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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자살】예화 모음 33편

by 【고동엽】 2022. 3. 3.
[처음 목차 돌아가기]
 
 

- 기독교인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자살의 원인-(1) 생물학적 원인

지금까지 우리는 자살을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살의 개념이 시대마다 달라졌고, 더 나아가 기독교에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자살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런 노력으로 자살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넓어졌다. 계속될 수 있는 자살의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대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만들었다. 실제로 자살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여전히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다만 시대적인 상황과 관점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제는 이런 자살에 대해 원인론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다. 사람은 왜 자살하려는 것일까? 이런 원인을 연구하다 보면 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까지도 자살하려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자살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대강이 조금은 드러났지만, 보다 심도있게 원인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이에 기초해 가장 궁금한 점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다루고자 한다.

1. 자살의 생물학적 원인

자살의 생물학적 원인은 자살을 연구하는데 일차적이다. 자살의 생물학적 이해는 신체 조건이나 신경 전달물질의 균형, 그리고 자살의 유전인자 등이 관심의 대상이다. 신체적 문제는 자살하려는 사람이 어떤 신체적 조건이나 상태에서 정신이 통제력을 잃고 무력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여기서 자살의 유전적 측면은 유전인자를 가진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살의 유전적 측면은 어느 정도 자살하는 당사자와 무관하게 유발된다는 점에서 책임이 다소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살의 생물학적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자살의 유전학적 요인

사람들은 자살의 생물학적 요인 중 ‘유전’ 여부에 가장 관심이 많다. 자살하는 사람은 집안에 (자살) 유전인자가 있다고도 한다. 자살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집안 내력이라는 생각도 갖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할 때 집안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지를 고려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자살의 유전성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살도 정말 유전될까? 자살이 유전되는가의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자살 행동을 파악해야 한다. 자살 행동(suicidal behavior)이란 자살 사고(suicidal ideation)와 자살 수행(completed suicide), 그리고 자살 시도(suicidal attempt) 등을 포함한다. 자살과 관련된 여러 행동을 포괄해 관련시키는 것이다. 자살 사고는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상태의 자살에 대한 생각이나 징조를 가진다. 자살 사고 또는 생각은 자살 시도와 수행보다 흔하며, 남성보다 여성에게 2배 많이 나타난다. 여성는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살 시도 때는 남성보다 죽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다. 그러나 남성은 시도 자체는 적지만 실제로 죽는 편을 택해 자살율은 여자보다 높다. 이런 문제는 자살 행동이 자살 의도, 자살 방법, 치명도, 충동성이나 공격성과 충동성이 높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자살 행동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서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살은 실로 복합적인 측면이 작용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자살 사고는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이 있지만 자살 심각도는 자살 사고부터 자살 시도, 그리고 자살 수행까지가 연속선상에 있다. 또 극단적인 방법은 종종 약물남용이나 의존, 그리고 정신과적 질환 등이 관련있다. 여기에 자살 수행은 비교적 낮은 정도의 자살 행동으로 자살하려는 생각을 하고 자살하려는 행동을 감행해 보는 비교적 낮은 단계다. 그에 비하면 자살 시도는 확고한 자살 계획을 갖고 매우 치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심각한 행동부터 사회적 위기 등의 스트레스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 충동적으로 시행한 자살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이런 자살 행동과 관련하여 유전자의 관련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세로토닌계와 관련된 유전자다. 세로토닌계는 많은 연구를 통해 기분, 충동성, 공격성 또는 자살 행동과의 관련성이 밝혀졌다. 실제로 자살에서 세로토닌계와 관련된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많은 편이다. 세로토닌은 뇌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호르몬으로 하나의 세로토닌이 수많은 신경을 상대로 전체 뇌의 상태와 분위기를 형성하고 조절한다. 이는 세로토닌이 활성화된 사람은 평상심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세로토닌의 기능에 대해서는 활성화 상태와 비활성화 상태를 정리하면 이해가 쉽다. 세로토닌은 자율 신경에 영향을 줘 몸을 충분히 준비된 상태로 만든다. 세로토닌 신경은 각성 상태에서 낮은 빈도로 규칙적인 자극을 보내는데, 이것은 자동차차 엔진에 시동을 걸면 저속으로 규칙적인 회전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몸을 움직이기 위한 준비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침 기상과 동시에 세로토닌 신경에서 자극이 잘 발생하면 쉽게 일어나 상쾌한 심신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이는 세로토닌이 뇌에서 작용하는 중요성을 의미한다. 자살과 관련된 세로토닌계 유전자들은 대개 TPH(Tryptophan hydroxylase)유전자, 세로토닌 전달 유전자, 그리고 세로토닌 수용체 유전자들을 말한다.

이외에 MAO-A(Monoamine oxide A)유전자, COMT(Catechol-O-methytreansferase)유전자, 도파민 수용체(Dopamine reseptor) 유전자 등도 자살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다.

(2) 자살 행동의 가족 연구

자살 행동이 가족간에 유전되는 경향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유전성은 정신과 질환의 유전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자살 위험이 높은 기분장애 환자의 친척들은 자살률이 높지 않다는 보고가 있다. 그럼에도 자살의 유전적 경향은 여전히 무시되지 않는 편이다. 이는 생물학적 특성이 자살과 관련이 높음을 시사한다.

쌍둥이 연구에서 이란성 쌍생아보다 일란성 쌍생아들이 자살 수행 및 행동 일치율이 의미있게 높았다. 오스트리아에서 시행된 쌍생아 연구는 일란성 쌍생아의 심각한 자살 시도 위험이 17배 높다고 보고했다. 양자 연구에서는 자살을 수행한 입양자의 생물학적 친족에서 자살률이 약 6배 정도 높았다. 이런 결과에 의하면 자살 행동은 43% 정도는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나머지 57% 정도는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에 브렌트와 만(Brent & Mann)은 자살 또는 자살 행동의 유전성은 정신과적 질환의 유전성과 충동-공격성 또는 다른 성격 특성의 유전성 등에 의해 결정될 수 있으며, 이 두 유전성이 공존한다면 자살 행동의 위험이 매우 증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자살 위험인자는 반드시 유전적 요인만은 아니다. 환경적 요인으로도 빈발하고 있다. 오늘날 자살자의 90% 이상은 정신과적 질환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자살의 약 60%는 기분장애의 경과 중 나타나고 나머지는 정신분열병, 알코올 중독, 약물중독 그리고 인격장애 등 다른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있다. 정신병리 유무가 자살의 강력한 예측인자이지만, 정신과적 질환을 가진 환자 중 소수만이 자살을 수행하고, 자살자가 반드시 정신과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격성, 충동성, 불안, 절망감, 비관주의, 알코올 등 약물중독, 아동기 학대의 과거력, 두부손상 또는 신경학적 질환, 흡연 등 임상적인 특징도 자살 위험을 증가시키는 요인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자살의 위험인자이면서 동시에 자살의 중간표현형(intermediary)으로 제시된다. 자살과 관련된 생물학적 연구에서는 자살 행동뿐만 아니라 이런 중간 표현형인 위험 인자들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만(Mann)은 자살 행동의 스트레스 소인 통합모델(stress diathesis model)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자살 위험이 정신질환의 심각도와 관련이 없고, 어떤 자살과 관련된 소인의 변화에 의해 자살이 유발된다고 설명한다. 자살의 생물학적 혹은 유전적 소인을 가진 사람에게 생활사건 또는 스트레스가 가해졌을 때 자살 행동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살 행동에서 비관·절망, 그리고 공격·충동성은 자살의 주요 소인이 된다. 이러한 소인에 성별·종교·가족력 또는 유전적 요인·아동기 경험·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는 요인 등 여러 요인이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 요인은 세로토닌, 콜레스테롤 그리고 다른 생물학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

(3) 자살 행동의 신경생물학적 요인

자살 행동은 신경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이해된다. 신경생물학적 관점이란 뇌신경의 변화가 자살을 유발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생각을 조절하는 뇌의 작동성과 기능성이 모두 뇌신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뇌의 원만한 기능과 조화는 그대로 정신 작용으로 이어진다. 이런 신경생물학적 요인은 신경에 변화를 주는 이른바 신경전달물질의 조건이 중요시된다. 신경생물학적 요인은 앞에서 다룬 유전자 기능과 유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뇌신경 변화에 영향을 주는 중복되는 측면이 다소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어렵지만 자살과 관련된 생물학적 요인을 살펴봤다. 이런 연구들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복잡하게 생각될 것이다. 솔직히 전문가들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그러기에 이런 전문적인 연구들은 아직 제한적이다. 그것은 여전히 신경생화학적 연구들이 활발하지 못한 원인도 있다. 중추신경계와 자살 행동 연구의 기술적 제한과 그들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여기저기를 참조하고 더러는 베끼고 각주를 달며 고생하면서 이를 정리했다. 이제 이를 종합 정리하면 자살 행동과 관련있는 생물학적 원인은 대개 신경생화학적 소견들로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는 세로토닌계 활성 감소다.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HPA축)의 과활성은 노르아드레날린계의 과활성 또는 과도한 분비와 그에 따른 노르아드레날린 결핍이라는 신경생화학적 변화를 의미한다. 세로토닌의 활성 감소가 주로 전전두엽의 배내측에서 관찰되면 전전두엽의 배내측 기능 이상은 충동 및 공격성을 증가시키고 자살 행동의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다. 자살 행동과 관련있는 스트레스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의 과활성을 유발하며, 이로 인해 노르아드레날린계의 과활성이 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자살 행동의 유발인자다. 자살의 유전적 요인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유전자 후보는 TPH1 유전자와 5-HTTLPR 유전자다. 아직 연구 결과들이 일관되지는 않지만 TPH1 유전자 다형성은 세로토닌 기능의 부전을 설명하고, 5-HTTLPR 유전자 다형성은 자살 행동 중 극단적인 자살이나 반복적인 자살 시도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MAO-A 유전자다. 이 유전자에 관한 연구는 그것이 자살 행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극단적 자살방법을 이용한 남성 자살자는 MAO-A 유전자 다형성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 외에 세로토닌 수용체, COMT, 도파민 수용체 등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자살과의 유의미한 관계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생활에서 직면하는 심리적 자극과 반응은 또다른 생물학적 요인을 변형 내지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에는 자살의 심리적 원인을 살펴보려고 한다.



2. 자살의 심리적 원인

자살의 심리적 원인을 살펴보려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어떤 심리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왜 자살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떤 심리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하는가?’ 등이 해당된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있지만 기대에 부응하는 시원한 답변에는 미흡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심리학 영역에서 자살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가 있지만, 그 입장이 학파마다 다르고 누구나 동의할 만큼 일치된 결론이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때문이다.

자살의 본격적인 연구가 공교롭게도 사회학자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eim)이 자살에 대한 이론을 정리해 발표하면서 자살을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심리학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이런 관점에서 자살의 심리적 원인에 대해 몇 가지 특징적인 점에 초점을 맞춰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1) 욕구 좌절에 의한 자살

인간은 욕구적 존재다.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욕구가 심각하게 침해받거나 이룰 수 없다고 판단되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개인이 기대하고 바라는 욕구가 좌절됨에 따른 갑작스런 태도다. 이는 인간에게 욕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극심한 욕구의 좌절이 있을 때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욕구의 좌절과 관련해 다음 네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1) 사랑의 실패로 인한 자살

사랑의 실패는 위축된 사랑, 수용과 의존, 협력에 대한 욕구의 좌절과 관련된다. 사랑과 관련해 자살하는 경우는 ‘사랑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의 실패 때문에 죽으려는 사람들은 자살이야말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는 최후의 방법이라 믿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사랑에 의한’ 자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프랑스혁명 때 연애로 인해 일어난 자살 중 소피 모니에의 사례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대웅변가이던 미라보와의 파란만장한 관계로 유명했던 그녀는 미라보가 죽자 마지막 연애가 끝났으니 자기 앞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미라보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집에 돌아와 그의 초상을 손에 쥐고 자살했다. 자살 도중 마음이 변할까봐 그랬는지 두 발을 쇠사슬로 침대 기둥에 매어둔 상태였다는 점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사랑과 관련된 이러한 사례는 연애의 실패가 일차적이지만, 사랑과 애정의 실패, 더 나아가 더 넓은 의미의 사랑으로 이해되는 ‘진정으로 자신을 수용하지 않고 협력해주지 않는 사람들부터의 좌절된 심리’도 해당된다.

2) 중요한 관계의 단절로 인한 자살

중요한 관계의 단절은 인간에게 극심한 슬픔을 유발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기대 살던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겉잡을 수 없는 심리적 상태가 된다. 이런 점에서 전술한 사랑의 관계와 일면 중첩되지만, 여기서는 연애를 뛰어넘어 상당히 의존하던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관계는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협력과 양육에 대한 욕구의 좌절과 관련된 것이기에 대개는 심리적 선행 요소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치명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 집단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련돼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 등이다.

관계의 단절은 대개 심각한 소외를 초래한다. 이때 당사자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는 외로움을 깊이 경험한다. 자신은 혼자라는 소외와 외로움이 겉잡을 수 없이 밀려든다. 함께 살아가던 배우자나 가족들과의 사별이 대표적이다. 필자가 상담한 내담자 중에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신지 6개월 후에 모친이 자살한 경우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모친은 사랑하는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뒤따라 갔을까 생각하면서도 남은 가족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가누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자살은 흔하지 않지만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3) 수치·모욕과 관련된 자살

한 개인이 극심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 감당하기 힘들어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이렇게 일어나는 자살은 심리학적으로 공격받은 자아상과 수치, 패배, 모욕과 불명예에 대한 욕구 좌절과 관련된 문제로 볼 수 있다. 수치와 모욕을 치욕이라 한다면, 여기는 명예훼손이나 불명예 또는 중상모략 등이 포함된다. 개인은 이런 치욕의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을 시도하는데, 자살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자살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불명예를 씻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도 이런 측면과 상당히 관련돼 있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누명이나 억울한 사건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있다고 판단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조롱하고 야유를 보낸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힘을 내기 어려운 가운데, 보란듯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자살을 선택한다.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는 1960년대 그리스 과학자 지시스가 이러한 예다. 그는 납을 원료로 한 도료를 사용해 파르테논 신전을 보수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신문에서 그 제안을 비웃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정확한 것이었고 오늘날 전문가들은 그가 제안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 부당한 대우에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자살

명예회복에 의한 자살은 대개 사회 질서와 관련돼 일어난다. 자신의 공과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해 법적으로 책임을 지거나 사회로부터 심각한 침해를 당했다고 판단하는 경우다.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는 자살에는 와해된 조절, 예측 가능성과 정리, 성취와 자율성, 질서를 이해하는 데서의 좌절과 관련된 문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왕이나 대통령, 또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는 편이다.

로마의 웅변가 라비에누스 티투스는 몇년간 몰래 당시 역사를 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하에게 고발된다. 원로원은 그가 써놓은 것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라비에누스는 자신이 저술한 것을 잃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 가족 묘지로 가서 자살했다. 부당한 대우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굳이 역사적 사건을 들추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기업 고위간부의 한강 투신과 현재 보도되고 있는 여자 연예인의 자살 등은 죽음으로 부당한 대우를 알리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으로 봐야 할 것이다.

(2) 심리적 고통의 출구로서의 자살

자살은 또 심리적인 고통의 출구로서 시도된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을 감행하기 전 먼저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여건이나 사건이 심리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심각하게 경험한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이란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대단히 힘겨운 일도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가벼운 일상의 고통을 무척 힘겨운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심리적 고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대개는 극심한 좌절감과 엄청난 방해 또는 심각하게 위축을 초래한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사람은 심리적 고통이 극에 달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고통의 출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이 반드시 자살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결론이 나면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자살이 고통스런 정신적 삶을 정지시키는 수단으로, 견딜 수 없는 심리통(psyache)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인지행동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자살을 ‘도움의 호소(cry for help)’라 간주한 것을 ‘고통의 호소(cry for pain)’로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살 행동은 뭔가를 전달하려는 경우가 많고, 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에 의해 유발되므로 고통이 일차적이고 도움에 대한 호소는 이차적이라는 것이다.

자살의 심리적 고통은 현재 상황을 벗어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아무도 이런 고통에 있는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이 과정에서는 대개 개인의 심리적 과정이 개입해 좌절을 피하는 것,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지지에 의해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를 왜곡되게 한다. 그 결과 개인은 덫에 걸렸다는 느낌과 막다른 골목이라는 느낌(sense of entrapment)을 갖게 돼 실패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결합되고,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이전의 부정적인 생각이 실패했다는 기억과 함께 문제 해결능력을 저하시키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기력의 생물학적 과정이 유발되거나 모방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를 초래한 때문이다.

(3) 절망적 현실로부터의 도피로서의 자살

현실은 자신의 삶을 떠받치는 힘이다. 사람은 자신의 현실이 빈약하면 힘을 잃지만 현실이 희망적이거나 좋으면 힘을 얻는다. 이런 점은 개인의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심리적인 문제에 크게 좌우되고 있음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심이 적은 사람이나 현실에 기대감이 낮은 사람은 기대감이 높은 사람에 비해 불만족은 작아지게 된다. 그만큼 절망감이 감소되기에 자살할 위험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대한 기대감과 현실의 불만족으로 인한 좌절감이 자살의 기초임을 의미한다.

현실에 대한 괴리감은 종종 부담으로 작용해 개인을 심리적으로 심각하게 억압하기도 한다. 그러면 개인은 억압 상황의 회피를 시도한다. 그래서 인지치료학자인 바우마이스터(Baumaister)는 자살을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개념화하면서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제시했다.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기대 수준은 높지만 현실적인 상태가 그에 도달하지 못할 때 기대와 현실 간의 괴리가 생기고, 그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기 비난과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주의 초점을 자신에게 되돌려 고통스러운 자기 지각이 더 커지고 자신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 상태가 초래된다.

개인은 고통스런 생각과 감정을 해소할 수단을 강구하는데, 이때 어떤 판단을 할 수 없는 ‘인지적인 몰락(cognotive deconstruction)’ 상태가 된다. 인지적인 몰락 상태에서는 정신 기능이 협소화돼 매우 부정적인 판단을 초래한다.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거부하고 피상적이고 무가치하게 지각하고 해석하는 정신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상태는 자살을 가로막던 여러 가지 내적 억제력을 약화시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절망적 현실 앞에 힘을 잃지 않고 의연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인간은 강한 존재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한 마디 말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 상황을 반전 내지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해결의 출구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극단적인 방법 중 하나로 죽음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기보다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의 어려움과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 대응해야 한다. 한 마디의 위로와 격려의 말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4) 자기파괴적 본능에 의한 자살

자살이 자기파괴적 행동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본능적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파괴를 일삼는 유전인자가 내재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본능에 대해 프로이트(S. Ferud)는 인간이 건설적인 측면을 가진 특성을 에로스(Eros)라는 생명본능으로, 파괴적인 측면을 가진 특성을 타나토스(Thanato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인화된 죽음의 신)라는 죽음본능으로 구분했다. 생명본능인 에로스를 그토록 구가하던 그가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를 일삼는 인간을 보면서 인간이란 죽음, 곧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선천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파괴적 본능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건설적으로 노력하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을 엎어버리고 싶은 심리가 작동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들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라 불렀다. 이 죽음본능인 타나토스와 대립되는 것이 바로 에로스인데, 이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생존본능이다. 일반적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 굳게 융합돼 있다. 이를테면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인간은 두 가지 본능, 즉 에로스에 이끌려 삶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타나토스의 영향을 받아 죽음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이런 파괴적 본능에 대해 자살 행동을 하게 만드는 정신역동적인 동기라고 표현했다. 죽이고자 하는 소망, 죽임을 당하고 싶은 소망, 죽고 싶은 소망 등이다. 모든 자살의 경우 이 세 가지 동기가 모두 나타나지만, 나중에는 어느 하나의 동기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죽이고자 하는 소망과 죽임을 당하고 싶은 소망은 나이가 들면서 감소하지만, 죽고 싶은 소망은 나이가 들면서 증가한다. 이는 자살하고 싶은 심리가 점점 증가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살을 개인의 파괴적 본능으로 본다면 누구나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개인은 잘 살아가다가도 일이 잘 안 되거나 막히면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기보다는 ‘쓸어버리고 엎어버리려는 심리’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경험하면서 살아나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많은 고생과 실패를 경험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에 영웅으로 선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칭송한다. 반면 조금만 견뎌나가면 되는 상황에서도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인생의 실패자’로 낙인찍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가의 문제는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다. 개인이 생활해 온 경험과 성격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5) 기타 원인론적 자살

자살에는 실로 다양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죽음으로 타인에게 복수하려는 보복성 자살, 스스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비관해 죽음을 선택한 자기처벌성 자살, 그리고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살도 있다.

보복성 자살은 죽음으로 타인에게 복수한다는 측면에서 가해적인 자살이다. 설령 자살자가 잘못한 경우라도 이때는 자살자의 엄격한 우위성이 인정된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복성 자살은 자신을 파괴하면서 상대방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의도를 가진 가해적 자살이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 무기력함을 비관해 선택한 자기처벌성 자살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자신이 가진 계획이나 생각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에게 실망해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에 대해 실망한 수준이 지나쳤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타인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는 매우 양심적인 측면도 있다.

반면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자살은 매우 억울하고 심각한 원한을 갖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릴 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살은 어떤 형태든 죽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행동이다. 심각한 수치심이나 불명예 등의 치욕으로 인한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봐 죽음을 선택했든, 개인의 정당성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든 모든 자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와는 달리 자살은 현상적으로 분노와 공격적·파괴적인 측면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생각은 자살을 내부로 향한 분노로 개념화했다.

그런가 하면 인지행동학자는 자살과 자기 파괴행동을 낮은 스트레스 역치, 제한된 대처 능력을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부적응적인 데 대처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대체하고 정적으로 강화해 행동적으로 소거할 수 있다고 본다. 이의 일환으로 만성적인 자살시도 환자를 위해 자살 행동의 동기와 능력의 결여를 결합하는 치료법을 강조하고 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중요한 대인관계, 자기조절과 스트레스 내성의 기술과 능력이 결여돼 있으며, 개인적·환경적인 요인이 가진 행동적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새로운 기술과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방해하며, 종종 부적절한 행동이나 자살 행동을 강화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극한 심리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평소 노력이 필요

우리는 이상에서 자살의 심리적 원인을 다뤘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해 자살을 막아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삶에서 정서적, 대인관계적, 행동적 스트레스를 개선하거나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다. 자살 시도자들에 대한 연구에서도 인지적인 경직성, 이분법적 사고, 빈약한 추상능력과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극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평소에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건설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면관계상 자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여러 명이 동일한 뜻을 가지고 죽는 집단자살이나 군대에서 명예와 군법에 의한 자살, 그리고 어느 단체를 위해 죽는 희생적 자살은 그 특수한 성격 때문에 다루지 못했다. 그 외에 죽은 사람과 저 세상에서 결합하려는 목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자살은 다시 후에 기술할 자살의 유형에서 더 다루게 될 것이다.

 


3. 자살의 원인-(3) 병리적 원인

3. 자살의 병리적 원인

자살은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 절망적이 돼 자기의 삶을 포기할 때 일어나는 극단적 행동이다. 또 현상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 죽음을 선택하는 의지적 행동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개인의 부정적인 의지력은 거의 작동되나 긍정적인 의지력은 마비된 상태에서 행해진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평소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정상적인 판단 기능이 순간 멈춰서는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실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살의 병리적 원인을 살펴야 한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어떤 질병과 관련이 있으며, 어느 정도의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1) 우울증과 자살

우울증은 자살시도와 관련, 그 선두에 선다. 과거의 자살 시도와 정신과 질환의 관련성을 종합해 보면 자살 사망자의 95%가 정신질환을 하나 이상 갖고 있으며, 이중 가장 흔한 진단이 주요 우울장애(59-87%)였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당시에 심리 및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 중에서도 우울증이 80% 이상인 것으로 보고된다. 실제로 우울증은 여러 정신 질병 중 자살률을 가장 높게 점유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depression)은 의기상실한 기분과 정신운동 저하에 따른 정신적 증후군이다. 우울증은 울증 또는 울병이라고도 하며 대개 심리적으로는 절망감, 즉 ‘희망이 없음’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이나 체중 감소를 수반한다. 우울의 상태를 두고 프로이트(S. Freud)는 개인의 분노가 내면으로 향한 것으로, 칼 융(C.G. Jung)은 정신 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때 분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특성이면서도 죽음도 불사하는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정신적 에너지로서의 작용은 멈춘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우울증에 대한 정의는 핵심적인 특성을 제시하고 있다. 우울증의 상태는 완전히 부정적이 돼 의기소침해지고,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상태에서 자살자는 절망감, 허무감을 느끼며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연결시키는 듯 하다. 당사자는 우울한 상태에서 분노가 유발되면 절망감으로 이어지고, 다시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이 절망감은 다시 다르게 변하지 못하도록 마지막 슬픔이 활동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키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고 보면 우울증은 그렇게 간단한 증상이 아니다. 오죽하면 우울한 상태에 빠진 당사자조차 그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겠는가? 그들은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혹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해 더욱 괴로워한다. 지금의 괴로움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이런저런 노력을 해도 쉽게 회복되지 않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앗아가고, 그들은 심각한 절망감으로 압도된다.

우울증은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더 흔하다. 우울증이 자기 존중감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 우울 장애의 시점 유병률이 남자가 2-3%, 여자는 5-9%였고, 평생유병률은 남자가 5-12%, 여자는 10-25%였다. 그 외에도 여러 역학 연구에서 우울증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2배 정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표와는 달리 자살 사망률에서는 남성이 앞선다. 여성이 자살시도를 더 많이 하지만 사망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남성은 사망하는 쪽을 더 선택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더 나아가 우울증 관련 자살시도는 우울 증상이 지나친 경우보다 오히려 회복되는 시기에 더 많아진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우울증이 심하면 죽을 힘조차 없지만,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죽을 힘이 생긴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알코올·마약 중독과 자살

알코올 중독이 자살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살 시도 순간 자살자의 50% 정도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보고가 있으며, 18% 정도의 알코올 중독자가 자살로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알코올 의존은 주요 우울증과 함께 자살 사망자들에게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정신질환이다. 실제 알코올 중독 환자들에게 자살 사고와 자살 시도는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는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 환자들의 자살 위험성을 주의깊게 평가하고, 자살 예방을 위한 정책수립 과정에서도 이를 염두에 둬야 함을 의미한다.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이야말로 살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자신들을 파멸시킨다. 많은 역학조사와 임상연구 결과들은 알코올·마약 중독이 자살의 대표적 위험 요인의 하나임을 알려준다. 연구에 따르면 알코올·마약 중독자의 40% 정도가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했으며, 70%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알코올로 자살하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만성 알코올 중독이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이 계속 술을 마시다가 죽게 되는 것을 알고도 마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술을 마시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마시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불안을 가라앉히고, 죽고싶다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측면과 자살 결심을 도와주는 측면이다.

남성 알코올 중독자보다 여성 알코올 중독자가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방법은 유일하게 여성이 남성보다 자살자가 많은 방법이기도 하다. 알코올·마약 중독 환자의 자살 위험 요인 연구는 인구학적·성격적·알코올 중독 관련·정신질환 병력·생활 사건 등 다섯 범주로 분류한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 동반된 환자에게서 자살 행동이 더욱 빈번하게 관찰된다. 이는 자살에 대한 보호 요인은 위험 요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신질환에 대한 적절한 치료, 치명적 자살 도구에 대한 낮은 접근성, 가족 및 지역사회와의 강한 연대감, 갈등 및 문제 해결의 기술, 자살에 대한 문화적·종교적 금기 등이 고려돼야 함을 의미한다.

(3) 정신분열증과 자살

정신분열증은 인지, 정서 및 사회 기능 등 여러 측면에서 장애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조기 사망의 주요 원인이 되는 심각한 정신질환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25-50%가 일생 동안 한 차례 자살을 기도하며, 10명 중 1명은 자살로 사망하고, 일반인보다 자살 위험이 약 30-40배 더 높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치료진들이나 가족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자살 위험에 대해 우울증 같은 기분장애보다 덜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자살의 일반적 위험 요인으로는 남자, 우울증, 절망감, 자살사고, 자살 시도 경험, 사회 기능 저하, 사회적 고립 또는 사회 지지체계 약화, 상실 경험, 약물남용 문제 등이 있다. 재발이 반복되고 만성화의 경과를 보이며, 증상이 남은 채 퇴원하고, 병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거나 병으로 자신이 황폐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양성 증상이 두드러지고, 남자이며, 사회·직업 기능 저하나 삶의 질 저하 등은 정신분열증 환자의 고유한 자살 위험 요인이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자살 위험은 급격히 변화 할 수 있어 이런 위험 요인의 유무와 관계없이 항상 자살 위험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자살 사망자들은 주로 심리적인 불편감과 절망감, 정신운동 지체를 보이며, 우울한 기분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일생 동안 더 많은 우울 삽화를 경험한다고 한다. 또 사회 및 직업 기능의 저하나 삶의 질 저하는 자살 발생을 예측한다. 그리고 젊은 환자일수록 최초 삽화 기간, 특히 첫 발병 이후 첫 1년간 자살 위험이 높다. 그러나 이들의 자살 위험은 시간에 따라 급격히 변할 수 있고, 실제 자살 위험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오히려 증상이 호전된 후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살 시도가 흔히 발생한다. 국내 정신분열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충동적인 환자일수록 더 자주, 더 위험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4) 불안장애와 자살

불안장애는 가장 흔한 정신질환 중 하나로서, 환자의 사회적·가정적·직업적 기능에 각종 장해를 일으킨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하나 이상의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 자살 의도를 갖는 비율은 60.6%, 실제 자살 시도를 한 경우는 70.4%였다. 이는 같은 기간 기분장애 환자에게서 보이는 자살 의도 70.9%, 자살 시도 69.9%와 비교할 때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또 불안장애는 기분장애, 알코올 중독과 같은 관련성 높은 질환이 함께하는 경우도 많다.

불안장애가 독립적으로 자살 의도 또는 시도와 관련돼 있는가에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이는 불안장애와 자살의 관련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규모 장기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한 연구는 3년에 걸친 장기 연구에서 주요 불안장애의 평생 유병률과 자살간의 관련성을 추적했다. 그 결과 사회공포증, 특정공포증, 범불안장애, 공황장애, 광장공포증, 강박장애와 같은 불안장애가 횡단 분석 및 종단 분석에서 모두 자살 의도 및 시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이 연구는 불안장애가 기분장애를 동반하는 경우 기분장애만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 비해 더 많은 자살 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는 불안장애만으로도 자살 시도를 증가시키며, 기분장애와 동반하는 경우 기분장애 환자들의 자살 시도를 더욱 증가시키는 위험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안장애와 자살의 관련성을 조사한 다른 연구에서는 사회인구학적 정보, 평생의 기분장애, 물질중독, 정신증, 반사회성 성격장애 등의 변인을 보정한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만이 자살 의도 및 시도와 관련이 있으며, 다른 불안장애의 경우 관련없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는 불안장애와 자살의 관련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질환별로는 각종 불안장애 중 공황장애 환자의 자살에 관한 연구가 가장 먼저 시행됐고, 공황장애 환자의 9%가 자살 행동을 보였다. 특히 공황장애 환자에게서 자살과 관련된 요인으로는 조기 발병은 물론 우울장애, 물질중독, 섭식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성격장애가 동반됐으며, 기분장애가 동반하지 않은 경우 자살 행동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공황발작, 공황장애, 자살 사고, 자살 시도를 분류한 연구에 따르면 1년 및 평생의 공황발작과 자살 시도는 동반 질환을 보정한 경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구 방법론적 측면보다 심층적 분석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공황장애 환자의 자살 관련 연구에서 쟁점은 연구 대상자의 수, 통계적 문제, 공황장애 및 공황발작의 정의, 시점의 차이(1년, 평생), 자살 의도 및 시도의 구분, 동반 질환의 보정 유무 등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의 차이에 따라 아직 연구 결과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섭식장애와 자살

섭식장애도 자살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다. 음식 섭취의 어려움은 생활의 불편함을 넘어 생명의 근본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섭식장애 또는 식이장애는 섭식행위의 문제로 크게 신경성 식욕부진증과 신경성 폭식증으로 구분된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최소한의 정상 체중을 유지하는 것을 거부하며, 신경성 폭식증은 반복되는 과식(폭식) 삽화와 이에 수반되는 구토 등 보상적 행동이 특징이다. 섭식장애 중 특히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자살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가 자살로 사망할 확률은 일반에 비해 50배나 더 높고 사망 원인에서도 2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신경성 폭식증은 자살로 사망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보고됐으나 자살 시도의 경우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경우 최고 20%까지, 신경성 폭식증의 경우는 최고 35%까지로 보고돼 다소 논란이 되고 있다.

섭식장애는 특성상 다른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고 있다. 섭식장애로 자살한 경우 기분장애와 성격장애가 더 많았다거나 알코올 의존과 주요 우울장애가 더 많았다는 보고도 있다. 신경성 폭식증의 경우 우울증과 물질중독 외에 행동장애가 더 많고, 많은 연구들이 신경성 식욕부진증 및 신경성 폭식증에서 물질남용과 자살의 관련성을 보고하고 있다. 이런 섭식장애도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첫째,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의 가장 많은 사망 원인은 내과적 합병증이지만 다음으로는 자살이다. 사망 원인의 54%가 내과적 합병, 27%가 자살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진단별로 자살 위험도를 설명하는 표준화된 사망 비율(standardized mortality rate)은 여성의 경우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32.4인 반면 신경성 폭식증은 0이라고 한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가 일반 인구에 비해 자살률이 200배 더 높다는 보고도 있다. 연구들은 입원환자 집단과 외래환자 집단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으로 입원했던 환자를 24년간 장기 추적 연구한 결과, 자살 사망률은 약 5.3%로 나타났다. 입원했던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의 자살률이 2.1%라고 보고한 다른 연구에서는 자살 방법으로 폭력적 방법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알코올·약물 중독이 많았다. 입원환자의 연구를 종합하면 자살률은 0-5.3%다. 외래환자 연구에서는 입원환자보다 다소 낮은 2.4-4.8%다.

둘째, 신경성 폭식증이다. 신경성 폭식증 환자들이 자살로 사망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88명의 환자를 추적 연구한 결과 자살률이 0.1%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섭식장애 환자의 경우 연구에 따라 질병기간, 치료 및 추적 기간, 입원시 체중 등이 자살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혼합형 섭식장애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와 신경성 폭식증 환자, 그리고 주요 우울장애 환자를 비교한 연구 결과는 세 집단간 자살 시도 비율이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자살 시도시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와 주요 우울장애 환자가 보다 심각한 자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됐다. 아형에 따른 차이를 보고한 연구에서는 제한형 신경성 식욕부진 중 환자의 9.0%가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살 시도를 했다고 밝혔다. 시도 방법으로는 약물 과잉복용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손목 절단이었다.

자살로 인한 사망률은 분명 신경성 식욕부진증이 신경성 폭식증보다 높지만, 자살 시도만을 비교하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높은지 분명하지 않다. 성적 학대 및 신체 학대가 섭식장애 환자에게서 자살과 관련된다는 보고도 있다. 특히 아동기 학대 경험이 신경성 폭식증 환자의 충동적 자기파괴적 행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적 특징에서는 완고한 성격, 높은 자기초월성 등이 섭식장애 환자에게서 자살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고된다. 아형에 따라서는 하제사용형에서 자살 시도가 더 많다고 알려진다. 자살 예측 연구에 따르면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경우 예측 인자가 우울 증상의 정도와 약물의 사용으로, 신경성 폭식증의 경우 약물 사용 장애와 하제의 사용 등으로 보고됐다. 연령별로는 청소년기에 섭식장애로 진단된 경우 초기 성인기에 자살 시도를 할 확률이 5배 더 높아지며, 초기 성인의 경우 굶고 구토하는 환자군의 자살 위험도가 더 높다고 한다.

이외에 각종 성격장애 환자의 자살도 적지 않다. 일반 인구에서 성격장애의 유병률은 6-13% 정도인데, 자살 사망자의 31-62%가, 자살 시도자의 77%가 성격장애를 갖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성격장애 환자에게서 자살을 예측할 수 있는 인자 중 가장 예측력이 높은 것은 과거 자살 기도력이며, 이외에 우울장애, 항정신성 약물사용 장애다. 자살을 시도한 성격장애 환자의 대부분은 과거 자살 기도력이 있었다는 연구에서와 같이 많은 성격장애 환자들, 특히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에서 과거 자살 기도력이 많이 보고된다.

(6) 소결론: 정신 질환자들에겐 세심한 관리가 ‘필수’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의 병리적 원인을 기술했다. 그러나 정신병이란 실제로 확고하게 드러낼 수 없다는 특성이 문제다. 대부분의 자살 기도와 자살이 정신 질병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신병 환자가 모두 자살하지는 않으며, 자살자들이 모두 정신병자라 할 수도 없다. 다만 정신병리적 상태에서는 정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기에 자살 위험이 가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극도로 화를 내는 사람이 갑자기 예기치 못하는 행동을 감행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화를 참지 못해 집에 불을 질러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경우나 운전하다 갑자기 화를 참지 못해 가족을 태운 채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경우를 뉴스에서 접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도 일시적이지만 정신이 이상 현상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순간적으로는 병리적 증상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 병리적 현상에서 자살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에서 정신이 문제되는 증상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자살할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고 보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자살의 원인-(4) 사회적 원인

4. 자살의 사회적 원인

지금까지 자살을 우리는 개인의 신체적·심리적·병리적 관점에서 고찰했다. 이는 자살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으로서 일면 개인의 책임성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살의 사회적인 원인은 그 관점부터가 매우 다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고 해석하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살의 사회적 원인은 인간의 행동을 단순한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한다. 즉 종교, 결혼, 가족, 이혼, 원시적 관행, 사회적, 경제적 위기 등을 자살과 관련시켜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는 선입견이 배제된 사회적 사실만이 사회 현상을 올바로 분석하는 방법이기에 모든 사회학적 탐구 주제는 공통적으로 미리 규정된 일련의 현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아마도 사회학자는 외적 측면으로부터 그 존재를 추론해 낼 수 있는 사회적 사실에만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관점은 자살이 개인의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다루기에 앞서 사회적 관점의 타당성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자살의 사회적 원인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자살에서 사회적 관점의 정당성

자살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려는 입장에서 뒤르켐(E. Durkheim)은 선두에 선다. 그의 자살 연구는 어떠한 사회이든지 일정한 ‘자살 경험’을 갖고 있음을 밝혀 자살이 ‘집단 경향’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집단 경향은 개인적 경향과 구분되는 사회적 사실이다. 개인의 자살 경향은 집단 경향과 관련해 분석될 수 있고 집단 경향은 개인들이 그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 구조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뒤르켐의 사회적 관점을 이해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그는 사회학이 학문적 진보를 보이지 못한 이유를 주제가 불분명한 점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사회적 사실을 제시했다.

사회적 사실이란 고정되거나 혹은 고정되지 않고 개인에게 외부적인 구속을 가할 수 있는 모든 행위 양식, 혹은 개별적 현실에서 독립해 스스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특정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일반적 행위 양식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사실은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개인의 행위에 대해 구속력을 가지며 개인에게 실재하는 힘이다. 이런 관점은 사회적 사실의 판단 기준을 세 가지 차원으로 파악하는데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사실이 개인의 외부 즉 외재성에 존재하는가, 개인을 강제하는가, 사회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가 등이다.

외재성의 기준이란 도덕적·법적 의무를 이행하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것들은 개인과는 무관하게 법률과 관습에 따라 규정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개인들의 불복종은 문제의 관습들이 갖는 지속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도덕적 규칙은 실제로 적용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기에 복종하는 개인이 없더라도 존속할 수 있다. 개인의 문화를 형성하는 도덕적 규칙들은 개인의 출생 이전에 존재했으며,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사실의 외재성은 자연발생적 인지력에 대해 그것이 불명료하고 불가해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사실은 사회적 질서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면 특유한 과학적 성격을 갖는 탐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사회적 사실성의 기준은 이것이 개개인에 대해 갖는 강제력이다. 때때로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이 개인적 의지에 대해 독립적이고, 그것은 우리를 속박하거나 압박하며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상적일 때는 사회적 사실의 이런 강제력을 깨닫지 못하지만, 법률이나 도덕, 규칙을 위반할 때는 그것을 알게 된다. 그때 사회는 억압적 제재수단을 갖고 반응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특정 나라의 언어나 통화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사회가 반드시 어떤 제재를 가하지는 않더라도 전혀 의사소통이나 경제적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원리와 같다.

사회적 관점에서는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격감되지는 않는다. 자살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없고, 오랫동안 대부분의 사회에서 발생돼 온 자살에는 거의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뒤르켐은 어떤 집단에서 자살률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며 어떤 혼란이 일어남을 들며 어떤 집단에서 자살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은 사회 구조 안에서 작용하는 붕괴시키려는 힘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모든 자살자들이 한결같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개인적 요건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사회학적 단일요인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사회현상을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지적돼야 한다. 다만 특정 사회현상을 두고 특정 이론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2) 사회적 관점에서 나타난 자살의 유형

자살의 사회적 원인은 전술한 대로 자살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은 자살을 사회 현상의 하나로 간주한다. 사회학자들의 자살 연구는 사회적 상황과도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개인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인이라는 데 초점을 둔다. 그리고 자살 요인들 가운데 사회학자들의 관심은 단지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된다는 점이 일차적이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소외나 혼돈 상태의 아노미 현상 등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살이 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의 상태에서 얻어지는 사회적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뒤르켐이 자살을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회 병리현상 중 하나로 현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질병으로 보려는 입장이다.

이런 뒤르켐의 자살이론은 두 개의 사회적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 하나는 사회적 통합(integar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조정(regulation)이다. 뒤르켐의 이론은 이후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가 제시한 통합과 규범이라는 두 변수는 자살을 설명하는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이론적 특성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그의 자살론은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이기적인 자살

이기적 자살(egoistic suicide)은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잊고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다. 뒤르켐은 개인적 자아의 사회적 자아에 대한 우월성과 철저한 내적 신념에의 도취, 그리고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고립된 가치관에 의한 자살을 ‘이기적 자살’로 정의한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한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 집단 내에 강하게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미혼자가 기혼자보다, 도시가 농촌보다 자살률이 더 높은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기주의는 개인이 타인과의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사회적 고립으로 가는 현대 사회의 일반적 상태를 반영한다. 개인이 속하는 그룹이 약화될수록 그룹에 덜 의존하고, 자신에게 더욱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해 관계에 근거한 행위 기준 이외에 다른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이론의 핵심은 사회가 강력히 통합돼 있을 때 사회는 개인을 통제 하에 두고 지배할 수 있기에, 개인이 고의로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금지시킬 수 있다는 데 기초한다. 이는 전술한 대로 자살률이 가족을 가진 결혼자보다 독신자들이 높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관점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이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막는다 해도 개인이 사회의 종속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사회의 위력이 무력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운명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생명을 종식시킬 권리를 갖기에 그들로서는 삶의 고통을 인내심있게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해명해야 한다.

