 지향하려는 보수주의 내의 움직임이었다. 교회는 성장과 기복에 함몰 되어 있고 사회는 독재와 분단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게다가 변혁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서 한국 사회 전체의 혁명을 지향했고 진보적 기독교 운동권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아무래도 거북스럽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이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이제 세계관 운동이 청년에서 성년으로 성장하고 있는 이때에 기독교세계관이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에 얼마나 일조했는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겠다. 그들은 교회를 향해서 늘 외쳤다. 왜 교회는 내세에만 매달려서 땅에서 고통하며 뒤채는 역사와 민중의 한을 보듬지 않는가? 언제까지 우리가 교회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냐, 이층적 진리를 수용해서 그리스도의 전일적 주되심을 저버려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런 목소리에 뒤늦게나마 이제야 교회는 응답했다.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자축할 만하다.

이제는 정반대로 말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라고. 세습하지 말고, 재정 비리 저지르지 말고, 예전처럼 영혼 구원이라는 종교의 고유한 본질에 집중하고 세상은 세상 알아서 돌아가게 내버려두자고 말이다. 낸시 피어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는 복음의 영적 실재를 내면화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러지 못하다. 그 내적 실재가 충만하기는커녕 텅 비어있었거나 아니면 교회 역시 세상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강조하기 전에 나무와 그 뿌리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급선무다. 다시 교회주의에 매몰되면 안 되지만 교회부터 추스르는 것이 일차적이다.

인도로 간 예수, 인도에서 오는 예수-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그런 예수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예수는 없지만, 이 땅을 걷고 있는 예수는 존재한다. 서구의 체계와 체제 속에 주조되어 서구의 족쇄가 채워지지 않은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모든 민족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가 인도에 전하는 우리의 복음이 되어야한다”(41).

다른 예수

서구 안의 비기독교적 요소마저도 서양=기독교라는 등식으로 종교적 재가를 서슴지 않을 때 “서구 문명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23)는 인도인들에게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첨병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면서 전쟁을 그만두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승인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며, 인도의 카스트 제도만큼 혐오스러운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와 천박한 물질주의는 성서와 거리가 한참 멀다. 기독교 진리가 아니라 서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순간, 이교도주의일 뿐 그런 예수는 없다.
그렇다면, 서양의 기독교에 의해 변절된 예수와 다른 예수를 찾아야 한다. 존스는 기독교가 아닌 예수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성서나 서구문명, 혹은 서양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진 어떠한 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정의되어야 한다”(38). 간단히 말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수는 인생의 처세나 지혜를 가르치는 현자가 아니라 800만 번의 고단한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는 구원자이며(262), 종교적 기교나 교리나 신조, 기적에 의해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9장)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지금도 볼 수 있는 분이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의 그리스도이다. 인도가 존스에게 요구하고 존스가 간디에게 준 것 간디가 인도에 제공한 것은 십자가였다. 인생을 숙명과 인과응보로 받아들이는 한, 타고르의 말처럼 무엇이든지 인도에 도착하면, 그것은 멈추게 된다(73).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 자체가 죽음이요 실패이므로 더 이상 패배나 좌절이란 없다. 십자가가 이미 부활이고, 고난이 곧 영광이고, 실패가 성공이므로 십자가를 자기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에게 좌절은 결코 없다. 부활의 아침이 도래하고야 만다.
십자가는 간디를 위대하게 하고, 서양의 기독교를 초라하게 만든다. 십자가는 근본주의가 생각하듯이 정치의 회피도 아니며, 자유주의자들이 주장처럼 실패한 정치도 아니다. 권력과 무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사랑과 진리의 힘에 의지에서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불행히도 그 십자가의 예수를 기독교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인도뿐 아니라 기독교도 십자가의 의미를 인도의 아들인 간디를 통해서 알게 된다(143).

현대판 예수

제자는 따르는 자다. 신자는 변호사가 아니라 증인이다. 복음의 승리는 이성의 증명 능력에 달려 있지 않으며 예수의 내적인 빛은 제 스스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만 보고 들은 것을 말할 뿐이다(행 4:20). 그러기에 우리는 교사가 아니라, 소개자이다. 우리의 “임무는 인도의 길을 걷고 계신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384)이다. 그리고 인도 스스로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와 함께 가도록 요한처럼 비켜주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인도인들이 이 점을 주목했다. “예수는 정말 이상적이고 멋진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정말 전혀 그를 닮지 않았군요”(206). 복음과 선교는 곧 우리 자신을 매개로 해서 전달된다. 하나님이 예수 속에 육화한 것처럼 바울이 당당히 ‘나의 복음’이라고 외쳤듯이 복음은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 소개된다. 진정한 복음 사역은 전파하는 자신 안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사역은 기독교 사역자의 문제이며 기독교 사역자의 특성에서 나온다”(30). 올바른 선교 방식이란 소개자의 기독교적 경험을 통과한다. 간디가 존스에게 제안한 네 가지도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2l9)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도인들이 복음을 거부할 수 없는 까닭은 예수와 기독교적 경험에 있다(253). 신자의 삶이 오늘을 사는 예수의 삶을 드러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초대교회가 예수 이야기를 그대로 살았을 때도 그랬으니까. 나의 삶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서 조명을 받으며, 예수의 복음은 신자의 삶을 통해 해석되고, 선포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언행을 통해 신선하고 살아있는 예수를 경험한다. 마치

출처 : 구미 에덴교회
글쓴이 : 이진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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