2) 이타적인 자살

이타적 자살(altruistic suicide)은 문자 그대로 타인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자살은 사회통합이 너무 강해한 나머지 집단을 위해 개인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타적 자살은 개인에 대한 규제력이 지나치게 강할 때 일어나며, 개인의 생활을 억압하려 했다기보다는 개인과 사회의 요구 사이에 균형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이타적 자살’은 종교적·정치적 집단과 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희생하는 형태의 자살로, 종교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군대의 군율, 사회적 명예 등에 의거해 자신을 포기하는 현상이다. 이는 대개 사회 집단의 권위가 너무 단호해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는 곳에서 일어난다.

뒤르켐에 의하면 이타적 자살은 집단의 생명을 가장 근원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지른다. 집단의 생명에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거나 통합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타적 자살의 예로 고령자와 정신질환자의 자살, 남편의 사망에 따른 부인의 자살, 주인의 사망에 따른 하인의 자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 형태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 집단의 목적을 위해 단식을 기도하다 죽은 사람들, 반전 운동으로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실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아무런 개인적인 목적이 없이 자신의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다.

이타적 자살은 가장 마지막 소유인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 개인에게는 위험한 매력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개인 생명의 권한을 사회가 갖는 것으로 존재 권한이 취소되는 형태를 갖는다. 이런 상황을 차치하고라도 현대 사회의 집단화 경향은 개인성을 자연스럽게 훼손하거나 심각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간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아노미성 자살

아노미성 자살(anomic suicide)은 사회가 무질서해져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약화될 때 일어나는 것으로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무규율성과 자아 상실에 따른 결과다. 개인의 욕구와 충족은 집단 의식을 통해 사회가 규제하는데, 이러한 규제가 제거될 때 개인의 욕구는 한없이 증가하고 그 결과로 아노미성 자살이 생긴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이 붕괴를 무법 상태를 의미하는 집단 무질서(anomie)라 불렀다. 이런 관점은 사회가 일반적인 도덕성으로 결속된다는 뒤르켐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아노미성 자살은 개인의 행위를 규정짓던 규범의 규제력이 약해지고 인간의 성향을 억제하거나 인도해주지 못할 때 일어난다. 사회 구조적 통합의 규제력이 소멸될 때 이기적 자살이 증가하고, 집합 의식이 약해질 때 아노미성 자살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합과 규제라는 사회 결속력이 갖고 있는 두 차원을 사회학적 변수로 삼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극단으로 흐를 때 자살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뒤르켐 이론의 가설을 검증한 것이다. 그는 이들 변수에 따라 계절, 시간, 종교, 결혼 여부 등에 따라 자살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했다.

실제로 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개인에게 적응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때 약해진 개인은 사회 적응이 갑자기 차단되거나 와해되는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 경제적 파산, 사회경제적 공황상태 또는 갑작스런 벼락부자가 되는 등의 변화 상황은 개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으로 작용해 무력감을 주게 되고, 자살로 유도될 수 있다. 이 현상은 개인이 자살을 포함한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노미성 자살은 사회적 상황이 개인의 무력감을 유발해 자살로 유도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도 한 가지를 빠뜨렸다. 그것은 그런 무질서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이 자살에 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의 연관성을 잘 파악했지만 상황에 반응하는 심리적 반응의 개인차를 간과하고 있다는 측면이다.

15. 자살의 유형-(1) 운명론적 자살

운명론적 자살(fatistic suicide)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어난다. 자기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감옥 안에 있거나,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거나, 전체주의적 정권에 속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 등이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아의 약화와 관련이 깊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저히 견뎌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자아의 약화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자기 연속성(self-continity)과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의 약화와 관련이 있다. 사회나 개인의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자기 보존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은 자살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런 운명론적 자살은 개인의 절망적 상황을 직면하게 만드는 정신 질병과 관련이 깊다. 이런 관점에서 운명론적인 자살은 사회성과 상당히 관련이 있지만 개인적 측면이 더 많이 관련되거나 작용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뒤르켐은 ‘운명론적 자살’을 아노미성 자살에 포함되는 부분적 영역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자살은 자신의 몫이 아니므로 단순히 그 죽음이 살인을 불러올 수 있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대로 심리 및 정신적 변화가 많은 청소년들의 자살에 관한 연구를 요청하는 측면이다.

사회학적 관점의 자살에서 보면 최근 일어나는 기독교인의 자살은 운명론적 자살에 가깝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신앙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그러나 자살자들이 대개는 건강한 상태에서 자살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 없는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시도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자살자들은 신앙이 상당히 무력화된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기에 운명론적 자살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저히 견뎌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예방적 대책을 세울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음을 깊이 새겨야 한다.

(3) 사회학의 생물학적 연관성에서의 자살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다루면서 우리는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학이 자살을 유난히 생물학적 특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특성이란 개인의 신체적인 조건이 그 바탕으로, 이를 다른 어떤 요인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자 개개인의 자살행위 (individual suicidal acts)와 자살풍조(courants suicidogenes)를 별개의 현상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자살자(suicide)는 자살 행위(suicidal act)와 구별돼야 함은 물론, 자살자와 자살 행위도 자살 풍조와는 엄격하게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을 위해서는 물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생물학적 요건인 자살자의 신체 구조를 설명해야 하고, 그런 신체 구조를 가진 자의 어떤 육체·심리적인 상태(biological, and psychopathic states)가 자살을 유발하게 되는가를 해명해야 하고, 자살자의 육체·심리적 요건과 구별되는 사회적 자살풍조가 어떻게 자살률을 증가 또는 감소시키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뒤르켐은 그의 자살론에서 그가 그토록 강조하던 사회학적 방법론에서 탈피, 오히려 자살자 개개인의 신체적·인구학적 특성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뒤르켐은 물론 생물학적 환원론(biological reductionism)을 배격했지만, 인간의 사고는 뇌세포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의 육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 동시에 인간의 육체만으로 사고가 형성될 수도 없음을 강조한다. 그의 입장은 자살이라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인간’ 존재를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욕구의 일부는 인간의 육체, 즉 생물학적 성질을 띠고 있고(these needs are biologically based), 일부는 문화적 성질을 띠고 있다(a product of the cultural system).” 이는 곧 인간의 사회적 욕구가 성질상 생물학·사회학적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사회학적 단일 방법론으로는 자살과 같은 사회 현상을 해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그의 이론은 자살론 뿐만 아니라 범죄 발생이론, 그리고 아노미 이론에서도 사회생물학의 이론이 보다 설득력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켐은 후천적 사회 요인을 자살 원인으로 중시하는 인상을 준다. 이는 그가 자살이 생물학적, 심리학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지만 사회학주의(sociologisme)를 주장하는 사회학자답게 자살을 사회적 측면에서만 고찰하려는 고집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점은 그가 자살 원인을 규명하면서 한편으로 자살 시도 주체인 자살자의 신체적 여건과 같은 생물학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나치게 생물학적 경향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자살 행위를 실증적으로 설명이 어렵고 추상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와 같은 뒤르켐의 방법론은 경험적·실증적 자료를 근거로 모든 사회 현상을 규명하려는 북미 사회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우선 사회학자들은 뒤르켐의 사회학적 방법론을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추상적 사회현상을 가설로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추상적 특성을 띤 사회 현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구체적 특성을 띤 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같은 생물학적 요건을 추상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학이 자살이라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자살자 개인을 중요시할 것인가 아니면 자살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환경을 더 중요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사회학의 풀리지 않은 과제인 개인우선론(individualistic approach)과 사회우선론(collectivistic approach)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가 관심 갖고 예방해야 하지만 극단론은 ‘경계’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다뤘다. 자살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일은 개인의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상기시킨다. 이런 관점은 개인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자살에 관심을 갖고 예방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적 상황이라면 사회가 개인을 도울 수 있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 시도 연령이 점차 낮아질 정도로 확산되는 최근 상황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대책이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현상을 지나치게 사회학적 측면에서만 논하면 자살자나 자살 행위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극단론이 가능해질 수 있다. 개인의 신체적·심리적·병리적 특성보다는 사회적 현상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그 책임을 사회에 전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상황을 인정한다 해도 개인은 동일한 사회적 상황에서도 행동에 대처하는 방법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개인성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자살 문제를 개인성과 사회성을 통합적으로 연계하면서 고려해야 함을 시사한다. 자살을 사회적 관점으로만 돌리면, 사회 안전망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막연하게 사회적 책임으로만 떠넘기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특히 우리 사회는 선진국에 비해 아직은 사회 안전망이 그다지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더욱 걱정이 앞선다. 최근 증가하는 자살을 막기 위해 개인의 주의력과 더불어 사회적인 관심과 예방적 대책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자살의 유형-(2) 도피적 자살

2. 도피성 자살

도피성 자살은 현재 문제로 인식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참기 어려운 극도의 고통으로부터 회피 및 도피하려는 욕구에 기초한다. 회피와 도피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때, 그리고 그것을 도저히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방어기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는 매우 본능적이다. 도피성 자살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모든 자살이란 그 특성상 어느 정도 회피적·도피적인 성격을 갖는다. 자신이 약해져 현실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부담이 그를 짓누르든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도피성 자살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이기적인 자살

이기적인 자살(egoistic suicide)은 도피적인 자살의 일차적 성격을 갖는다. 순전히 자신만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데 이기적이라는 말이 가능하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는 아마도 사회적 측면이 기초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자기만을 위해 죽는 점을 들어 자살을 이기적이라 부르는 것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힘든 고통을 면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를 포기했다는 점과 압도되는 주변의 상황보다 개인의 의지적 측면이 고려되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자살이 도피적인 성격에 기초한다 해도, 실제로는 일종의 죽고자 하는 심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메닝거(Karl Menninger)는 자살을 ‘자신을 향한 살인(homicide)’으로 규정했다. 모든 자살에는 어떤 종류든 얼마간의 죽이고자 하는 소원, 죽임을 당하고자 하는 소원, 그리고 죽고자 하는 소원이 관련된다는 것이다. 메닝거의 이같은 생각은 자신을 동일시한 대상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격이기에 자살을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의 결과로 본 프로이트(S. Freud)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이유로 이기적인 자살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더 많이 논의된다. 실제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죽는 자살을 ‘이기적인 자살’이라 규정한 뒤르켐은 개인이 사회적 구성원임을 잊고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로 간주한다. 개인적 자아의 사회적 자아에 대한 우월성과 철저한 내적 신념에의 도취, 그리고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고립된 가치관에 의한 자살이라는 점에서 ‘이기적 자살’로 정의내린 것이다. 이런 시각은 자살을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으로,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 집단 내에 강하게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뒤르켐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미혼자가 기혼자보다, 도시 사회가 농촌 사회보다 자살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타인과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벗어나 고립되는 현대사회 반영

이기주의는 사회주의와 매우 대립되는 개념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개인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기주의는 개인적인 것 못지 않게 교묘히 개인을 벗어나면서 집단을 위하는 이른바 ‘집단 이기주의’ 형태로 더욱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전히 개인적 이기주의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런 시각에서 이기주의는 개인이 타인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벗어나 사회적 고립으로 가는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상태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개인은 속해 있는 그룹이 약화될수록 그룹에 덜 의존하고, 자신에게 더욱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행위 기준 외에 다른 기준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물론 사회가 강력하게 통합돼 있을 때 개인을 통제 하에 두며 개인을 지배할 수 있기에 개인이 고의로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금지시킬 수 있다는 데 기초한다. 이는 전술한 대로 가족을 가진 결혼자보다 독신자들에게 자살률이 더 높은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이기적인 자살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이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의무를 회피한다 해도 개인이 사회에의 종속을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할 때는 사회의 위력이 무력해진다는 약점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시각은 사회보다 개인이 우선이라는 관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사회는 개인이 인정하지 않는 지점에서는 존속이 어렵다는 이론이 가능해진다. 개인은 자신이 운명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생명을 종식시킬 권리를 갖기에, 그들이 삶의 고통을 인내심 있게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 고통의 해결로서의 자살

인간에게 고통은 삶을 힘들게 만든다. 개인은 어떤 고통이든 그것이 극도에 도달되는 경우 죽고자 하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하게 된다. 고통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그 멀기만 하던 죽음이 그다지 멀지 않게 생각되기도 한다. 사람이 살면서 한두 번 정도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차는 있지만 이런 고통은 대체로 신체적인 면이 더 크다. 신체적인 고통은 개인이 어떤 질병으로든 통증의 지배 하에 놓일 때다. 그럴 때는 죽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리 치료해도 해결되지 않는 질병으로 통증이 심화돼 자주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 심리적 절망이 자신을 엄습한다. 필자도 밤새도록 치통에 시달려본 적이 있었다. 진통제를 있는 대로 복용해도 통증은 멈추지 않아 종합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퇴근해서 다른 의사가 응급처치를 해줬는데 치통은 멈추지 않았다. 가장 강한 진통제 주사를 맞았고 약을 복용했는데도 말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하루가 그렇게 길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심각한 질병이나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에 비견되는 일은 아니지만 주의환기를 시키기 위해 예를 하나 들기로 하자. 나폴레옹이 아프리카를 침공했을 때 일이다. 그는 이집트 원정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부상당한 클레베르를 적지에 남겨두고 남은 군사를 인솔해 사막을 횡단해서 카이로로 진군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물은 바짝 말라버렸거나 독이 풀어져있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까지 가는 12일간의 여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고 한다. 동료들의 고통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병들은 자기 머리에 총을 쐈다. 장군이나 나폴레옹이 지나갈 때 무기와 짐을 지닌 채로 나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물론 최악의 기후를 견디지 못해 일어난 자살이다.

‘카드빚’ 경제적 고통, 심리적 고통으로 이어져

그러나 고통은 이런 자연적인 환경 외에도 심리적인 문제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경제적 문제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과히 헤아리기 어렵다. 경영난을 막아보려 사채를 끌어써 낭패를 본 중소기업이나 가정 경제를 파탄내지 않으려고 급하게 사채를 빌려 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바람에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갖은 협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는 ‘신체포기 각서’를 써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삶은 지나친 고통이자 저주일 것이다. 이 삶의 질곡에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해줄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아무리 외쳐봐도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빚더미에 시달린 사람으로는 은행 카드도 동일한 경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은행빚이라는 사실을 경험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리 돌려막기를 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심리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처음 신용카드 사용과 그에 따른 정책은 돈이 급한 서민에게는 막힌 관을 뚫는 대안과도 같았다. 현금서비스 한도를 대폭 늘려 신용카드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우리를 속이는 신기루였다. 카드 회사는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심리를 너무나 잘 활용했고, 적절한 대비책 없이 실행된 섣부른 정책이 낳은 폐해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용카드 불량자로 내몰렸고, 오히려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역행해 그것을 추스르느라 한동안 몸살을 앓았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3) 부양 기피에 의한 자살

독거 노인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독거 노인들이 일반 노인들보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3배나 많다는 보고도 있다. 그들 중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노인들이 간혹 있지만, 자녀들이 있거나 여러 자녀를 둔 노인들도 있다. 우리는 이를 미디어 매체를 통해 여러 번 접해서 익히 알고 있다. 자녀가 여러 명인데도 서로 부양을 미루기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는 경우도 있다. 가진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위장 부양을 하다 들통이 나자 아예 협박하면서 재산을 빼앗고 부모를 돌아오지 못할 먼 곳에 내다버린 자녀도 있다. 잘 모시겠다고 양로원에 위탁하고서 나타나지 않거나 연락이 두절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도 한다. 젊을 때 자식을 키우느라 온 힘을 다했건만 성장한 자녀들이 돌보지 않고 있다. 힘이 다해 이제는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지만 그들은 무엇 때문에 부모를 외면하는 것일까?

외로운 노인들의 자살은 사회병리적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안전망을 갖추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기력이 쇠해서 노동할 힘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국가는 전혀 책임질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물론 최근 정부는 노인들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정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지 못한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서류상 자녀가 경제활동 한다고 기록돼 있어 그나마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전혀 돌보지 않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그런 노인들은 심리적 배신감이나 모멸감까지 겹쳐 절망적 심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로운 노인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의 자살은 부끄럽게도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노인들 중 2001년 1890명, 2003년 3612명, 2005년 4349명이 자살해 갈수록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인 자살 증가는 그 동안 효(孝)를 강조하며 부모를 모시고 노인 공경을 자랑하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변화를 의미한다. ‘부모는 부모이고 나는 나’라는 서구 개인주의 사상의 단면이 우리에게도 침투한 것이다. 자녀들을 위해 온전히 희생한 부모들은 더 이상 자녀들에게 노후를 기댈 수 없는 현실이 됐고, 아울러 어떻게든 노후를 스스로 준비해 둬야 한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4) 생활고에 의한 자살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극단적 빈곤으로 인한 죽음, 나아가 ‘생계형 자살’이 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주변에는 전기, 수도, 가스 요금조차 제대로 내지 못해 고통받는 가정이 적지 않다. 이들은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전기료 체납가구 숫자는 79만여 가구이고 이 가운데 기초생활 보호대상자가 36만 가구인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전기, 수도, 가스가 끊겨 가장 기초적인 생활 여건마저 유지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빈곤층에 대한 제도적인 특단의 장치가 강구돼야만 할 것이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은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소녀가장의 죽음이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없는 중학교 3학년 소녀가장으로,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는 것과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입학금 마련 등의 고민을 홀로 감당하면서 심리적인 고통이 컸던 것이다. 그녀는 그날 학교 선생님이 준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초등학생인 막내 여동생에게 주면서 “엄마 말씀 잘들어. 나 잘테니 소리가 나더라도 깨우지 마라”고 부탁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살했다.

그녀는 A4 5장 분량의 유서를 남겼는데, 유서에는 가족과의 갈등, 가난에 대한 절망, 친구에 대한 고민, 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어머니와 자매에 대한 사랑 등이 적혀있었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소녀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은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사회 안전망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고, 병들어도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구축돼야 할 것이다. 이는 자살을 더 이상 개인의 정신병리적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밀한 사회 안전망 필요… 가족 집단자살은 심각한 문제

선진국에서는 ‘사회 안전망’을 치밀하게 구축하려 노력한다. 이런 소녀가장의 이야기는 필자가 유학하던 독일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교육 기회가 균등하고, 저소득층이라 해도 자신의 형편에 해당하는 건강보험료를 내기만 하면 치료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건강보험이 이를 지불하기 때문인데, 사보험이 아니라 공보험이 그렇게 발달된 점이 특이하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술이 부족해서 죽는다고 해야 한다. 아직 그러한 의료 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우리 현실에서는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물론 사회 안전망이 잘 구축됐다고 해서 자살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선진국에서조차 생계형 외에 또다른 자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생계형 자살은 막아야 한다는 바램을 갖는다. 생계형 자살은 비참함의 대명사이며,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자살이기에 보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나아가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경우 더한 충격을 준다. 실제로 경제적 압박이 계속되는 요즘 동반 자살하는 가족이 점차 늘고 있다. 가족 동반 자살은 일반적으로 생계형 자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도저히 견뎌내기 어려운 경제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것이다. 이런 가족 동반 자살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강원지역 동반 자살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중에는 생계형 자살이 있겠지만,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경우는 전체 가족이 극도로 어려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5) 각종 중독에 의한 자살

요즈음 각종 중독으로 인한 자살이 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약 4억 5000만명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 중 1억 5000만명이 우울증, 9천만명이 알코올 혹은 약물중독 환자이며 2500만명이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고, 해마다 1백만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중독이란 어떤 물질을 섭취하거나 행위를 함에 있어 신체·정신·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적절히 할 수 있는 통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뇌의 질병이라고 알려진다. 이는 정신건강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 당사자는 물론 주변 가족과 사회에 엄청난 고통과 손실을 안겨주는 실로 파멸적인 정신질환이다. 중독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한데, 알코올이나 약물과 같은 물질에 대한 중독이 전통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도박, 게임, 인터넷, 섹스 등과 같이 즉각적인 쾌감이나 긴장 해소, 흥분을 유도하는 행위에 대한 중독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독으로 인한 자살은 대개 간접적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직접적 자살이 아니기에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설마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죽는다는 점에서 주변 사람들의 주의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중독은 모두 중독으로 인한 죽음을 부르기 때문에 간접적인 자살을 초래한다. 우리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 열흘 넘게 게임만 하다 숨진 청년의 기사나 밥을 굶고 50시간 동안 계속 게임만 하다가 탈진해서 사망하는 경우 등을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간접적으로 자살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10대에서 20대, 30대에 이르는 연령층에서 게임 중독으로 인한 죽음이 흔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우려할만 하다. 이들 중독은 직접적인 행동이 아니라 해도 결과적으로는 자살에 이르게 되는 통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보다 게임 중독이 더 심각

실제로 게임 중독은 다른 중독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병원에는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 외에도 게임 중독 환자들의 입원이 늘고 있다. 게임에 빠져 식사도 거르고 잠도 안 자고 일도 포기하고 게임에만 몰두하다 견디다 못한 가족들에 의해 강제로 입원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중독은 임상 현상이나 치료 방법의 차이보다는 뇌의 보상 회로에 장애를 일으키는 공통적인 신경 생물학적 병리 소견이 발견되는 측면이 특이하다. 내성이나 금단과 같은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나, 갈망에 대한 조절 불가능, 심리적인 퇴행과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성격변화 등 중독의 대상은 달라도 임상적인 현상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이는 다양한 중독들이 사실상 동일한 질병이기에 병원 등 치료하는 기관에서 대개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다. 치료와 재활에서 사용되는 약물도 유사할 뿐 아니라 자신의 중독을 인정하게 하고 중독 행동을 끊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과 대처 기술을 학습하고 12단계와 같은 영성 회복 프로그램이 활용되는 점에 있어서도 거의 유사하다.

(6) 투자 실패로서의 자살

투자실패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10억 만들기’ 신드롬에 빠진 부녀가 재산을 탕진하자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는 딸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최고의 통신회사에 최연소 합격해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옥탑방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14년간 지방 세무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빈털터리가 돼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는 데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자리에서 번번이 미끄러지자 2003년 5월 갑자기 사표를 냈다. 퇴사한 그녀는 최근 몇년 사이 서민들의 인생 목표가 되다시피한 ‘10억 만들기’에 골몰했고 재취업은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1년 내 10억원을 만들지 못하면 같이 죽자”고 했고 아버지도 “그러자”고 다짐했다.

이들은 전 재산인 퇴직금 5천만원 가운데 2천 5백만원을 투기성이 강한 코스닥업체 주식에 투자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식을 샀다가 다시 되파는 초단타 매매를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깡통계좌 뿐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한 통계 분석으로 숫자를 찍어 매주 로또에도 30만원씩 투자했지만 당첨금이 1백만원인 3등에 세 번 당첨됐을 뿐이다. 결국 2004년 8월 22일 통장 계좌잔고는 ‘0’이 됐다. 부녀는 이날 옥탑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그녀가 먼저 목숨을 끊으면 아버지가 시신을 처리하고 뒤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이틀 동안 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시다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월세를 받으러 온 주인에 의해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10억 만들기’는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들에겐 신기루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투자실패로 인한 자살은 도피적 성격이 강하다. 카드 빚으로 인한 자살과 함께 주식 실패, 투자 실패로 인한 자살은 경제적 이유가 동기로 작용한 자살이라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한다. 이런 자살의 특징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황금만능주의로부터 그 비극적 결과가 출발된 데 공통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주식 투자, 부동산, 펀드 등 종자돈으로 빠른 시간에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이른바 ‘재테크 열풍’이 번지기 시작했다. 재테크가 합법적인 투자 전략이라면 로또를 비롯한 사행성 복권들이 국민들의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방법으로 또다른 열풍을 주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재테크나 로또 열풍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황금만능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겠다는 의지는 있고, 이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전술한 ‘10억 만들기’ 신드롬 따위는 이제 남녀노소 누구나 뿌리칠 수 없는 위험한 유혹이 되고 있다.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삶의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관리하지 못하면 더 큰 불행을 자초한다. 이런 한탕주의는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다 끝내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도박성에 빠져는 데 문제가 있다.

낙태·신세대 군인들도 도피성 자살 위험

이외에도 낙태로 인한 자살이나 심한 훈련으로 인한 신세대 군인들의 자살도 도피성 자살에 해당한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 손쉬운 정보 공유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성적인 정보와 자극이 갈수록 넘쳐나고 있다. 실생활에서 성적인 접촉도 그만큼 빈번해지고 있기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그대로 미성년자들의 낙태로 인한 자살을 부른다.

신세대 군인들의 자살이 사회에 종종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다만 지금도 사회에서는 군대 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하나의 이유라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낙태나 군대에서의 자살은 도피성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

(7) 결론: ‘공부 부담’ 청소년들에게 세심한 주의 기울여야

이상에서 우리는 도피성 자살에 대해 고찰했다. 도피성 자살은 대개 비참한 상황으로 인한 자살이 기초를 이뤘다. 비참한 상황이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어 삶을 지탱하기 너무나 힘겨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변 환경도 어렵지만 개인의 심리적인 측면이 더욱 무겁게 느껴져 심한 절망감에 빠진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지만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야 한다.

더욱이 이런 도피성 자살은 자아정체성이 아직은 형성되지 않은 아동이나 청소년들에게 노출돼 있다. 이들은 삶의 어려운 상황에서 적응력이나 인내심이 성인에 비해 훨씬 약하기 때문에 도피 수단으로 취하기 쉽다는 점에서다. ‘학교와 집’이라는 단순한 생활의 굴레에서 무거운 공부의 부담은 그들을 짓누르는 현실로 인식되기 쉽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스트레스 상황이나 심각한 갈등 상황으로 이어져 도피성 자살을 부추길 위험성이 높아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자살 위험을 알아차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 있는 자살 시도자들은 대개 수동적이고 타인과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양상을 보인다. 자신의 자아상과 상반된 자신의 처지, 자신의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의 하나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인이라도 예외를 둘 수 없다. 경제적 현실이 악화되는 요즘 교회에서 성도들의 도피성 자살에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자살의 유형-(3) 병리적 자살

3. 병리적 자살

인간이 겪게 되는 비참함 중에서도 질병은 가장 공포스럽다. 어느 시대에나 질병에 대한 치료방법보다 질병이 가져다주는 불행이 더 강한 인상을 남겼던 만큼, 질병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줄 수 있다. 이런 질병은 물론 신체적·심리적 성향과 물리적 환경의 성격이지만, 나라마다 강도는 달라도 상당수의 개인에게는 직접적으로 자살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질병이라는 병리적 상태에서는 어떤 이유로든지 정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어렵다. 질병의 공포 때문에 심리적 불안정을 경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지금 돼지와 관련된 인플루엔자의 공포에 떨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1890년경 인플루엔자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 뉴욕은 물론 셍페테르부르크에서도 사람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이런 공포로 프랑스의 브레스트에서는 자살한 사람 수가 다른 때보다 5배나 증가했다. 1879년 시칠리아에 콜레라가 급격하게 퍼졌을 때도 수백명이 자살했다. 질병에 대한 공포로 절망한 나머지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살했다. 이런 질병은 대개 공포로 인한 자살이지만 질병 그 자체가 자살로 몰아가는 직접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자.

(1)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우울증은 여러 정신질환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증상이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95% 이상의 사람들이 당시 심리 및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우울증으로 80%를 점유하고, 나머지 20%는 충동 때문에 자살한다고 한다. 이는 우울증이 자살을 유발하는 가장 흔한 정신장애임을 시사한다. 우울증은 그만큼 자살을 부르는 특이한 증상으로 자리하고 있고, 실제로 자살시도자들 대부분이 우울한 상태에서 자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울증(depression)은 의기 상실한 기분과 정신운동 저하의 정신적 증후군이다. 우울증은 울증 또는 울병이라고도 하며 대개 심리적으로는 희망없음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이나 체중 감소를 수반한다. 특히 우울증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흔하다. 자기 존중감 상실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여성이 더 취약하다. 여성 우울증은 주요 우울장애의 시점유병률이 남성이 2-3%인데 비해 여성은 5-9%였다. 또 평생유병률은 남성이 5-12%였지만 여성은 10-25%에 달했다. 이외에도 여러 역학적 연구에서 우울증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2배 정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울증은 자살 유발 위험성이 가장 높고, 그 중에서도 우울에서 회복되는 환자들에게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심한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기간은 자살 위험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다. 이는 심각한 우울증 상태에서는 자살이 일어나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상태에서는 가능함을 의미한다. 무력감과 절망감의 역동은 우울적 기제와 자살 행동에 내재하고 있는 피해자의 의식적인 정서의 파생물이다. 미래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대하는 인지적 도식이 무력감의 기본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환자들에게 자살 시도 많아

죽음이라는 생각의 자살 시도는 종종 임상적 우울증의 일부분이다. 자살로 인한 죽음은 급성 삽화기간 동안 약 1% 비율로 일어나며, 반복적인 우울증을 보이는 환자에서는 평생 15% 정도로 발생한다. 공감적이고 체계적인 면담을 통해 임상가들은 환자의 자살 사고 및 충동, 의도 등을 알아볼 수 있다. 많은 환자들이 자살 사고를 보이지만, 이들 중 자살 의도를 갖는 환자들은 많지 않다. 위험성은 급성 삽화에서 증상이 완화된 후 몇주, 몇달 지나서다. 가장 높은 자살 위험은 증상이 향상된 후 6-9개월 동안 발생한다.

우울증이 상당한 정도에서는 자살에 대한 생각이 증가하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충동이 강한 청소년들은 우울증 상태에서 자살하는 경향이 높다. 이는 자살이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률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되는 이유다.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약 20%가 자살 충동을 느꼈으며, 이들 중 약 9%는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다고 보고했다.

(2)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자살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은 정신장애 중 우울증 다음으로 자살 위험이 높다. 물론 우울증 환자의 자살시도가 많지만 그 중 대개 25% 정도가 자살하고, 다음으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15% 정도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정신분열증 환자의 높은 수치는 질병의 특성에 기초한다.

정신분열증은 정신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정신 장애의 대표적 질병이다. 정신분열증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무의식적인 생각이 현실이 되는 현상이기에 자신의 무의식과 세상의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살을 부르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가 된다.

정신분열적 자살을 두고 예술적으로 천재성을 지닌 사람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1853년 말 음악가 로버트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 갑자기 시작된 광기로 강에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정신착란 증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의 자살 시도는 미수로 그치고 말았지만 귀가 쑤시고 아픈 증세가 몇 시간이나 계속돼 매우 고통스러웠던 그에게는 일종의 고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에 비하면 화가인 반 고흐의 자살은 유명하다. 반 고흐는 귀를 면도칼로 잘라 창녀에게 준 사실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자살을 정신착란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독일 바이에른의 루이 2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왕은 여성기피증이 있고 고독하고 감수성이 강하며 바그너에 심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신하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아 대인기피증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바이에른 사람들은 루이 2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의사들은 그의 정신병세를 확실히 인정하고 있었기에 대신들도 최종적으로 모여 루이 2세가 정신장애에 걸려 있어 통치능력이 없다는 조서에 서명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심한 고통을 주는 위기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

이처럼 정신분열증은 정상인들이 행동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측면을 보인다. 때로 겉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가 하면 매우 위협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정신 이상을 보이는 결과로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들의 행동은 그만큼 상상을 뛰어넘는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정상적인 정신 통제력을 잃었다는 것을 말하며, 자살을 시도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필자가 독일에서 유학하며 목회할 때 일이다. 교인 중 의학을 공부하던 학생이 밤마다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했다. 병원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자살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환자가 창 밖으로 투신 자살했다. 다행히 간호사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보고해 책임은 면할 수 있었지만, 양심에 가책이 됐나 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했던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정신분열증에 의한 자살에서는 생물학적 요인이 중심이 된다. 대뇌 세로토닌 체계의 조절 이상과 관련이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뇌에서 여러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공격성과 충동성이 증가하는 등 자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정신병 환자의 자살은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살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함부로 저지르는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사자에겐 심한 고통을 주는 위기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살 시도자들이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있기에 정죄하거나 핀잔하기보다는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실제로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러 행위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통스럽다는 신호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는 몸짓을 보낸다.

(3) 강박증으로 인한 자살

강박증이 주된 원인이 돼 자살하는 경우다. 이들은 불필요한 생각에 집요하게 매달리다 심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강박증적 자살은 불필요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이 괴롭게 만드는 일종의 양심 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때 자살은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특별한 동기 없이 일어나며, 뚜렷한 이유 없이 환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관념이 굳어지면서 일어난다.

강박증으로 인한 자살 시도자들은 아무런 합리적 동기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강박적인 생각은 반성과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본능적 욕구로, 물건을 훔치려는 욕구, 살인하려는 욕구, 방화하려는 욕구 등이 집요하게 환자를 괴롭히게 된다. 이런 현상은 순전히 실제와는 다르게 생각 속에서 커져 여기에 압도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환자는 자신의 욕망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저항하다 보면 슬픔을 느끼고 우울해지며, 명치 끝을 내리 누르는듯한 불안감이 점점 커져간다. 그런 이유로 강박증적인 자살은 일종의 불안이 심화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강박증, 자살할 정도의 사실 아니어도 자살 실행할 수 있어

강박증은 심리적 저항이 강하지 못하고 압도된다는 데 특성이 있다. 환자가 저항을 포기하고 자살을 결심하는 즉시 안정을 되찾지만, 환자가 죽음에의 충동을 쉽사리 억누를 수 없다는데 문제의 중요성이 있다. 이는 강박증의 특성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분명한 이유도 없이 괜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 생각은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충동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강박증은 그 생각을 중단하지 못한다. 이는 강박증이 충동성을 내포하는 이유다. 별 것도 아닌 생각에 불안을 느끼고 매달리면 스스로 엄청난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 불안이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미 상대방은 잊어버리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양심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에 이른다. 이런 자살은 현실에 있어서나 당사자의 상상에 있어서나 아무런 원인이 없지만 짧거나 긴 시일에 걸쳐 마음을 사로잡고 점차 자살하고픈 의지를 일으키는 강박관념이 굳어지면서 급작스럽고 저항할 수 없게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강박증적인 자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자살할 정도의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살이 가능한 점, 시기적으로 매우 촉박한 가운데 시도된다는 점,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순전히 본인의 생각에 의한 결단이라는 점 등이다. 이는 순전히 자신이 크게 느낀 나머지 스스로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 죽음에의 충동이 세차게 일어나 자살로 실행하도록 그 행동을 촉발시킨 자살이라면, 강박증적 자살로 보아도 무방하다.

(4) 질병의 비관으로서의 자살

질병을 비관해 자살하는 경우는 대개 노인들에게 편중돼 있다. 특히 노인에게 해당되는 경우에는 복합적 특성을 보인다. 예를 들어 노환으로 인한 통증 및 퇴직, 아내의 사별로 인한 외로움 등이 겹쳐 생긴 ‘마음의 병’이 원인이다. 노인의 생활고, 질병, 그리고 심리적 원인까지 겹쳐 자살하는 경우다. 주로 은퇴자들이 신체 기능의 저하, 가까운 사람의 죽음, 각종 만성질환 등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다. 특히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만성통증은 신체 기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거동 불편으로 독립적인 생활력 상실과 고립감을 유발한다. 이 경우 정상인에 비해 우울증 발생이 5배나 높아지고 자살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경력이 화려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이런 위험에 더 노출돼 있다.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육체적·정신적으로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욱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에 빠져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2005년 5월 17일 전 대법원장이 마포대교에서 투신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전까지 노인성 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확인됐다. 통원 치료를 받은 병원 담당의사는 요추염좌 재발로 물리치료 받을 것을 처방했고, 그때까지 그는 모두 5차례 치료를 받았다. 그는 기침을 심하게 한 후 허리가 아프기 시작해 일어설 때마다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료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지난 2000년 허리를 삐어 그해 4월 24일부터 6월 29일까지 치료를 받았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2주 전부터 ‘자살하고 싶다’, ‘너무 고통스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에 아내와 사별했던 점도 외로움을 가중시켜 자살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3년 1월 21일 현역장군의 자살도 여기에 해당한다. 육군본부 계룡대에서 이모 준장은 수년간 당뇨, 고혈압, 간염 등으로 약물과 통원치료를 받아오다가 신병을 비관해 자살했다. 당시에 그의 자살은 창군 이래 현역장군이 처음으로 자살한 사례였다. 수천명을 거느리는 장성급 군지휘관이 자살을 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신병을 비관해 자살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자살이어서 그만큼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 때로는 학교장이 이런 대열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학생과 신세대 장병의 자살을 막아야할 교장과 장군마저도 자살을 선택하고, 대법원장 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직위에 올랐던 인물까지도 자살을 선택하는 형국이다.

어느 일간지에 보도된 기사는 이런 상태를 더욱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오류동에서 두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지난 1년간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던 90대 노인이 아내를 목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그는 “78년이나 함께 산 아내를 죽이는 독한 남편이 됐다”고 유서를 남겼다. 이 기사는 물론 두 노인이 경제난과 질병 등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경우다. 당시 기사는 이런 형편에 있는 노인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3일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1세 이상 노인 자살자는 3653명이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하루 10명의 노인이 자살하는 것으로, 2000년 노인 자살자 수(2329명)보다 무려 56% 증가했다.

(5) 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자살

자살은 신체적 질병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지금까지 자살을 정신적인 질병과 연관성을 많이 갖는 것으로 다뤘지만, 신체적인 질병도 그에 못지 않게 자살을 부르고 있다. 이는 물론 전술한 질병을 비관해 자살한 것과 상당 부분 중첩되지만 여기서는 신체 질병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려는 것이다.

자살은 신체적 질병과 관련이 많다. 자살한 사람의 32%가 죽기 전 6개월 내에 각종 신체 질병으로 치료를 받았으며, 자살자의 주검을 부검한 결과 25-75%가 신체적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점에서 신체적인 질병과 자살은 깊은 관계를 가진다. 최근 들어 어린이·청소년과 노인층에서 우울증과 자살률이 현격히 증가하는 것도 이런 신체 질병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쉽게 상처받고 유연한 사고나 문제해결 능력이 부족한 어린이·청소년들은 자기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공격적인 행동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높으며, 주변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이를 촉발시킨다. 게다가 노인들은 만성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경제적 무능력, 사회적 지원의 부족 때문에 자살률이 제일 높은 것이다.

노인의 신체적 질병은 자살을 부를 위험성을 높인다. 그럼에도 국가의 노인에 대한 자살 예방책은 아직도 미미한 수준이다. 신체 장애 영역에서만 보더라도 노인을 위한 대책에는 신체적 질환이 있는 노인들을 대할 때 노인이 질병을 얻게 되면 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랜 질병 생활을 해야만 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더 크게 받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그 부양을 책임져야만 하는 가족들의 부양 부담감이나 사회적 지원체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정작 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인의 정신건강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것이 사실이다. 노인에게 올수 있는 신체적인 질병이 몇몇을 제외하고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질병에 걸렸을 경우 젊은 사람은 신체적인 의료 혜택만 받으면 완쾌되지만, 노인의 경우는 질병에 걸림으로 해서 자아존중감이 극도로 낮아지고 무능력감을 느끼며 우울증 등 심리적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발전하면 노인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노인 자살의 첫 번째 원인으로 질병을 꼽을 수 있는 이유다.

(6) 결론: 교회가 나서 자살 ‘대유행’ 오기 전 예방책 강구해야

우리는 지금까지 병리적 자살에 대하여 고찰했다. 병리적이라는 질병 상태에 있을 때 자살하기 쉬운 것임을 다뤘지만, 여기서는 특히 일차적으로 정신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상태를 우선했다. 그러나 질병이란 신체 및 정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체적인 자살도 정신적 질병에 못지 않게 자살을 부르는 것을 다뤘다.

이런 병리적 자살에는 기독교인이라도 예외를 둘 수 없다. 우울감의 상태에서는 순간적으로 신앙의 위력이 무력화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울 증상에서는 신앙이 무력화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아가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서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기도하던 것을 들 수 있다. 이때 엘리아의 우울증상은 온 힘을 쏟아서 기진맥진하게 된 아드레날린 우울성이었다. 대선지자가 자살을 기도했다면 신앙심이 강하지 못한 일반 신앙인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최근 기독교 젊은이들의 자살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자살은 대개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해결 수단이 되고 있다. 최근 인터넷의 발전으로 ‘자살 사이트’를 통해 동반 자살하는 형태도 있어 사회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자살 유혹은 기독교인이라 해도 우울감 상태에 있다면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에게 자살 유혹과 예방적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이유다. 자살이 온 나라를 강타하는 때가 오기 전에 교회는 서둘러 자살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8. 자살의 유형-(4) 자기 처벌성 자살

자기 처벌성 자살은 문자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처벌하려는 의도에서 시도하는 자살이다. 자신을 스스로 처벌한다는 것은 깊은 양심의 가책에서 일어난다. 자신이 부주의하거나 잘못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경우 죽음으로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 죽어 잘못을 사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이 자살은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자신이 나서 책임을 지는 성격이 강하다. 이런 자기 처벌성 자살은 매우 양심적이어거나 소심한 사람이 시도하는 편이다. 주변 사태가 도도히 자신에게 밀려오는 상황에서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버텨낼 만큼 심리적으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처벌성 자살은 사실과 전혀 다른 측면도 있어 때로는 안타까움을 갖게 만드는 죽음이다. 일의 잘못됨과 실제로 잘못됨에는 어느 정도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잘못했는가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잘못됐다는 그 일을 깊이 자각하는 가운데 더욱 양심의 가책이 유발됐을 수도 있다. 이때 자살 시도자는 자신의 자살로 모든 것이 일단락되거나 정리되고 마무리되기를 의도한다. 이런 자기처벌성 자살은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양심의 가책에 의한 자살

지나친 양심의 가책은 자살을 부르기도 한다. 다같이 잘못했어도 이들은 더 많은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한 경우로 판명된다 해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될 것을 양심의 가책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처벌한다. 이러한 자살은 개인적 측면이 강하다.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 해도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살로 그 책임을 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잘못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의 잘못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를 처벌하는 성향이 높아지는 이유다.

지난 2004년 10월 성실했던 형사계 반장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포천 여중생 사건을 맡은 강력계 형사 반장이었다. 포천 여중생 사건이 일어난 이후 1년 동안 사건 해결을 위해 매일 한 번씩 사건현장을 다녀갔을 정도로 성실했던 그는 평소 성실한 형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유서에서 포천에 와서 휴가 한 번 제대로 갔다 오지도 못하고,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도 못하고 스스로 삭히느라 술을 마셔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아내같이 싫으면 싫다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못해 여기까지 온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인 딸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는 모습이었다. 그는 가정에서도 모범적이었다는 것을 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력계 형사라는 외길을 걸어온 그의 자살에는 다른 원인도 있을테지만 유달리 양심의 가책이 큰 성격 탓도 크다.

양심의 가책은 정신분석에서 초자아가 강한 사람에게서 더 표출된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부모의 말에 순순히 순종하고 사회의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 초자아의 위협에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낀다. 이런 점에서 양심의 가책이 심한 사람은 수치심이나 죄책감도 더 강하게 느낀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대개 부모의 양육 환경에서 찾는다.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억압 때문에 자아가 위축돼 있거나 자기존중감이 낮은 상태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우리는 수치심이 자기존중감이 낮은 데 대한 열등 의식의 일차적인 신호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를 위해 체면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특성도 더 크게 작용한다. 이런 태도는 내면 세계를 가지려는 심리지만, 이 내면 세계를 자신이 지켜내려는 자기만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은 수치심에 민감하다. 그런 이유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수록 수치감을 숨겨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들의 양심의 가책이나 수치심은 어떤 의미에서 존경받고 칭찬받고 싶은 근저의 자기애적·과시주의적인 소원들에 대한 방어기제다. 물론 이들은 병리적 자기애 지시, 특히 전부 아니면 전무의 법칙을 따라 인정과 존중, 칭찬을 받고자 하는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만 부적절감과 양심의 가책만을 심하게 경험할 뿐이다. 이런 양심의 가책이 지나친 상태에서는 강렬한 자기애적 욕구와 격노로 반응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자살로 이어진 것이다.

2) 자기 패배로 인한 자살

자기 패배성으로서의 자살은 급격한 에너지 소진과 관련된 죽음이다.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급격한 에너지 소진이 이뤄져, 존재 가치의 평가 절하를 시도한다. 이들은 대개 타인에 의한 비판이나 모욕보다 스스로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느끼는 자기애적 모욕을 경험한다. 심지어 이들은 어떤 암시적인 가치 절하에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근저에 있는 자기애적 취약감과 외부 견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체제가 약화돼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어떤 잘못한 일이 일어날 때 드러내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속으로 은폐하려 한다. 이러한 은폐된 자기애적 소원은 에너지가 격감된 자기애적 구성물의 역동을 반영하는데, 우울한 자기애적 역동은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적절히 처리되지 못해 결국 그 갈등을 자살로 마감한다. 이런 자살은 급격한 에너지 소진으로 인한 죽음이기는 하지만 자기 패배를 인정하고 죽음에 대한 의지로 자신을 처벌한 행동이다.

우리는 ‘도피성 자살’ 편에서 투자 실패로 자살을 시도했던 부녀의 예를 들었다. ‘10억 만들기’ 신드롬에 빠진 그들은 재산을 탕진하자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는 딸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부녀는 이날 옥탑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그녀가 먼저 목숨을 끊으면 아버지가 시신을 처리하고 뒤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뒤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이틀 동안 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시다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월세를 받으러 온 주인에 의해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투자 실패는 그녀에게 패배로 여겨졌다. 그녀에게 투자 실패는 단순 실패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 정도의 강한 것이었기에, 그 패배감은 더 컸다.

패배감은 타인에 비해 유치하고 약하고 어리석고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이런 특성은 대개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경우와도 관련된다. 내면적인 것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바림직하지 못한 부끄러운 법이다. 그것은 겉으로 남을 위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그 이익이 공동체의 생활을 방해하는 것,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고, 동물적이고 관능적인 욕구나 사고 등이 해당한다.

이런 특성은 대개 자신의 부정성을 극도로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런 자극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나는 바보처럼 보인다→이렇게 보이는 것은 끔찍하다→부끄러워 살 수 없다’.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약한 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면이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분노적 충동으로 인한 자살

분노적 충동으로서의 자살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분노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유발한다. 물론 분노는 현상적으로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도록 분노를 쌓아 온 결과다. 이 경우 분노는 강력한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음 속 불만이 누적돼 어느 시점에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분노적 충동으로서의 자살은 분노를 유발하는 강도가 그 자신을 사로잡을 정도로 커진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그를 조절한다.

우리는 때로 홧김에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힘들게 1년간 농사를 지었는데 가격이 폭락했을 때 그것을 추수하지 않고 트렉터로 갈아 엎어버리는 어떤 농부를 종종 본다. 추수하려고 일꾼들에게 주는 품삯이 더 든다는 항변이다. 그 농부의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들의 표정은 가득한 실망감과 함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정치가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그것이 심각해지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도저히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일어난 자살이지만,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분노적 충동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분노적 충동을 자극받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상황에서는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강하게 휩쓸린다. 더구나 분노는 그 특성상 원한을 품게 만들고, 원한을 품으면 종종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을 방어하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가 하면 원한의 대상을 두려워해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더 깊은 원한의 표현으로 복수하고 싶은 심리인데, 이는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상실한 데 대한 이차적인 고통 및 분화와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분노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특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심리학에서는 정의내린다.

분노는 대개 상대방이 자기 요구의 실현을 부정하거나 저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결과로 표출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자아의 안정이 무너지거나 위협받는다고 판단하면 일어난다. 이런 측면에서 분노적 충동은 맹목적 공격이나 파괴 충동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나 욕구도 무너진다는 판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분노는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해도 무시하는 당사자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있고 자아가 손상되지 않았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지나친 분노감이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4) 실패에 따른 부담에 의한 자살

실패에 따른 부담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중대한 일이 실패했을 때 자신에게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들의 부담은 대개 단순한 심리적 부담이 아니라 내면에서 엄청난 죄책감은 혹은 죄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이들의 ‘죄책감’은 흔히 종교의 영역에서 신앙적으로 주로 사용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양심을 거스른 데 따른 심리적 불안감으로 이해된다.

지난 2005년 5월 낙태를 비관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1년 전부터 결혼을 전제로 성관계를 가져 임신했다. 그녀와 사귀던 남자는 이미 두 차례나 유산을 시키고도 “내 아기가 맞느냐”며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차례 실랑이를 한 끝에 낙태를 감행하고,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랑과 변심으로 인한 것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실패에 따른 부담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다. 아마 그녀는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감이 극도에 달했을 것이다. 주변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데다, 자신이 확신하고 행동한 것에 따른 보이지 않는 가족의 압박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심리적 불안감은 대표적인 ‘부정적 정서’다. 환자들은 임상에서 불안을 경계하면서도 가장 쉽게 불안에 휩싸이는데, 이들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이 불안 현상은 뚜렷한 원인없이 느끼는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 등의 감정으로, 더 악화될 수 있다. 여기에 원만한 해결 없이 불안에 휩싸이게 되면 겉잡을 수 없이 시달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불안은 흔히 위협과 같이 분명하고 실제적인 위협에 대한 반응이지만, 때로는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의 산물이다. 이런 경우 자살 시도자의 지나친 책임감이 문제일 수 있다. 이때 책임의 소재와 특성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이들의 지나친 책임감이 죄책감과 심리적 부담을 일으키는 원인이 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을 죽음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에 따른 심리적 부담도 알고 보면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잘못했다’는 느낌은 대개 개인적·임의적인 기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은 유부남과의 외도에는 죄책감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의 병든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에 극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과 행동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생각이 정당화될 수 없을 때도 있고 생각이 행동 이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지나친 불안에 휩싸이지 않도록 보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5) 결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는 자기 처벌성 자살에 대해 고찰했다. 이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엄청난 실패를 초래했을 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이다(마 27장, 행 1장). 예수님의 제자 중 스스로 자원해 나섰던 유다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자살이면서도 대표적 자살이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해 판 죄를 뉘우치고 은 30개를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매 죽었다(마 27:5)’. 부정한 수입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지 못했고, 반역의 댓가를 반환했지만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 목을 매었을 것이다(행 1:18). 그는 스스로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제자였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괜히 욕심을 내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휘말리고, 그에 따른 자살이 기독교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얼마전 빚더미를 해결하지 못하고 비관 자살한 젊은 연예인의 사건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기독교인이라도 지나친 탐욕으로 무리수를 두면 수렁에 빠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말씀을 깊이 새길 때다.

 


9. 자살의 유형-(5) 보복성 자살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사건에 직면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다. 온 국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분 앞에 애도하며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이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애도 기간에 걸맞는 태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비극적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5. 보복성 자살

보복성 자살은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자살이 어떻게 보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아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때로 그렇게 보복적인 성격으로 시도되기도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 충분히 타인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보복성 자살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실제로는 타인을 공격하고 타인을 벌주려는 가해적 성격을 담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심각하게 침해를 주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자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복성 자살은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죽이는 일종의 반전살인(反轉殺人)으로 설명된다.

보복성 자살은 어떤 형태든 간에 상당히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겉으로는 단순히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복하려는 의도로 죽음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 입증, 완벽한 지배력 실현, 그리고 타인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든다. 보복성 자살은 성격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항의성 자살

항의성 자살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경우다. 자신을 강력히 변호하고자 하지만 힘이 미약하다고 생각할 때 시도된다. 사회적 배경이나 힘을 행사할 수 없을 때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항의적 자살이 보복적이면서도 자신을 강력하게 변호하려는 목적을 갖는 이유다.

항의성 자살은 어떤 사실에 대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이를 입증하려는 방법으로 극단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항의성 자살은 대개 소심하거나 부정성이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곧바로 입증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죽음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15일 C백화점 3층 화장실에서 여자 손님의 가방이 분실됐다. 이때 중3 남학생 강모 군이 용의자로 지목됐다. 강 군은 부모가 사건 조사에 참여하기 위해 외출한 사이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 13층에서 삶을 마감했다. 18일 백화점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그는 범인이 아니었음이 확인됐다. 그는 우연히 억울한 누명을 썼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했다. 너무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 CCTV를 통해 즉시 확인했더라면 누명이 벗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욕적이고 억울한 상황을 조금만 견뎠더라면 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항의성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가 말한 자살의 구성요소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자살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 즉 죽이고 싶은 욕망,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 등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정신분석학자인 멜라니 클라인은 이런 요소들이 고도로 복합적이며 애매모호해서 서로 분리시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속성을 제거해 다른 속성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져 그 속성만을 죽여 없애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항의성 자살은 죽이고 싶기도 하고 죽임 당하고도 싶은 욕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죽음 그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건전하게 생장시켜 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단순히 자신의 항의 의도가 전달되면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자살은 결국 바르게 살려다 생을 포기하게 되는 꼴이 된다.

2) 결백성 자살

결백성 자살은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자살하는 것은 자기 변호적인 성격이 있지만, 정당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항의성 자살은 자기를 변호함에 있어 항의적인 측면이라면, 결백성 자살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무게를 둔다. 항의성 자살이 힘에 무게를 둔다면, 결백성 자살은 혐의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 억울하다는 점과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 같다.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목적을 갖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방편으로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소한 일이 발단이 돼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문방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오후 4시경 김모 양은 친구 2명과 귀가하던 중 13단지에 있는 문방구에서 1백원짜리 아이스크림 2개를 구입하고 2백원을 지불했지만, 주인은 1백원밖에 받지 않았다고 해 시비가 벌어졌다. 주인이 학생들의 말을 믿지 않고 욕까지 하자 김 양도 화가 나서 욕을 했고, 급기야 주인은 김 양의 멱살을 잡고 150m 떨어진 학교 교장실까지 그들을 끌고 갔다. 이후 이들은 5시경 집으로 귀가했고, 김 양은 이들과 헤어져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6시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돈 1백원 때문에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고 무남독녀 외동딸이 희생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김 양은 평소 밝고 활동적이며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방구 주인으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마음에서 극단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볼 수 없다. 이런 작은 일로 죽음을 선택한 데는 그동안 쌓여온 김 양의 부정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활달해 보이고 문제가 없어 보여도 속으로는 부정성이 쌓였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달리 타인에게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김 양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는 달리 부정성이 많이 축적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성은 그 특성상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심해지면서 지나치게 쌓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폭발하게 된다. 이 부정성에는 반드시 두 가지 특성이 함께하는데, 억울하다는 것과 복수하겠다는 것이다. 작은 일을 발단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비인간적인 삶,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삶을 견뎌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상황에 처할 때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은 오늘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3) 자기 변호성 자살

자기 변호성 자살은 죽음으로 타인에게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경우다. 이는 자신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차원에서 일종의 절망적 수단으로 선택된다. 자기 변호성 자살은 힘이 약하거나 내면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얼마든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가해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데도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변호성 자살은 매우 절망적인 자살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복수의 심리적 과정이 매우 간단했다. 자살자의 망령이 그를 박해했던 사람을 파멸시키거나, 그의 자살 행위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친척들이 그 일을 대신하거나, 혹은 그 부족의 냉혹한 규율이 자살자의 원수로 하여금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나라의 관습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의 자살은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자살자 자신이 진짜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살자는 복합적이지만 신비한 의식(儀式)으로 시작하여 원수의 죽음으로 끝나는 주술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자기 변호성 자살은 ‘죽음의 성향(the death trend)’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비탄의 과정은 상실한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비탄에 빠진 사람의 자아 내부에서 되찾아졌을 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투사의 완만한 과정이 한결 어려워지고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른다.

부모나 부모와 마찬가지로 열렬히 따르던 사람을 여읜 아동은 죄의식과 분노, 그리고 극심한 자포자기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고한 아동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그의 자연 발생적 슬픔은 내면의 고통이 된다. 까닭을 알 수 없고 당치도 않은 이 적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동은 그 적의를 자신의 내부에서 분리시켜 죽은 사람에게 투사시킨다. 그 결과 공상을 통한 동일시는 제어할 수 없는 온갖 공포심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가슴 깊은 곳에 살의를 품은 사자(死者)를 간직하며, 만족을 모르는 그 ‘분신(Doppelgaenger)’은 결코 진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소리쳐 알리며,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자기 변호성 자살은 아마도 ‘죽음의 성향’이 생의 만년에 많은 자살자들의 이상하리만큼 확고부동한 성격과 위로할 수 없는 완고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몽유병자나 신들린 경험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이들의 움직임은 어둡고 보이지 않는 중심부로부터 조종받는다. 그들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목적은 그들의 목숨을 저버릴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 자살 행위는 자살이라는 최종 행위의 직접적 이유라든가 상당한 보상, 맹목적인 충동 등이 아무리 그럴싸한 것들이라도 근본적으로는 악귀를 쫓아내려는 시도다.

4) 공격성 자살

공격성 자살은 타인을 벌주려는 의도에서 시도하는 죽음이다. 자살로 타인을 심각하게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심각한 공격이란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타인에게 앙갚음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음으로 엄청나게 공격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격성 자살은 알고 보면 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결과를 초래한다. 타인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한 분노를 자살로 표출하는 것으로, 해석에 있어서는 전술한 결백성 자살과 흡사하다. 부정성을 많이 축적해 분노하게 되고 그것이 공격성으로 표출돼 마침내 자신을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심리적으로 ‘역설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을 공격하려다 자신을 죽이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가장 노골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흔히 심리적 이중성이 나타난다. “죽어버릴테야. 내가 죽으면 속이 상하겠지”라고 부모에게 말하는 화난 사람은 단지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식과 분노를 그의 삶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투사시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투사에 의한 동일시 기제에 의해, 즉 자신은 희생자요 그들은 가해자라는 심리과정에 의해 적대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들은 분노 때문에 보복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부정성에 의해 불살라지는 꼴이다. 내부의 부정적 요소들을 더 이상 감내할 수가 없다고 느껴, 자신의 생명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막강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괴과정 요소들을 떨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당혹감을 갖게 만든다.

공격성 자살 하면 고결하게 체면을 지키려 했던 로마인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신조와 명성을 위해 침착하게 칼 위에 몸을 덮쳐 자살하기도 했다. 그들은 죽음으로 순화되고 이상화된 자신의 이미지가 남아 있기를 바랬다. 이처럼 로마인과 같은 고상한 이상이 없을 경우 자살은 단지 자신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을 확인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 뒤에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시 살아 남으리라는 믿음, 즉 일종의 사후 재생 문제와 관계가 있다. 마치 천국이 격렬하게 전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원시 전사들의 사고 방식과도 흡사하다. 이 전사들은 내세의 지복을 영영 얻을 수 없게 만드는 질병이나 노쇠에 의한 불명예스러운 자연사를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모를 일이다.

5) 결론: 보복성 자살은 청소년들에게 나타나기 쉽다

이상에서 우리는 보복성 자살에 대하여 다루었다. 보복성 자살은 매우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나타나기 쉬운 자살이다. 사례에 든 것도 모두 청소년들이었다. 아직 전두엽의 발달이 이뤄지지 못해 이성적 판단이 약한 청소년들은 순간의 감정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심한 모욕이 담긴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누구는 1등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부모의 꾸중, ‘돈을 네가 훔쳤지?’ 하는 의심의 추궁이 일어날 경우 청소년들은 반발이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때 그들에게는 ‘내가 죽음으로써 너희도 고통을 받아라’는 보복적 심리가 작용하기 쉽다. 보복성 자살이 가족 내 갈등이 많은 청소년에게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10. 자살의 유형-(6) 최후 수단성 자살

우리는 지난 주간 국가적으로 큰 일을 치뤘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룬 사상 초유의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자살의 유형에서 최후 수단으로서의 죽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그 분의 죽음은 최후 수단적이기는 하나 여러 면에서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우리의 정치사를 변혁하는 요청이요, 누구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공범적 측면이 강하다. 검찰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 범인을 사냥하듯 하고 언론은 그것을 연일 중계하다시피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띄울 때 우리는 그 분이 힘들어 하는 얼굴의 고뇌를 읽고서도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막아주지 못했지 않은가 말이다.

수많은 국민이 가슴에 눈물로 말했던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는 이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살아있는 권력 앞에 저항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 몸을 사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에 일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미안해 더욱 눈물로 통곡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기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비겁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분을 앞세우고, 또 정치적인 상황을 반전하려는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그 분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다만 가신 분의 뜻을 깊이 새겨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 남은 자에게 남겨진 몫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후 수단성 자살이란 더 이상 어떻게 할 힘이 없다고 판단될 때 죽음으로 대응하는 행동이다. 삶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자신의 정당성이 인정되거나 수용되지 않을 때 취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최근 일어난 전직 대통령의 죽음도 이런 관점에서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물론 성격상 복합적 측면이 있기에 단순화시킬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최후 수단적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이런 최후 수단성 자살에는 다음 유형이 있다.

1) 상황 반전으로서의 자살

상황 반전은 모든 인간이 꿈꾸는 심리다. 이런 경우는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끼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이 상황을 원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됐으면 하는 상태는 매우 억울한 심리에 기초해 있다. 물론 그 상황은 자신이 잘못해 초래된 경우일 수 있고, 자신과는 상관없이 이뤄진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불리해진 상황을 피하고 싶어 반전을 기대하는 것이다. 상황을 반전시켜 현실에서 운신의 폭을 안정되게 만들고 심리적으로 편안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이유로 상황 반전은 자신이 매우 불리해진 경우 보다 정당한 가치로 평가받으려는 심리에 기초한다.

최근 우리는 학업 부담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성적을 비관, 자살하는 사례를 많이 접했다. 또 사업 실패자들이 자살사이트를 통해 동반 자살하는 사건도 경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30명 이상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어 이미 OECD 국가들 중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동반 자살에 유난히 관심을 보인 것이 특이하다.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반전시키려다 좌절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반전은 심리적인 원인이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심리적 인식이 상황을 더 무겁고 힘들게 만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인지심리학자인 바우마이스터(Baumaister)는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규정한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노력이 사실상 자신을 회피하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우마이스터는 자살을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개념화하면서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기대와 현실의 괴리다.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기대 수준은 높지만 현실적인 상태가 그에 도달하지 못할 때 기대와 현실 간에 괴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비난과 부정적 평가의 결과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긴 이유를 자기 탓으로 돌려 자기 비난과 부정적인 자기 평가를 한다. 셋째, 고통스러운 자기 지각의 증가다. 주의 초점이 자신에게 돌려져 고통스러운 자기 지각이 커지고 자신을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넷째, 부정적 정서상태에 빠진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 상태가 초래된다. 다섯째, 인지적 몰락의 상태다.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없애줄 수 있는 수단을 갈구하게 돼 ’인지적 몰락(cognotive deconstruction)'상태가 된다.

여기서 인지적 몰락은 정신 기능이 협소화되는 상태로,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거부하고 피상적이고 무가치하게 지각하고 해석하는 정신 상태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자살을 가로막던 여러가지 내적 억제력을 약화시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고 봤다. 이는 바우마이스터의 이론이 절망 요인, 우울감과 같은 정서적 요인, 단기적 위험 요인과 자살과의 관계, 우울증을 포함한 다양한 병리 집단에서 나타나는 자살의 공통적 기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유다.

2)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 일어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원하지만, 때로 정반대되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지만 기왕이면 잘한 것으로 평가받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그런데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 억울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로든 실추된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 힘에 부쳐 한계를 느끼고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마지막에 죽음으로 그 정당성 입증을 시도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대개 남성들이 주로 시도한다. 일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으려 하는 심리 때문이다. 남성은 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 명예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명예를 위해 살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자신의 힘이 한계에 도달할 때, 그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남성은 자살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역사적으로 군인들이나 영웅들에게서 많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경우나 성공한 자리에서 치명적인 모욕을 당한 경우 등이다. 불명예스럽게 도망치거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군인의 특성이다. 그런 이유로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살하는 것은 군인들 특유의 것이었다. 적의 손에 놀아나는 것은 군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패배자가 되는 참혹함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가 발레르 막심(Valere Maxime), 플루타르크(Plutarque), 플린느(Pline), 타키투스(Tacitus), 디오도레(Diodore)와 케사르(Cesar)를 비롯한 고대의 저술가들은 모두 사령관이나 당대의 명사, 또는 부대원 전부가 이러한 이유로 자살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전세계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서나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평소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서도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죽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당당히 싸우다 죽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로부터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 지방을 연결하는 협로를 지켜내는 임무를 부여받은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와 3백명의 스파르타 시민이 그런 경우다.

3)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은 정권이 바뀌어 처형당해야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으로, 전에 정권을 잡은 사람을 죄인 취급하려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은 정치적으로 실패해 죽음을 당하는 정도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수만 명의 자살자를 낸 프랑스 혁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전쟁의 와중에는 많은 죄수들이 교도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나, 어차피 처형될 것이므로 미리 자살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는 다른 사조에 억눌리게 되고, 때로는 불의의 반계몽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며 목숨을 끊어 자신들의 이상을 지키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은데다 믿고 있던 것이 모두 무너져버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던 것과 달리 정권이 바뀌어 힘을 잃게 되면 새로운 권력으로부터 압박이 시작된다. 그 압박은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심리적 고통이 가중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기 지롱드파에서 자살이 유행했던 것도 지롱드파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압박을 받은 원인이 더 컸다.

여기는 소비에트 혁명이 실패했을 때 나타났던 심리적 매커니즘을 들 수 있다. 혁명의 실패가 무조건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 중에서도 번민에 잘 빠지고 쉽게 과격해지는 사람들이 자살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죽은 후 소련 상황을 보면, 스탈린 전제 시대가 차차 확립돼 레닌 숭배자의 눈에는 이상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싸울 때도 공통의 척도 없이 공포로 추락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사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에서는 혁명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살이 유행했다.

1956년 헝가리 반공의거는 이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예속돼 있던 헝가리 국민들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 사건이었다. 이후 수백명이 자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희망을 모두 빼앗긴 프라하의 봄에, 다른 해보다 자살률이 5배 높았다. 포르투갈에서도 카네이션 혁명 때 비폭력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파업과 데모가 확대됐던 5월, 파리의 자살률이 2배 증가했다.

4) 투쟁으로서의 자살

자살은 최후 투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마지막까지 항거하고 투쟁하는 행위다. 이런 점에서 투쟁으로서의 자살은 현재의 부당한 상황을 자신의 몸을 던져 막는 것이다. 몸을 던져 막는 것은 마지막 남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고 남은 것은 목숨 하나 뿐이므로 이것을 동원해 마지막으로 가하는 일종의 육탄공격인 셈이다. 이같은 경우는 비인간적인 대우나 모욕적인 삶이 자행되고 있다고 판단될 때 몸을 던져 투쟁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비인간적인 삶,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굴욕을 당하는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을 잘 견뎌내야 하지만,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상황에 처할 때 자살 충동을 느낀다. 이 경우 당사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을 스스로 버렸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압박을 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여기에 투쟁하던 중 힘이 다하는 경우 자살로 이를 막으려 하는 것이다. 자살은 성격상 지배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상대방에게 침해를 가하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자살이 갖는 마지막 힘이기에 자살을 통해 모욕적인 상황을 끝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 이런 경우 당사자는 어느 정도 자살을 통해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던진 행위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이기 때문이다.

투쟁으로서의 자살도 알고 보면 심리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통을 견딜 수만 있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사람에 따라 고통이 찾아오는 시간과 내용이 다를 뿐 누구나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 고통이 자신의 명예를 완전히 훼손하는 경우나 가장 아끼는 가족의 고통이 동반되는 경우 더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가중되고 만다. 협박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해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자신 때문에 가족이 고통당하고 그것이 빨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는 경우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절망감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당사자를 압박하는 마지막 수단은 피붙이인 가족을 협박해 고통을 가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이 자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과 타인의 잘못된 동일시로 인한 혼동이 자살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살에 취약한 청소년은 사춘기의 변화로 인해 자신의 신체적인 경험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종종 소외의 박해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운 삶과 부활에 대한 환상이 자살에서는 거의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내적인 초기 관계의 파생물을 둘러싸고 있는, 조직화됐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공격적 충동은 정신적인 통합의 발달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압도하고 방해한다.

자살에 취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자신을 함께 통합하는 자기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을 통과해 새롭고 더 나은 세계로 갈 것이라는 변형의 환상에 의해 행동한다. 타인과 결합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살에 취약한 사람이 상실을 접할 때 고통을 호소하게 하고, 양가적인 자살 시도에 관련되게 하며, 자신이 희생양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설명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쉬나이드먼(Shneidman)은 자살이 논리적이며 심리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자살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의 이론으로 자살을 이해하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결론: 자주 실망하는 사람·이상적인 사람들 세심히 보살펴야

이상에서 최후 수단으로서의 자살에 대해 고찰했다.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초기 어느 한 이론으로만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살과 관련된 행동이 정신과적 병력, 신경증, 외상적인 삶의 경험, 자살 행동에 대한 유전적 취약성, 사회문화적인 위험 요소와 보호 요소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어느 한 관점이나 방법만으로 자살과 관련된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다양하고 통합적인 방법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살은 우연히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망을 잘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잘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실망을 잘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상이 무너진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주 실망하면 자신이 가진 긍정적 에너지를 부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신의 이상이 무너지는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느끼기 쉬운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실망하기 쉬운 성향을 이미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실에서 지나친 이상화를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어쩌면 직면하는 현실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우둔함이 오히려 필요하다.-------

 


기독교인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김충렬 박사의 ‘살자’

몇년 전 이은주, 유니, 정다빈 등에 이어 지난해 안재환, 최진실 등 유명 기독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의 힘’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자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발생한 면이 없지 않다는 평가다. 경제위기로 지난해보다 더 어려운 한해가 예상되는 2009년, 크리스천투데이는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김충렬 박사와 함께 ‘기독교적 입장에서 바라본 자살’에 대해 정리하면서 교계에 자살예방과 생명존중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한다. 김충렬 박사는 “특히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최근에 안재환과 최진실 성도의 자살이 연일 방영된 장면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들의 영정 앞에 놓여진 ‘성도 ○○○’라는 푯말은 기독교인이 자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표지였다. 그리고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질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목회자들의 수많은 설교를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는 것과도 같아 부끄러움을 넘어 목회의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의 문제로만 치부해 목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진솔하게 영혼을 지키어 돌보는 일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의 요청에 귀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기독교인의 자살은 최근에만 있던 사실이 아니라 오래도록 행해져 왔다. 다만 그 성격의 특성상 드러낼 만한 일이 아니어서 가리워지거나 편의상 다른 사고로 적당히 처리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드러내기에는 곤란하지만 필자는 상담하면서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직분자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족들의 가슴아픈 사연을 여러 차례 상담하는 임상에 직면하고 있는 터다.

자살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현상이다. 자살은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 절망적으로 자기의 삶을 포기할 때 일어나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현상적으로 자살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을 선택한 의지적 행동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개인의 부정적인 의지력이 작동되면서 긍정적인 의지력은 마비된 상태에서 행해진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결국 자살은 평소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순간적으로는 정상적인 판단의 기능이 멈춰서는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실행되는 것이다.

이제 자살은 일반인들만 아니라 기독교인에게조차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현실의 마지막 출구나 해결책으로 활용되는 편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우리 목회자들은 자살에 대하여 그 현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부하여 목회적인 대책을 세우는 노력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성경에 나타난 자살의 유형을 정리하면서 그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자.


Ⅰ1.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성경에는 실로 다양한 자살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여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경에서의 자살은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치 죄의 결과로 여겨지며, 이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돼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당한 자살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이런 자살을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자기처벌성 자살: 유다(마 27장, 행 1장)

예수님의 제자 중 스스로 자원하여 나섰던 유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자살자다. 그의 자살은 신약의 대표적인 자살이기도 하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하여 판 죄를 뉘우치고 은 30개를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5)’. 부정한 수입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지 못했고, 반역의 돈을 반환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에 사로잡혀 황급히 성전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 절벽 위에서 목을 맸을 것이다(행 1: 18).

실로 유다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제자였다. 그의 자살 원인은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지만, 일단은 그의 탐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욕은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한 데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해 고발했다.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유다의 탐욕은 급기야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탐욕에 물든 그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유다의 자살은 지나친 욕심이나 탐욕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물론 유다의 자살을 두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야망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종의 보복성으로 저들의 음흉한 계획에 야합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다가 돈 몇푼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다 해도 이 또한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던 결과라는 범위를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도피성 자살: 사울(삼상 31장)

사울은 도피성 자살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도피란 현실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회피하려는 행위로, 대개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적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할례 없는 이방인의 손에 잡혀 모욕적인 죽음을 당할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져’ 자결했다(삼상 31:4).

사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미약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하나님은 이런 미약한 지파에서 왕을 선출하시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울은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 자신의 미약함을 알고 행구 사이에 숨는 겸손함을 보였으나, 왕이 된 후 교만해지기 시작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정도가 되기에 이른다.

 

사울의 자살에서 우리는 지나친 교만의 말로를 보게 된다. 지나친 교만은 자신을 깨닫지 못해 마침내 자신을 개선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교훈이 생긴다. 그의 교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됐고, 급기야는 하나님도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 악신이 들어가서 늘 번뇌하게 됐다.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실 것을 알고 다윗을 죽이려 들기에 이른다.

실로 사울의 자살은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지나친 교만이 자살로 이어지게 됐음을 본다. 교만은 자신이 중심이 돼 다른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교훈도 무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을 것이다. 자신을 끝내 낮추지 못하는 교만이야말로 누구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해 스스로 자살로 삶을 끝내고야 만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3) 보복성 자살: 시므리(왕상 16장)

시므리의 자살은 쿠데타 실패로 인한 자살이다. 북이스라엘의 엘라왕이 폭정을 행하자 시므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엘라왕이 술에 취해 대신들과 흥청거릴 때 시므리 장군이 그를 쳐 죽였다. 그러나 집권한지 7일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오므리를 등극시키고 시므리가 머물던 왕도를 포위했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다(왕상 16:18).

억지로 오른 왕위가 그다지 순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백성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몹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성이 함락됨을 보자 자신의 왕궁을 불사르고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왕상 16:15-20). 시므리의 치세 기간은 이스라엘 역대 왕중 가장 짧은 7일에 불과했고, 더 나아가 훗날 ‘시므리’라는 이름은 구데타를 일으킨 악명 높은 왕의 대명사가 됐다.

시므리의 자살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해 쿠데타를 일으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이다. 권력욕이란 지배력의 다른 모습으로, 열등감이 그 근원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지배하려 든다는 점에서 지배력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자살은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성을 불지르고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사실에 근거하면 보복성 자살에 해당한다. 지나친 권력욕을 자살로 해결하려는 비참한 보복적 자살이 아닐 수 없다.

 

4) 운명론적 자살: 아히도벨(삼하 17장)

아히도벨은 다윗왕이 신임했던 부하들 중 하나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고 왕위를 차지하려 했을 때 압살롬에게 모략을 제공한 자가 아히도벨이다. 나중에 다윗의 충신인 후새의 전략에 몰려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히도벨은 나귀타고 귀향해 스스로 목매 죽었다(삼하 17:2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모반에서 아히도벨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의 반역은 다윗왕에게 뼈아픈 일격이었을 것이다. 압살롬은 다윗에 대항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아히도벨과 협의한 후, 다윗왕의 또다른 부하인 후새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왕에게 은밀히 충성하고 있던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에 반대하고, 대신 실제로 다윗에게 유리한 자신의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압살롬의 거사에 등을 돌렸다. 압살롬이 후새의 계획을 받아들이자 아히도벨은 후새가 자신을 속였음을 깨닫고는 압살롬의 부대가 비참히 패할 것을 예상하고 자살했다(삼하 15:31-37, 16:20-17:23).

 

아히도벨의 전략은 다윗왕만 잡으면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도 다 잡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실제로 다윗왕만 잡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의 기막힌 전략은 압살롬도 마음에 흡족해 했으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하게 됐음을 알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좌절이요 절망 뿐이다. 그런 절망이 끝내 그에게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절망이 상황을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좌절에 이르고 극도로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상황을 해결하려는 과히 운명론적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운명론적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균형있게 살아가지 못하고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펼쳐가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극심한 좌절에 이르러 자살로 삶을 끝내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5) 이타성 자살: 삼손(삿 16장)

삼손의 자살은 거의 영웅적인 자살이다. 그런 이유로 삼손의 자살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삼손도 자살한 사람이다. 물론 그의 자살은 하나님의 백성을 귀찮게 하는 블레셋을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죽이고 자신도 죽는 죽음이라는 사실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으로 묘사된 인물인 삼손은 특별히 구별된 나실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전설적인 전사로서 그가 거둔 엄청난 전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초기 지파동맹시대(BC 1200-1000) 상당한 기간 동안 블레셋인들에게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암시한다. 삼손은 ‘20년’ 동안 판관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단 지파 출신으로 예루살렘 근처 소라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중 신의 현현(顯現)을 통해 그들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나실인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실인은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머리털을 밀거나 깎지 않으며, 사체(死體)를 만지지 않기로 서약한 이른바 ‘구별된’ 사람이다.

물론 삼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가 신전에서 죽은 것은 자살이 아니라 잠시 포기했던 원래의 사명(‘판관’과 나지르인으로서)을 되찾은 행위라고 한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비평가들과 심지어 탈무드 시대(1세기부터 시작) 일부 유대인 해석가들까지도 삼손의 이야기를 전설 또는 서사시로 간주한다. 그들보다 좀 더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그 사건들의 비현실성과 본문의 민담 양식을 인정하면서도 사담에 담긴 역사적 진리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대중의 상상력으로 인해 윤색되고 랍비 문학의 영향으로 살이 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삼손의 죽음은 그 현상적으로 볼 때 자살이 틀림없다. 다만 그의 자살은 단순히 운명을 비관하여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은 뒤에 마지막 온 힘을 쏟아 적을 무찌르는 형태의 죽음이기에 이타성 자살로 분류돼야 할 것이다. 물론 삼손의 죽음은 생각해 볼 여지를 여전히 남기고 있다. 쉽게 자살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비록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헌신이요 택한 백성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안락사가 부분적으로 허용되고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논의 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자살을 고찰했다. 이제부터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해 정리하고 논의해 나가기로 하자. 크리스마스에 이어 새해를 맞는 지금 자살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 찬물을 끼얹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경제적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이때, 더 많은 생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데 일조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대로 영혼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구주 예수님의 정신에도 오히려 부합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

 

앞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자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제는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해서는 일단 그 실태부터 궁금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일부 드러난 것 외에 어느 정도로 자살하는가에 대한 그 실태가 무엇보다도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사실은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의 자살 통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수치스러운 특성으로 인해 드러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드러난다 해도 사고사로 처리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기독교인들의 자살이 있어 왔지만 최근 들어 드러난 기독 연예인들의 자살로 충격과 함께 이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자살에 어느 정도 기대어 유추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점은 기독교인이 한국이라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 자살의 실태와 그 현실에서 그다지 예외적이지 않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하는 것이다.

 

1) 자살 사망률의 변화

통계청이 2006년 9월 발표한 한국인의 2005년 사망원인 통계에서 자살은 사망원인 4위를 차지한다. <2005년 사망원인 통계결과>에 따르면 2005년 한 해동안 사망한 사람들 중 자살에 의해 죽음에 이른 사람이 1만 2천명에 달한다. 이는 하루 평균 33명이, 인구 10만명당 26.1명이 자살한다는 수치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전체 사망자 중 4.9%를 차지해, 암과 뇌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 다음이다. 자살이 전체 사망원인 중에서 차지하는 순위는 1992년 10위였으나 1995년 9위, 1998년 7위, 2004년 5위, 2005년 4위로 지속적으로 순위가 상승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서서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다가 IMF 경제위기 때인 1998년 급격히 상승했고, 이후 2년간 약간의 감소가 있었지만 다시 증가하기 시작, 2003년 이후에는 1998년의 자살 사망률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통계 수치에서는 자살이 경제와 상당히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경제가 비교적 좋았던 199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자살 사망률이 증가했고, 2003년 이후 자살 사망률이 1998년의 자살 사망률을 상회하는 것을 보면 경제위기 이외의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추정하게 된다. 가족의 지지체제 약화, 도시화, 이혼의 증가, 각종 중독 증상으로 인한 가족 붕괴 등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성별로는 남성의 자살 사망률이 여성보다 2배 정도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여성이 자살을 많이 시도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적은데 비해, 남성은 자살 성공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자살 시도에서 여자에 비해 더 확실한 방법을 선택하는 결과로 보고 있다.

이 통계를 사망원인별로 구분하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자살이 사망원인 중 성인병 질환인 당뇨병보다도 높을 뿐 아니라, 간질환이나 교통사고, 고혈압과 폐렴보다도 높은 수치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학자들이 자살을 질병으로 파악하려는 근거이기도 하다. 자살은 한국사회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적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다.

 

2) 연령별 자살 사망률

이 통계를 연령대별로 구분하면 자살은 더욱 심각한 측면이 드러난다.<통계: 기사 하단 관련기사 참조> 자살은 20대와 30대에서는 사망원인 1위다. 20대에서 2위는 교통사고이며, 30대 2위는 암이라는 점이 비교될 뿐이다. 자살이 20-30대에서는 교통사고나 암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10대와 40대에서는 2위로 나타난다. 40대부터는 암이 가장 심각한 사망원인이고 자살이 그 다음을 차지하며, 10대는 외부적 요인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로서 1위가 교통사고라면 2위가 자살로 나타나고 있다. 50-60대에서도 자살은 사망원인 5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통계는 자살이 특정 연령층에 집중돼 있기 보다는 전 연령층에 관련돼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대로 자살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통계에서는 자살한 사람들의 연령별 비율이 드러나고 있다. 전체 자살 사망자를 100으로 놓고 연령대별로 비율을 살펴보면 2004년 기준 40대가 자살자 중 가장 많은 21%에 이르고, 다음이 60대로 16.3%, 30대 15.8%, 70대가 13.8%, 20대가 9.4%, 10대가 2.1%로 나타나고 있다.

 

이 통계에서 특징은 장년층의 자살이 압도적이며, 특히 여성보다는 남성들의 자살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청소년의 자살도 점차로 높아지는데다가 최근에는 아동의 자살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OECD 국가들의 자살 사망률 1위

또 한국인의 자살률은 30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2위 헝가리가 2002년에 보여준 23.2명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헝가리에 이어 3위인 핀란드는 자살률 18.8명인 것에 비하면 우리의 26.1명이라는 수치는 매우 높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수준이 높을수록 자살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특히 그 수준이 갑자기 떨어질 때, 즉 실업이나 경제불황시 전문직 종사자들의 자살률이 증가한다. 계절별로는 봄·가을에 약간 높고, 미국의 경우 금요일 저녁에 많다고 한다. 지역적으로는 북유럽,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동유럽, 그리고 일본의 자살률(10만명당 25명 이상)이 높다. 최근에는 네덜란드,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체코, 핀란드 등의 순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중에서도 지중해 연안국인 이탈리아, 스페인, 이집트 등에서는 10만명당 10명 이하로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현상은 자살은 생활 수준과는 달리 기후적인 측면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실제로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자살하기 때문이다.

 

4) 기독교인의 자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둬야 한다. 이런 통계에 기독교인은 전혀 해당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누구도 자신 있게 단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근 기독 연예인들의 자살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살이 비록 소수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목청을 높여 외친다 해도 ‘기독교인들도 자살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특히 유명 연예인 중에도 안재환이나 최진실의 자살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들의 자살은 영향력 면에서는 몇백 편, 아니 수천 편의 설교보다도 그 위력이 강력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수고하고 힘쓰던 목회의 노력이 이렇게 무참히 무력화돼 버린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이는 다시 생각해도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일어나는 질문을 덮어버리기에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살을 전혀 막아줄 수 없었던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내세우며 자랑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전혀 알아차리는 눈도 없었던가? 저러다 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감각이나 느낌이 전혀 없었던가 말이다. 아이들만 보내면서 자신은 몇 년씩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았던가? 정말이지 한달 내내 방영되는 그들의 자살에 대한 장면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귀를 막고 있어야만 했던가?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대명제 하나만을 방패처럼 높이 치켜든 채 말이다. 그들의 장면은 분명히 영혼을 돌본다는 우리의 목회 체계가 실종돼 버리고 말았다는 현장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그러기에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넘어 지각 있는 자들에게는 분노가 치밀었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제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자살을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으로만 치부해 그 책임을 벗어나려는 구차한 노력을 중단하고 과감하게 그에 따른 이해와 아울러 대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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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우리는 지금 기독교의 자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성경에 나타난 자살을 유형적으로 정리했고, 기독교인의 자살 실태에 대해 기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실태는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해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여건 때문에 부득불 한국인의 자살 실태에 상당히 기대 유추하는 아쉬움을 남긴 것이긴 했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그 특성상 일정한 통계 수치로 나태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누군가 기독교인의 자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정리하고 종합하려는 시도가 없는 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교회들이 그것을 밝히고 협조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이는 비단 한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숨길 수만은 없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해 교계에는 물론 사회에까지 큰 충격을 주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직도 이런 현상에 대하여 개인의 문제로만 보려는 목회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 자살, 목회자들 책임은 없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자살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자살을 드러내 놓고 말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삶의 축복과 성공을 강조하며 교인을 추스르고 달래는 목회적 성격이 그렇게 이끌고 있으며, 삶에 지치고 고단한 교인들에게 부정적인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더욱 긍정적으로 자극하여 힘을 주려는 것이 목회자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렇게라도 자살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은 어쩌면 그들의 희생의 대가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를 그들의 잘못으로 단순화시켜 정죄해버린다 해도, 영혼을 성실하게 돌보지 못한 책임은 쉽게 덮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양심을 가진 목회자라면 그들이 “사느냐, 죽느냐?”로 갈등하며 괴로움에 떨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에 열중하고 있었던가? 그들의 생명이 비참한 자살로 마감되기 전에 우리는 어떤 목회적 관심을 보였던가 말이다. 진정한 목회자라면 이런 양심의 소리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자살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질문하신다면 뭐라 말할지 부끄러운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어느 정도 목회적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들이 목회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백 번 핑계를 대 회피한다 해도 목회적 책임까지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리고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살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해도 그들이 교인이라는 사실은 그대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정 앞에 있는 ‘故 성도 ○○○’가 그것을 입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들의 연이은 자살은 이제 우리 목회자들이 더 이상 자살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회피하고 공론화하기를 꺼린다면 우리는 더 많은 희생자를 초래하는 결과를 부르고야 말 것이다.

다행히 이들의 자살에 대해 귀를 막지 않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서서히 감지되고 있는 점은 반가운 일이다. 필자는 최근 1년에 한 번 모이는 신대원 출신 목회자 동기 모임에서 ‘기독교인 자살의 목회적 이해’라는 주제로 특강을 부탁받았다. 목회 정보의 교환을 꾀하고 친교 성격을 갖는 동기 모임에서 자살에 대한 특강을 원한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다. 자살이라는 주제는 고사하고 동기 모임에서 특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고 부담돼 사양했지만 동기회 회장은 오늘의 상황에 즈음하여 자살을 목회적으로 짚고 넘어가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에 정중히 이를 요청한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그런 자살에 대해 언급할 가치가 없다며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교단에서조차 공개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봤다. 이는 자살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 반갑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더 이상의 자살을 막기 위해 생명의 귀중함을 역설하고, 교리를 강조해 정죄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간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그들의 견해는 그런 우려를 넘어 다양한 관점, 즉 객관적 이해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자살에 대한 다양한 관점으로 견해의 폭을 넓히고 그에 따른 정신적 이해가 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발전적이다. 그러다 보면 논할 가치도 없다던 입장에서 점차 자살과 생명, 그리고 신앙의 위력 등을 연계해 토론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그 동안 덮어두고 드러내기를 꺼리던 태도에 어느 면으로든 영향을 줄 것이다.

기독교인 자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이런 분위기와 관련해 한 가지를 분명히 두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인 자살이 이처럼 쉽게, 그리고 널리 이뤄진 때는 일찍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인의 자살은 최근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오래도록 있어온 것이지만,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로 더욱 드러나게 된 측면이 없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다 봇물이 터지면 수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아직은 신앙의 체계도 없고 삶에 대한 목표가 정확하지 않아 소명감이 분명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런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그 원인을 분석하고 예방적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일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인의 자살 현상에 대하여는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기독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만들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왜 자살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생명을 강조해 과히 ‘생명의 종교’로 알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생명의 종교에서 자살이 그토록 행해지는 정도라면 당사자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마치 생명의 종교가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자행하고 있다는 질타를 받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 인식해야만 것이 더 있다. 그것은 자살 경향이 이제 기독교인들까지 위협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현실이다. 실제로 필자는 상담하면서 내담자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자살하는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는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여러 번 접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대개 삶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에는 신앙적인 무기력이 연관돼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기에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상담자로서도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그들이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하여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신앙생활 하던 장로의 자살을 목격한 목사님의 목회적 충격

자살한 사람들 중에는 장로들도 있고 권사들도 있다. 경찰서장을 지냈던 어느 장로님도 자살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권사님도 갑자기 자살했다. 이런 자살은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자기 교회 장로가 자살한 현장을 제일 먼저 목격한 어느 목회자는 그날 충격을 받고 하루종일 힘을 잃었다고도 했다. 전혀 그럴만한 직분자가 아니었다는 점이 목회자인 그에게 더욱 충격을 줬을 것이다. 그의 자살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건이기는 했지만, 그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라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 교회의 중직들의 자살은 때로는 목회자의 목회를 여지없이 무력하게 만든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임상경험에 의하면 자살한 사람은 여러 이유가 있고 형태도 다양하지만 특이한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대개 그들이 평소에 모범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거나 추앙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직분자들의 자살은 가까운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다른 교인들에게도 두고두고 충격과 함께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렇게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 왜 자살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은 때로 부정적으로 작용해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모방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어떤 형태의 자살을 주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살의 금기상 말할 수 없다. 다만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살이 상당히 보편성을 띄는 분위기로 접근하고 있다는 심리적 현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임상경험은 예전에는 기독교인의 자살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어느새 그다지 멀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는 현실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의 자살은 이제 특정 목회자와 교회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한 때다.

영혼을 구하려는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 땅끝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전체 기독교의 문제이자 영혼을 돌보는 목회의 문제인 것이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목회적 돌봄에도 일정 부분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자살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자살을 시대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살은 시대마다 그 관점이 상당히 다르게 변해오고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관점의 변화는 물론 시대마다 생명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고 있다. 실로 자살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점과 삶의 당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자살이 부쩍 증가하는 것도 이런 생명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고대의 자살에 대한 이해: 신의 뜻에 위배

고대(古代)는 기독교가 일정한 틀을 이루기 전이다. 이때 기독교는 보편적인 고대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일반 대중종교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개념들을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신(神)은 불가시적이고 초인간적인 영원한 힘으로 인간의 운명을 통제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에 기도, 의식(儀式)이나 제사에 의해 예배되고 회유되는 힘들의 실존을 믿은 것이다. 이 시대에는 신, 우주 그리고 자연이 관심사이던 시대적 상황에서 우주의 생성을 밝히려는 그리스의 철학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이때의 관심은 물리적 우주와 인간의 영혼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면서 물질 안에 갇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고대의 자살은 영혼론을 기초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2) 소크라테스: 생명의 주인에게 죄를 지음

신, 우주 그리고 자연에 관심을 갖던 시대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그는 철학자들이 외부적인 데만 관심을 갖던 당시 풍조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신이 우주와 인간을 만든 ‘주인’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신이 만든 우주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 그 영혼이 중요시된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사고의 대상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사용하여 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는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영혼은 도덕성을 기초로 신중성과 절제, 용기와 정의 등의 덕(德)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이런 시각에서 자살은 “생명의 주인되시는 분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기의 감옥의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수인(囚人)이다…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자살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3) 플라톤: 자신의 생명에 상처를 주는 행위

플라톤에 이르러 그리스 사상은 절정에 이르게 됐다고 알려진다. 신비적 경건을 소유한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의 원초적 영혼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인간의 영혼이란 육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육체와는 별개의 것이면서 육체의 파멸 후에도 죽지 않는다는 이른바 ‘영혼불멸론’을 역설했다. 영혼은 육체가 갖지 못하는 불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영혼은 이데아를 고향으로 진선미를 추구하며 인격적인 신과 만나고 이 세계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최고의 만족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자살을 “스스로 영혼을 육체로부터 풀어주는 행위”로 이해한다.

플라톤은 <파이돈(Phaedon)>에서 자살이란 신체에서 영혼을 스스로 풀어주는 것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율법(Nomoi)>에서는 자살을 매우 수치스러운 것으로 규정, “죽음의 의도와 동기를 의식하면서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자살이 자기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 행위로서 어느 정도의 의도를 가지고 동기를 인지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행한 상해(傷害)라는 견해다. 이런 견해는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내린 것이기에 자살은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함부로 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자살은 신체에서 스스로 영혼을 풀어주는 행위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잘못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은 자살이란 매우 수치스러운 행위이기에 자살자는 ‘묘비도 없이 묻어야만 한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매정한 정죄적 관점과는 달리 자살자의 예외적인 경우를 두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예를 들어, 마음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하여 구원받을 여지가 없는 경우, 소크라테스처럼 법정의 판결에 의한 자살인 경우,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개인적인 불행 때문에 도무지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누가 봐도 불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수치심 때문에 자살한 경우 등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에서도 용서는 될 수 있지만 자살행위 자체는 개인이 저지른 비겁한 짓으로 비난받는 것을 면치 못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들은 현대의 자살을 이해하는 단초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자살은 비겁한 행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신비적 정신이 훨씬 덜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와 보이는 현상이 서로 상호적 실체로서 존재한다.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질료에 대한 현상적인 힘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신은 제일동인(動因)으로서 세계 발전 과정의 시작일 뿐 아니라 목표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감각적인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요소인 로고스를 가진 영원한 존재이다.

이런 그가 자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단지 <니코마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살은 불법적인 것이고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논조다. “자살은 그 사람 자신에게는 부정이 될 수 없다 해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가난, 연애라든가 그외에 어떤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용감한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아니라 도리어 겁장이가 하는 일이다. 괴로움을 피한다는 것은 게으름뱅이의 짓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음 앞으로 다가서는 동기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피하는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소결론: 자살 연구보다 영혼론 연구가 선행돼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살에 대한 견해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자살하는 개인의 자율성과 개인적인 안녕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자살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우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자살은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함부로 다룰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의 자살론에서 영혼론이 기초가 됨을 발견하면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스스로 생명을 파괴하는 단순한 죽음을 위한 행위 뿐만 아니라, 먼저 기독교의 영혼론을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자살과 관련해 생명의 귀중성과 함께 영혼론을 더욱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우리는 고대에는 자살이 신의 뜻에 위배한다는 사상을 고찰했다. 이 시대구분은 물론 정확한 기독교 교회사의 구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런 기독교적 정확성보다는 특징을 살려 임의적으로 시대를 구분해 나갈 것이다. 확실히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영혼론을 중요시해 우리에게 영혼불멸의 선물을 가져다 줬다. 이는 영혼불멸을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고맙기까지 하다. 그들에게는 우주의 원리를 밝히려는 의도가 영혼이 중심에 자리했다는 점에서 자살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분위기가 교부시대에 들어오면 자살은 더욱 정확하고 엄격하게 신앙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를 다음의 몇 가지로 특징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스토아 철학자: ‘행복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살이 정당화

그리스 철학의 뒤를 이어 헬라 문화가 로마로 이행되던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물론 기독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등장하기 전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야 한다. 이 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상의 중심에 선다. 대부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도덕성에 따라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삶을 자연스럽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삶에서 육체적 건강과 같은 행복할 수 있는 본성적인 유익성을 상실하였을 때, 현명한 사람은 그 점을 인식하고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가 행한 자살이 그 사람의 윤리적 미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 뿐 아니라 개인의 선(善)도 자살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살한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단지 사는 것이 선(善)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선이다.”, “현자는 그가 가능한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야 할 만큼 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세네카에게는 적어도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 중했던 것이다.

2) 락탄티우스: 자살은 불명예스럽고 가증한 것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자살이 일정한 틈을 보이던 것이 교부 시대에 이르면 엄격하게 그 문이 닫히고 만다. 교부 시대에 이르면 자살은 살인과 같은 행위로 죄악시하게 된다. 교부 시대부터 기독교는 자살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죄악시하게 됐다.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하면 자살은 불명예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는 자살을 윤리적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자살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려는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철학자들에게 철퇴를 가한다. 이는 교부 시대에는 자살을 자신을 죽이는 살인행위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부시대에도 순교 정신으로 자살하는 경우나 덕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해하는 태도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3) 아퀴나스: 자살은 회개할 수 없는 죄

자살은 살인행위에서 이제 회개할 없는 죄로 규정된다. 여기에 어거스틴(Augustine)은 그 선봉에 선다. 어거스틴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Thou shalt not kill)”가 이미 자살을 금하고 있다는 견해를 들어 자살을 회개할 수 없는 죄악으로 단정했다. 그는 <신국론>에서 ‘어느 누구든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어떠한 법도 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난에 대해 스스로 결백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 ①자살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자연법(natutal self-love)에 어긋난다 ②자살은 자살자가 속한 공동체에 상처를 준다 ③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생명의 의무를 어기는 것이다 등을 들어 어거스틴의 견해를 옹호한다. 이런 견해는 중세 교회에서는 교의로 성문화되기도 했다. ‘신체에 대한 인간은 단지 사용권(usus)을 가질 뿐이며, 하나님께서 지배권(dominium)을 갖기에 자살은 인간 존재와 하나님의 관계를 무효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교의에 따라 그 당시에는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해 기독교적으로 장례를 치루지 못하게 했다. 자살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4) 어거스틴: 자살은 영혼을 더럽히고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

앞에서 우리는 자살이 살인행위요 회개할 수 없는 죄라는 점을 고찰했다. 이런 관점 외에도 교부들에게서는 또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와 공동체와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는 대목이다.

락탄티우스(Lactantius)가 자살자를 살인자로 정죄했다면, 자살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어거스틴은 자살을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다시 ‘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겨 놓지 않았다. … 그는 비록 죄 때문에 자살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죽임으로써 또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물론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것은 신앙의 회개와 연관되는 특성이다. 그런 이유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것은 영원불변한 영혼을 끊임없이 돌봐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돌봄은 특히 이 땅에서 잘 수행돼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실로 영혼의 고결함의 유지와 아울러 그 책임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살은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점 외에도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더욱 특이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다음의 글을 통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항하는 죄라는 인식을 밝히고 있다.

‘자살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첫째, 만물은 자신을 사랑함이 당연하다. 그러기에 만물은 자신을 보존하고 적대적인 힘에 대항하려고 애씀이 당연하다. 자살은 자신의 자연적 경험성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자신을 마땅히 보호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부분은 그 자체로 한 전체의 부분이 된다. 한 사람은 그 자신으로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셋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선물이다. 이에 생명은 생과 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복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빼앗는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노예를 살해함으로써 그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은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일에 자신이 권한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도 같다. 생과 사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아퀴나스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은 바로 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구약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5) 소결론: ‘자살의 공동체성’ 유난히 강조한 교부들

아퀴나스는 생명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관련돼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개인의 사건이 아닌 공동체와 연관된 공동체의 사건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는 생명의 개인성보다는 공동체성을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헬라의 국가론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공동체성을 중요시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인이야 어쨌든 간에 그가 생명의 연대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것은 생명은 그리고 영혼은 혼자서 살아나가고 돌보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나가고 함께 돌보아야 한다는 존재라는 점이다.

교부들의 자살에 대한 관점은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한 치의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실로 엄격한 것이었다. 이런 엄격함에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귀중성, 공동체성의 연대성, 그리고 영혼의 돌봄에 대한 책임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아니 어쩌면 신앙에서 잃어버린 점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이것들을 잘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기독교인 자살의 목회적 해답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1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르네상스(Renaissance)는 일반적으로 중세에서 근세로 이르는 과도기라고 한다. 이 르네상스는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상징되지만, 본래는 재생이나 부활을 의미하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무엇의 부활이고 재생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대개는 자유로운 자연적 인간의 발전과 그리스·로마 시대 고전적 문화의 부흥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강력한 신 중심 권위로부터 속박된 인간성을 회복, 자연적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이 신의 권위에 의해 상실했던 자아(自我)를 각성하고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인본주의 또는 휴머니즘과 같은 뜻으로 부르는 이유다. 이 시기 자살에 대한 시각을 그 특징에 따라 다음의 세 가지 관점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자살하면 지옥간다”

르네상스는 실로 오랫동안 신 중심이라는 중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혀 있던 인간의 이성이 자유롭게 날개를 달고 학술, 문예, 미술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자아에 눈뜬 시기다. 신의 권위에 억압돼 발휘되지 못하던 인간성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 자연스러운 인간성으로 점차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문예나 미술 뿐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 천문학 등 여러 자연과학적 발견, 자연철학, 그리고 이성을 통한 학문의 발전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신 중심의 권위를 말끔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영국에서는 10세기 말 에드가 왕이 자살한 사람을 절도범이나 다른 범죄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했고,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나무막대기에 묶어 거리에 세웠다. 이는 르네상스가 아직도 중세 신학의 영향권과 그 분위기에 지배되고 있는 과도기적 특성 때문에 신 중심의 신학적 권위나 영향력이 그다지 감소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단테(Dante Alighienter)의 <신곡>에서 이것이 더 확고해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사상이다.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단테가 7일동안 하나님의 세계를 여행한 문학적 상상의 기록이다. 여행자 단테는 여행안내자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와 함께 지옥-연옥-천국으로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수백명의 신화상 혹은 역사상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관해 철학적, 윤리적 고찰을 할 뿐만 아니라 중세의 신학과 천문학적 세계관을 광범위하게 전하고 있다.

단테는 <신곡>을 쓰면서 자살한 사람을 지하 7층인 지옥의 7번째 원(圓)에 뒀다. 사탄이 지하 9층 밑에 있으니 사탄과 가까운 곳에 둬 자살을 정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테는 자살한 사람은 최후의 심판 후에도 부활할 수 없다고까지 역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inferno)’에서 상상했던 지옥의 끔찍한 모습들은 훗날 프랑스 미술가 구스타프 도래(Gustave Dore)의 일러스트레이션에 잘 나타나 있다. 온통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 도는 가운데 머리와 다리가 잘려나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 그곳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뚫고 자란 가시난 나뭇가지를 달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육신을 포기한 몸이므로, 최후의 심판 후에도 부활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단테의 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일 것이다.

2) ‘삶의 초탈’로서의 자살

중세는 비교적 자살을 엄격히 통제하는 분위기였다. 신체적인 특성을 주로 들었다. 인간은 단지 사용권(usus)을 가지며, 하나님은 지배권(dominium)을 갖기에 가능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자살을 교의로 성문화시키고, 자살자를 법적으로나 관습에서 신성모독으로 간주해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적 장례를 치를 수 없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엄격히 자살을 금지하고 방지하는 분위기에서 숨겨진 측면을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교의로 성문화하면서까지 자살을 금지하는 것은 그 시대 자살자가 상당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정죄되던 도나파의 경우, 기독교적 신앙을 맹신하게 만들어 순교적 유혹을 통한 자살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행동이 성화(聖化)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면서 개인의 삶을 혐오할 정도로 기독교적 맹신을 추종하게 만들었다. 이교도들의 자살 외에도 신자들의 자살도 일어났다. 물론 각종 교회 회의를 통하여 이교도의 자살과 신자들의 자살이 현격히 감소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자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당시 신자들의 자살은 주로 수도원에서 일어나곤 했다. 당시 불신앙인들이 야기한 분노에 따른 공포, 수많은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삶에의 혐오,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지상의 고통에 대한 구원을 찾기 위해 남성과 여성들이 수도원에 몰려들었다. 도나파 신도들이 기쁨과 환희로 죽음을 택한 것과는 달리, 수도원에서는 세상적 삶의 무료함에 대한 도피적 성격의 자살이 있었다.

우울, 은둔, 명상 위주의 생활, 금욕주의,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 지옥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자살을 유발시키는 요인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미덕을 실천해야 하기에 세상이 주는 기쁨, 오락 등의 모든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한 채 고요함 속에서만 살다 보니 우울증에 빠지거나 삶에 역겨움을 느껴 자살의 유혹을 더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승들의 자살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려는 병리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수도원이 오히려 잦은 자살의 현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자살은 개인 양심의 문제”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면 자살에 대한 틈이 약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12-13세기에는 자살이 마치 고대의 추억처럼 사회 각계 각층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이 시기에는 고대 문헌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고대 이교도들처럼 자살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소설과 시에는 영웅과 미인들의 영예나 사랑이 의도된 죽음으로 끝나는 일화들이 다수 수록돼 있다. 이 시기에는 자살에 대해 문학 영역에서 미화시키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니라 해도 상당히 영향력있는 인물들이 그런 입장을 취해서 이뤄진 측면이 없지 않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몽테뉴(Michel Eyguem de Montaigne)가 대표적이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에서 고통이나 치료될 수 없는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을 허용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이런 입장은 물론 작품의 특성이 풍자적이고 환상적인 경향 때문에 그 진위에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몽테뉴는 <수상록(Essias)>에서는 자살 사례와 자살을 칭송한 로마 작가들의 글을 인용한다. 그의 의도는 자살을 개인의 판단이나 양심의 문제로 생각하자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부분적이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자살이 사회에서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부분적으로 자살에 대한 정당성이 제기됐던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나친 ‘신앙’의 강조,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살을 돌아보면 우리 시대의 자살과 관련하여 신앙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생명과 삶의 역설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자칫하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도한 금욕이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 그리고 자기 희생의 순교까지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금욕은 수도원적인 음침함과 부적절한 금식, 고독 등을 낳고, 결국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너무 심한 절제로 정신이 혼란스러울 수 있고, 정신 기능이 약화돼 판단력과 행동력이 심각하게 약화된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은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지나치게 구분하는 흑백논리적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세상적인 것을 모두 부정적으로 볼 때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오락 등의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하게 돼 고독해지거나 고립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상태는 그대로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지나친 자기희생적 봉사나 순교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실제로 순교는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인식돼 있지만, 이는 종종 이단에서 오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는 이교도들이 순교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도나파의 경우 군중과 사제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이방인들이 믿는 신전을 더럽히고 그들의 축제를 무례하게 망치기도 했으며, 여행자들의 갈 길을 가로막고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순교할 것을 강요했다.

이런 특성들은 모두 흘러간 시대적 흐름이기에 오늘날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들을 차단해야 한다는 점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수도원 자살’에서 보듯 기독교 신앙이 세상적인 측면을 넘어 지나치게 영적인 측면을 강조해 진정한 행복, 영원한 영광은 이 세상의 삶 너머에 있다고 가르치면, 무의식적으로 자살로 유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는 역사적으로 보면 르네상스 시대와 중첩된다. 르네상스 시대는 16세기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중세적인 봉건제를 버리고 근세적인 중앙집권화가 진행됐고, 문예사조로는 르네상스에 해당돼 휴머니즘이 주창됐다.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이교적인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을 따르고, 인간적 가치의 앙양을 목표로 해 기독교와 모순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인문주의자들의 목표는 ‘크리스천 휴머니즘’의 확립이었다. 종교개혁은 사실상 이런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즘의 바탕에서 일어났다고 이해해야 한다.

1) 자살은 개인의 문제

종교개혁 시대는 인문주의 후기와 중첩되고 있다고 했다. 중세 신 중심의 신앙적인 압박에서 벗어나 인간성이 중요시되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중요하게 작용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 존엄성이 서서히 기치를 들기 시작한 시대다. 자살도 사회에서 허용하거나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자살을 개인적으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선 것은 전술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몽테뉴(Michel Eyguem de Montaigne)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자살을 고통이나 치료될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에게 허용하듯이 표현한 것이나, 몽테뉴가 <수상록(Essias)>에서 자살 사례와 자살을 칭송한 로마 작가들의 글을 인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몽테뉴는 특히 “삶은 타인들의 의지에 달려있으나 죽음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자살을 전체적인 것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이는 철학이나 학문, 그리고 신앙의 영역이 함께 다뤄지는 분위기에서 자살이 다르게 이해되는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다 스펜서는 <요정여왕>을 통해 플라톤적인 연애사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문주의, 거기에 청교도주의까지 섞어 그것들이 서로 모순됨에도 관능적인 회화미와 밝은 음악미를 구현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문예를 대표하는 것이 운문극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교극에서 출발한 영국 연극은 서서히 세속화의 길을 걷다가, 16세기 중반 사회적·사상적으로 진폭이 커진 엘리자베스 시대가 되자 국민들의 연극에 대한 정열이 폭발해 급속한 발전을 이룬다.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이성의 작용을 통해 인간의 욕망에 자유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을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을 다시 연극으로 표현하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지옥에 떨어지는 듯한’ 무서움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자살은 중대한 죄악

종교개혁은 기존 종교세력의 타락에 눈을 뜬 새로운 신앙적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비판의식에서 비롯됐다. 교황의 과세와 교직 임명에 대한 간섭은 백성들의 생활에 압박감을 줬다. 교황청의 행정도 부패했다. 여기에 수도원들이 소유한 많은 토지는 귀족들이나 농민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지방 교직의 착취로 경제적 불안 상태에 있는데다가 불같이 일어나는 독일 휴머니즘의 지성적 발전과 일반적 종교각성은 백성들에게 깊은 공포심과 구원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가 슬로건이 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신의 주권이 강조되고 신의 섭리와 삼위일체론이 중요시됐다. 마틴 루터가 외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죄로 물든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는 칭의론이나 칼빈의 예정론이 새롭게 부각됐다. 오직 절대적인 신의 주권만이 강조되던 이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는 길만이 중요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자살은 제6계명을 어기는 행위라는 사실에 기초할 수 밖에 없었다. 생명을 파괴시키는 자살행위는 중대한 죄악이었다. 타인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행위이든 자기 자신의 그것이든 하나님의 형상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행위로 봤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의 절대적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기에 자살은 하나님의 소유물(시 24:1)을 자의로 탈취하는 행동이라는 관점이었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신의 주권이 강조된 종교개혁 시기에는 자살이 엄격하게 금지됐다. 교회와 사법기관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자살 행위에 대항하는 싸움을 계속했다. 17세기 교회와 자살과의 싸움은 “자살하는 자는 품위 없는 평민”이라는 루이 14세의 선언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살한 사람의 손가락을 직접 모두 잘라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집을 파괴하고 집을 둘러싼 숲의 나무들도 모두 베어버리도록 명령했다. 자살한 귀족의 문장은 교회 대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깨진다. 자살한 사람이 부르주아이거나 대표자였다면 그의 사체를 목 매달아 걸어두고, 재산은 모두 몰수해 왕에게 바쳐진다. 자살 미수의 경우 그 사람은 지하 독방에 갇히거나 광장에서 곤장을 맞아야 했다.

3) 자살은 회개할 수 없는 죄

종교개혁이 믿음의 시기로 상징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 시대 자살이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는 중세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칼빈(Calvin)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보다 엄격하게 자살을 금지했다. 자살은 긍휼이 여김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회개도 불가능하다는 식이었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자살행위를 가차없이 비난하는 이유였다.

다만 자살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틴 루터(M. Luther)가 비교적 틈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는 “자살한 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루터가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성령훼방죄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해 더 많은 교인들을 자살로 유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시대 자살에 대한 분위기는 비단 독일어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신앙이 돈독한 청교도들이 그랬다. 당시 영국 개신교도들은 자살의 도덕성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17세기 후반까지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존 로크(John Locke)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타고난 개인의 자유를 줬지만 그 자유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자유를 주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아퀴나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런 분위기는 종교개혁자들이 자살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갖고 토론하거나 역설한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은 생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종교개혁에 나서느라 자살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생명 중시 차원에서 자살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런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가톨릭의 견해와 달리 부분적이기는 해도 하나님이 자살을 긍휼히 여기고 회개를 허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4) 자살의 예외적인 경우

종교개혁 시대에는 물론 교회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입장도 있었다. 16세기의 믿음과는 거리를 둔 철학이 부활했고, 과학과 문학이 재개하자 자기 변호를 하는 데까지 나간 몇몇 작가들이 자살을 정당화하고 교회에 저항하려는 태도를 표방했다. 자살을 옹호하려는 반응이 출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다. 로마법 연구, 고대 문화의 찬양, 모방 및 재현 욕구가 이런 반응을 양산했다. 이런 사실은 자살이 다시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추론하게 한다. 메디치 공작에 의해 독살된 필립 스트라치와 같은 당대 유명한 명사들도 자살을 선호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자살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일관성있게 거부됐으나, 루터나 퍼킨스 등은 자살이 구원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고 했다. 아메시우스(1576-1633)는 자살을 극히 심각한 죄로 규정한 후 정의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는 경우, 예컨대 국가기관이 형벌로서 자살을 명령하거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는 경우에는 자살이 정당화된다고 봤다. 이처럼 자살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의해 고통받는 경우로 간주됐다. 삼손의 행동은 이런 관점에서 정당화됐다. 또 해전을 벌일 때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배에 불을 질러 적함에 돌진하는 행위는 죽음이 직접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뤄진 삼손의 행동을 일반화된 모범으로 제시할 수 없으며, 적에게 상해를 입힌다는 목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완전히 신앙적으로만 채색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문주의의 발흥과 신앙의 중심이 어느 정도 혼재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개혁 사상가들에게는 신앙이 중요시됐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문주의, 즉 휴머니즘이 더 중요했다. 이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반대만이 아닌,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와 도시 사회의 등장, 일반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각성과 새로운 경건주의의 수용, 그리고 당시 유럽인들의 신앙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개인주의 사고와 내면적 진리의 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루터에게 믿음이란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나 지식, 확실성보다는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절대적 선(善)에 기쁨으로 굴복해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후에 루터는 신앙을 강조하고 칼빈은 <기독교강요> 등으로 신학이 체계화된 결과를 산출하게 됐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자살은 신의 절대 권위를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됐고, 용납될 수 없었다.

확실히 종교개혁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신에 대한 심오한 신비적 실체감을 깨우쳤다.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에게 그 절대적 존재를 믿게 만들었고, 암흑 속에서도 절대적 존재에 신뢰를 갖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을 일깨웠다. 그러나 근본적인 인간 존엄성의 문제는 신의 절대성에 가리워 버리지는 않았는지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생각해 할 일이다.

이런 종교개혁의 특징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자살은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기독교인이 신앙의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는 그대로 정신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우울증 상태로 이어진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의 자살이 우울증과 관련해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 자살의 역사적 이해-(5) 계몽주의 시대

계몽주의는 이성(理性)의 기능을 우선시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한 운동이다. 계몽주의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인간되게 만드는 위대한 특성이다. 이성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며, 그 기능에 따라 인격성숙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로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되게 만드는 뚜렷한 특성이다. 그런 이유로 이성의 특성은 더욱 합리주의를 발달시켜 신학에서도 신화나 신비주의를 미신적인 것으로 보기에 이른다.

이런 계몽주의의 이성은 이미 합리주의가 대두될 때 그 조짐이 싹트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계시에 대해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은 합리성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그에 합당한 사고를 할 때 참다운 인간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에는 자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을까? 우리는 이를 다음의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신을 파괴할 자유는 없다

계몽이란 잠든 이성을 깨워서 인간의 주체로 삼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은 자연히 인간의 성숙과 미성숙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칸트(Immanuel Kant)는 처음 이 계몽이란 용어에 대해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미성숙은 인간이 성숙해야 할 책임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성이 올바로 기능하지 못한 결과라는 생각이었다. 정신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성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미성숙한 존재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가진 이성을 깨우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자율과 성숙을 선물로 주기에 미성숙 상태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이성을 구사하려는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 즉 잠든 이성을 깨우려는 계몽주의의 시대적 경향은 철학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모두 17세기 영국의 홉스(Hobbes)와 흄(Hume)와 18세기 독일의 레싱(Lessing)과 칸트(Kant), 프랑스의 루소(Rousseau)와 볼테르(Voltaire) 같은 사상가들이다.

이런 계몽주의 시대에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일단 존 로크(John Locke)가 주장한 관점이 팽배했다. 로크는 신(神)이 개인에게 자유를 줬지만, 그 자유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견해는 자신을 보존할 책임과 하나님의 의무를 어길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입장들은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계몽주의에서도 상당 기간 동안 자살을 이해하는 시금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것이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기능이 부각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면서 점차 이런 분위기가 약화되고 있었다.

2) 자살은 자연법 위배 아니다

계몽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로크의 견해는 모두 일정한 기준과 특정한 관점에서 자살을 단죄하는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 대립적인 입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는 가운데 자살을 파악하려는 관점이다. 그것은 계몽주의가 자살을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그 선봉에 선다.

흄은 그의 미발표 저서인 <자살에 관하여(On Suicide)>에서 아퀴나스의 자연법에 의한 자살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계몽주의적인 접근에 힘을 실었다. 아퀴나스의 견해에 대해 흄은 “자살을 공격하기 위해 자연법을 논리에 어긋나게 자의적으로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기준이 모호하다.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그 법을 어기는 것이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질병이나 재난에 순응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바꿔놓는 것을 허용하듯, 어떤 경우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을 허용하고 어떤 경우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명백한 잘못”이라고 명확히 정의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

둘째, 일부 자살은 그 질서에 순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우리가 이성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라면, 일부 자살은 오히려 그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즉, 여러 여건을 고려해 자살하는 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된다면 자살하는 것이 곧 질서를 따르는 것이 된다.

셋째, 자살은 하나님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질서’가 단지 하나님이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동의할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매 순간 관여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동의하고 안 하고의 구분이 사실상 없어지게 된다. 이런 시각은 아퀴나스의 관점과 비교된다. 그에게 있어 자살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만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인간이 언제 죽을지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자신에 대한 의무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흄은 ‘자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질병과 노화, 불행 등은 인간의 삶을 충분히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럴 땐 사는 것이 때로 죽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의 자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흄은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이나 비난받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다섯째, 자살은 타인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것도 아니다. 흄은 자살이 타인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흄에 의하면 사회와 개인은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다. 그러나 타인에게 심각한 해나 고통을 주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면, 그런 상호관계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우리가 타인에게 실질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경우와 같이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자살은 단지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상에서 기술한 흄의 견해는 지금까지의 자살에 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견해는 자살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태도가 매우 혼란스럽고 미신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태도는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전제하는 공리주의적인 측면에 바탕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두는 사상이다. 이는 계몽주의가 인격 성숙을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돼 판단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경향에서 볼 수 있다.

3)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

계몽주의는 이제 자살을 이성의 기능 중심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는 자살을 이성이라는 기능을 활용해 자연법이 아닌 과학적으로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理性)이 눈을 뜨면서 학문을 수립하는 시기인 계몽주의 때에야 비로소 자살을 이성의 눈, 즉 과학의 눈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은 판단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에 이성의 기능 강화는 개인의 책임 중시로 이어지는 분위기에서 자살은 전체적인 측면보다 개인의 상황이나 여건이 고려되기 시작한다. 이때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보다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를 파악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신학에서 자살을 “악마와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개인적인 일로 보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란 개인 심리의 결과나 특정한 사회적 상황도 포함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자살을 개인적으로 파악한다는 말은 인간이 갖는 자율성에서 이해된다. 이성의 자율성은 계몽주의의 기본적 원리다. 자율성(autonomity)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법(法)이 된다는 것이다. 그 법은 물론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참된 존재로서 우리 안에 있다. 자율성을 처음 언급했던 칸트는 이를 말하고자 했다. 즉, 자율성은 법이 결여된 주관성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본질적 속성이기에 이러한 이성의 법으로부터 이탈하는 모든 것은 의지(意志)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율성은 타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더 잘 이해된다. 타율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바깥의 것, 낯선 권위에 의해 지배받고 조정된다. 인간은 욕망이나 충동, 그리고 쾌락 원리 등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이미 타율적이 된다. 이때의 타율성은 순수한 이성 법칙에 의해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두려움, 낯선 권위의 안전성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즉 이성의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는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시도다.

이런 점에서 타율성은 이성적 의지와는 다르게 간접적으로 쾌락 원리에 호소하는 것이 된다. 이성의 구조와 법칙을 부정하고 내적인 충동이나 외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런 타율성에는 어떤 정치, 종교, 교육적 권위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율적이 되기 위해 이런 타율 안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기 경험으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자율성은 비록 타율성 안에서라도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적 조화를 산출해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지 못하는 한 타율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에서 이성의 자율성으로 자살을 이해하면서, 비교적 자살에 대해서는 문(門)이 열리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돼 그 책임성이 부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면 계몽주의는 이성의 기능이 중심이었지만, 실상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해석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자살이 자연법에서만, 그리고 신학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던 것이 개인의 여건과 심리,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의 결과들까지 고려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살은 1763년에서야 처음으로 체계적인 이해가 시작됐고, 자살 행위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의미부여도 18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알려진다.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데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이다.

4) 자살에 대한 허용적 입장만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계몽주의가 전반적으로 자살에 대해 상당히 허용적인 입장을 취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칸트는 자살에 대해 가장 반대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 중 하나다. 칸트는 개인의 자율적인 이성적 의지에서 도덕적 가치가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개인의 이성적 의지는 도덕적 의무의 원천이기에 그 이성이 자신을 파괴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살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인간성을 실추시키는 행위요 도덕적 권위의 근원을 공격하는 모순이라고 파악했다. 이런 반대에도 자살은 계몽주의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일 뿐 아니라 점차로 허용되어지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계몽주의의 자살에 대한 관점은 그동안 자유롭지 못하던 자살 논의가 비교적 확대된 점이 특이하다. 그 발단은 이성의 기능이 새롭게 발견된 결과다. 인간의 정신이 중심이 되는 이성을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시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이성의 기능이 잘못되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건강하지 못하면 곧바로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져 자살을 유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계몽주의의 이성이 자율성과 함께 그 책임성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계몽주의는 개인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측면만 아니라, 이를 올바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오늘의 자살에서 개인의 이성적 기능과 더불어 그 책임성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 자살의 역사적 이해-(6) 낭만주의 시대

낭만주의(Romanticism)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사조다. 이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강한 인상을 특징지웠기에 한 시대로 구분하고 지나가려 한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지성과 규범 등을 절대시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종교 도덕 형식주의를 부정하고 인간 내면의 진실과 감정을 중시, 주로 연애, 자연, 동심의 세계를 다룬다. 낭만주의는 프랑스 혁명정신, 나폴레옹 전쟁, 괴테의 작품 등의 영향으로 합리주의보다 비합리적인 자유, 그리고 개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풍조가 조성됐다. 인간의 존엄성이 중요시됐지만 근간은 규제와 형식을 탈피하려는 정신에 따라 고정적인 법칙을 거부하고 자연이라는 내면적 본질에 따른 자유롭고 구속없는 자유와 영원한 창조력을 지니는 인간성을 중요시했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말이지만 시대적으로는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수정주의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

1) 자살은 죄악이 아니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얽매이는 것을 벗어나고자 했다. 인간이 가진 내면의 진실을 마음껏 드러내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에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 감상적인 욕망을 갖는 이상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성, 즉 객관성을 중요시했다면 낭만주의는 주관적 감정을 중요시했다. 주관적 감정이 중시되는 측면에서 자연히 인간 존재나 그 존엄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상상력이 활용되고 신학에서는 주관적 감정인 ‘절대의존 감정’이 특징으로 정리된다.

이런 낭만주의에서는 자살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유롭게 허용되는 분위기가 흘렀다. 자살은 죄악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능히 일어날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살에 대해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 일어나게 됐다.

그 첫 시도는 존 던(John Donne)의 <자살론(Biathanatos)>에서 이뤄진다. 그는 자살을 반드시 죄악으로 단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입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전과 근대의 여러 법적 자료와 신학적 자료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성경이 자살에 대해 명확히 비난하지 않았고, 기독교 교의는 순교나 사형, 그리고 전쟁 중 죽음 같은 다양한 죽음이나 죽임을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핵심적인 주장은 자살에 대해 정당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노력으로 자살이 반드시 신의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자살이 자기 보존을 명하는 자연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도 자연법을 거스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사회적 관습이나 교회, 성경에 비춰 율법 및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윤리학적 관점에 바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자살이 인간 존엄성의 발현인가?

낭만주의는 기독교에도 영향을 줬다. 특히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시라는 패러다임에 변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인간 이성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 ·통치하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는 ‘신의 주권성’ 인식이 있었다. 그 효과로 인간이 자기 생명에 충실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었고, 그러므로 모든 자살은 ‘신성모독’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살을 돕는 자들도 죽음을 선고받을 정도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됐다. 이때 자살을 생각했던 기독교인들은 다른 완곡한 방법을 생각하기도 했다. 신앙의 금기, 지옥에 대한 공포, 새로운 철학의 경향들이 어우러져 자기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자신을 파괴하는 완곡한 방법을 종종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몸에 자기가 손대지 않으면서 간접적으로 믿음에 의지하며 고요하게 자기 목표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들어서면서 자살이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됐고, 때로는 미화됐다. 이는 낭만주의가 인간 영혼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것들, 즉 논리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험의 영역이 중요시된 결과였다. 낭만주의는 오로지 직접적·감정적으로 자유로운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고, 인간의 감정은 주관적 감정이며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사상과 교리에 얽매인 인간 존재는 이제 그 형식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맞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정열적이며 까다로운 천성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자유롭게 파괴하는 낭만적 영웅을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문학에서도 그 중심적 역할을 하던 빅토르 위고가 ‘낭만주의란 문학에서의 자유주의’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중시됐다. 그러다 보니 낭만주의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살까지도 미화될 뿐 아니라 특히 광적인 사랑이 전쟁 후유증, 혁명사상 등과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 자살, 폭력, 살인 등의 비합리적인 감정 표현이 핵심주제가 되는는 특징이 생겼다.

자유를 추구하는 낭만주의 시대에서도 괴테는 그 선봉에 선다. 18세기 말 독일에서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써낸 것은 이 흐름에 불을 당겼다. 괴테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상당 부분을 가져온 이 소설에서 젊은 베르테르는 다른 남자와 곧 결혼하게 될 로테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베르테르 열기’라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무명 작가였던 괴테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베르테르의 열기는 곧 당시 사람들이 소설 속 베르테르의 죽음을 모방해 자살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높던 교황과 황제의 권력과 권위도 이미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던 18세기 사람들은 이미 자살을 죄악이라고만 생각하던 시대를 한참 지나 있었다. 괴테의 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낭만주의 영향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나는 자살은 더 이상 추한 모습이 아니었다.

3) 자살은 고통의 해결책?

자유로운 낭만주의는 자살까지도 자유로운 행동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상황이나 환경은 자살이 그 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명분이 뚜렷한 자살, 사랑의 고뇌에 몸부림치는 가운데 일어난 자살은 미화됐다. 물론 자살의 낭만주의적 관점은 주로 문학가들에 의해 시도된 측면이 강하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그리고 플로베르(Gustare Flaubert) 등은 작품 속에서 자살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이 시대 자살은 베르테르, 맨프레드, 르네와 같은 주인공들에 의해 특징지어졌고, 이들의 자살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사랑하는 연인에 의해 버림받거나 사회에서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영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이 고통의 해결책이라는 사상은 낭만주의 배경에서 더 이해되고 있다. 낭만주의는 고전적이고 형식에 매이는 틀을 탈피하려는 자유로운 개인의 인격 존중이 중심이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들은 지나친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인간 정신의 창조적 상상력과 직관적 분별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학에서도 덮어놓고 절대 초월자로서의 신을 떠올리기보다는 주관적 신앙 경험으로 발견된 신이 더 중요시됐다.

신앙이란 교리적 명제 속에 갇혀있을 수 없으며, 신적 존재에 대한 감정적 이해와 내적 헌신을 수반한다. 인간의 사유와 이성은 그들 고유의 영역과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절대자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앙적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은 일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절대자에게 향하는 직관적 감정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기독교 교리와 신비적 요소는 세속적 방법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초월적인 절대자가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저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관점에서 지옥과 천국, 부활과 구원 같은 오래된 주제들을 재해석했다.

물론 낭만주의 이전이라고 자살을 항상 나쁘게 본 것만은 아니었다. 기원 전부터 트로이 영웅 아이아스(Ajax)의 자살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과감한 결단으로 보여졌고, 로마 제국의 탄생을 이끈 루크레티아(Lucretia)의 자살은 여성의 정조를 지키려 했던 상징으로 중세가 끝나가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중점적으로 두고두고 칭송됐다. 이렇듯 서구에서는 카톨릭의 힘이 강력했던 중세만 제외하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살을 포장되거나 이해해 왔다.

4) “자살은 죄!” 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일단 자살할 마음 먹으면…

우리는 이런 낭만주의의 자살에 대해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낭만주의도 모든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유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가 시대의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극도로 민감한 몽상가로만 비춰지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다. 새로운 시대의 사고 방식을 표현하는 진정한 낭만파는 시대의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는 천재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살자의 심리를 이해하고 예방하려는 관점에서 이런 낭만주의 경향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은 19세기 전반 이후 계속되지 못했으나, 무엇보다도 이성적 질서와 균형잡힌 형식미를 존중했고, 정적(靜的)이며 조각적이었던 고전주의에 반대한 결과로 일어났다. 여기에 정열적 자아의 해방, 국민적·지방적 전통에의 복귀, 자연에 대한 사랑, 명상적 신비주의, 미적 회고취미(懷古趣味), 이국정서 등을 통해 상상력의 폭을 넓혔다. 서정시에 음악성을 회복시키면서 현실에의 관심을 자각시켜 상징주의와 사실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이런 낭만주의 경향은 자살자들의 심리를 잘 드러낸다. 우리가 아무리 “자살은 돌이킬 수 없는 죄요,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떠들어댄다 해도 그들은 압박하는 현실의 굴레를 자유롭게 벗어나고 싶고,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자살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합리화하는 자살자들

자살자들의 자유로운 감정이나 의도를 고려해 우리는 신앙 만능만을 강조해서 자살을 막으려는 단순한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논리와 이성의 우위성을 강조해 설득하려 해도 이미 부정적 감정으로 압도된 상태에서는 별다른 효력이 발휘되지 않을 수 있다. 자살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는 설득되지 않으려는 더 강력한 부정의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과 이성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설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심리적 반발이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상태는 아마도 그들을 새로운 신앙의 신비주의로 합리화시키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삶이 너무나 힘들어 “나는 하나님 곁으로 가노라!”고 유서로 남기는 형태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확실히 낭만주의 입장에서는 자살을 허용하고 합리화시키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낭만주의 입장이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런 입장에서는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오로지 개인의 이익과 행복으로 두게 되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낭만주의의 입장이 일면 치우친 측면이 있지만 자살자의 상황이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점을 환기시킨 점에서는 평가받을 수 있다. 자살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형태의 자살을 하든 간에 심각한 심리적 고통, 즉 거의 병리적 상태에서 자살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그 책임을 묻는다 해도 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 자살의 역사적 이해-(7) 19-20세기

자살예방을 위해 역사적 고찰을 실시하는 와중에도 두 유명 연예인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故 장자연 씨의 유서 공개로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지만, 결코 이것이 자살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경기침체로 인한 실직의 공포는 다가온 봄과 함께 20-30대 자살율 증가의 우려를 낳고 있다. ‘자살의 역사적 이해’ 7번째 마지막 편은 모더니즘 이후의 자살에 대한 다양한 사상을 고찰해 본다.

19-20세기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된다. 이 시대는 일관되게 사회 상황에 영향을 끼치던 이전의 사상과는 달리 다양한 사상이 복합적·혼합적으로 지배했다. 이 시대는 존재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가 등장하고, ‘있는 그대로’를 중요시하는 사실주의, 복합성을 표현하는 양식의 상징주의, 그리고 모더니즘 등이 다양하게 작용했다. 이런 시대적 다양성은 자살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는 양상을 도출하게 했다. 자살 논의는 이미 계몽주의 때부터 어느 정도 문이 열리면서 낭만주의에 이르러는 반드시 죄가 아니라는 관점으로까지 논의되다 이제는 자살의 이유와 동기에 대해 상당히 다양한 관점이 제기된다. 이런 자살은 시대적 사상과 관련,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쇼펜하우어: 맹목적인 삶을 의지로 이겨내야
자살은 맹목적 의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이고 굴복일 뿐

삶의 허탈은 자살을 유발할 수 있다. 삶의 허탈은 인간이 갑자기 힘을 잃는 심리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실존의 확신을 상실하게 돼 삶을 포기할 정도에 이른다. 이때 자살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이미 문학의 낭만주의에서 시작, 실패한 사랑을 자살로 종결하는 것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살은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생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허탈한 것으로 보는 염세주의적 관점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주의에 기초한 측면이 있다.

사실주의는 일부러 미적(美的)이고 조화된 것을 찾기보다 추악하고 불쾌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관념적인 유형보다 구체적인 개성을 중시하고, 이상주의처럼 선택적·수식적이 아닌 사실적·객관적인 묘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때로 사실주의는 일면 낭만주의 시대와 중첩되지만, 낭만주의의 시대적 조건과 달리 사회적 현실의 문제가 사람들의 보편적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자본의 지배가 좀더 철저하고 현저하게 된 현실에서 사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인식이 싹트게 됐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삶의 의지력이 결핍된 현상에 주목했다. 인간의 삶은 허탈한 의지로 인해 끊임없는 욕구가 이어지면서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런 사상은 여러 젊은이들을 자살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은 상당히 오해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는 자살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맹목적인 삶을 의지로 이겨야 된다고 설파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욕구나 무의지가 부정되고 항상 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의지를 세워 맹목성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과제라는 ‘의지의 초상’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해탈과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쇼펜하우어는 자살자가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살은 맹목적 의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굴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2) 까뮈: 삶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라
자살은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포용하는 책임을 포기하는 것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은 자살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자살은 생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자살은 부조리한 인간의 삶에 직면해 인간의 의지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살은 무의미한 삶에서 자신을 의미의 근원으로 깨달으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실존철학자들이 사르트르와 동일한 입장은 아니다. 이는 실존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존재 양식에서 항상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며, 인간은 이 가능성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과 다른 사물 및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기에 실존은 항상 세계 내의 존재로서 가능성이 중요시된다. 이때 인간을 절대적이거나 무한한 실체의 현현(顯現)으로 보는 견해와 대립하며 의식·정신·이성·이데아 등을 강조하는 관념론 등의 형태에 반대한다. 이런 점에서 실존(existence)은 존재(being)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이 초월성이 실존의 기초로써 유신론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인간 실존은 절대적 자유로서 자신을 투여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실존주의는 급진적 무신론의 형태를 띨 수도 있으며 인간 실존의 유한성, 즉 투여와 선택의 가능성에 내재한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휴머니즘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런 점은 실존주의가 역설적으로 삶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실존 철학자들에게 삶은 언제나 중요한 근간이었다.

실존주의는 겉으로 삶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했지만 실제로는 그 부조리와 모순에 대항해 살 것을 권유한다. 여기에 까뮈(Albert Camus)를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다룬다.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진 코카서스 바위를 다시 굴려 산 위에 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삶의 부조리로 설명한다. 그래도 그 부조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울 것을 강조했다. 이는 자살의 유혹에 저항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까뮈는 자살이 삶의 부조리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자유를 가져다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자살은 삶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포용하는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정신의학자들: 자살은 특정한 질병과 관련
카톨릭은 20세기 들어 자살자 장례 허용

정신의학자들은 자살이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같은 질병과 관련됨을 인식하고 치료를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자살에 대한 다양한 학술적 이론은 19세기 이후 많이 나오고 있다. 19세기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들의 이론은 자살자들을 심신상실자로 보는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실제로 우울증은 여러 정신질병 중에서 자살률을 가장 높게 점유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95% 이상이 당시에 심리 및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드러났지만 그 중에서도 우울증이 80%를 점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울증(depression)은 의기상실한 기분과 정신운동 저하의 정신적 증후군이다. 우울증은 울증 또는 울병이라고도 하며 대개 심리적으로는 ‘희망 없음’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이나 체중 감소를 수반한다. 우울 상태는 프로이트(S. Freud)에 따르면 개인의 분노가 내면으로 향한 형태이며, 칼 융(C.G. Jung)에 의하면 정신에너지의 고갈을 의미한다. 이때 융의 정의는 우울증 이해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융은 우울증이 의식에서 이용할 만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했다.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고,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세계가 큰 세력을 가지고 의식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자살자가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 자살관념 등은 자아의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자아가 집착해 온 사회적 평가, 객관적 기준, 사회 규범의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다.

자살과 정신질병의 원인론적 분위기는 교회에도 반영되어 카톨릭에서는 1917년 제정된 종교법에서 자살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의사의 증명서를 통해 정신착란이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죽음이 일어났다는 것만 증명하면 모든 종교적인 장례식이 허용됐다. 이는 자살한 사람도 교회의 심판없이 자유롭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종교법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자살한 사람들에게는 교회장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자살은 더 이상 교회에서 범죄가 아닌 일종의 정신병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뒤르켐: 자살은 현대화 과정서 나타나는 사회적 질병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사회의 병리적 현상 중 하나

사회학적인 관점은 자살을 사회현상의 하나로 간주된다. 사회학자들의 자살 연구는 사회적 상황과도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개인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인이라는 데 초점을 둔다. 자살 요인들 가운데 사회학자들의 관심은 단지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되는 점이 일차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요인에 대해 에밀 뒤르켐(E. Durkheim)은 그 선두에 선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가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소외나 혼돈 상태의 아노미 현상 등 사회적 질병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뒤르켐이 자살을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뒤르켐의 자살이론은 두 개의 사회적 차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통합(integar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조정(regulation)이다. 이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자살의 요인은 단지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감지되는 자살자의 행위와 관련되는 점이 일차적이다. 여기에 사회적 측면에서자살의 특성에 따라 유형화를 시도하는데,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죽는 이기적 자살, 타인을 위해서 죽는 이타적 자살, 사회가 무질서 하게 되어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아노미성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운명론적 자살 등으로 구분한다.

사회학적 관점의 자살에서 보면 최근에 일어나는 기독교인의 자살은 운명론적 자살에 가까운 것이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이 상황에서 신앙은 상당히 무력화된 상태임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운명론적 자살은 힘들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도저히 견뎌내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5) 자살은 죄가 아니라 ‘불행한 사건’
자살자 장례문제 논쟁 종식돼야 할 때

‘자살=죄’는 명제는 오래도록 기독교의 보루 역할을 해 왔다. 이제 이런 정죄의 소극적인 방법이 수정돼야 할 때가 됐다. 이런 신앙적 명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유일한 방어벽의 실효성이 약화되었거나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사전에 교육하고 예방하는데 더 노력하는 등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리고 자살자 장례에 대해 개선을 지향할 때도 됐다. 실제로 카톨릭은 이미 전향된 자세를 보인지 오래다. 1965년 바티칸 제2공의회의 전 내용이 출판된 이후, 교회 권위자들은 더 이상 의학적인 다른 자료들 없이도 자살한 사람이 누구든 종교적인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했다. 1983년 교회법은 자살이 ‘교회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절망에 빠진 사람의 표지’라고 파리 주교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더 이상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식 표명된 것이다. 이전에는 자살이 ‘죄’로 규정되었지만, 오늘날은 ‘불행’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로마의 성베드로성당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얀 팔라크의 자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증언으로도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결한 개인의 희생의 의미와 이웃사랑의 가치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언은 납득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살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실로 자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 아니라, 그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자살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름을 들면 익히 알 만한 많은 유명인들의 자살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런 사실은 지면관계상 일일이 들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지만 자살을 극복하자는 취지에도 위배되는 것이어서 생략해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중세 때 신앙의 이유로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살했다는 사실은 많이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아팠다. 더욱 세상과 단절하고 신앙에 정진하고자 했던 순수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존엄사까지 논의되는 시대…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 선행돼야

그럼에도 자살의 역사적 고찰은 단편적·편협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자살을 이해하는 관점이 고작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식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고,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포용적이면서도 예방적이어야 한다는 과제를 던졌다고 본다. 그렇다고 자살한 사람을 허용하고 넘어가자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적어도 자살한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정죄하려는 의도는 지양돼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책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살은 건강한 정신상태에서가 아니라 병리적 상태에서 시도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이 자살자의 장례를 거행하는 것처럼 개신교도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그 결과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런 시각은 물론 자살이 생명의 관점을 기초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도 있고, 독재에 항거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으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버리는 일이 된다. 이를 두고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전에 따라 안락사(euthanasia or physician assisted suicide)와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의 경우 존엄하게 죽을 권리 등이 문제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생명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이해와 더불어 자살은 더욱 다각도로 연구돼야 할 것이다.

 


21. 자살의 유형-(7) 자기 희생적 자살

자기를 희생하는 자살이 있다.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을 구하는 자살이 그것이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도저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는 상태로 결론내리고 자기의 소중한 목숨을 던져 상대방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의도를 갖는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여론을 만들어 힘을 가진 단체, 또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요구를 이끌어낸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자신을 희생하는 죽음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희생적 자살은 일단 두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먼저는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상대방, 즉 적(敵)으로 생각되는 대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어야 한다. 생활이 다양해지는 현대에 이르러 목숨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자기 생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곧잘 일어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런 자기 희생적 자살에는 다음 유형이 있다.

1) 애국적 자살

애국적 자살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는 행위다. 자신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기꺼이 바치는 숭고한 죽음이기도 하다. 1942년 촬영된 나치의 초대작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주인공이 “나는 조국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자살한다. 이것은 괴벨스가 독일 제국의 위대함을 선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지만, 애국적인 죽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애국적 자살은 너무나 그 명분이 분명해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교과서나 이런저런 보도로 상당히 알고 있다. 물론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모두 애국적 자살로 분류할 수는 없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로 한정해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기 목숨을 던진 대표적인 예로는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를 들 수 있다<①기사 하단 윤봉길·안중근 참조>.

2) 이타적 자살

이타적 자살은 자기 목숨을 던져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이 포함된다. 고(故) 강재구 소령(1937-1965)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6기생으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됐고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에 전속된 뒤 대위로 진급했다.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이 되었다. 출발하기 전 10월 4일 홍천(洪川)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훈련 중 부하 사병이 실수해 수류탄이 중대원이 있는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산화했다. 수류탄이 터지면 모두 죽는 상황에서 자신이 그 수류탄을 껴안고 죽음으로써 여러 부하들의 생명을 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죽음이 자살이냐 자기 희생이냐의 문제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 판단에 의해 구별된다. 그 행위가 사회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행위를 인정할 경우 그러한 자기 파괴를 자살과 동일시하지 않고 승화시켜 ‘자기 희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자기 희생적인 자살이라 해도 그 근본은 다르지 않다. 다만 그 행위에 미치는 감정적·정열적·이성적 성격이 다를 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가치 체계를 결부시켜야 하지만 여기서는 ‘희생적 자살’이라는 특별한 ‘자기 죽음’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

이타적 자살이란 형태도 다양하고 상황도 가지각색이다. 죽은 사례 하나 하나가 특별하고 명확한 목적을 갖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격적 측면에서 일단 자신의 죽음을 통한 상황의 반전이나 반향을 중요시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거나 상황이 변화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결과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보다 나은 상태’를 안겨주려는 목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려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일종의 헌신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타적 자살은 때로 자살자가 기대하는 것과 이후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는 해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특별한 헌신의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과연 이타적인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유서의 서두에서 “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받을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한 점에서 자신 하나만으로 이 모든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던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단순한 기준에서 보면 ‘대통령이 왜 자살하냐?’고 반문하면서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 생각에는 적어도 구차한 삶을 영위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기보다 자신 하나 희생함으로 사건이 종결되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녹아있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그 분의 깊은 심정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해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다는 것 쯤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살아있는 권력의 압박으로 전에 그가 쌓아놓은 업적까지도 부정부패로 퇴색되고 단죄되는 상황에서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버텨내기 힘들다고 판단된다. 이런 점이 후속책으로 검찰의 지나친 사정의 칼날을 문제삼고, 더 나아가 현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물론 우리는 그의 죽음을 미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지는 말아야 하지만, 그의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만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이미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 특히 권력이 무엇인지 정치적인 측면을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극단적 선택의 이면에는 그런 심정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보려는 것이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모로 갈등하고 있기에 후속 조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어떤 면으로든 정리돼 더 이상 불행한 사건으로 많은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온 국민이 바라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3) 단식투쟁적 자살

단식투쟁적 자살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단식하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위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문제를 두고 단식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다 죽는 것이다. 이는 성격상 사회적 문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제에도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현대에 와서는 강력한 위협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는 편이다.

단식투쟁적 자살은 상황 반전을 위해 가장 강력한 무기로 활용된다. 정치 권력과 결부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때로 이런 투쟁은 처음에는 죽으려 하지 않았으나 점차 상황의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죽음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를테면 아일랜드 공화국 군대는 항상 단식투쟁을 무기로 삼았다. 수많은 지도자들은 내전 중 투옥되면 단식투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죽어갔다. 그 중 프랑시스 휴즈, 보비 상드, 프라이즈 자매 등이 유명하다.

어떤 경우든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비극적인 방법으로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고 죽겠다고 위협해 자신들의 이념을 알리는 것, 그리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고위 성직자들의 ‘단식 투쟁에 의한 자살’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프랑스의 유력한 성직자들 대부분과 웨스트민스터사원 대주교는 “죽음에 이르는 단식투쟁은 폭력이다. 이것을 신의 의지에 부합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교황청 내 일부에서는 단식투쟁에 대해 얼마간의 종교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단식투쟁은 자기 희생적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단식에 의한 자살과 희생은 엄격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희생은 ‘신에게 경의’, ‘영혼의 구제’, ‘동포에 대한 봉사’ 같은 대의를 위해 누군가 목숨을 버리거나 그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단식 투쟁이 정당화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 최후의 유일한 수단일 것, 성공 가능성이 있을 것 등이다. 단식투쟁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야지, 자기를 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때로 단식투쟁이 본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단식하는 경우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단식이라는 위협적 수단을 가하고 그 일을 처리하려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실제로 죽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죽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투쟁을 진행하다 신체적인 이상으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자살은 순수성에 있어 이미 문제가 있다. 대개 정치적인 이슈를 걸고 단식투쟁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기에 단식투쟁은 단순히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상황을 전환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자신의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리려는 각오로 하는 단식투쟁은 최고의 이타주의요, 자기 희생적 자살로 간주할 수 있다.

4) 민주주의와 복지를 위한 자살

복지를 위한 자살은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죽음으로 항변하는 행위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려움이 많았던 개발도상국 시절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다. 대개 열사로 불리는 이한열, 박종철, 김주열, 전태일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분신·투신·할복·의문사 등 여러 형태로 목숨을 던졌다.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간곡한 염원은 한결같이 평등한 세상, 통일된 세상, 인권이 존중받는 민주주의가 꽃피우는 세상이었다. 아무리 힘들게 태어났어도 정의가 살아 약동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이들은 대개 군사독재 시절 폭압정치, 공안 탄압에 희생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소박한 서민들의 기본 생존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어린 삶의 개선을 외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추가된다<② 전태일 참조>.

5)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자살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성격의 자살이 있다.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 신에게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일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건을 종결하려는 마음으로 자살하는 경우다. 이런 자살은 자신의 한 목숨을 바쳐 여러 사람들을 구하려는 목적의 자기 희생적인 자살이다.

기원전 4세기 로마의 광장 앞에 커다란 틈새가 생겼다. 마을에서 가장 활력이 되고 있는 것을 꽂지 않으면 닫히지 않는다는 신의 계시가 내렸다. 당시는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인이 마을에서 가장 활력이 되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마르쿠스 쿠르티우스라는 젊은 귀족이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갈라진 틈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광장에 모여있던 로마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갈라진 틈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자 틈새가 닫혔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 있다. 집정관 데시우스 뮤즈의 최후가 그것이다. 역시 기원전 4세기, 뮤즈는 파르테스군과 대결하는 로마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녀(巫女)가 자기는 신에게 산 제물을 바치라는 계시를 받았다면서 지휘관이 목숨을 바치는 쪽의 군대가 이길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데시우스 뮤즈는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가 자신이 군대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살했다. 뒤에 그의 두 아들도 신의 계시를 받아 한 명은 갈리아로부터 승리를 얻기 위해, 또 한 명은 에피로스의 왕 피루스를 무찌르기 위해 자살했다.

물론 이런 자살은 그다지 효험이 없는 추상적 죽음일 수 있다. 잘못된 계시를 받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일 수 있고, 자기 자신이 팽창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됐을 수도 있다. 프랑스 잔다르크의 경우가 이런 점에서 논의된다<③ 잔다르크 참조>.

6) 자기 희생적 자살은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자기 희생적 자살은 여러 면에서 양면적이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살인가, 진정한 자기 희생적인 죽음인가 등의 질문을 갖게 만든다. 원래 희생적인 것이 아닌데 도중에 잘못해 죽음에 이른 것인지도 의문일 수 있다. 희생을 빙자하여 죽은 것인지, 여러 사람을 위해 죽기로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인지도 분명치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기 희생적 자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기준이나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신의 성적을 비관해 자살하면서도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 미화할 수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힘든 세상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죽을 힘을 다해 살려는 의지를 상실한 채 명분있게 마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위해 진정으로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음은 물론, 머리숙여 고요히 손을 모아야 한다. 남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치는 고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① 애국적 자살의 예: 윤봉길과 안중근

윤봉길 의사(1908-1932)는 3·1 운동을 계기로 애국 운동을 벌이다 탄압을 받자 1930년 상하이로 가서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 가입했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天長節)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죽이고 기타 요인에게 부상을 입힌 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오사카에서 순국했다.

윤봉길 의사는 농민계몽에 앞장선 사람이기도 했다.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 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고, 이곳에서 한글·역사·산술·과학·농사 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상하이 의거를 접하게 됐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등 사태가 급격히 진전되자, 김구는 급속도로 침체에 빠진 항일 투쟁의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는 한편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한·중 양국의 민족감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 폭파계획을 진행시켰는데 이때 윤봉길 등 6명이 하역인부로 투입됐다. 그러나 상하이 병공창(上海 兵工廠) 주임 김홍일(金弘壹)이 맡은 시한폭탄 제조가 지연됐고, 거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전(停戰)이 되는 바람에 좌절됐다.

이후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탐지하고 폭탄투척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에 선발된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 선서를 했다. 이후 29일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으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는 거사 직후 체포돼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됐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탔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할 때 총을 잘 쏘아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심지어는 자신의 석탄 상점을 팔아 1906년 남포에 삼포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이듬해 일본이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하자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1907년 이범윤 등과 함께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참모 중장을 맡아 일본군과 맞써 싸웠다.

1909년 러시아로 간 안중근은 김기룡 등 12명과 함께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다. 이때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없애기로 손가락을 잘라 피로 맹세했고, 3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으로 국민들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히로부미를 없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단지회 회원들과 암살 계획을 세운다. 히로부미가 도착하기로 한 10월 26일 안중근은 일본인 기자로 변장하고 하얼빈역에 숨어 들어갔다.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환영객들을 향해 나가는 순간, 안중근은 3발의 권총을 쐈다. 2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왼쪽 가슴에, 1발은 심장에 명중시켰다.

이어 안중근은 태극기를 꺼내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그는 경찰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며 31세임을 밝히고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독립주권을 빼앗아간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를 해치는 자이다. 그러므로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이지, 내 개인의 생각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의연히 밝혔다. 여섯차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일반 살인범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 포로로 대할 것을 주장했다. 재판정에서 꿋꿋한 자세로 당당하고 논리있게 답변하는 안중근을 보고 일본인 재판관과 검사들도 감탄했다.

죽음을 며칠 앞두고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로 옮기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리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고 유언했다. 모진 고문과 여러 차례의 재판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던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② 민주주의와 복지: 전태일

대구 출신의 전태일(1948-1970)은 1970년 11월 13일 서울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 노동자다.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했다.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철저히 조사, 개선 방안을 노동청(지금의 노동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해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곧바로 설문지를 돌렸으며,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 선처를 약속받는다. 그러나 시정을 약속한 기한인 11월 7일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 13일을 시위날로 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피켓 시위를 벌이기 직전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자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그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 피복노동조합이 결성, 인간적인 처우를 희망하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오늘날까지 노동 문화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③ 신에게 제물: 잔 다르크

유럽의 가장 처절했던 100년 전쟁, 프랑스는 영토의 반을 잃고 트로아 조약으로 왕권마저 강탈당한다. 샤를 7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대관식을 거행하려 하나, 렝스로 가는 길마저 영국군에게 점령당한다. 한 줄기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 프랑스를 구원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적 뿐이었다. 이때 로렌의 작은 마을에서 프랑스의 빛, 신의 선물이라는 잔 다르크가 자라고 있었으니, 그녀는 13세의 소녀로서 매일 기도하며 신과 여러가지 방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군에게 자기 대신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죽어간 언니의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성당에서 영국군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뒤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선혈(포도주)을 마신다.

몇년 후, 샤를 7세는 국민들 사이에 신의 메신저라 불리며 새로운 희망이 된 잔에게 군대를 주면 조국을 되찾겠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러나 샤를 7세와 측근들은 어린 잔을 믿을 수 없어 측근에게 왕 행세를 하도록 명령한다. 잔은 성에 도착해 그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샤를 7세에게서 군대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첫번째 전투는 오를레앙으로 가는 문을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나를 사랑하는 군사들이여, 이 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승리한다!” 깃발을 들고 적진을 향하는 잔을 보고 지쳐있던 프랑스군은 사기가 최고조에 올라 대승리를 얻어낸다.

그러나 잔은 전쟁터에 널려진 시체들에서 피흘리는 신의 모습을 보고 괴로워 한다. 그리고 다음 전장에서 혼자 앞으로 나아가 적에게 이야기한다. “헨리 왕에게 전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이 들판에 묻히고 싶지 않다면 물러가라.” 그리고 기적적으로 영국군은 철수하고 오를레앙을 탈환한다. 샤를 7세는 렝스 대성당 대관식을 올리고 다시 프랑스는 왕권을 되찾지만, 아직 영군군에게 점령당한 많은 땅에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은 처절한 편지를 잔에게 보내고 있었다. 잔은 그들을 구해야했지만,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진 샤를 7세에게는 점차 귀찮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19세의 나이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명을 쓰고 1431년 5월 30일 화형당했다.


22. 자살의 유형-(8) 영웅적 자살

영웅형 자살(heroic suicide)이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고귀하고 용맹한 것으로 찬양하는 자살이다. 반드시 죽어야 될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지 말아야 될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해 죽은 것이라 인정하는 죽음이다.

영웅적 자살은 대개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한 사건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이준 열사나 안중근 의사의 죽음, 그리고 부하를 살리기 위해 몸으로 수류탄을 막은 고 강재구 소령이나 인구 밀집지역에 떨어지지 않도록 비행기와 운명을 같이한 조종사의 죽음 등이다. 이는 대개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한 것에 해당한다. 현상적으로는 자살이지만, 실제로는 다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영웅적인 행위다. 이런 자살은 성격상 군인들에게 많으며,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명예로운 자살

명예로운 자살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이다. 사사로이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명예적 자살은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해 붙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자살 당사자는 명예롭게 죽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해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반면 자신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치욕이나 불명예적인 사건에 대해 죽음으로 타인의 중상모략을 종결하고자 해도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치욕과 불명예라는 자신의 실수 때문이든 타인의 중상모략 때문이든 이런 것들에서 자신을 지키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 침공을 계획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로부터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 지방을 연결하는 협로를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와 3백명의 스파르타 시민이 그런 경우다. 테르모프라이에 도착한 레오니다스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협로를 대충 감시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크세르크세스는 밤에 그곳을 빼앗아버렸다.

과오를 범해놓고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레오니다스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를 따라온 동맹국 보초병을 돌려보내고 남겠다는 스파르타 병사만을 자기 옆에 남겨두고 “오늘 밤 우리들은 저승의 신 플루토 옆에서 저녁을 먹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날 밤 그들은 일제히 크세르크세스의 진영으로 돌격, 그들이 원하던 대로 모두 죽임당했다. 이 영웅적인 희생을 기념하여 “여기를 지나가는 분이여! 스파르타로 가서 우리들은 법에 따라 여기서 죽었다고 전해 주구려”라고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협로를 공격하려던 것이 들통나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을 다수를 위해 희생을 감행한 영웅적인 죽음으로 평가하고 기렸던 것이다.

명예로운 자살은 자살의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느끼고 감탄하며 명예를 부여하는 행동의 범주와 유사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자살로 간주하지 않으려 한다. 에스키롤과 팔레가 고대 로마의 장군이며 정치가인 카토의 죽음과 프랑스 혁명 당시 온건한 혁명파인 지롱드 당원들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은 사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타인을 위한 명분이 있다면 명예로운 자살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을 위한 자기부정과 극기정신에 의한 자살이 약간 덜 명백하기는 하지만 같은 정신적 특질로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던졌다. 이는 명예로운 죽음이 이타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이유다.

2)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한 자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한 자살도 명예로운 자살로 분류해야 한다. 전투하는 군인이 패배했을 때, 비참하게 치욕과 고통을 당하느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반드시 직접적으로 타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해도 타인을 위해 싸우다 일어난 것이므로 명예적인 죽음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 중 심한 부상으로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엄격하게 적군에 의한 죽음은 아니라 해도 시시비비를 넘어 일단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될 수 있다.

켈트인 중에서도 패배 후 살아남는 것이 씻어낼 수 없는 치욕이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갈리아의 위대한 지도자 중 카티볼리우스, 브렌노스, 빈덱스, 사크로비르, 플로루스 등이다. 그들은 모두 군사적 패배의 치욕을 씻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자살했다. 갈리아의 일부 수병들은 베네치족의 해군이 패배했을 때 생포되지 않기 위해 배 위에서 죽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해군을 지휘하던 원로 재무관 그라니우스 페트로니우스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스키피오에게 붙잡혔으나 “카이사르의 용병은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에게 목숨을 바칠 수는 있다”고 선언하며 자결했다. 기원전 196년, 스키피오에 의한 카르타고 점거 후 하스투발은 승자의 발 밑에 꿇어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아내 알비는 남편의 이러한 비굴한 행동에 분개해 에스클라데스 신전에 불을 지르고 가지고 있던 가장 아름다운 장식품을 몸에 지닌 채 두 명의 아들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카르타고에 피신해 있던 9백명의 로마 탈주병들도 불에 뛰어들었고, 이러한 일들에 동요된 하스투발도 자살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은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지휘관이 많은 병사들을 작전상 잘못으로 죽게 만들었을 경우 책임지고 자신도 자결하는 것을 보고 비겁하다고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군인답다고 생각한다.

1954년 베트남 전쟁시 디엔 비엔 프에서 필로드 대령이 그러했다. 방어진지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그는 베트콩이 비행장에 접근하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베트콩 포병대는 항상 움푹하게 패인 땅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에 진영을 배치했으므로 필로트 대령은 베트공 진지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트콩을 이틀 만에 전멸시키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공격 개시 후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자기가 확신했던 것들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그는 패배가 다가왔음을 깨닫고 대피소로 달려가 자결했다.

3) 특공대의 자살

특공대의 자살은 특정한 임무를 띠고 몸을 던지는 죽음이다. 전투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든 국가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든 국가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죽음이다. 이런 죽음은 전략적이고 수단적인 측면이 있지만, 다수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때로 심사숙고한 끝에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최후를 맞는 경우도 있고, 전체 전략의 일부로 끼워 넣어 어쩔 수 없이 수단적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확실한 목적, 즉 전체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한다고 평가된다.

이 경우로 독일과 일본의 특공대가 유명하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조직된 자살 비행부대다. 이들의 최종 목적은 인간 폭탄으로 목표물에 몸을 던지는 것인데, 이는 며칠 전, 혹은 몇주 전부터 준비된다. 이 1인승 특별기는 3개의 로케트 엔진으로 날며, 비행기 앞부분에 1톤의 고성능 폭탄이 실려 있다. 일단 이 ‘자살기’에 오르면 조종사는 내릴 수도 없고 마음을 바꿔먹을 수도 없다. 급하강 시 시속 1천km의 속력을 내는 이 고속 자살기계는 단 3, 4개의 간단한 장치만으로 조종하도록 돼 있다. 서양인들도 최악의 경우 개인적으로 충동적 자기희생을 하기는 하지만 계획적으로, 흥분상태에서 하는 집단 자살에는 부정적이다. 그래서 가미가제가 등장했을 때, 국제 여론은 이들을 흥분한 변태자 내지 광신적인 로봇이라 생각했다.

일본의 가미가제는 신도(神道)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신도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자기 희생에 대한 저항이 적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항상 존경받고 죽어서도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 의해 생겨나는 죽음에 대한 경시·헌신과, 자기 희생이라는 일본인의 대원칙, 육체적 미덕이 정신적 미덕과 동일시되는 현실 등이 정신력과 어우러져 가미가제라는 전술상 무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투기 수가 충분치 않아 이들의 영웅적인 행위에도 미군 함대를 철수시킬 수 없어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자폭 항공기로 적을 공격하려 했던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무인 장거리로켓탄 V-1호에 사람이 탑승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독일 최초의 자폭기에는 보복무기(페어겔룽스 바페, Vergelungs Waff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보복무기 1호는 행동반경이 300km, 최고 속도는 시속 600km였다. 비행기에 임시로 착륙장치를 설치하고 유명한 여성 시험비행사 안나 레이치(Anna Reitsh)가 시험비행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 기술자가 2명의 자살 조종사가 같이 탈 수 있도록 2개의 조종 장치를 장착한 제2형 자폭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탁상 위에서 고안된 1인승의 제3형으로 결정됐다.

이 로켓탄에는 모터도 착륙장치도 없고 단지 펄스 제트엔진만으로 ‘발사’된다. 안나는 이 자살기에 관심을 기울여 결사의 사명을 완수할 후보자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착륙장치를 부착한 제1형을 사용한 연습 비행이 비밀 장소에서 이뤄졌으나, 조종사들이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 이미 필요없어져 버렸다. 시간이 너무 흘러 자폭기로 독일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전술이 실행되지 못한 것이다.

특공대의 자살은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 나라의 군대 특성에 따라 얼마든지 현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살 특공대를 들었을 뿐이다.

4) 순교적 자살

순교적 자살은 종교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살은 신앙적인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자신의 희생을 통해 신앙인들이 더 깊은 신앙으로 정진하기를 기대하는 행위다. 순교적 자살은 때로 특별한 이유없이 자기부정 자체가 찬양되기 때문에 순수한 희생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해 이뤄지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경우에는 매우 광신적인 성격을 갖는 특성이 있다.

여기에는 힌두교인들이 대표적이다. 힌두교도들에게는 갠지스강 등 성스러운 강에서 죽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다. 비문을 봐도 옛날에는 왕과 대신들이 그런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고, 19세기 초까지도 이러한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브힐족은 시바 산에서 자신을 바치기 위해 신앙적인 동기로 바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해안을 따라 여러 척의 배에 광신자들이 가득 타고 자신들의 몸에 돌을 매달고 물 속으로 뛰어들거나, 그들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이 탄 배를 차츰차츰 가라앉게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많은 구경꾼들이 그들의 용기를 찬양하고 그들의 명복을 빌면서 지켜본다. 아미타종 신도들은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밖에 없고 공기통으로만 숨을 쉬어야 하는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들은 그곳에서 단식하며 조용히 죽음에 이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유황 불길이 솟아오르곤 하는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끊임없이 신을 부르며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받아달라고 기도하면서 불길이 솟아오르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그러한 불길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을 신이 허락한 징표로 생각하며 깊은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이른바 ‘순교자’인 이들은 깊은 존경을 받으며 오랫동안 기억된다. 이런 힌두교의 자살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무위의 철학으로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현자 브라만 중 한 명이 말한 “네가 무엇을 하든지, 네가 어떤 것에 즐거워하든지, 네가 무엇을 희생하든지, 네가 무엇을 베풀든지, 네가 발휘하는 의지와 힘과 노력들을 신께 바치라. 그러면 윤회의 고리를 구성하는 선하거나 악한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를 포기하면 신께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구절은 포기와 금욕을 통한 정신적인 자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신앙적인 자살은 판단이 곤란한 경우가 있다. 신앙적인 행동은 때로 보편적인 이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개인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자신의 허물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진정한 자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그 안에 있고 또 그 안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진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합일시키려 노력하는 신앙적 행위를 중심으로 행동한다. 이때 그들은 자신만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특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살도 비인격성이 극치에 이르고, 타인을 위한 자살이라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시도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견이 있다. 신앙의 이름으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자신의 삶에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않는 어느 정도의 병리적 상태에서 시도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웅적 자살을 다뤘다. 영웅적 자살은 개인이 다수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던지는 것이 특징이다. 충성심으로 인한 자살도 이에 해당한다. 어느 시대든 자기가 모시던 윗사람이 죽으면 그 뒤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영웅적 자살에는 충성심이 기초해 있다. 그러나 영웅적 자살이라도 당사자보다는 타인들이 영웅적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직업이 다양해질수록 집단 이기주의는 높아진다. 이것들이 투쟁화될 때 영웅적 자살을 부를 위험성이 높아진다. 각종 모임이나 규탄대회 등에서 분신이나 투신 등으로 자살하는 경우 등이 속출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분노를 정당하게 표출하지 못하면 충동적으로 자살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감정을 체계적으로 표출하고, 그 방법도 합리적이고 단계적으로 대응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불안한 이 시대에, 더욱 이런 영웅적 자살을 막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3. 자살의 유형-(9) 사회적 자살

사회적 자살(social suicide)은 사회적 상황과 관련돼 있다. 개인 심리 상태가 사회적 상황에 의해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다. 불황의 장기화와 양극화, 실업률 증가, 물가 불안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되어 일어나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 자살은 개인의 차원으로만 볼 수 없기에 대개 사회 병리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회의 중심축이 되는 정치나 경제 등이 위기와 혼란에 있을 때 자살 경향이 높아진다. 실제로 사회의 위기, 특히 경제적 위기에 자살 경향이 악화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런 사회적 자살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갖는다.

1) 아노미성 자살(anomic suicide)

아노미성 자살은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붕괴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뒤르켐은 이 붕괴를 무법 상태를 의미하는 집단 무질서(anomie)라 불렀다. 사회적 통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때 개인은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부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때 개인은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에 의해 서로 조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충족돼야 할 감정들과 어우러지거나 연합되지 못한다. 이런 감정은 가장 고통스러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대개 환멸과 실망의 길로 인도되는 편이다. 이때 개인은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 개인은 위험해질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지위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자신의 지배 밖으로 벗어날 때 분노의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노는 자신을 파멸시킨 현실이나 상상의 원인에 의해 반감을 갖게 만든다. 이런 특성 때문에 뒤르켐은 아노미성 자살은 일반적 도덕성이 와해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는 정도의 급속한 변화는 개인의 적응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개인은 사회에 대한 적응이 갑자기 차단되거나 와해되는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

경제적 파산, 사회경제적 공황상태 또는 갑작스런 벼락 부자가 되는 등의 상황은 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분노가 폭발되는 상황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분노는 개인에게 사회적 상황이 자극되어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개인이 분노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분노해 불을 지르는 방화사건이나 운전 중 화가 나서 가족을 태운 채 물 속에 뛰어드는 등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분노는 쌓아두면 쌓아둘수록 위험성을 증가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아노미성 자살은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다. 사회적 상황이 개인의 무력감을 자극하고 좌절하게 만들어 자살로 유도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도 한 가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질서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이 자살에 이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전체적인 사회적인 분위기와의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상황에 반응하는 심리적 반응의 개인차를 간과하고 있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행동이란 개인의 성향과 매우 관련돼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상대적 박탈감으로서의 자살

상대적 박탈감으로서의 자살은 비교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힘을 잃어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현상이다. 개인은 상대적 박탈감이 작용해 무력감을 경험하면 자살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이 자살을 포함한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다. 개인은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살면 힘든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늘 고생을 견디면 내일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을 가지면 고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 고생은 오히려 희망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개인을 힘들게 만드는 고생이란 대개 “지금의 고생을 견디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좌절된 경우다.

상대적 박탈감이 자살을 유발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특정한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의 분노를 자극하면 이 분노가 다시 부정성이 팽배하게 돼 일어나기에, 일종의 폭발 현상과도 같다. 이런 현상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인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거나 축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갑자기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쌓이게 된 결과로, 자신도 겉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는 스스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거나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을 맞는다. 더욱이 상대적 박탈감에 의해 유발되는 분노는 개인의 사사로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분노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사회적인 원망과 함께 좌절을 동반하므로 개인의 인격을 순간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경우라도 상대적 박탈감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할 때는 자신에게 분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이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쉼 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언론에서 상당한 관심을 보인 것은 동반 자살이었다. 물론 동반이라는 말이 맞느냐를 두고 논란이 없지 않지만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조카가 강원도에서 동반 자살했다는 사람을 상담한 일이 있다. 그는 조카가 상대적 박탈감에 의해 자살했다고 했다. 그의 조카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의 힘든 삶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심리적 고통은 가중되기 마련이다. 마음을 어둡게 색칠하면 한숨이나 좌절 밖에는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카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노력해서 살아야할 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분노와 공격적인 특성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 상황이 개인 상황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 개인은 악화된 상황을 사회적으로 돌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분노하고, 그 분노는 다시 공격성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이때 개인은 전에 다른 사람을 공격했든 안 했든 분노하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익숙한 습관들이 전복되면 개인은 심한 흥분 상태에 빠지며, 불가피하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위안을 구하려 든다. 격앙된 감정을 분출하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3) 욕망에의 분노로서의 자살

욕망에의 분노로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 분노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다. 때로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목표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목표가 능력 이상의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경우는 잘못 평가받은 경우의 자살이며, 존재의 가치란 측면에서 사회적인 위치가 명확하지 않을 때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는 대개 본능적인 것이어서 피하기 어렵다. 개인의 욕구는 어떤 형태든 정당성을 떠나 언제나 ‘충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욕구가 과도해지면 지나친 욕망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욕심이 합쳐지면 개인을 부정적으로 자극해 극단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의 욕구와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키고 난 후에도 정복할 수 없는 장애를 향해 돌진하다 지나치게 제약이 된 삶을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삶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욕망에의 분노는 충족하지 못해 화가 나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평상시 남달리 높은 목표를 갖는다.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집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더 많은 좌절감을 유발할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많이 기대하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약하다 해도 좌절감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불만을 품은 상대나 상황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욕망을 달래주기보다 부정적 자극을 받으면서 가망없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칠 수 있다. 그들은 삶 자체에 불만을 품고, 삶이 자신을 속였다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제물로 만들었던 허망한 흥분에서 깨어나면 앞의 경우처럼 좌절된 감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기는 너무 지친 상태가 된다. 이때 그들은 마치 긴 여행을 마친 것처럼 기진맥진해 정력적으로 반응할 수 없다.

욕망에의 분노는 개인의 인내심을 쉽게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욕망에의 분노를 갖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도 참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모든 일에 참을성이 없어진다. 온갖 변화를 추구하다 언제나 같은 느낌으로 돌아올 뿐 새로운 경험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한 자신의 욕망 충족이 개인의 삶에 중요한 이유다.

4) 사회 병리현상으로 인한 자살

사회 병리현상으로 인한 자살에는 해고 및 실직으로 인한 요인이 선두에 선다. 해고·실직으로 생계를 꾸리지 못해 절망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다. 해고나 실직은 사람을 갑자기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최악의 경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 누구든지 생각이 갑자기 부정적으로 되는 것은 물론, 생각의 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고가 꽉 막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갑작스런 해고와 실직이 개인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위험성이 높은 이유다.

경제 위기에는 경영 악화로 해고가 단행된다. 이런 해고는 물론 일단 인원을 줄여 회사를 살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해고는 실직으로 이어지고, 실직자가 도저히 다른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순간적으로 절망감이 밀려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파업을 막아보자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을 들어 외치는 노동자 측과, 용납할 수 없다고 버티는 사용자 측의 장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자살이 ‘자신의 의지’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게 한다. 노력해서 일하고 싶은데 그런 상황이 못될 때 좌절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가장 기초적인 먹고 사는 문제가 위협을 받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이 순전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일어난다면 개인의 인내심은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사회 병리적 현상에는 해고와 실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연령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초등학생은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중고생은 지나친 학습부담으로, 인터넷 사이트의 자살 유혹, 경기 침체, 실직과 직장 스트레스, 그리고 독거노인까지 자살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사회적 측면과 함께 개인적 측면도 상당히 결부되어 있다. 실제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개인의 심리를 압도하게 되면 얼마든지 개인의 문제가 사회 문제라는 핑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측면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대개 부정적인 의지를 작동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들라면 우리 교육 현실을 말해야 한다. 교육 현실이 이를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에서부터 중·고등학생. 재수생에 이르기까지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소식을 우리는 갈수록 접하고 있다. 명문대 입학에 교육 초점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만 들어가면 성공한다는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다양한 능력이 있음에도 성적 하나로 명문대 진학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현 주소다. 마치 ‘인생은 고등학교 성적순’인 것 같다.

대학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나가는 사회로 개선돼야 한다. 대학 졸업 후에도 노력하는 사람, 또는 직장에서 그 능력을 평가받는 사람 등이 성공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 이런 현실은 우리 젊은이들을 열등감으로 몰아넣고, 건강하게 노력하거나 살아나가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라 걱정스럽다. 그래도 이런 사회적 병리 현상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자살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이 될지 모른다.

5) 결론: 다 사회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

사회 병리 현상에 의한 자살이라도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리기에는 조심스럽다. 개인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도 사회적 책임으로 전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 병리적인 측면이라 해도 어디까지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것인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있다. 물질 만능주의, 우울증과 스트레스, 생명경시 풍조, 젊은이의 사회 부적응, 인터넷의 부작용, 학교 성적과 대학 입시 실패, 실직과 구조조정, 노인 문제 등이 모두 그런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구조적인 모순을 문제 삼아야 하지만, 개인적인 노력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자살은 개인보다는 사회적인 문제나 영향으로 자살할 수 있는 점을 중요시해 다룬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부정적인 영향에 휩쓸리지 않는 한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사회적 문제는 많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자살할 수만은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개인이 그런 문제 상황에 잘 적응하고 극복한다면 더욱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은 이미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개인의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의지의 존재다. 인간은 살려는 의지를 가지면서 죽으려는 의지도 함께 갖고 산다. 프로이트는 이를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살려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고, 죽으려는 사람은 파괴를 구하는 셈이다.

개인은 사회적 상황만을 문제삼지 말고 이런 상황을 견뎌내거나 극복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란 개인이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아무도 자살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도와주지 못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다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올때까지 개인은 평상시에 건강한 정신을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 한다.

 


24. 자살의 유형-(10) 애정적 자살

애정적 자살은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사랑을 찾아 행복하다고 느꼈는데, 어떤 이유로든 사랑을 잃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삶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에 깊이 빠져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다. 이런 현상은 앞의 사회적 자살과 매우 대조된다. 사회적 자살이 순전히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애정적 자살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애정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랑의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때 갑자기 무기력해지거나 심리적·정신적인 병이 들기도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내면에는 반드시 채워야 하는 사랑을 위한 그릇이 저마다 있는지 모른다. 그 사랑의 그릇을 채우지 못하면 힘을 잃거나 심한 경우에는 병이 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애정적 자살은 사회적 잣대로 평가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본능적인 차원, 즉 깊은 인간 이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애정적 자살을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기술할 수 있다.

1) 연애적 자살

연애적 자살은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경우다.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나 그들은 자살이야말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는 최후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자살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연애’라고 하면 놀랄 것이다. 연애란 반드시 결혼 전에 하는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혼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연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연애가 정신적으로 서로의 에너지를 교류하며 사랑하는 관계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연애는 여왕에서부터 인생의 낙오자까지 그 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연애적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정신 에너지를 교류하면 행복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하기조차 싫어한다. 이들에게는 서로가 떨어져 있는 것이 심리적 고통이다. 이런 생각이 지배하면 자신의 순수성이나 결백성을 입증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그러다 실제로 죽는 경우도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저승에서나마 하나가 되기 위해 자살한다.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둘만의 사랑의 관계를 저 세상에서라도 이루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연애적 자살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은 유명하다. 그들은 고대 가장 유명한 커플이었다. 악티움 해전이 참담한 결과로 끝난 후, 클레오파트라는 함대를 재집결해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그때 둘 사이는 소원했지만 남편은 잠시 퇴각해 있다 알렉산드리아로 찾아갔고, 이때 멋진 향연을 베풀고 연회를 즐긴 후 화해했다. 그러던 중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죽으면 안장될 자신의 영묘(靈廟)를 만들고 거기에다 가구, 금, 진주, 에메랄드 등을 옮겼다. 그리고 영묘를 닫고는 남편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알리게 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 이제 네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고 부르짖고는 자결했다. 그러나 쉽게 죽지 않아서 나중에 그녀의 영묘로 인도돼 들어갔으나, 이미 배를 찌른 상태라서 죽고 말았다. 슬픔과 우울에 가득찬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거부했고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시녀 둘과 함께 자살하고 말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피 모니에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소피 모니에는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던 정치가 미라보와 애정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애인인 미라보가 죽자 장례식에 참석한 후 집에 돌아와 유언장을 쓰고 침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죽었다. 손에는 대웅변가인 미라보의 초상을 쥐고 있었고, 자살 도중 마음이 변할까 그랬는지 두 발을 쇠사슬로 침대 기둥에 맸다고 한다. 애인이 죽자 자신의 앞날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애의 정열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지만, 그 대상이 사라지면 갑자기 힘을 잃게도 만드는 것임을 시사한다.

연애적 자살은 다양한 특성과 성격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마음껏 만나지 못해 죽는 사람, 피할 수 없는 이별 때문에 죽는 사람,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홧김에 죽는 사람, 애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죽는 사람, 애인 없이 사는 것 보다는 죽는 편이 차라리 덜 참혹해서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어떤 경우라도 일종의 분노와 공격성의 결과라는 점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학자들은 연애로 인해 분노가 자신을 심하게 공격하면 자살하게 되고, 그 분노가 타인을 공격하면 살인한다고 한다. 연애로 분노가 자극되면 파괴적인 공격성이 유발돼 자신이나 타인을 공격하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연애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사실은 잘못된 연애로, 사랑의 병리적 현상을 설명한다. 이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다.

2) 정조의 상실로서의 자살

정조의 상실로서의 자살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조를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경우다. 이들에게 정조는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여성이 정조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허용해야 할 자신의 소중한 몸을 원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허용하게 돼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정조적 자살은 몸과 관련이 있다. 몸의 허용이 마음까지,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까지도 더럽힌다는 사상에 기초한다. 몸의 순결이 마음의 순결이요, 마음의 순결이 영혼의 순결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정조적 자살은 성(性)이 개방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 됐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그런 자살을 여러 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어느 동네 처녀의 자살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녀는 강간당했다고 저수지에 뛰어들었다. 비오는 날 물결따라 철렁철렁 밀려오는 그녀의 시체를 보고 난 후 쉽게 지우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아직은 죽음이 뭔지 잘 모르던 시절이기에 충격이 더 커서 그랬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당시 산에서, 들에서, 그리고 집에서 정조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을 더 경험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에도 ‘혼자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일도 죽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으기 의문이 있었다.

정조적 자살은 필자의 경험만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은 종종 있다고 말한다. 성폭력 상담소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친구도 그런 일을 들려줬다. 이처럼 여성이 정조 때문에 자살하는 경향은 여성의 심리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은 보통 자신을 파괴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여성이 자살을 도망, 망각, 현재 생활로부터의 도피, 아주 오랫동안 잠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마도 이런 경향은 죽음을 잠드는 것으로 표현한 데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의 최근 조사를 보면 급속히 산업화되는 나라에서 자살률이 가속화되고 있다. 산업화 영향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탓인지 모른다. 1980년대에는 모리셔스군도, 타이, 싱가포르 등 세 나라의 15-24세 여성 자살률이 남성보다 훨씬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경향은 여성들이 남성보다는 자살하면서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성이 비교적 개방된 이 시대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한 자살을 코웃음 칠 노릇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3) 실연에 의한 자살

실연에 의한 자살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실연은 어떤 경우로든 사랑을 잃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현상이다. 사랑을 잃어 정신적 에너지가 중단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정신적으로 마땅히 기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심각하게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실연에 의한 자살에는 사별과 이혼에 의한 자살도 해당한다. 사별과 이혼은 엄밀하게 다르지만 사랑의 줄이 끊어진 점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미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사별은 원치 않은 가운데 사랑을 잃은 것이라면, 이혼은 원하는 가운데 사랑을 잃었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이 둘의 차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별은 타의에 의한, 이혼은 자의에 의한 것이므로 그에 따른 자살도 동일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사별과 이혼 중 어느 쪽이 자살 경향성이 높을까 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문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별보다는 이혼에 의한 자살이 더 많다.

배우자 사별로 인한 자살은 남편이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가정적 혼란에 기인한다. 생존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족적 재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자 남게 됐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된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도 다른 견해가 없지 않다. 사별이 모두 자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 개인적 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사별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고 의욕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혼에 의한 자살은 사별보다 경향이 높다. 이혼률이 높은 국가에서 자살률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데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자살이 이혼만큼 많지 않은 네덜란드만 예외다. 그런 점에서 뒤르켐은 자살 수치와 이혼 수치가 모두 높은 이유는 양자가 동일한 요인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다시 말하면 불완전한 균형을 가진 사람들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이것이 변하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부가 많은 나라에서 이혼이 많으며, 그런 부부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인격과 지능이 낮은 사람들에게서 많고, 그와 같은 특징들은 그대로 자살에 대한 경향성도 높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혼과 자살이 일치되는 것이 자살에 미친 이혼 자체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양자가 비슷한 원인에서 비롯, 다르게 표현되는 현상이라는 점이 원인인 것으로 여겨진다.

4) 불륜적 자살

불륜적 자살은 불륜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회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고 삶은 더 힘들어져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 매우 보기드문 일이지만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하면 ‘불륜을 진정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는 불륜적 사랑은 무거운 도덕 때문에 언제나 수면 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랑으로 인해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은 불륜을 꿈꾸는 심리가 있다’고 말했다. 전혀 사랑을 모르다가 뒤늦게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 50대 주부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30년을 살았지만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날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가슴이 떨리고 모두 그를 위해 해 주고 싶고 그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도 그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면 전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솟았다. 그러던 중 그 남자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사랑이 끊어지게 됐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는데, 거의 한 해를 그렇게 지냈다. 이제 그녀에게 삶을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됐다. 무기력해졌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다. 그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그 절절한 사랑에 감동이 되면서도 너무나 안타까웠다. 사랑이라는 느낌을 오랜 세월이 지나고 50대 후반에서야 느끼게 됐다니 말이다. 그녀는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중 인생의 황혼에 생각지 않은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옛말에 ‘사랑은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녀에게는 적어도 그랬던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불륜’이라고 이름 붙일 수만은 없을지 모른다. 사랑은 자연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지를 갖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나도 모르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누구도 거부할 힘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면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을 떠올릴지 모른다.

유리 지바고는 누군가? 제정 러시아 말기와 공산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술과 사랑을 좇아 번민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혁명 대열에 끼기에는 떨리도록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부르주아라는 비판 앞에 고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내 토오냐와 아이들은 파리로 망명 간 후 빨치산에게 붙들려 징용당했다가 공포의 우랄 수용소를 간신히 탈출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바고의 마음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라라였다. 라라는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와 혁명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지바고에게 도무지 무엇이라 이름붙이거나 이러니 저러니 생각할 수 있는 따위의 미(美)를 초월한 여자였다. 그런 라라와의 우연한 회우(會遇)는 개인의 영혼과 자유의 존엄을 역사의 법칙에 대비시킨 아름답고 비극적인 순수한 사랑 그 자체였다. 이 와중에 라라는 불륜이었던 한 남자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무도장에서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도리어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 지바고는 이런 라라를 치료하게 되는 숙명적인 인연을 맞는다.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반드시 만나게 돼 있던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그것만으로는 해석이 도저히 불가능한 특별한 섭리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둘은 1차대전 중 각각 군의관과 간호사로 재회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인생 길에 이런 여인이 또 있어 생의 고달픈 틈새를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온다면 당해낼 남자가 과연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그녀에게 행복의 공간을 허락해주지 않고 어찌 한 순간인들 배겨낼 남자가 있을까?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은 순수했어도 윤리적으로 볼 때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히 불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둘의 불륜을 문제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이라 부러워한다. 그러면 사랑이란 순수하기만 하면 윤리적인 차원을 떠나 허용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는 윤리와 도덕이 살아있는 현실에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모든 연인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 아니 숭고하게 깊이 남아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것이다.

불륜적 자살은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에게 도덕이니 생활의 책임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그들에게 사랑은 이미 남이 인정하건 말건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요 삶의 원동력이기에, 방해하는 어떤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상태다. 다만 그들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못해 심리적으로 더욱 심각한 고통이 따를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불륜적 사랑을 하는 사람이 모두 자살하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의 자살은 칼 메닝거(Karl Menninger)가 역설했던 ‘죽음을 당하고 싶은 욕망’이 조금 더 작용한 결과인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는 자살의 환상이 심각한 내적 갈등에 반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죽음의 성향이 자살 기도자의 환경에 내재할 경우 그것이 그에게 자기 파괴에 대한 고정관념을 행동화시키는 소인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자살을 도덕적 잣대보다는 사랑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동반적 자살

동반자살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죽는 현상이다. 동반자살은 매우 사랑하는 사람과 죽는 커플의 자살이 있고 전혀 모르던 사람과 만나 서로의 마음을 같이해 죽는 자살도 있다. 때로 사람들은 치욕을 견디며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살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것이 싫어 함께 죽기도 한다.

커플의 자살은 최소 형태로서의 이른바 ‘집단 자살’이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자살이 매년 평균 60건에 이르는 상당히 ‘흔한’ 사건이다. 벤 사이드 박사는 최근 조사에서 1년 동안 영국에서 이러한 자살 시도가 58건 있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병에 걸려 고통받거나 특별히 심신이 쇠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이러한 동반자살의 특징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오로지 자신들 내부로 도망쳐 둘만의 사회를 형성하다는 점이다.

커플의 자살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과 죽어서도 하나로 맺어지겠다는 소망이 자리한다. 이런 소망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절규’다. 전설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서로 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연인들에 관한 자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불행이 찾아왔고, 결국 죽음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연인들은 무덤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나아가 상대방과 멀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택할 만큼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보다 더 행복을 느낀다.

운명의 결단은 두 연인의 머릿속에서 고정관념이 된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죽는 것 말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한쪽이 제안하고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사(情死)를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 쪽이라고 알려진다. 연상의 여성일 경우 사랑을 잃을까봐 정사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라마르틴과 그가 사랑했던 우델로이 부인의 유명한 자살미수 사건이 바로 이 경우다. 그녀는 병들었고, 남편보다 자신이 연상이어서 머지않아 사랑받지 못할거라 생각해 라마르틴에게 동반자살을 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최근 인터넷에서 만나 동반자살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서로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만나서 자살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점에서 일치를 이루는 점이 특이하다. 더욱이 그들이 대개 남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나이와 환경을 넘어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로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서로에게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순간적 일치감을 느낀다. 남녀의 하나됨은 신기한 힘을 발휘하는 미묘한 면이 있다. 그것은 남녀가 하나될 때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는 이른바 ‘행복감’이다. 비록 일찍 만나서 사랑을 이룬 것은 아니라 해도 이성이라는 사실은 그 특이한 상황에서는 세월을 당겨서 순간적으로 깊게 하나가 돼 일체감을 맛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동반자살은 반드시 사랑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원한 때문에 동반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채플린의 스승인 막스 렌더가 그런 경우다. 그는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아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25년 호텔방 침대에서 둘은 함께 자살했다. 유서에는 ‘정말로 이제는 지겹다. 이런 괴물과 더 이상 살 수 없다. 같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밤 나는 아내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고, 아내는 같이 죽자고 말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고 쓰여져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자신에게 전달된 최후의 메시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매우 사랑한다고 인정하고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가 좋지 않은 관계인데도 함께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쉽게 풀리지 않을 의문이겠지만,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 어렵지 않다. 증오도 애정의 지나친 표현이라는 사실에서 애증의 관계를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부정적인 사랑인 증오를 긍정적인 사랑으로 바꿀 이유가 여기 있다.

6) 결론: ‘달아나는 전차와 사랑은 붙잡지 마라! 곧 다른 전차와 사랑이 올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애정적 자살을 다뤘다. 자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애정적 자살은 여전히 강력한 자살 원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사랑을 추구하고, 그 빈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요하다 해도 인간에게는 결국 이런 사랑을 맛보고 그것을 향유하다 가고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우리는 정신의 깊은 곳에 자리하는 ‘신화적 모티브’라고 한다. 신화적 모티브는 사람이라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특성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공허함이 가슴으로 차오르는 순간이면 누구나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을 꿈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야만 했던 지바고와 라라의 삶을 이해하듯 애정적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려 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어쩌면 아름다운 관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다가 눈을 감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낭만에 젖어서 살 수만은 없다.

그래서 연애적 자살에서 한 가지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사랑을 잃어버린 경우에는 ‘달아나는 전차와 사랑은 붙잡지 마라! 곧 다른 전차와 사랑이 올 것이다’를 기억해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25. 자살의 유형-(11) 이상향의 자살

이상향의 자살은 죽음을 환상적으로 생각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행위다. 이런 현상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대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 일어난다. 지금의 현실을 뛰어넘으면 거의 완벽한 사회가 존재할 것이라는 이상향은 인간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굴려가며 살아가는 존재일지 모른다. 이런 원리에서는 현실이 작아지면 이상이 커지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상향은 현실이 불합리하고 힘들수록 더욱 가중된다. 그런 생각에 따라 이상향의 자살은 현실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죽음을 도피처 또는 문제를 해결하는 통로나 분출구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그 출구의 하나로 자살을 미화하려는 유혹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데 기초한다. 이상향의 자살에는 다음 몇 가지 유형을 갖는다.

1) 유토피아적 자살

유토피아적 자살은 죽음의 저 편에 이 세상과는 다른 완벽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데서 시도되는 죽음이다. 그 완벽한 세상이란 불평등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가 온전하게 평가되거나 수용되는 완벽한 조건 아래 있는 이상 사회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인데도 그 정신에는 포기할 수 없이 살아있는 점이 놀랍다. 이런 유토피아적 생각은 현실이 못마땅하고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생각나는 특성이다.

유토피아적 생각은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고달플수록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 이상향의 세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회피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기술한 애정적인 자살에서 특히 연애적 자살이나 동반적 자살은 이런 이상향의 성향을 포함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이상향의 자살은 개인보다는 이단 종교의 집단 자살의 형태로 시도되는 편이다. 역사적으로는 ‘인민사원’이나 ‘태양의 사원’ 등의 집단 자살이 대표적이다.

1978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5시 남미 가이아나의 수도 죠지타운에서 집단자살이 일어났다. 그날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Jim Jonse)는 캠프 지역 내 흩어져 있던 신자들을 불러모았다. 존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도주한 후 베네수엘라에 가까운 밀림으로 들어가 인민사원을 만들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그가 사회주의적이고 반인종차별적인 참신한 교리를 설파하는데 끌린 사람들이었다. 그때 교주인 짐 존스는 이미 그곳을 조사하려 왔던 미국 국회의원 레오 라이언과 10여명의 기자들을 총살한 후였다. 난감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그는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처치한 사건으로 설명하고, 수습책이 없어 당황하다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신자들과 함께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그들을 위험에서 구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적들이 매우 가까이 왔다. 가이아나 군대가 우리를 습격하고 있다”면서 “모두 함께 모여 저 세상에 가기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죽어야만 한다. 모두들 약속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자! 독약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독약이 든 커다란 통 앞에서 드디어 ‘죽음의 행사’가 거행됐다. 그 행사는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독약을 마시게 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 사이 교주는 위엄을 지닌 채 신자들을 죽음으로 재촉했다. 스피커에서는 귀청을 울리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죽음을 사랑해야지 혐오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들은 내일 모레 부활할 것이다. 오늘 저녁 모두 잠들게 되더라도 모두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죽음만이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죽음은 어머니다”고 소리치면 신도들은 “정말 우리들은 죽음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화답하고, ”어머니, 어머니“라고 노래하면서 독을 마셨다고 한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오델로 로스는 그 중 몇 사람에게만 교주의 친위대가 독을 마시게 했을 뿐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기 손으로 독을 마셨다고 했다. 이로써 15세 미만의 어린이 180명을 포함한 918명의 신도들이 집단 자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물론 순순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교주의 친위대가 누구도 도망갈 수 없도록 포위하고 있었다고 한다. 친위대는 도망하려는 신도들의 손발을 묶고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다. 이런 ‘죽음의 약속’을 따라 노인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백인도, 흑인도, 아시아인도, 멕시코인도 모두 하나가 되어 죽었다. 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단에 의한 강압적인 죽음이라 봐야 한다. 다만 교주의 이상세계 건설에 찬성하고 따랐던 것이 문제였다. 실제 그들은 처음 교주 짐 존스가 가이아나의 밀림에 유토피아적 사회를 건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인민사원에서 새로운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 이상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면 유일한 해결책은 집단자살 뿐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죽음의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했는데도 말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허무주의적 자살

허무주의적 자살은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다. 이런 허무주의는 철학에서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의 심연을 직시하는 입장이다. 삶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허무주의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이는 서구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후에 도래할 장래 가치를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소시민층 세계관의 반영으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자살은 허무에 기초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특이한 점이 있다. 삶은 고생해서 사는 것에 비하면 무슨 특별한 것을 획득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살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허무주의적 자살은 처음부터 허무적 사상에 입각해 살던 것이 아니고, 현실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점차 생각이 허무하게 이어진 것이다. 자신을 가로막는 현실이 풀리지 않아서 더욱 절망적이 되고, 삶을 허무한 것으로 결론내리게 된다.

작년 10월 어느 여교수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 여교수는 교수였던 남편이 암으로 사망하자 끝내 견디지 못하고 6개월 후 자살했다.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이 없는 세상이 너무 허무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둘은 너무나 금슬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별이란 반드시 금슬과는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스무 서너살 정도 되는 아들과 딸을 두고 갔다. 이런 경우 그녀는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갖고 산 것이 아니라, 남편이 없는 세상이 허무하게 된 경우다.

이런 점에서는 구직자의 비관 자살도 마찬가지다. 일간지에 보도된 어느 구직자의 자살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2년간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취직을 못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남길 유산도 없고 아무런 아쉬움도 없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려 한다. 죽으면 화장해 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 유서는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발견됐다. 공부도 많이 했는데 일할 곳이 없는 오늘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더욱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의 허무성은 생의 만년에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허무적 성향은 일반적으로 인생의 나이가 60이 넘으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알바레즈는 “나이 든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성향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것 같다”고 하고, 심지어는 “생의 만년에 허무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그들의 목숨을 저버리는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연한 일인지는 모르나 작가들은 이런 허무적 성향과 상당히 결부돼 있는 것 같다. 영국 최초의 문인 자살자인 토머스 채터튼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파베제, 플라스 등이 모두 그들의 유년 시절 부친을 여의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부친의 방법대로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진정한 허무주의는 진실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 경과해야 할 과정이어야만 한다. 허무주의가 인생의 전체적 목표와 목표 달성을 위한 참된 수단이어야지, 원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 허무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결단으로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실존적 노력이 가능하다.

3) 죽음을 예찬하는 자살

죽음을 예찬하는 자살은 삶보다 죽음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 선택하는 행위다. 이들에게는 고단한 삶보다 죽음이 더 고상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 고통과 허무 속으로 방치한 생의 본성을 고발한다. 나는 본성을 파괴할 수 없기에, 삶이란 억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구토가 나서 자살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불멸을 믿지 못하게 되면 짐승의 수준을 넘어선 성숙하고 발전된 자신을 가진 모든 인간들에게 자살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말은 도스도예프스키가 한 말이다. 그는 자살이라는 극적인 충동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으나 자기 스스로 성취할 수 있고 참기 힘들게 이끌리는 자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파괴행위를 명쾌하고 고요한 것으로, 그리고 무책임한 것과는 달리 충만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속에 가장 매혹적이고 독특하고 낭만적인 키릴로프를 만들어 냈고, 이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 그는 키릴로프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살의 스승으로 만들어 자살자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광기나 분노에 의한 극심한 고통의 희생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이때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한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키릴로프, 즉 도스도예프스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은 여전히 신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것은 둘 중 하나로 “하나님, 혹은 공허”인 것이다. 도스도예프스키 자신이 이런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려 심한 고통을 당한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만일 신이 살아 있다면 모든 것은 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이고, 누구도 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범한 인간은 자기의 의식으로 신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때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키릴로프는 몇 차례 고심 끝에 영혼은 불멸이 아니고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런 태도는 도스도예프스키가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은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인간이 행한 전부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고안해냈다”는 어두운 결론을 내리고 만다.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심지어 신 앞에서도 미화되기도 한다. <어떤 비관론자의 앨범>의 작가 알퐁스 라베에게 자살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였다. 그가 죽은 후 5년 후에 출판된 그의 비밀수첩에서는 “존재는 멸망이고 죽음은 삶이다”는 문제를 표출시켰다. 어떤 부분에서 라베는 삶에서 유리된 인간이 올바르게 신성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 파괴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자살은 창조주에게 돌리는 최후의 감사가 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오랜 사고와 철학 덕택에 최후의 행동에서 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상하게 감행하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이런 대목은 자살은 신 앞에서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행위로 보는 관점이다.

죽음을 예찬하는 작가들은 많았다. 카프카는 “자살은 자기 과거의 과오를 씻는 행위로 설명하는 데서 그 선두에 선다. 1913년에 출판된 그의 저작 <판결>에서 주인공 게오르그 벤데만을 통해 그는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아버지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생각이다. “죽을 시간을 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의 마음 깊은 곳에는 순수한 아이가 있지만, 더 깊은 곳에는 악마가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내가 너에게 물에 빠져 자살하라고 말한 것이다.” 판결이 내려지자 주인공 게오르그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 속에서 서둘러 자살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난간 끝에 붙어있다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강물에 투신했다. 이런 점에서 카프카는 물리적인 자살보다도 더 강한 자살, 즉 자신의 모든 글들을 파괴함으로써 도달하는 문학적인 자살을 꿈꾸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가든 수필가든 철학자든 도덕주의자든 간에 이런 죽음을 예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자살의 합법성을 받아들인 몽테스키외가 있는가 하면, 영국의 존 돈과 스웨덴의 존 로벡은 자살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폴 스카르피아와 베카리아도 자살을 찬성한다. 몽테뉴는 자살이 모든 ‘악의 치료제’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권장하고, 카프카는 자살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살라크루는 역설적으로 자살이 삶과 만나게 된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토마스 모어는 자살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예리한 성찰을 보여준 사람은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시인, 깨어진 리라(돈), 사라져 버리는 미래를 보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자살은 단지 휴식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안식을 찾아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했다. 견딜 수 없는 나약함에 솔직해질 수 없었고, 가장 깊고 억압된 감정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자살은 현세의 종결이자 도피이고 삶의 성취가 될 수 있었다. 까뮈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작가들이 죽을 수 있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며,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미리 예상된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까뮈가 자살을 의도된 목적과 고요함 속에서 준비된 최후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까뮈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진정으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인가?’, ‘글쓰기와 죽음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가?’ 등이다. 미셀 뷔토르는 자살과 글쓰기의 애매한 관계로부터 자살의 긍정적인 등가물을 추출해낼 수 없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글쓰기에 의해 오랫동안 ‘발효되고’ 부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단번에 감행된 자살이 운명의 십자로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세우게 된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앙드레 지드는 “나는 문학으로 죽은 사람들은 벌써 자기 자신 안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미셀 라리스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최고 위험인 ‘죽음’을 감당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점은 부정성의 결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긍정적으로 글을 쓰는 더 많은 작가들은 인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작가들이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4) 모방적 자살

모방적 자살(Copycat suicide)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모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그대로 흉내내 죽는 현상이다. 모방 자살은 대개 유명한 사람의 자살이 있은 후에 잇따라 자살이 일어나는 현상으로,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에 보도된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나 연예인 등의 자살보도를 접하고 모방되는 편이다. 이 모방 자살은 최근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이름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인 청년 베르테르는 조용한 자연에 묻혀서 우울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어느 아름다운 산간 마을에 찾아간다. 그는 마을 무도회에서 멋진 춤 솜씨를 가진 쾌활한 여인 로테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춤을 계기로 로테와 친해진 그는 그녀에게 약혼자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듣고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로테를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윤리적인 판단과 이성은 잠시 접어둔 채 그녀를 계속 방문하면서 그들은 어느 새 감성이 통하는 다정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로테는 알베르트와 결혼하게 되고 둘은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결국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절망한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소설이 19세기 유럽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면서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이처럼 소설 내용이 모방 자살로 뒤따랐던 점을 들어 베르테르 효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모방 자살은 실제로는 자살의 전염성이 강하게 작동한 데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이런 자살에는 동일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남이 죽는 것을 보고 따라 죽는 단순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방 자살은 더 근본적으로는 자살 시도자의 심리적 측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강한 동기를 받고 죽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돼 시도하는 죽음이다. 실제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사람이나 자살 경향이 있는 사람이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의 죽음에서 강한 정신적 쇼크를 받고 자기도 따라 죽는 경우는 상당히 일어난다. 우리는 얼마 전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있은 후 여러 건의 모방 자살이 일어난 사실을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모방 자살은 역사적으로 여러 건이 일어났다. 이런 모방 자살 시도는 여성이나 아동, 청소년 등이 많은 편이다. 옛날 프랑스 리옹에서 명백한 이유도 없이 단지 죽은 사람을 따라 일어난 자살이야기, 1831년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와 영국 맨스필드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모두 그러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93년 모방 자살에 의해 베르사이유에서만 수백 명이 죽었고, 20세기 초에는 마르세이유에서 처녀들이 잇따라 자살한 것이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톨프가 마리 베세라와 함께 자살했던 사건이 보도된 후에는 상당한 모방 자살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에서까지 여러 커플들이 갑자기 자살했다. 보르도에서는 어떤 장교와 그 애인이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다. 나도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거울 앞에서 자살했다. 이런 모방 자살은 프랑스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모방 자살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남의 자살을 흉내내는 만큼 먼저 일어났던 자살과 똑같이 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어느 삼림감독관이 아내와 함께 루드비히 2세가 자살한 장소인 스탄 베르그 호수를 찾아 자살한 것이 그 예다. 그런가 하면 최근이 아닌 까마득한 옛날에 일어났던 죽음을 모방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노틀담사원탑, 에펠탑, 런던탑,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유명한 건물들은 그만큼 유명한 자살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죽은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그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절망해서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보통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촉발시키는 것은 시사성이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남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사건이 있은지 이틀 내에 같은 방법으로 자살하기 때문이다.

5) 모방 자살 막기 위해 유명 연예인들 자살 보도 신중해야

이상에서 이상향의 자살을 다뤘다. 이상향의 자살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클수록 위험성이 높아진다. 이런 현상은 물론 살려는 의지가 꺾여버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정신 에너지의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신앙이 무력화돼 자신이 거의 신이 돼 버린 현실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확산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 더 위력을 떨치도록 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한 신앙으로 삶의 태도를 확고히 하고, 더욱 살아야 할 소명감을 다져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대중 스타들의 자살은 잇따른 모방 자살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은 자아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아동이나 청소년 등은 모방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대중 스타들의 자살보도를 지나치게 다루는 보도 태도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보도를 통해 충동을 받은 소외 계층이나 충동성 강한 청소년들이 모방 자살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오스트리아 소네라는 의사는 자살에 대해 10년간 연구한 끝에 빈의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자살에 대해 신문이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룰수록 사건이 늘어난다고 보고했다. 이는 메스컴이 정보를 쉽게 전달하게 된 오늘 다른 사람의 자살 사건에 대해 마음의 동요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이상향의 자살을 막기 위해 한 마디를 부언해 두고 싶다. 현실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지나친 이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더욱 삶을 즐거운 것으로, 이른바 누림이라는 “향유의 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6. 자살의 유형-(12) 자기 변형적 자살

자기 변형적 자살은 존재를 변화시키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이는 자기 존재를 변형하려는 방식에서 이해된다. 인간은 반드시 자살을 언급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존재의 변형을 추구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달라지고, 세월을 거듭하면서 점차 발전적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형태가 진정 달라지는 존재론적 변형은 인간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욕구일지 모른다. 자살이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형하는 한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종교심리학에서는 일종의 신비주의로 존재의 초월을 의미한다. 다른 존재로의 변형은 외관상으로 성질이 다른 존재가 된다. 자기 변형의 자살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갖는다.

1) 변신적 자살

변신적 자살은 존재의 변형을 꿈꾸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가 불만족스러워 다른 존재를 강력히 희망하는 결과다. 이는 대개 올바른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주로 일어난다. 그들은 자살을 조상들의 세계로 가는 최종 결말로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신들이 그들의 죽음을 부른다고 믿는다.

이런 현상은 다른 민족이나 부족들에서도 나타나지만 특히 시베리아의 캄찰달과 아메리카의 인디언에게서 나타난다. 이들 중에서도 체이넨, 크릭, 검은발 부족들이 이런 믿음을 갖고 있다. 심지어 말리 도공족은 조상들을 만나기 위해 굶어 죽으려는 목적으로 식량도 없이 정글 속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하여 죽음이 그들을 찾아올 때까지 얼음이 떠 있는 호수에 빠져 익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존재의 변화를 꾀하는 행동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현세에서 스스로 죽어 없어짐으로 새로운 존재의 변형을 시도하는 것이다.

스스로 죽어 신(神)이 된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상은 보편이지는 않지만 특정 부족에서는 그렇게 믿는 편이다. 예를 들어 폴리네시아 카나크 부족의 언어에는 정확히 ‘죽다’는 동사로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기에 그들의 의식에서 죽음이란 근본적인 변형일 뿐이다. 이 부족은 살아있는 인간의 세속적 요구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신의 영역에 들어간다. 이들에게 자살은 다른 모습, 즉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자기 신체 기능을 스스로 잃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돼 다른 형태로 살아있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찾으려는 자살자가 산 자와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 자살은 새로운 세계이자 최상의 조건의 삶, 각기 다른 형식들을 취하는 삶으로의 탐구다. 이는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다.

변신적 자살은 현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1970년 11월 25일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자살 의식을 거행하면서 죽은 사람이 있다. 그는 활발한 정치 활동과 세계적인 저서로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다. 그의 죽음을 두고 미친 짓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스럽고 제의적이면서도 이타적인 행위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옹색한 인간의 삶을 벗어나 영원의 길을 선택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자살하는 그를 보면서 같은 자리에서 2명이 뒤따라 죽었다. 그리고 1971년 6월 27일 가나자와 박물관에서 투슈카모토라는 어린 학생이 미시마를 모방해 자살했다. 그 학생은 죽기 전에 “나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30여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복 자살했다. 어린 학생이 그런 일을 감히 자행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변신적 자살은 현실적인 삶의 불만족과 연관성이 있다. 현실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변신은 고통으로부터 회피 및 도피하려는 욕구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현실의 불만족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지만, 특히 전두엽이 완벽히 발달하지 않은 청소년들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는 청소년들이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 힘겨운 상황이나 심각한 갈등 상황이 하나의 도피처로서 자살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이런 상황에 있는 경우 청소년은 대개 수동적이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대로 자신의 자아상과 상반된 자신의 처지, 자신의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변형의 시도일 수 있다.

2) 환생으로서의 자살

환생으로서의 자살은 다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에 기초한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들을 신으로 변형시키지 못하거나 영원으로 가게 돕지 못하면 영혼은 다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존재의 환생에서 죽음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들에게 죽음이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이 사는 동안 선행을 많이 쌓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동물의 몸으로 환생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환생 사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환생은 존재가 순환적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불교의 해탈이 대표적이다. 불교의 윤회 사상은 이러한 순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윤회를 통한 순환성은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또 하나의 초월로 경험되는 신성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생의 관점은 자아 초월을 자기 변형의 형태로 바꾼 니체의 영원회귀의 초인적 초월, 불합리에 가까운 까뮈(Camus)의 체념 등도 해당한다. 특히 까뮈는 생활의 영원한 불합리성을 각오함으로서 개인적인 허무주의를 초월할 수 있다고 설파한 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유사한 순환적 초월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에스키모인들은 죽은 후에 가장 좋은 목적지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갑작스럽게 죽거나 자살하는 경우 영혼은 낙원의 공간, 즉 그들의 영혼이 세 가지 세계 중 한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새 세계가 오기를 기다리며 살게 된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자살은 그들에게 괴로운 경험이 아니다. 이는 에스키모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 비율을 나타내는 데서도 입증된다. 이런 에스키모인들의 자살 관념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확장돼 있기 때문이다. 에스키모 노인들은 자기들이 가정이나 사회에 짐이 된다고 느껴지면 쉽게 자살할 수 있고, 삶의 공간이 거의 없는 생활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다.

유명한 북극지방 전문가인 페트릭 브라운은 한 에스키모 청년의 죽음을 전한다. ‘오아눅’이라는 이 젊은 에스키모 청년은 지역에서 최고의 사냥꾼으로 알려졌는데, 어느 날 사냥하다 실수로 절친한 친구인 오콕톡을 죽이고 말았다. 오콕톡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둘째 아들의 시체를 보게 됐다. 어머니는 죽은 둘째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에스키모인들은 그녀가 어디로 갈지 잘 알면서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누구도 그녀가 바위 꼭대기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뒤이어 오아눅은 죽기 위해 끝도 보이지 않는 남극으로 떠났다. 고단한 삶을 굳이 영위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 그들은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겨울철 이동 기간 두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 없었던 어린 소년은 가족과 친지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 하자 자기는 그곳에 남아있겠다고 말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긴 구덩이를 하나 파 주었다.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에스키모인들은 자기들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행위를 방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소년의 결심 후에 보인 주변 사람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단호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특별히 예외가 아니라는 데서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이런 점은 아마도 에스키모인들의 죽음의 개념이 신화적·종교적 철학과 북극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인식과 관계가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개인적인 탈출로서의 자살

개인적인 탈출로서의 자살도 자기 변형의 죽음을 선택한 행위다. 현재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기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인 탈출로서의 자살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삶보다는 죽음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다.

개인적인 탈출의 개념은 아마도 기존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서 나타난다. 불어에서 ‘목마’를 의미하는 다다(dada)는 예술 양식이라기보다는 기존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허무주의’ 상태를 일컫는다. 특히 서구 근대의 세계관, 예술관의 근본인 합리주의의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우연성을 중시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다다이즘을 흡수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합하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초현실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은 초현실주의에서는 예술가와 삶의 융합으로부터 이뤄지기에 예술가를 부정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삶이 가치없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현실과 극단의 대립은 결국 삶에는 죽음이 너무나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만든다. 끈질기게 노력해도 현실의 문제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자살이 하나의 해결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자살이 유혹의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허무주의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허무주의적 시각에서 스스로의 삶을 몇 살까지로 규정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초현실주의자 청년 리골이 마흔을 넘기지 않기로 자신에게 약속하고 실제로 자살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1929년 11월 5일 40세 생일이 되자 약속을 이행했다. 그리고 삶에 대해 고뇌한 끝에 늙는다는 것을 최고의 불행이라고 여겨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칼 마르크스의 딸과 사위 폴 라파르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부부는 70살이 넘어서는 살지 않겠다고 했던대로 1911년 11월 11일 자살했다. 마르크스의 사위는 부엌에서, 딸은 방에서 발견됐다. 이들은 “나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다. 삶의 기쁨을 모두 빼앗고, 육체적 정신적인 힘을 잃게 하는 늙음이 나의 에너지를 마비시키기 전에 나는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때 자기가 키우던 개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새로운 개 주인이 개를 사랑해 주고,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썼던 것이 특이했다.

히틀러의 측근 요셉 괴벨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경애했던 그는 더할나위 없는 선전 부장인 동시에 대중 선동자였다. 그는 히틀러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히틀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도 히틀러를 위해 바쳤다. 4월 29일, 요셉 괴벨스는 지하호에서 <총통의 유서를 보충함>이라는 제목으로 유서를 썼는데 그것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우리 식구 모두는 결연하게 결심했다. 아내와는 충분히 상의했다. 아이들은 개인적 의견을 말하기에는 아직 어렸지만 스스로 결정내릴 수 있는 나이였다면 전폭적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총통의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서 모실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의미없는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개인적 탈출로서의 자살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의 변형을 꿈꾸는 죽음은 아니다. 이들은 단순히 현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좌절감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만족하지 못해 새로운 세계를 기대한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자기 변형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이 고달프고 힘들어 직면한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죽음을 해결책과 분출구로 찾았다는 점에서 존재의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은 현실의 문제에 부딪친 사람들이 죽음으로 존재의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4) 새로운 만남으로서의 자살

새로운 만남으로서의 자살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행위를 말한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거나 심각한 중병으로 죽었을 때 스스로 뒤따라 죽는 경우다. 사랑하는 사람과 저승에서나마 하나가 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새로운 만남으로서의 자살은 죽음 이후를 기약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이루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국의 해럴드 왕과 그의 애인 에디트의 최후가 유명하다. 영국에서 ‘최고 미인’으로 알려진 에디트는 해럴드 왕이 헤이스팅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해를 찾아내고는 강으로 달려가 투신 자살했다.

오스트리아 왕자의 자살은 더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왕자인 루돌프는 옛 애인의 딸과 함께 자살해 이른바 ‘메이얼링의 비극’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루돌프는 선천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물려받아서인지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언제나 황후의 근심이었다. 그러던 차에 왕자는 실제로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어느 창녀와 같이 죽자고 했고 2명의 장교 친구에게도 같이 죽자고 제안했다. 그러다 옛 애인의 딸인 마리 벳세라를 만났을 때 그것이 이뤄지게 됐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아들 루돌프에게 마리와의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루돌프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는 자살을 결심했다.

당시 18세였던 마리는 왕자를 만난지 5일 만에 유언을 작성했고, 1888년 1월 28일 두 사람은 메이얼링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사냥 관저로 갔다. 거기서 마리는 사랑의 증표로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총을 쏘라고 했다. 루돌프는 사랑하는 애인의 피 흘리는 머리를 베개에 올려놓고는 온 몸을 꽃으로 덮고, 옆에 누워 자기도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강해서 죽음으로밖에는 다시 꽃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루돌프는 어머니와 누이 동생, 아내에게는 편지를 썼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자살을 택한 ‘죽음의 상징’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은 자를 뒤따르는 행위는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두고 동물이 무슨 자살을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런 예는 동물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의학 박사인 꽁도레세는 동물들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인을 잘 따르는 동물이 주인이 죽고 나서도 절망적인 애착을 보이는 일이 많다. 스스로 굶어 죽는 동물들이나 주인의 무덤에서 며칠 동안 끈질기게 주인을 찾는 동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사회적 존재인 동물은 인간과 지속적이고 정감 어린 접촉을 한다. 동물들의 사회적 생활 방식은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융합되고 확립된다.” 동물들의 자살은 전문적으로 연구돼야 할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만남을 위한 자살은 그 특성상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살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도저히 떨어질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진위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살은 특히 이상향을 꿈꾸는 청소년기에 죽은 가족과의 재결합을 위해 시도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현실 생활이 어렵고 불행해 힘들다고 판단되면 자살로 출구를 찾으려 한다. 죽어서 저 세상에서 만나고, 후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환상적 욕구 등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들의 자살이 대개 복수하고 남에게 벌주거나 남을 꼼짝 못하게 지배하려는 욕구, 희생과 속죄의 욕구,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구, 죽어서 저 세상에서 만나고 후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환상적 욕구 등에 의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5) 결론: 자살 막으려면 현실의 불만을 목회적으로 잘 돌봐야

이상에서 우리는 자기 변형적 자살을 다루었다. 자기 변형적 자살이 변신적이든, 환생을 위한 것이든, 그리고 존재의 탈출을 꿈꾸고, 새로운 세계에로의 자살이든 모두 현실의 불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심각한 현실의 불만이 저 세상의 이상향을 꿈꾸게 만들어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존재의 발전이나 변화를 저 세상에서라도 이루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자살은 특히 충동성이 강한 사춘기의 청소년들이 막연한 자살 관념으로 인해 더욱 시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력이 요구된다. 청소년 자살이 어느 유형이든 자신을 향한 파괴적 충동, 내적으로는 공격적인 살인, 남을 향한 적개심과 공격성이 자기 자신으로 향한 데서 유발되고 있고 대개는 현실적인 불만족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상담 치료에서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청소년들을 여전히 접하고 있어 이런 현실이 더욱 깊이 느껴진다. 그러기에 현실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목회적으로 신경을 기울여 돌봐야 하면서도 청소년들을 신앙적으로 강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7. 자살의 유형-(13) 신앙적 자살

신앙적 자살은 신앙적인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다. 이를 두고 ‘신앙인이 어떻게 자살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자살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을 가진 이단적인 종파나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상적인 신앙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는 특히 신앙의 박해가 심한 곳에서 순교의 의미로 시행되기도 한다.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구원의 확신을 주고 낙원을 보장해 주는 행위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 경우 세상의 삶보다는 열광적인 수난과 형벌을 용감하게 수용하는 신앙의 자세가 된다. 신앙은 특성상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사상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이는 이러한 위험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다. 이런 이유로 신앙적 자살은 때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순교한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신앙적 자살은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해 기술할 수 있다.

1) 신성모독에 대한 항거로서의 자살

신성모독에 항거하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살은 신앙의 박해가 일어나 신성모독이 행해지는 곳에서 발생한다. 물론 신성모독을 두고 죽음과 삶을 선택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이들의 죽음이 자살인지 순교인지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가 공인되지 않던 초기에는 기독교인들 중 자발적으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죽음을 찾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초기 기독교가 순교를 가장한 자살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음을 말한다. 실제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앙을 이유로 엄청난 학대를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당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성인의 반열에 놓고 숭배한 경우가 있었다.

이런 현상은 신앙적으로 순교를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순교하면서 그들의 순교가 하늘의 축복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초기 카톨릭 교회는, 삶이 눈물과 절망과 유혹으로 가득한 지옥이 아니라면 참아야만 하는 엄중한 것이지만,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영광은 세상의 삶 너머에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죽음으로 초대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은 “순교를 사모해 자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의 즐거움”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어거스틴조차 “만일 자살이 죄를 사하기 위해 허락된다면, 자살은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행동노선이 돼야 할 것이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시사한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교회는 이런 신자들을 이단자로 선고해야 했고, 이들을 교회로부터 파면하기도 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당시 기독교인들은 원형 경기장의 사자굴에서 사자 밥이 되기도 했다. 로마는 사자와 불 등 갖가지 고문들을 영원한 구원의 도구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며 무척 당황하고 경악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형벌을 달게 받으며 자신들의 믿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지속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가급적 관용을 거부했다. 죽음을 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영국 작가 알바레즈는 논문에서 순교란 로마인들의 박해에 대한 기독교적 창조라고 말했다. 터툴리안은 ‘고난을 피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순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으로 목숨을 바친 이전 순교자들이 교회력에 기록되고 그들의 유골이 따로 모아져 교회에서 성스럽게 숭배되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기도 했다. 순교자들은 낙원에서 자신들을 괴롭히고 죽였던 자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다. 당시에는 기독교의 피가 부어지지 않으면 누구도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상이 팽배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죽음을 열망하며 현세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려 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저항하지 않고 죽음의 형벌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순교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에게 둘러싸인 독재자는 “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그리고 스스로 물에 빠져 익사해보시오!”하고 외치기도 했다. 이를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을 대개 이런 식으로 조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역사학자 E. 기번(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순교의 유혹은 시대를 드러내는 표지라고 기술한다. 그는 “사람들은 무척 굶주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즉시 고문당하거나 자살했다. 이것은 광기와 열광에 가깝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때도 교회를 점령하고 목사와 성도들을 불러세워 “예수의 초상화에 침을 뱉고 믿지 않는다고 하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고 위협할 때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한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의 말대로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

기독교에서 자살이 신앙적으로 실천된 것은 박해가 심했던 4-5세기에 집중됐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맞섰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기독교는 수많은 생명의 피 위에 기초가 놓아졌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순교의 이름으로 미화된다 해도 어느 정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신앙적 용기가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맥을 이어온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시대건 이런 경향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2) 과도한 금욕으로서의 자살

과도한 금욕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중세 수도원에서의 자살이 이를 입증한다. 5-10세기까지 이교도와 신자들의 자살은 현저히 감소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자살이 오히려 증가했다. 이에 대한 의문은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신앙에만 정진하는 수도원에 몰려드는 금욕적인 이유에서 발견된다. 당시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를 박해하는 야만족들이 야기한 분노에 따른 공포, 수많은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삶에의 혐오,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지상의 고통에 대한 구원을 찾기 위한 것 등의 이유였다. 이런 이유로 남성과 여성들이 수도원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수도원에 밀려드는 현상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연관돼 있다. 당시는 영혼의 질병이 난무했으며, 정신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영적인 공황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고 영적 평안을 위해 수도원을 찾았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살한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번뇌를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 크리소스톰은 이에 대해 “수도원에는 질병과 근심, 악의 치유보다는 오히려 눈부신 기쁨 가운데 자살을 찾고 세상을 소비하게 만드는 아투니아(백배 더 강한 의미의 그리스 단어)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신앙의 기쁨으로 세상의 연락을 초탈하는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 내에 이런 신앙적 기쁨만 가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상적인 기쁨을 끊어버리면서 더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성 제롬의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성 제롬은 “수도원의 음침함과 부적절한 금식, 고독, 너무 많은 독서 때문에 수도승은 우울증에 빠지고 성직자들의 의견보다 히포크라테스의 치료를 더 필요로 한다. 나는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 심한 절제로 미쳐버린 사람들, 춥고 음침한 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봤다. 이들은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말하고 침묵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이는 도나파 신도들이 기쁨과 환희로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정상적인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세상을 경멸하고 천국에 대한 강렬한 소망으로 자살한 경우가 상당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수도원에서 자살이 빈번했던 이유는 과도한 금욕 때문이었다. 수도승들은 가장 어려운 최고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이 주는 기쁨, 오락 등 모든 인간적인 교류를 차단한 채 고요함 속에 살아갔다. 자발적으로 갇힌 그들은 아주 깊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삶에 역겨움을 느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성스러운 수도원의 신앙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죽음으로 치유하려는 일종의 정신질환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자살 강박관념’이 14-15세기까지 계속됐다는 사실은 놀랍다.

과도한 금욕으로서의 자살은 물론 중세에 한정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기독교가 신앙적으로만 편향될 때, 그러니까 세상이 주는 기쁨을 완전히 차단하는 경우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오로지 신앙적인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이 없는 생활 속에서는 자연적으로 세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상담치료를 하던 내담자 중에는 도저히 세상에 적응할 수 없어 혼자 하는 일을 선택하면서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걸린 경우가 있었다. 그는 교회가 가르치는 삶의 방법이 세상에서 전혀 통하지 않아 갈등했다. 이는 물론 극단적 경우이지만, 교회가 “비둘기같은 순결함만을 강조하고 뱀같은 지혜”를 역설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교회가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생명’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3) 이교도적 자살

이교도적 자살은 신앙의 이름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이런 이단 종파적인 자살은 지금까지 ‘태양의 사원’이나 ‘인민사원’ 등에서 신도 수백명이 집단 자살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교도적 자살은 20년 전부터 종교단체와 신비적 종교사상을 지닌 결사단체에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단체들은 모두 조직화돼 있으며, 통솔·이데올로기·예속이라는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또 대부분 비교적·균형적으로 체계화된 사회와는 다른 점을 지니고, 여러 초인간적 권력을 지닌 교주가 신도들을 지배한다. 교주는 신을 자칭하거나 자신을 메시야, 구세주, 예언자라고 선언한다. 그는 ‘계략’을 지니고 있으며, 지닌 권력은 과히 절대적이다. 그런 지도자들 중에는 무기를 지니고 있어 신도들이 잘못에 저항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신도들이 집단 자살함으로써 교주에게 순복하는 경우도 있다. 1968년 일본의 와카야마에서는 ‘진실의벗교회’ 신자 70명이 함께 자살했다. 그 전해 필리핀의 인디나오 섬에서는 ‘성직자의교회’ 신자 60명이 집단 자살했다. 1987년 8월 서울에서도 ‘오대양 집단자살’이 있었는데, 이때 신자 92명이 극적인 상황 속에서 자살했다. 1994년 스위스와 캐나다의 ‘태양의 사원’ 사건에서는 교주였던 유사법론자 루크 주레를 포함한 50명 이상이 자살했다.

그 외에도 도나파라는 한 기독교 분파에서 신앙적 신비주의 때문에 집단 자살했다. E.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들의 자살을 순교를 가장한 신비주의적 자살로 본다. 그들의 행동이 성화되고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면서, 개인의 삶을 혐오할 정도로까지 맹신을 추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중과 사제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이방인들이 믿는 신전을 더럽히고 그들의 축제를 무례하게 망치기도 한다. 또 법정에 무단 침입해 재판관들에게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이들은 여행자의 갈 길을 가로막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순교할 것을 강요한다. 로마 곳곳의 낭떠러지에서는 도나파 사람들이 부모·친구·형제·자매들을 데려온 후 식구와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투신하는 비극이 자주 벌어졌다.

이교도적 자살은 기독교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런 내막을 잘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이를 기독교로 오인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마치 기독교가 자살을 강요하는 종교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역사 이래 올바른 것에는 반드시 반대의 경우도 존재해 왔다. 다만 옥석을 가리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은 점이 문제다. 기독교가 신앙적 타격을 받지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이교도적 자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4) 악령적 자살

악령적 자살은 악령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행위이다. 악령, 즉 사탄이 나타날까 두려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사탄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사탄이 무서워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악령이나 귀신은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움을 유발했다. 이런 두려움을 신앙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도 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의 우울, 무료함, 명상 위주의 생활, 금욕주의 등은 이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정신 세계에 대한 교회의 지배,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비관적 생각, 지옥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들은 이들을 자살로 유혹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런 특성이 악마가 불러 일으키는 흥분과 절망의 충동으로 변해 귀신을 숭배하게 됐기 때문이다. 귀신을 숭배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루종일 루시퍼가 ‘나는 네 영혼을 원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모르쟁과 루뎅 지역에서는 당시 귀신 숭배에 의한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이들 지역에서는 100여명씩 자살했다. 사법부는 이런 식으로 자살하려는 남자와 여자들을 잡아 수감하고 교수형을 집행했다. 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윤리적인 고통과 더불어 형벌로부터 자기들이 저지른 모든 악을 일소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이들은 우물이나 강물 속에 뛰어들거나 칼로 자기 몸을 찔러서 죽었다. 이런 현상은 9세기까지 계속됐다. 자살에 대한 처벌이 사법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특이하면서도 당시 사회 분위기를 말해준다. 쉽게 자살 퇴치를 형벌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한 법정에서는 자살징후를 보이는 사람을 미리 가려내 처벌했다.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는 자살에 대해 5세기까지 모든 종교적인 방식들로 형벌을 동반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자살을 도왔던 공법이 처벌 대상이 됐고, 스페인에서도 자살하면 종교적으로 파문당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재산이 압수됐다. 러시아 기독교는 자살한 자의 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언의 효력이 상실됐다. 자살 미수자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는 형법의 출처가 바로 교회의 권위였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어떤 의식을 치른 후 자살한 자의 집을 저주했고 공권력으로 집을 불태웠다.

영국 10세기말 에드가왕은 자살한 사람을 절도법 및 기타 모든 범죄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자살한 사람의 시체는 나무막대기에 묶여 거리에 세워졌다. 자살한 사람은 반역자가 됐고, 모든 재산은 왕이 회수했다. 이런 규정은 1870년대까지 계속됐다. 프러시아에서는 1871년까지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정밀 해부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스위스에서는 칼로 자살한 사람의 경우 머리에 나무로 된 칼손잡이를 박았다. 익사한 경우 사체를 강변에 매장했고, 교살한 경우 신부 앞에서 사체를 토막내 개들이 먹을 수 있게 했다.

5) 결론: 잘못된 신앙은 생명경시 풍조로 이어질 위험이

악령적 자살을 역사적 근거를 대면서 기술한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잘못될 경우 일어날 자살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하자는 데 있다. 신앙은 삶에 도움이 되지만, 반대로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120년이 지난 상황에서 올바른 신앙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신앙과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진정한 신앙의 자리를 위협하고, 신앙으로 인해 삶의 고단한 무게가 느껴질 때 신앙인들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자칫 삶을 포기하는 수준으로 나가면 자살은 그만큼 쉬워진다. 이런 경우 신앙인들의 상황은 죽음이 한 걸음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이 시대에 효력을 발생하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상에서 신앙적 자살을 다뤘다. 신앙적 자살은 어떤 이유로든 신앙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경우다. 여기서 우리는 이를 올바른 신앙을 다시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또 기독교 신앙이 삶에서 어느 정도 효력을 갖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의 자살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더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이 올바로 전파되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는 내세의 소망을 강조한다. 세상의 삶은 부정적으로, 천국의 삶은 긍정적으로 투영한다. 이는 물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것을 권하는 것이지만, 잘 이해되지 못하면 목적에 어긋나는 결과도 발생할 수 있다. 성도들이 천국에서의 생활을 지나치게 소망한 나머지 세상의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기독교인의 무의식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이유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상당수 자살했다.

오늘날에도 어떤 이유로든 삶의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가르침은 천국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 수 있다. 고통스러운 이 세상의 삶을 접고 낙원이라는 저 천국에 가기 위해 가급적이면 생을 빨리 마감해야겠다는 심리, 즉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저 세상에서는 더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만든다. 일전에 보컬그룹의 어느 가수가 자살하면서 ‘하느님 곁으로 간다’고 했던 유서의 한 부분은 한 개인의 문제이지만 이런 위험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보다는 저 천국 위주로 편향돼 있는 점이 장점이면서도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삶을 균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천국을 강조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 세상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8. 자살의 예방-(1) 자살의 위험요소

자살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자살하려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많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자살하려는 사람의 동정을 살피며 시간을 다퉈 신속·적절히 처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간적인 실수로 생명을 잃게 되기 쉽다. 이는 자살의 예방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다.

자살의 예방에서 자살의 위험요소(risk factors)를 파악하는 일은 일차적이다. 자살의 위험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은 가장 쉽게 예방적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물론 자살 기도자들의 단일 요소로 자살의 직접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는 않다. 그러기에 일단 통계적으로나마 자살 가능성이 높은 ‘위험 요소’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의 위험요소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사회생활과 사람들로부터의 고립

사회생활과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은 위험요소다.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힘이 빠지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심하면 집 밖을 나서지 않으려 한다.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만나며 살아야 하는데, 힘이 빠지면 사람을 싫어할 뿐 아니라 만나지 않게 된다. 이런 현상은 이미 ‘마음의 병’이 든 것으로 그 결과는 고립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싫어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한 증상이다. 이런 현상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을 넘어선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사람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다. 그러기에 이는 이미 마음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급격하게 감소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아동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둘 수 없다. 다양한 계층에 자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초등학생까지 자살하는 형국이다.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인한 중고생과 재수생의 자살이라든가 인터넷 자살사이트의 공개적인 유혹, 경기침체 장기화와 실직, 직장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자살, 그리고 독거노인의 자살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을 회피하는 현상은 다음 유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첫째, 자연을 찾는 유형이다. 주로 자연을 찾는 사람들은 사람을 싫어하는 하나의 유형에 해당할 수 있다. 등산을 좋아하거나 들이나 바다로 자주 나가려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 중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쉼을 위해 자연을 찾는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사람을 싫어해서 자연을 찾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에 병이 들어있다.

둘째,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는 유형이다. 마지못해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사회생활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만, 마음 속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경우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 눈여겨봐야 한다. 셋째, 두문불출하는 유형이다. 사람을 회피하기 위해 집에만 있는 사람들은 은둔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미 마음이 심각한 상태가 됐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하며 삶을 어둡게 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2)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잦은 언급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자꾸만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위험하다. 삶이 허무하고 인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이미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삶에 대한 관심이 철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관심이 높아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죽음과 관련된 서적이나 영화, 음악 등에 집착을 보인다. 이런 태도는 자살 위험이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자살 시도자들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자주 자살 생각을 한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직·간접적으로 자살 의도를 내비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살 의도를 직접 질문해야 한다. 그 사람을 자극할까 두려워서 우회적으로 질문해서는 안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다만 적절한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살하고 싶나요?”라고 질문한다면 질문받는 자를 당황하게 만들어 순간적으로 “아니오”라고 거짓말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많이 힘들겠네요. 정말 어떤 때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 같아요”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자살 의도를 질문하면 자살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대응이 다를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이를 숨기고 암시적으로 말한다. “앞으로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나를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등의 말로 대신한다. 반면 너무나 힘들어 견딜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럴 생각이 있는 것으로 답하기도 한다. 이런 대응은 각자 다르지만 사실상 자살의 전조 증상이다. 그러기에 이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관념은 단지 무의식적인 변환의 충동이 구체적 관념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실제로 시도까지는 잘 이르지 않는다. 다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은 자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 자살 위험요소를 인지해야 한다.

자살이 임박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불안해한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오히려 자살 심리를 자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히려 자살의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불안감을 줄이는 쪽으로 대화가 진행돼야 한다. 이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효과적인데, 이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심리적인 상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3) 신체적인 질병이나 사고의 증가

신체적인 질병이나 사고의 증가도 자살의 위험요인 중 하나다. 신체적인 질병은 심리적인 약화를 초래한다. 중병으로 고통이 극심해 심리적인 괴로움을 경험하는 경우에는 죽고 싶은 생각이 많아진다. 반드시 질병이 아니더라도 약물 복용이나 알콜 중독 상태도 이와 같다. 알콜 의존이 다른 정신질환과 동반될 경우 자살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갑작스럽게 당한 사고로 신체 일부를 상실하거나 크게 손상을 당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큰 사고를 당해 신체 일부를 상실한 사람들이 대부분 자살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신체 일부를 상실했거나 큰 손상을 입었을 경우 의욕이 꺾이거나 좌절하고 갑자기 인생이 허무해진다. 필자는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 끝내 자살한 경우를 경험했다. 그는 주변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들어가기 어려운 명문대학에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고의 증가에서는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사고도 해당한다. 최근 가족들의 죽음이나 건강 상실 등 삶에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족들 중 자살한 사람이 있을 때, 죽은 가족에 대해 강한 죄의식을 갖고 있을 때 등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로 심리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살 시도자에게는 자살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중 자살한 사람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위험이 높아진다. 이런 경우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기 어려워 혼자만의 고민이 가중되는 편이다. 죽은 가족에 대한 죄의식은 강한 죄책감을 일으켜 자살해서라도 다시 결합하려는 심리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모양으로 사는 것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신다면… 저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다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등의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강한 죄책감이나 재결합의 소망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4) 학교 및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킴

학교와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도 자살 위험이 높아진다. 이는 학생은 공부에 성실하게 임해야 하고 성인은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거나 성인이 직장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무단 결근을 하는 경우 등을 상정하는 것이다.

학생이 학교에서, 성인이 직장에서 문제를 자주 일으킨다면 이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문제는 자살을 시도할 힘을 갖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살 시도를 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자살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자살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대개 무기력하게 있다 주변에서 우연히 자살 시도 여건이 마련되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자살 시도 여건을 마련해 주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생활이 자주 문제로 나타날 때 자살하려는 생각이 증가된다.

이는 학교와 직장이라는 사회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는 자살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와 상당히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의 경우 성적 비관이 가장 많다는 것에서도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입시 위주의 학습 부담이 청소년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같은 반 여자친구와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자살을 예고한 뒤 열흘이 지나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 어린이의 일기장에는 “내가 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면서 어른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이 씌어 있었다. 그 어린이는 그날 자신의 방 베란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아파트에는 안으로 문이 잠겨 있었고, 아버지는 철야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맞벌이를 하던 그의 어머니는 전날 밤 10시 퇴근해 문을 두드렸으나 문이 안으로 잠겨 있자 옆집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우리는 이 초등학생의 자살을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자살한 초등학생의 10월 29일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답답한 세상, 답답한 인생, 난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 답답한 세상과 꽉 막힌 인생 때문이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신다. 어린이인 나는 8시 30분부터 6시까지 학교와 학원, 10시까지 공부,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시험을 못 봐서 혼날 때는 이해가 가지만, 공부를 했는데도 부모님들은 공부를 안 했으니 이런 상황이 나왔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내가 어린이면 최대한 이해를 할 것이다. 세상은 답답하다. 난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린이가 왜 어른들의 개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초등학교 5학년의 일기 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워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학생들은 이 정도 글을 쓸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입시 위주의 우리나라 상황이 잘 드러나고 있어서 더 씁쓸해진다. 신나게 뛰어 놀아야 할 어린이들이 일찍부터 입시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할 중고생들의 경우 위험성이 더 높아진다. 성적이 떨어져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5) 정서적 교류와 관계의 단절

정서적 교류와 관계의 단절은 자살의 위험요인이다. 교류와 관계의 단절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마음문을 닫은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정도면 이들은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색된다.

교류와 관계 단절 상태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거절한다. 이미 자신의 상태가 더 개선될 거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하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는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도와주겠다고 해도 부담감만 느끼고 도움받기를 거절한다. 그러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교류와 관계 단절에서 급격하게 심각한 외로움을 유발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혼이나 독신, 별거와 이혼, 사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이는 부정적 행동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다음의 행동을 보일 때 예사로 보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직·간접으로 농담처럼 자살 의사를 비치는 것, 우울증이나 불안, 불면증으로 의사를 찾아가는 것, 평소에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나 친지를 찾거나 접촉하는 것, 특별히 자신이 입는 옷, 특히 속옷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 등이다. 이런 특징은 모두 자살을 염두에 둔 행동일 수 있다.

최근에 필자가 살고 있는 서울 어느 구에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몇몇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살 직전에도 학원을 하나 더 다니기로 친구들과 전화하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쓰던 모습이 발견됐다. 이런 학생들의 공통점은 대개 모범생이고 성적도 비교적 상위권이라는 점이다. 다만 부모와 정서적 교류가 없다는 것이 특징으로 발견됐다. 이는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면서 혼자 힘들어하는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6) 자살 막으려면? 자존감을 세워주라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의 위험요인에 대하여 고찰했다. 자살의 위험요인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바탕은 자존감(Esteem) 저하에 있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저하시키는 일 때문에 유발되는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존감, 즉 존재의 가치감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일을 실패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도, 원하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저하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경우 오히려 심기일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했기에 더욱 노력해서 기어이 성공으로 이끌 수 있고, 바라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가 새로운 경험도 얻는다.

그러기에 이들의 문제는 심리적 부정성(Negativity)에 있다. 평소에 부정성이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생각해서 노력할 정도의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돼 버린 상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가꿔야 한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은 성경의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부정적 에너지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좋지 않은 상황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비로운 경험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울수록 더욱 기도하고 신앙적인 노력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29. 자살의 예방-(2) 자살의 징조와 신호

앞에서 우리는 자살의 위험요소를 고찰했다. 자살의 위험요인은 자살의 징조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자살한 사람 10명 중 8명은 자살 의도를 미리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는 보고가 있다. 자살의 누설은 그대로 자살의 단서 제공이 된다. 자살을 누설하는 방법은 “나는 자살할 것”이라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자살 방법을 공개하며, “당분간 만나지 못할 거야” 처럼 간접적으로 누설하기도 한다. 직접적인 누설의 경우 “설마, 정말로 자살할 사람이 저렇게 말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간접 누설의 경우에는 그 말이나 행동이 자살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이러한 자살의 징조와 신호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해 기술할 수 있다.

1) 죽음과 관련된 말과 행동을 자주 한다

죽음과 관련된 말을 자주 하는 경우 조심해야 한다. 죽음과 관련한 말은 이들의 자살 의지를 보여주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상당 부분 죽음에 기까워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매우 어두운 심연에 이르면 죽음에 대한 말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어두운 심연이란 바로 마음의 지하실 가까이 있는 현상이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으므로, 마음의 지하실에 접촉하면 ‘죽음’이 단 하나의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자살하고자 하는 심리에 근접해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다.

우리 마음에는 실제로 어두운 마음의 지하실이 있다. 이를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이때 술에 심하게 취하면 더 깊은 지하실에 이르러 깜깜한 암흑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그저 죽고 싶은 생각만 가득해진다. 지나치게 술을 마셔 자살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런 경우다. 이런 현상은 일상 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깊은 고민이나 난관에 봉착하면 곧잘 여기에 도달한다. 이때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과 말을 하게 된다. 여기에 가까운 사람들의 경우 낙서장이나 일기장에서, 그리고 친구에게 죽음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지나 친구에 관해 자주 말하며, 자살에 관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자살을 시도한 일이 있는 사람을 찾는 등의 언어와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이 관찰되면 자살할 생각과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 심각하게 받아들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자살자의 60%는 자살 동기나 계획을 직접적으로 누설하며 20%는 간접적으로 누설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약 30%만 직·간접적으로 누설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의 경우 “죽고 싶다”고 하다가 조용하고 차분해지면 이미 자살을 결심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살이 임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이전에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고 정신과 입원 치료를 받은 일이 있으면 자살 위험도는 더 높아진다. 어느 경우에나 자살 시도의 가능성이 높은 시기는 첫 자살 기도 후 3개월 이내다. 특히 가족들은 한번의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안심하지 말고, 그를 계속해서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2) 소중한 물건을 타인에게 나눠준다

자신이 소중히 아끼던 물건을 나눠주는 일은 자살 징조다. 이는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현상이다. 사람에게는 원초적으로 소유 본능이 있다. 그런데 이 소유 본능에서 철수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멀리하거나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 자살한 남고생이 그런 경우다. 그는 평소 아끼던 CD와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리고 다음날 자살했다. 친구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해 반갑게 물건을 받았지만, 그것이 그가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알았을 때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알아차리지 못한 죄책감에 오히려 시달려야 했다. 물론 이런 행동도 성격에 따라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성격이란 특정 상황에서 일정한 행동을 유발시키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이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만들기도 하는 내면의 심리적 세력이다. 자살하기 전 물건을 나눠주는 행동도 일종의 성격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무언가 정리하려는 심리는 인간의 본능적인 차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날 수도 있다.

자살하기 전 물건을 나눠주는 사람은 대개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평소 남달리 물건에 애착을 보여온 것이다. 물건에 마음을 두고 때로는 의지하고 정(情)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던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서는 소중하게 아끼던 물건을 나눠주는 행동은 심리적으로 묶어뒀던 것을 풀어버리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우울증이나 비관적 태도 이상의 다른 성격적 특성이 관련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은 일정한 유형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대개 타인의 비난에 과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형, 충동적이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며 예측할 수 없는 유형,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해 접근이 어려운 유형, 높은 기준을 고집하는 완벽주의자로 실수를 두려워하며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유형 등이 있다. 이런 유형에 따라 행동의 차이가 조금 있지만, 무언가 주변을 자꾸 정리하는 기미가 보이면 자살을 의심하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3)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행동은 위험하다. 물론 그렇게 위협하고서 자살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사용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심각한 상황에 있는 경우는 실제로 자살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이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자살 위협에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자주 취했던 행동인가 아니면 최근에 하는 위협인가, 그리고 특정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하는 것인가다. 자주 위협하는 경우라면 단순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던 사람이 위협하는 경우, 특정 사건 때문에 위협하는 경우라면 주의해야 한다. 자살 의지와 상당히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위협의 강도를 인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면에 강력한 자살 의지가 있는 경우라면 그 강도가 드러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매우 약하게 위협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자살할 결심이 섰다면 마음이 차분히 정리돼 있을 수 있다.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발달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살 시도나 자살에 성공한 청소년 중 상당수는 발달 과정에 문제를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습장애, 언어장애 등을 보이거나 매우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던 아동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자살을 시도하는 상당수 청소년은 약물 남용이나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편이다. 특히 반사회적 성격 또는 경계선 성격장애 청소년들이 반복적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이 때문에 공격성·충동성과 자살 행동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청소년들은 아직 전두엽이 완벽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사고의 판단이 합리적이지 않은 편이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은 더욱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4) 평소와는 달리 행동에 큰 변화가 있다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에 큰 변화가 있다면 자살의 징조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일상생활을 거부하며 매우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직장에 열심히 출근하던 사람이 갑자기 휴가를 낸다거나 결근하는 경우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던 사람이 어느날 도저히 그 사람과 사귈 수 없다는 식으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학생의 경우 학업 성적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거나 낙제, 정기결석, 가출, 학교중퇴 등을 시도하는 경우다.

커다란 행동 변화는 마음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다는 신호다. 이런 행동 변화 중 가장 위험한 신호는 심리적으로 예전과 매우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경우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불안정하고 침울하던 사람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평화롭게 보이는 경우다. 이미 마음에 어떤 결정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툭하면 목소리를 높여 싸우려던 남편이 전혀 싸우려 들지 않거나 오히려 조용해지고, 가정 일에 신경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신경을 기울이는 등의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청소년의 경우라면 부모로부터 심한 꾸중이나 심리적 거절에 대해 반항하던 학생이 전혀 반항하지 않고 매우 순종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모두 눈여겨 봐야만 하는 행동들이다.

큰 행동 변화는 사실상 심리적인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이미 마음 속으로 큰 결심을 하면 작은 일에는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거나 유연해지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죽음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 초연해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이라 말한다. 그래서 상담 현장에서는 작은 고민을 해결하고 치료하는 수단으로 곧잘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하며 마음을 전환시킨다. 이는 심리적 변화가 행동을 변화시키는 근본 바탕이라는 관점에서 시도된다. 이런 점에서 평소와 크게 다른 행동 변화는 쉽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요인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5) 심각한 절망에 빠진다

심각한 절망은 정신 에너지를 급격히 떨어뜨린다. 평소 일처리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하던 사람도 심각한 절망에 빠지면 전혀 그답지 않게 일처리를 한다. 명쾌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던 사람도 매우 단순한 논리에 사로잡혀 행동하고 만다. 이를 두고 상담 현장에서는 심각한 절망에 빠지면 누구라도 ‘까만 벽’만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다. 평소 다양한 방법으로 일처리를 잘 하던 사람이 매우 단순하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때로 사회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자살하는 경우를 경험한다. 우리는 그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판단을 내린 것을 보고 놀란다. 성공의 길을 달려오느라 힘들었을텐데 단순한 말 한 마디에 목숨을 포기하거나, 그냥 지나쳐도 될 모욕을 견디지 못한 사례에 대해 의아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심각한 절망이 어떤 것인지 모를 때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심각한 절망에 빠지면 전혀 앞이 보이지 않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긍정적 측면은 보이지 않고 ‘까만 벽’만 보이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일을 실패하고 심각하게 절망에 빠지면 자살 위험이 높아진다. 사업이 도산해 빚더미에 앉거나 생각지도 않은 실직에 내몰릴 때, 그리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을 때 등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다른 연령군에도 그렇지만 특히 청소년기에 더욱 심하다. 청소년들의 경우 자살 당시 부모나 친척의 죽음, 동생의 출생, 가족의 병원 입원, 잦은 이사 등 스트레스가 높은 생활 사건이 많았다. 특히 가정불화와 잦은 싸움, 별거 및 이혼 등과 관련이 높으며,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등이 자살 행동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절망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6)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은 일이나 상황을 견뎌낼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는 일을 그르칠 위험이 그만큼 높음을 의미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적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그것이 지속적이고 너무 강하면 거기에 압도된다.

어떤 일을 실패하면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진다. 청소년 자살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 부모간 불화, 부모와 청소년 자녀들 간의 불화, 부모 상실이나 이혼, 진학 실패 및 성적 부진, 친한 친구로부터의 거절, 성관계 후 임신, 이성친구에 의한 실연 등의 생활 사건이 많은 청소년을 자살로 이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성적이나 입시 실패와 관련해 청소년 자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사춘기 이전의 아동에서는 특히 부모의 꾸중이나 정서적 거절, 버림받았을 경우 자살 충동이 증가한다. 또한 학교폭력이나 왕따에 시달리는 학생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자살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의 스트레스에서는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성적 비관보다는 가정 내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것이다. 성적이 떨어질 때도 성적 불량 자체보다는 성적 때문에 일어나는 부모와의 갈등이나 심리적 버림, 무력감 때문에 자살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외형적으로 성적 비관, 입시 걱정으로 자살했다고 보고되지만 기저에 깔려있는 정신역동적 측면과 정신과 진단을 보면 상당수는 이미 우울증에 걸려있거나 정신분열증 초기 또는 가정의 정서적 지지 상실 등을 심하게 경험한 청소년임을 알 수 있다.

비단 청소년 뿐만 아니라 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경우 세상이 깜깜한 암흑으로 보이고, 그저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 뿐이다. 우리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에서 이를 잘 경험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극심한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스트레스가 아무리 높다 해도 감당할 만큼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고갈된 에너지에 스트레스까지 산더미처럼 내리 누르고 있다면 누구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 정도의 상태를 병리적 상태로 규정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심리적 질병 상태이기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7) 청소년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지 말고…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의 징조와 신호를 다뤘다. 이런 징조와 신호는 익히 알던 것이어서 새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비화될 수 있는 점에서 경각심을 갖고 관찰해야 한다. 특히 우발적 행동을 취하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충동성이 강해 우발적인 행동으로 주변을 놀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잘못했더라도 너무 심하게 꾸중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다. 스트레스와 부정성이 가득한 청소년들은 그것이 자극이 돼 우발적으로 극단적 행동을 취할 위험이 높다.

이런 자살의 징조와 신호들은 모두 정신 에너지가 급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비롯되는 현상들임을 알고, 적절히 대응 및 대처하려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미 수차례 신호를 보냈는데도 간파하지 못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해 귀중한 생명을 잃고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30. 자살의 예방-(3) 자살이 임박한 사람들

자살예방은 자살하려는 사람의 신호를 잘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일정한 신호를 보내고, 그 신호 후에는 실제 행동으로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이들을 압도해 어두운 곳으로 밀어내는 작용이 있음을 가정한다. 이런 상황은 이들을 악화시키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이를 어두운 심연이라 부를 수 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 헤어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어두운 심연의 함정에 있는 경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그만큼 절대적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여러 말이 필요없고 작은 손길이라도 내밀어 잡아 끌어주는 행동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알아서 돕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자살 신호를 자살이 임박한 사람들의 신호라는 차원에서 고려하고자 한다.

1) 가족이나 친구 중에 자살을 한 사람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한 경우 자살 위험은 그만큼 높아진다. 일종의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나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가까운 친구가 자살에 성공한 경우 그 영향이 크게 작용하기 쉽다. 가까운 사람의 자살은 평소에 자살하려는 생각만 하던 사람에게 자살 관념을 증가시켜 에너지를 갖게 만든다.

자살 관념은 무의식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갖게 만들어 활성화되기 쉽다. 마치 무서운 전염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전염성은 모방 자살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켜 모방 자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보도된 뒤에 자살 사례가 연거푸 생긴다든가, 집단 동반 자살의 참극이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한 경우에는 특히 기후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기후는 사람의 행동에 가장 직접적인 자극을 가해 자살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살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1년을 더운 시기와 추운 시기의 두 기간으로 나눌 경우, 어느 나라에서나 예외없이 자살은 대부분 더운 시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최초로 지적했다. 이는 <의학 심리학>이라는 잡지가 증명한 결과와 일치한다.

프랑스의 플로레와 듀그라 박사는 마르세이유에서는 기온이 22도를 넘으면 자살이 증가한다고 지적했다. 카바느 박사는 특히 건조했던 여름이 지나고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이 자살에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후가 가장 온화한 때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기 쉬움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춥거나 더운 극단적인 날씨가 사람들을 자살로 내몬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기후의 영향을 자살 경향과 관련해 연구한 바는 드러나지 않지만, 대개 감정이 가라앉기 쉬운 때를 조심해야 한다. 개인의 마음이 가라앉기 쉬운 때에는 우울 성향이 높기 때문이다. 햇볕과 가까이 살아가는 우리의 경우 우울해지기 쉬운 날들을 견디기 어렵다.

2)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자살할 위험을 언제나 갖고 있다. 자살 시도자와 자살자들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가장 흔한 것이 주요우울증, 양극성 장애, 약물남용, 품행장애 등이다. 청소년기에는 특히 충동성이 문제가 되는데 비행, 적대적 반항장애, 약물남용 등의 행동문제를 가진 청소년이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실제로 자살로 이어진다.

샤퍼(Schaffer)는 실행이 매우 어려웠던 자살 청소년 173명에 대한 심리부검을 실시한 결과 자살 시도력, 주요 우울장애, 약물남용이 가장 흔한 자살의 위험 요인임을 보고했다. 이 점은 다른 연구에서도 발견된다. 자살 시도자의 정서와 행동을 보면 우울증에 빠진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 외로운 사람, 독신자, 알코올 중독 혹은 남용, 정신질환자, 정신질환에서 회복된 사람 등이 있다. 외부적 계기로서는 친구, 가족, 우상적인 사람의 자살이나 죽음, 명예훼손, 심각한 질병 등이 있다. 스트레스와 관련해서는 직장에서의 사고나 압력, 실직, 이혼과 같은 가정 스트레스 등이 해당한다. 자살 시도 경력에서는 아무래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사람이 가장 높으며, 사회적 조건에서는 정서적 지지 세력이 없거나 중요한 사람으로부터의 거부·거절 등이 우위를 점유한다.

정신장애를 앓는 사람이 더 자살 위험을 보이는 것은 절망감을 깊이 느낀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중간 중간 정신이 들었을 때 깊은 절망을 느낀다. 실제 임상 경험을 보면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약물치료를 받고 병이 호전됐을 때 자살 시도가 많은 편이다. 우울증이 극심하면 죽을 힘조차 없기 때문이라는 임상 결과다. 그러므로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자존감이 현저하게 낮아진 사람

자존감이 현저하게 낮아진 사람도 위험하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현상은 삶의 확신과 관련된다.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자존감 약화는 삶의 확신마저 약화한다. 삶의 확신이 약화되는 현상은 생활 능력의 문제를 나타내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심리적 건강이나 질병 문제와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개인의 생활이 가능한지 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런 이유로 삶의 확신은 능력의 기능마비나 불가능성에 이를 수도 있어 때로는 치료가 필요하다. 개인의 생활능력이란 단순히 생활할 수 있는 신체의 건강만이 아니라 그 장애를 갖고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나타낸다.

이러한 삶의 확신은 질병이나 건강과는 간접적으로만 관련이 있는는 것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생활력은 삶의 확신에 기인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삶의 확신에 문제가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개인의 생활력이 문제된다. 생활력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소망이 끊겼다면, 삶에 대한 확신이 더 약화된다. 이러한 자존감 약화는 대개 적응 문제로 나타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충분한 사회적 지지기반과 환경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거나 부모와 친척간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가까운 곳에 자기를 이해해줄 만한 사람이 없을 때는 문제가 생겨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 무기력하고 희망이 없어진다. 이런 경우 충동적 혹은 절망적으로 자살행동을 시도할 수 있다.

4) 무단으로 가출하거나 잠적하는 사람

무단 가출이나 잠적도 자살 임박을 알리는 신호다. 이들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없어지는 상황을 미리 느껴보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를 경험해 보려 한다.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아 점검하고 그곳을 자주 간다. 이런 경우 장소를 확정하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모습일 수 있다. 자살 시도자들은 집을 나가거나 잠적하면서 자신은 이렇게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등의 암시적인 말을 한 경우가 있다. 하루 이틀 집을 떠나보고 자신만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런 행동을 하다가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물론 무단 가출하거나 잠적하면서 자살 의도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행동으로 자신이 바라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경우다. 이런 사람들은 죽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면서 실제로는 이런 자신을 말려주기를 바란다. 이와 달리 진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의 경우에는 예비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런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죽으려 하지 않는 것으로 오판하는 경우 자살이 일어나면 자살예방 차원에서 실패한 경우가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한 무단 가출은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스스로 뭔가 준비하는 행동이 보일 수 있다. 몰래 약을 사 모으거나 위험한 물건을 감추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고, 항정신성 약물, 담배, 알코올 섭취가 증가한다. 이런 행동을 하면서 가족이나 친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하거나 요구가 관철되기를 바란다. 이런 행동을 해도 도저히 상황이 반전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자살을 결심한다.

5) 자주 유언을 말하는 사람

자주 유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살이 임박했다고 봐야 한다. 유언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다. 유언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하게 되는데, 평소에도 자주 말한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관념이 지배적일 때는 유언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 정식으로 유언장을 쓰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다르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에 자살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글로 쓰려 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경우 무의식적으로 일종의 암시를 보이는 행동이므로 자살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이런 유언이 건설적인지 아니면 절망에 빠진 사람의 최후 감정인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다. 건설적이고 합리적으로 유언을 하는 경우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차원이지만, 절망에 빠져 하소연하듯 하는 경우는 자살 관념에 지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살적 유언에는 미련과 바람이 들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살 시도자의 미완적 삶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지각색의 기묘한 방법으로 관심 끌려는 메시지를 남긴 사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는 바람, 자신이 지구에 존재했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쓴 사람, 진정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쓴 사람 등이 있다. 이런 유언과 관련, 게리 교수는 <프랑스의 윤리 통계>라는 책에서 자살자들의 최후 메시지를 빈도수로 나열해 놓았다.

자살자의 유언을 빈도수에 따른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과 인생에 대한 불만,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작별의 말, 장례에 대한 지시, 신의 자비에 대한 믿음, 내세에 대한 신앙,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에 대한 유감, 속죄하고 싶다는 생각, 자신을 그리워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을 자살하게 만든 그간의 괴로움에 대한 것, 자살을 알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정신적 고민, 자식에게 자기가 죽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 유품(초상 사진, 반지)을 모두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용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머리카락을 한 움큼 남기고 싶다는 바람, 시체 검안소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성직자에 대한 모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다.

이런 유언은 모두 인간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는 말이지만, 가장 깊은 속에 담고 있는 말들이다. 이와 달리 자살의 고통을 자세하게 기록한 사람도 있고, 죽을 시간을 기록해 두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냉정하게 쓴 자살자도 있다.

6) 결론: 어쩔 수 없이 죽는 사람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죽으려는 의도가 강력한 사람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설사 알아낸다 해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죽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자살은 어느 정도 자기합리화를 이룬데서 비롯된 결과다. 자기 나름대로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 행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살자들은 묘비에 이런 아랍 속담을 즐겨 사용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낫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눕는 것이 낫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강하게 해서 마음이 편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자살을 위한 노력이 별로 도움이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그 한 순간만 넘길 수 있게 돕는다면 가족을 위해, 아니 세상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예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하겠다.

 


31. 자살의 예방-(4) 기독교인들의 자살 예방

자살은 개인이 심각한 무력감에 빠질 때 출구의 하나로 선택될 수 있다. 이는 최근 젊은 연예인들이 기독교적 신앙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살한 것이 입증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실제로 극한 상황에 이르면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분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모두가 심각하게 무력화되는 상황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신앙 만능만을 고집하다 화를 당하는 경우를 방지해야 한다. 필자는 신앙적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자살 예방을 위해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병리적 신앙을 경계하자

병리적 신앙이란 이른바 ‘병든 신앙’이다. 신앙이 병들면 생기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활력이 없어진다. 최근 목회 보고서들에 의하면 기독교인이라도 각종 병리 현상에 예외가 없다. 이런 현상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해 정신의 허약함이 드러난 결과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의 정신 질병은 신앙과 관련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질병은 대개 특정한 신앙 형태, 즉 권위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 신앙, 신앙적 기대가 과장됐거나 소원 충족에만 집착하는 신앙심에 빠진 경우 등에 관련된다. 이들의 특징은 대개 포용하거나 이해하는 태도를 갖지 못한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목표가 너무나 뚜렷하다 보니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한다.

우리는 최근 잇따른 기독교인들의 자살을 두고서도 얼마나 마음 좁게 비판과 정죄를 가했는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하였을까?” 라는 태도로 이해하지 못하고, 심한 욕설과 함께 비판과 정죄를 서슴치 않았다. 그런 태도는 진위 여부를 떠나 분명히 기독교인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물론 모든 것을 덮어 놓고 ‘옳다고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옳다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심이 있지만 편협된 신앙은 ‘신앙적 오만’을 낳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적대감을 통제하기 위해 신앙을 잘못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개 신에게 높은 소원을 요구하거나 신이 징벌하는 주체로 자신을 생각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신앙심과 병리적 현상의 모순된 관계로 발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의 행동은 자신의 생각에는 너무나 신앙적일지 모르지만, 그와 달리 상당히 병리적인 경우도 발생한다. 스스로 정신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신앙의 특별함이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정신적인 장애가 발생할수록 진정한 신앙에의 참여는 감소하는 반면 병리적 행동은 증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의 병리적 행동이란 현실 생활과의 균형을 잃는 것으로, 내적인 의미와 다르게 신앙적 행위만을 일삼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일상 생활을 소홀히 하면서도 더 많이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데 치중하는 형태다. 이는 신앙 공동체를 떠나서 행하는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하지만, 증상적으로는 정신 질환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신앙적 투신과 정신병, 신경과민적 불신 등은 이미 생활에서 균형 감각을 잃은 병리적인 상태다. 그러므로 삶과 신앙의 균형 유지가 중요하다.

2) 분기별로 정신건강을 체크하자

기독교인에게도 정신 건강(Mental Health)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을 가지면 정신이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인이라도 정신 건강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대개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삶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탓에 오히려 죄책감을 많이 갖고 있다. 대개 동일한 잘못을 했어도 신앙인이기에 두 배의 죄책감을 느낀다. 잘못한 것을 두고 개선의 여지를 보이면 될 것을 ‘하나님이 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 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시다! 심지어 그 일이 일어났던 것까지도 감사합시다!”고 권유한다.

교인들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는 성도들을 목회적으로 돌봐주는 행위에 해당한다.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 보다 교회가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 이들을 돌보려는 목회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분기별로, 아니면 전·후반기로 나눠서라도 간단한 정신건강 체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껏 해야 구역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목회적 태도는 옳지 않다. 구역장은 전문가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자신도 문제를 가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교구 담당 부목사가 이를 개입하거나 관여한다 해도 그들 역시 전문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 차원에서 간단한 심리검사를 실시, 정신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교인들을 미리 발견하고 일정한 교육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얼마 전 기독 연예인들의 자살도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필요성과 함께 아쉬움이 남는다.

3) 기독교인의 영적 건강을 중요시하자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건강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의 건강은 물론 영적인 건강을 의미한다. 신앙이 활력을 잃게 되면 각종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신앙인들에게서 매우 신앙적이지 않는 면도 발견된다. 신앙적 형식주의에 치우쳐 실제로는 활력있는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상담자는 영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치료를 진행한다. 영적인 힘이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건강과 관련해 대표적인 것은 전술한 대로 ‘우울증’이다.

우울증과 관련, 매사에 의욕이 없고 부정적인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정신 에너지를 ‘제로(zero) 상태’로 보고 관찰해야 한다. 이는 신앙이 약화될 때 자살 위험이 더 높아짐을 시사한다. 특히 우울증이 유발되는 측면과 관련된 사람들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울증은 흔히 강박적이고 철저한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며, 이들은 대개 사회 생활을 착실히 하고 사회의 도덕규범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 특히 신앙적으로 교회 일에 성실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절망감, 허무감, 삶의 무의미 등에 빠져 기력을 잃기도 한다. 이런 우울증이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면과 연계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추구하는 본질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는 현실적 욕구와 불만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당 부분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과 관련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경우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무력감을 경험하고 자살할 수 있다.

신앙인이라 해도 급박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반대급부로 ‘저 세상적인 것’을 이상화시키는 비현실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일종의 현실 도피적 태도를 취하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중세 수도원에서 자살이 많았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세상과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로지 신앙에만 정진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우울증을 증가시켰다.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열망이 강해졌던 것이다. 괴롭고 힘든 세상을 벗어나면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때 우리는 자살자들이 죽은 다음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왜 생각하지 않는지 등을 두고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당장 그런 것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생각할 힘이 없는 상태다. 평소 기도하면서 신앙적으로 무장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4) 신앙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강화하자

최근 기독교인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기독교의 신앙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런 문제는 지난날 기독교가 사회를 선도하던 시대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게 돼 버렸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편협된 시각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신앙을 상실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잘못된 신앙, 형식적인 신앙은 생활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뭔가에 가리고 얽매인 신앙적 특성은 자칫 세상을 포용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격리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세상을 결코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만 여기면 안 된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이 땅의 삶은 ‘영원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저 세상을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면 삶에 대한 의욕이 서서히 약화되는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다름 아닌 신앙의 무기력 상태다.

신앙의 무기력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다. 활력을 가져야 할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면 질병 상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 치료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은 그 원인의 하나로 현대인의 무의미(無意味)를 정신적 문제로 지적한다. 현대인에게 삶의 무의미(無意味)는 삶의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 무의미(無意味)가 삶의 무기력과 정신병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면 신앙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인(敎人)은 무의미는 아니라 해도 곧잘 무기력 상태에 노출될 수 있다. 게다가 신앙 생활이 무의미한 상태의 교인이라면 언제든 무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교인은 잠재력이 침전되고 삶의 단조로움과 무기력이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힘이 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의욕 상실의 심리적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교인은 원인 모를 공허감이 그들의 실존적 공백을 채워, 신앙적으로 생활을 창조하기 어렵다.

5) 내세 신앙으로 소명을 강조하자

기독교인의 심리는 고정적이지 못하다. 주변 환경은 신앙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이런 경우 신앙이 확고하지 못하면 외부적인 위협에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는 신앙이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 갑작스런 사건 변화 등에 의해 손상이나 상실에 노출됨을 의미한다. 이런 점은 목회자에게 내세 신앙을 다시 강조하고 새 힘을 얻게 만들어야 함을 상정한다.

내세 신앙은 물론 죽은 다음 천국 가고 지옥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에서 자신의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바로 자신이 삶에서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일을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런 내세 신앙은 존재와 신앙, 그리고 소명 내지 사명의 문제와 중첩된다. 즉 삶을 사는 존재로서의 회복일 뿐 아니라 사명자로서 건전한 신앙의 회복이다. 소명감이 분명할수록 삶에서는 힘이 될 수 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어려움을 극복할 힘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순간이나마 망각한 경우로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간적인 망각이 엄청난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내세 신앙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은 한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의 접촉 결여로 생의 무의미한 악순환 속에 빠졌다. 그녀의 삶에 대한 무의미의 문제는 치료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일기 속에 그 일단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계신다. 나는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내 일이다.” 그녀는 ‘인간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보다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무슨 임무를 마련하고 계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무의미의 발견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인데, 이는 마침내 삶에 대한 소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로 그녀의 무의미의 발견이 끝내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6) 체험적 신앙 생활을 훈련하자

기독교인의 신앙 생활은 체험적이어야 한다. 체험적인 신앙은 힘이 있어서 생활 속에 만나는 여러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체험적인 신앙은 감동을 낳고, 삶으로 이어지는 생동감을 발휘하게 된다.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세대이다.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세대는 EPIC이라는 네 특성으로 요약된다. 이 네 가지는 그 첫글자를 딴 것으로 먼저 그들은 경험(Experience)하고 싶어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그저 알기보다 자기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하며,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한다. 또 그들은 참여(Participatory)하길 원하고 그저 일방적인 수여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또한 관계성(Connected)을 중시하며, 이미지 중심적(Image-drive)이다. 즉 포스트모던인들은 말과 글로 충분히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이미지나 은유로 표현하기 원한다.

실로 오늘의 기독교는 고대 기독교의 영성과 오히려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는 ‘빈티지’(vintage)가 중요시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도 적극적인 참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공동체성을 더욱 지향하며,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하는 예배를 강조한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생활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됐다. 이제 나에게는 무의미의 심연이나 나락(abyss)은 없으며, 나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존재로 나의 삶은 다시 멋있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떠오르는 교회들이 ‘빈티지 신앙 예배’(Vintage-Faith-Worship)를 추구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체험적 신앙이란 피나는 훈련으로만 가능하다. 일과성에 그치는 수련회나 집회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된다. “너희가 말대로 살면 내 제자가 되고(요 8: 31)”라는 말씀은 체험을 요구한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말씀을 붙들고 한 주간, 또는 일생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성경을 공부하는 것으로만 되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체험이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는 진정한 ‘통회와 자복’이 없는 것도 문제다. 정신 분석에서도 ‘애도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면 진정한 인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신앙적으로는 통회와 자복의 자리다. 교회가 진정한 신앙의 부르짖음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신앙 집회도 문제다. 유명한 코미디 강사나 모셔 말씀을 곁들여 한바탕 웃고 쓸쓸히 돌아서는 교인의 뒷모습을 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식하지만 눈물 콧물 흘리고 부르짖던 뜨거운 ‘심령부흥회’가 그립다.

7) 결론: 신앙으로 자살위기 극복한 사례 많이 나타나길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자살을 예방적 차원에서 기술했다. 이는 신앙적인 측면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올바른 신앙 외에도 세상을 보는 관점, 보다 긍정적인 시각, 그리고 삶의 가치관까지를 다양하게 포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넓히는 문제가 매우 중요시된다.

이런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앙이 형식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라면 삶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위에 기독교인의 정신 건강에 관심을 기울여 목회적인 체계를 가지고 대응하자는 깊은 권고가 내포돼 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신앙이 위력을 발휘해 극복하였다는 간증을 들을 수 있는 시대를 기대한다.

 


32. 자살의 예방-(5) 자살하기 쉬운 사람들

자살하기 쉬운 사람들은 자살 위험이 높아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들은 그 순간만 모면해 낸다면 자살을 피할 수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 기독교인들의 자살 예방법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기독교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할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들이 바로 자살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에 자살 위험성이 높다. 실제로 그들은 한두 가지 특성 때문에 자살 위험에 노출돼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면 자살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1) 절망에 빠진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자살할 위험이 높다. 이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의 해결 수단으로 자살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다. 절망은 개인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킨다. 평소 정상적이라 해도 절망의 수렁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하는 데서 입증된다. 성공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어느 순간 절망하고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란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 때는 고통스러운 상황도 극복할 수 있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좌절의 벽에 부딪쳐 굴복하고 마는 현상과 같다. 평소 명쾌한 판단을 내리던 사람이라도 어려움에 봉착해 해결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전혀 그답지 않은 결론을 내리고야 마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 중은 대개 사회적인 상황과 관련된다. 사회적 상황이란 대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삶의 기반이 흔들릴 때 심각하게 좌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가 났거나 실직한 경우, 성공을 향해 달려가다 추락한 경우, 갑자기 사고를 만난 경우, 희귀병에 시달리는 경우 등이다. 이들이 자살하는 근본 원인은 삶의 기반을 더 이상 개선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경제적 측면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 상황을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을 때는 매우 부정적인 심리 상태가 되기 쉽다. 이런 부정적 심리 상태에서는 더 이상 더 나아진다는 희망이 없어져 출구의 하나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불황의 장기화와 양극화, 실업률 증가. 물가불안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침체되면서 자살이 증가하는 사회적 현상에서 입증됐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만 볼 수 없기에 사회 병리현상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 중심축이 되는 정치·경제 등이 위기나 혼란에 있을 때 자살 경향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절망하는 개인은 통제를 벗어난 감정들로 서로 조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충족돼야 할 감정들과 어우러지거나 연합하지 못한다. 이런 감정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해 갈등이 대개 환멸과 실망의 길로 인도된다. 이때는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좌절 상황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 그 출구의 하나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존재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지위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람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지배 밖으로 벗어날 때 분노의 감정을 피할 수 없다. 이때 분노는 자신을 파멸시킨 현실이나 상상의 원인에 의해 반감을 갖게 만들어 상황에 대한 적응이 갑자기 차단되거나 와해되는 위험에 노출된다. 경제적 파산이나 실직으로 존재 가치가 추락하는 상황은 개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거기에 분노가 폭발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분노는 개인에게 사회적 상황이 자극돼 일어나지만, 개인이 분노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갑작스럽게 분노해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이나 운전 중에 화가 나서 가족을 태운 채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건은 모두 이것과 관련이 있다. 개인의 분노는 쌓아두면 둘수록 위험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교회가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목회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2) 사회 지지기반이 약화된 사람

사회 지지기반은 개인이 삶을 살아 나가는 기초다. 자신을 떠받치고 위험에서도 새로운 힘을 갖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바탕이다. 그러므로 지지기반이 든든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차이는 그 현상을 넘어 심리적으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지지기반이 든든한 사람은 어떤 위험에 노출돼도 해결하거나 개선하려는 비교적 안정된 심리를 갖지만, 약한 사람은 실수나 실패를 하면 큰 위험에 빠지거나 지금까지 쌓아온 공력이 붕괴될 수 있다는 초조함이 그들을 짓누른다. 이는 지지기반의 여부가 그만큼 삶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지기반에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 있다. 일반적인 것으로는 가족, 이성(異性), 친구, 직장 등 4분야가 있다. 이 4가지를 사회학에서는 동반자적 개념으로, 다시 가족적 동반자, 낭만적 동반자, 사교적 동반자, 작업적 동반자 등으로 부른다. 이는 개인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자 바탕이다. 가족은 삶의 베이스캠프로서, 1차적으로 중요한 삶의 바탕이다. 정상을 향해 등정하는 등산가에게 베이스캠프의 중요성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듯 가족이나 가정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가정이 깨졌거나 부모가 없는 경우 심리적인 허약함을 견디며 사회의 마파람을 스스로 감수하는 어려움에 직면해야 한다.

낭만적 동반자는 사랑하는 이성(異性)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성의 힘이 가장 강력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이해해 주고 응원한다면 그다지 힘들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고 낙오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자살하는 경우는 이를 시사한다.

특수한 것으로는 사회적으로 힘이 되는 배경을 확보한 경우다. 주변에 큰 힘이 되는 가족이나 친척 또는 지인, 재정적이나 권력 등으로 든든한 기초를 이룬 사람 등이다. 이른바 사회적 배경(background)이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다. 사회적 지지기반이 허약하거나 잃어버려서 삶의 기초가 흔들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 그들은 자칫하면 삶을 포기할 수 있어 자살 위험이 높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런 사회적 지지기반이 허약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가난을 구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목회적으로 그들의 영혼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와는 달리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 사회적 원망을 사기도 한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된 현 상황에서 교회가 약자를 돌보는 디아코니아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하겠다.

3) 자살 클럽이나 사이트를 찾는 사람

자살클럽이나 사이트를 찾는 사람들은 그만큼 자살에 가까워져 있다. 자살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모임에 가입하고 함께 논의하고 있다. 자살 모임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역사가 프로퍼스 루카스(Prosper Lucas)는 런던, 빈, 베를린 등지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파리와 브뤼셀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발견되는 즉시 경찰이 그 모임들을 폐쇄시켰지만, 음지에서 피는 꽃과 같이 비밀리에 계속 생겨났다.

물론 이런 모임은 현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고대에 이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음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클럽을 만든 적이 있다. ‘죽고 싶을 때, 평온하게 함께 죽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1802년 다시 파리에 나타났다. 12명의 회원이 있었고, 규약에 따라 자살할 사람을 게임으로 결정했다가 다음부터는 투표에 의해 그 해에 자살할 사람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자살 사이트’로 변형 수용됐다. 물론 사이트도 이미 유럽 등지에서 발전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조금 생소한 것은 우리의 인터넷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사이트에 의해 이미 상당한 동반자살이 일어났다. 특히 동반자살은 우리 사회에서 쉼없이 일어나는 자살 가운데서도 언론에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필자에게는 특이했다. 물론 동반이라는 말에 논란이 없지 않만, 우리나라의 경우 동반자살이 상대적 박탈감과 비교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힘을 잃어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현상이었다. 개인은 상대적 박탈감이 작용해 무력감을 경험하면 자살로 유도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이 자살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개인은 어느 정도 희망을 갖고 살때 힘든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오늘의 고생을 견디면 내일은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을 가지면 고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다. 이런 경우 고생은 오히려 희망의 조건이 된다. 그런 이유로 개인을 힘들게 만드는 고생이란 대개 희망이 좌절된 경우다. 상대적 박탈감의 증가 상황에서 심리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분노와 공격성과 맞물려 있다. 사회적 상황이 개인의 상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개인의 악화된 상황을 사회적인 것으로 돌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분노하고, 그 분노는 다시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이때 개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전에 공격했든 안 했든, 분노하면 언제나 자신을 공격한다. 익숙한 습관들이 반복되면 개인은 심한 흥분 상태에 빠지며, 불가피하게 파괴적 행동으로 위안을 삼는다. 격앙된 감정을 분출하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할 수 있다. 이는 동반자살 위험이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의 분노를 자극하면 이 분노가 다시 부정성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폭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일시적으로 일어나지만 실제로 부정적인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거나 축적된 결과다. 다시 말하면 부정성이 갑자기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쌓이게 된 결과로 자신조차 겉잡을 수 없는 상태로 돌변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자살 사이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조사하거나, 갑자기 경제적 상황이나 환경이 변화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더욱 신앙적으로 고무시키는 교육은 물론, 실제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그를 돕는 노력을 보여 일단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줄 필요가 있다.

4) 인기를 얻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인기를 얻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살하기 쉽다. 인기의 상승과 하강이 심리적 상황을 급격히 돌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의 자살은 20세기 후반이후 급격히 늘고 있다. 인기를 얻는 직업은 인기만으로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 주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영광과 부를 누리는 원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은 다르지 않다. 그 동안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가수라도 그가 부르는 노래가 히트하는 순간 갑자기 스타가 된다. 스타가 되면 대중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그들의 인기는 그대로 수입으로 이어져 존재 가치가 예전과 사뭇 달라진다. 출연한 영화가 히트하면서 유명세를 얻는 경우나 유명한 스포츠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기인들은 극과 극을 달린다. 인기가 상승할 때는 대단히 분주한 가운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삶이 행복하지만, 반대의 경우 지독한 실망감에 빠지기 쉽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자살하려는 생각에 물들기 쉬운 위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이를 극명히 보여준 실례들이다. 스타의 자살에 대해 롤랑 바르트(Rollang Barth)는 1970년 ‘불안을 야기하는 초인간적인 일’로 연구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할리우드에서는 12년 동안 2만명의 단역배우 중 단 12명만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의 경우도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도를 통해 자주 접한다.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모 연예인의 자살이 그것이다. 이런 보도로 우리는 배경이 약한 스타의 경우 소속사의 지원으로 인기스타가 돼서도 대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인기스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실망과 회의,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에 빠지게 된다.

스타의 세계는 보다 찬란하게, 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이 목표이므로 이를 달성할 수 없을 때의 상처는 다른 일보다 더 가혹하다. 또 인기 절정에 오른 것을 잘 지키지 못하면 하루 아침에 추락하기도 한다. 인기가 떨어지면 만회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배우들 중에는 마땅한 배역을 찾지 못해 불만족스런 상태로 몇년을 보내다 결국 두 번 다시 출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교회는 인기 직업에 종사하는 이른바 ‘스타’들을 목회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극과 극을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이 사회적 파급효과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전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에서 기독교의 권위와 존재, 그리고 효용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른바 톱스타의 자살은 목회자가 몇천번 설교를 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영향을 줬고, 그 위력이 막강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살은 신앙의 정도를 넘어 일반인이나 교인들 모두에게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도 자살할 수 있음을 알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자살 뒤에 연일 보도 및 방영되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도 자살한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 허점을 여지없이 강타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인기인들이 소속돼 있는 교회에서는 그들을 목회적으로 돌보는 전담반이라도 있어야 할 지경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5) 집안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사람

집안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가정은 그렇지 않은 가정에 비해 자살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자살에 유전성이 있는지 하는 물음에는 명쾌하게 답변하기 곤란하다. 학문에서는 자살의 유전성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지만, 특성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전적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우울증 등의 정신병이 가계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경우다. 양쪽 부모 모두 자신들의 정신적 특징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실제로 죽음의 성향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자살 뿐 아니라 다른 일에 있어서도 가계 내 전력만큼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가계 내 영향은 집안에 자살한 사람이 두 명 이상 나온 경우가 이에 가깝다. 루돌프 대공은 조상 중에 자살한 사람이 많았다. 스타비스키,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파베스, 베르밍감, 쁘레보 파라돌 등 유명한 자살자들 역시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쉐르와 데아누스 두 박사는 연구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자살하는 것은 40%가 맏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족 전부가 차례 차례 자살한 경우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팔레이 박사는 아버지와 7명의 아이들이 있는 가정의 경우를 예로 든다. 이 가정은 7명의 자녀들 중 5명이 아들, 2명이 딸이었다. 이들 중 장남은 40살에 투신으로, 차남은 35세에 사랑 때문에 고민하다가, 3남은 투신, 4남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2명의 딸도 강에 투신 자살했다. 이런 경우는 자살이 많은 집안에서 자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폭력이 심한 집안에서 자란 자녀들이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유전이 아니라도 무의식적으로 답습돼 행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가계의 문제를 생각하면 결혼도 자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배우자가 죽은 사람은 이혼한 사람보다 자살자가 많고, 이혼한 사람은 독신자보다 자살자가 많다. 이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결혼이 자살 행위에 대한 방어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이혼이나 별거가 증가 또는 감소하면서 자살도 증가 또는 감소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집안에 이미 자살한 사람이 있는 경우, 위험성을 인식하고 일정한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드러내기는 쉽지 않지만, 다른 자살 강의를 통해서라도 이들이 교육을 받게 만들어 신앙적인 차원을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6) 부담을 많이 가진 청소년(어린이)

요즘 15-24세 사이 청소년들의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청소년 시기는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두엽이 덜 발달돼 충동성이 강하며, 덮어놓고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자살은 해를 거듭하면서 증가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85년 사이에 총 20%, 즉 매년 3.8%씩 증가했다. 눈이 많이 내려 추운 캐나다의 퀘백주에서는 1961년에서 1981년까지 20년간 8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15-25세 사이 청소년이 해마다 1천명 정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이 수치가 통계에 잡힌 수치임을 감안하면 자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들의 자살은 자살 미수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그만큼 자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청소년 자살자들에게 부모의 결손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 자살자의 42%가 결손가정에서 성장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딸과 어머니가 없는 아들이 자살을 기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과 다른 성이 가족 중에 없는 것이 자살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심리적인 힘을 받지 못하는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들 중 1번 자살을 시도한 청소년의 30%가 실패하면 재시도하고, 25%는 여러 차례 되풀이한다.

1944년 미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자살하려는 청소년의 요인이 발표됐다. 이들 중 36%는 사춘기 고민, 35%가 마약, 31%는 주위의 압력, 28%는 가족 불화를 들고 있다. 1984년 캐나다에서 실시했던 조사에 의하면 중학생 5명 중 1명이 이전부터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했고, 8명 중 1명은 최근 2개월 동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중 70% 이상의 학생들은 자살하기 위해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놓은 적이 있었고, 30%는 최근 2년간 실제로 자살을 계획했다.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의 자살은 청소년 전체 사망률의 2위에 해당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은 정신 장애의 증가와 공부 스트레스가 주로 차지한다. 특히 공부 부담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짓누르는 요인이다. 일류 대학에 가기 위한 치열한 학업과 입시 경쟁은 이들을 2중, 3중의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이들의 학업 부담은 성적에 따라 장래가 결정되는 데 있다. 입시를 실패한 학생이 인생이 실패했다며 자살하거나 수능 시험을 전후로 자살이 늘어나는 현상은 학업이 그만큼 심리적 부담과 고통을 가하고 있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우리 상황은 청소년들에게 학업 부담을 덜어줌은 물론, 심리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부 외에 다른 특기나 취미 활동을 인정하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이상일 뿐, 교육이 특성화되고 다양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신앙만 강조해 공부를 도외시하게 만들지 말아야 하고, 공부의 중요성만 강조해 신앙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공부 비법을 강의하는 현실적 차원과 함께, 신앙적으로 무장하는 영적 측면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7) 목회자의 관심이 전제돼야 자살예방 활동 가능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예방 측면에서 도와야 할 사람들에 대해 다뤘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모두 행동을 요구하는 점에서 실천에 어려움이 따른다.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를 개인에게만 요구하고 말에 그친다면 성도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주는 꼴이 된다. 그러기에 이런 제안들은 목회자가 자살에 관심이 없는 경우 한낮 쓸모없는 공상에 불과할 수 있다. 필자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을 분명히 하기로 하자! 그것은 바야흐로 기독교인이 자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에서,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는 우리 현실에서 자살은 다른 사람들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의 힘으로 자살을 이겨내고 주변 사람들까지도 죽음에서 구원해 내는 기독교인으로 칭찬받는 시대를 기대해 본다.

 


33. 자살의 예방-(6) 교회의 대응책은

지금까지 자살예방에 대해 기술했다. 자살예방은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이 중요한 문제로 남고 있다. 교회가 자살예방에 부응해 얼마나 많은 교인들의 생명을 건지느냐의 문제는 교회의 실천에 달렸다. 교회의 자살예방 실천은 일단 교회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교회가 관심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응책을 제안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1) 삶의 위기와 예방교육

삶의 위기는 인생의 하나의 과정이다. 삶이란 일정 기간에는 상승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하강의 세월도 있다. 이렇게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삶이다. 언제나 승승장구하는 경우만 있지도 않고, 끝없이 추락하는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생은 밤과 낮이 교차하듯 성공과 실패, 상승과 하강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다. 이런 인식을 기초로 위기에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개인은 위기에 처하는 때가 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일반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더욱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르는 돌발적인 위기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위기는 개인의 삶을 어렵게 하기에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교인에게 삶의 위기에 대한 교육이 필요해진다. 기독교인이라 해도 삶의 과정에서 엄청난 위기가 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 있음을 교육하는 것이다.

위기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은 때로 갑작스런 사고를 부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 대응이 중요해진다. 삶은 다양한 변화에 직면해 적응하고 대응해야 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런 경우 신앙인은 신앙의 힘을 발휘해 잘 대처할 수 있지만, 때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자살은 이를 입증한다.

이런 위기 순간에 자살 유혹이 일어나기 쉽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라 해도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는 출구의 하나로 자살을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런 위기 순간에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혼자 외로워지려 노력한다. 이런 현상은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점에서 자살 위험도 높아진다.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람들 중은 더욱 그러기 쉽다. 특히 감당하기 힘든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심리 및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더욱 취약하다. 이때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위한 예방교육을 한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살충동으로 고통받거나 정신 건강에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인 편견과 오해 때문에 타인에게 적절한 도움을 구하거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겁내고 포기하기 쉽다. 이런 현상은 예방교육으로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특히 자살예방과 관련해 성도들의 인식 전환이나 대응에의 개선은 정신건강과 정신질환, 신앙생활과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함께 포함, 신앙생활과 연관지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뿐 아니라 삶의 위기와 그에 따른 위험을 예방하는 효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전체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함께 자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을 초기부터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도 병행돼야 한다.

2) 생명존중에 대한 교육

자살예방에서 더 적극적인 방법은 생명에 대한 존중을 인식하는 것이다. 개인의 인식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교육은 자주 할수록 효과가 있다. 현대의 생명경시 풍조는 신앙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놀라는 분위기였지만, 어느새 사람이 죽었다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이는 현대 사회에 와서 죽음이 대량화되는 점도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도 문제다. 자살하면 자기 삶도 끝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생명의 포기다.

생명의 포기에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신앙생활도 단순히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사실은 삶도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사람은 잘 사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생명의 끝을 알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사는 동안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에 대한 오해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죽음을 이상화시킬 수 있다.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죽음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차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유서를 남긴 어느 연예인의 자살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신앙적인 차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죽음이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삶의 소중함, 상대방의 소중함, 아름다운 죽음 등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점을 교육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특성을 가지므로, 반드시 신앙에서 부활을 강조하지 않는다 해도 생명의 보편성은 여전히 중요시돼야 한다.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가 아닌 사회 병리적인 현상이나 구조적인 문제,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오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여건에도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그에 따른 인식이 분명하다면 쉽게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웰빙과 웰다잉 교육

잘 사는 것이 웰빙(well-being)이라면 잘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 한다. ‘건강한 삶’과 ‘건강한 죽음’이다. 이 둘은 개념적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로 갈리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연결돼 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고,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잘 죽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잘 살지 못하고, 잘 사는 사람이 잘 죽는 것을 모를리 없다.

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에서 이를 간접 경험한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동영상을 본다면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이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을 보노라면 도저히 사형수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뒤에 아무리 후회한다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살아있을 때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보고 준비했더라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의 준비라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보다 가치있게 살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가급적 일찍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가치있게 살아야 한다. 이는 건강한 삶과 건강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웰빙과 웰다잉의 교육이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선배 목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30대 후반의 남성도가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는 “목사님! 내가 정말로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했단다. 남들은 죽어도 나는 안 죽을 줄 알았다고 생각했기보다는, 자신에게 죽음은 너무 막연하게 생각됐을 것이다. 아직 나이도 어려서, 죽음을 생각할 정도가 아니었으리라. 이는 죽음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을 대비하지 못한 후회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주 늦게, 심지어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낀 후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나간 삶을 후회한다. 이런 점은 잘못된 죽음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 시급함을 시사한다. 죽음에 대한 오해와 자살 사망률의 급증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로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현실에서 가장 불행하고도 불량한 죽음의 형태인 자살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최근 우리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두 전직대통령의 장례를 치뤘다. 이런 것을 보면서 온 국민이 죽음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에서도 단순히 ‘죽으면 천국간다!’는 막연한 교육을 넘어서야 한다.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더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하고,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하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이면서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교육이자, 결국은 자살예방 교육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독일은 죽음을 준비하는 교육 전통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다. 교회의 주일 설교와 일상의 장에서 사람들은 늘 죽음에 대해 배우고 있다. 또 1980년대 이후 학교 교과과정에 죽음 준비교육 프로그램을 정식으로 포함시켜, 국공립학교 교과과정상 매주 두 시간 있는 종교시간에 이를 다루도록 하고 있다. 미국도 1960년대부터 죽음 준비교육이 시작돼 지금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정식 교과과정에 포함돼 있으며, 평생교육 차원에서도 병행 실시되고 있다. 일본도 2002년부터 이를 학교교육에 포함시켰고, 2005년 400만달러 규모로 죽음준비 교육과정 개발예산을 책정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살아 나가는 교육에만 치중돼 있다는 느낌이다. 입시 위주의 지나친 경쟁에 치중돼 있어 진정한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것을 가르칠 여유가 없다. 이런 허점 속에서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교육을 통해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고, 신앙의 필요성을 더 잘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담전문가의 기용 및 활용

정신적으로 질병 상태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 있다. 각종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생활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보호가 필요하지만, 교회는 목회적 차원에서 손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교회가 이런 것까지 세밀하게 돌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개인의 생활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신앙생활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병원이 아닌 바에야 국가도 하지 못하는 일에 교회가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영혼을 돌보는 목회적 책임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질문한다면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헌금은 강조하면서 그들의 생활 문제나 심리적인, 즉 영혼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맡겨두는 것이 올바른 목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교회의 차원에서 그들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교회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도들 중 전문가를 기용하거나, 또는 전문가와 연락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성도들 중에는 사회 정식기관에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 전문가들이 있다. 봉사적 차원에서 일할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들 중에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존재는 자살 포럼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발표회에서는 교회의 자살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문요원을 활용하지 않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교회에 전문가들이 없다면 사회 봉사단체와 연계하여 돌보는 방법도 있다. 생명의 전화는 1973년 아가페의 집을 시작으로 시민자원봉사단을 중심으로 하는 24시간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해 오고 있다. 수원시 자살예방센터 역시 2001년부터 자원봉사단에 의한 24시간 전화상담실을 운영해 오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 상담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자살예방협회도 2005년 사이버 상담실을 개소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 자살 및 정신질환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하는 24시간 전국 공통전화인 1577-0199를 개설하여 전국 정신보건센터를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는 2004년 ‘서울 정신건강 2020 프로젝트’를 통해 ‘애니타임 응급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위해 2005년부터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를 설립하고 위기관리팀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서비스의 특징은 전국 공통 전화인 1577-0199를 대표번호로 사용하면서 서울시 전역의 창구를 일원화해 24시간 체제로 운영하며, 정신보건 전문요원에 의한 보다 전문적인 서비스 체계를 구현하고, 응급출동 체계 구축을 통해 상담 이후의 즉각적인 개입도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 광역센터 위기관리 서비스는 기존의 지역정신보건 서비스 체계 및 정신의료 시스템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대상자를 연계하고 지원함으로써 잠재적 자살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자살예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의 전화, 여성의 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가정폭력 상담소, 청소년 상담전화 역시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 체계와의 네트워크 구축은 효율적 자살예방 시스템 구축을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5) 목회 전문화로 사회에 봉사

목회는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들 한다. 이는 목회의 전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다. 사회는 디지털 시대인데 비해 교회는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1백년 전의 주일학교 교육도 지금과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주일학교 교사는 특별한 교육 없이도 그저 나이에 어울리는 청년들이 도맡아 한다. 주일학교 교사는 청년들이 거쳐가는 과정으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주일학교 교사는 전문화되지 못한 청년들이 약간의 실험성을 곁들인 정도로 담당하고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만 해도 교회는 무지에 빠진 백성들의 교육 분야에 기여하며 무지를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개화기 기독교는 그만큼 우리 시대 교육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연세대, 서강대, 숭실대, 이화여대, 서울여대 등 여러 기독교 계통의 대학이 세워진 것은 기독교가 우리 교육을 변화시킨 증거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떤가?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교회의 정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전문화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다음의 체계를 구축해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

첫째로 정신건강의 봉사다. 교회는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정신건강에 봉사하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지역사회를 위해 교회 내 전문인들과 봉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이혼이나 실직, 각종 사고, 자살 시도 등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봉사를 하자는 것이다. 이런 봉사는 평소에 전문기관을 방문하기 어려운 주민들에게 좋은 혜택을 줄 것이다. 특히 특히 자살 충동이나 심리 및 정신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해 지속적으로 돌봐주고, 위험이 나타나는 초기와 이후에도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교회의 이런 봉사는 실제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줘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을 주고, 전도의 효과도 있다.

둘째, 자해 및 자살시도자 관리다. 봉사시 발견된 정신 이상자들을 교회가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봉사 차원이지만, 실제로는 지역민의 영혼을 돌보는 작은 목회다. 생명을 중요시하는 교회가 이런 노력을 통해 영혼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신앙으로 유도하자는 것이다. 교회가 이런 일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시한다면 지역사회의 삶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질지 모른다. 이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이므로 반드시 호응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자살시도 및 자해의 과거력을 가진 사람들을 관심을 갖고 돌볼 필요가 있다. 실제 자살시도자의 절반 이상이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후에는 필요한 정신과적 치료를 받지 않아서, 자살 위험이 높은 채로 생활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자살 시도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리와 치료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셋째, 자살 도구에 대한 접근성 교육이다. 정신건강에서 자살시도는 가장 좋지 않은 모습이다.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이런 시도를 자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 자살에 이용될 수 있는 위험한 방법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살 도구에 대한 접근을 직접 제한하는 방법, 자살 도구의 치명도를 낮추는 방법, 자살 시도 후의 치료법을 개선하는 방법 등도 함께 다뤄져야 한다. 치명적인 자살 시도 수단에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자살예방법이다. 오래 전부터 자살을 계획하고 준비했더라도 자살에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곁에 없다면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자살시도가 늦춰지거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다른 방법이나 도구를 쓰면서까지 자살 시도를 계속하려고는 하지 않으므로, 자살 시도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과 접근성, 치사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면 자살을 예방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6) 상담전문가 역할로 자살 예방에 기여

교회의 상담 역할은 국가에 기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루에 33명, 한 달이면 1200명, 일년이면 대략 1만 2천명 이상 자살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숨가쁘게 성장을 위해 질주하듯 달려온 것에 비해, 정신상태는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을만큼 양적인 성장을 이뤘다. 그것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60여년 전만 해도 얻어먹던 나라에서 일약 부자 나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2-13위를 달리는 정도니 말이다. 그에 반해 한국인의 정신상태는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이 사실이다. OECD 국가 중 자살 1위를 기록한 것이나 이혼이 단기간에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는 한국인의 정신상태가 추락할 대로 추락해 피폐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다행히도 이런 상황과 때를 같이해 반가운 소식이 있다. 최근 신학대학들에서 상담학과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는 사회와 교회 현장에서 상담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상담학 교수로서 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할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는 희망의 징조다. 특히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증가하고 있는 터에 교회의 상담적 봉사가 그 자리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심리적·영적으로 훈련을 많이 받아온 기독교인들이 상담 과정을 조금만 이수한다면 사회의 심리적인 문제에 봉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담 전문화를 통해 교회가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붙잡은 것이다.

자살예방이 사회의 공익적 측면을 반영하는 대표적 문제라고 볼 때, 여기서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선진국가의 행정체계를 도입하고 자살예방과 관련된 봉사를 올바로 선도해 나갈 때, 교회의 존재감은 높아질 것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요즘, 더욱 그 역할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상담으로 봉사하고 싶은 성도들을 교육시켜 전문화하고, 일선 업무의 중복을 피한 봉사와 원활한 역할 분담을 통해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일에 앞장서 국민의 좌절된 마음, 특히 자살에 빠져드는 사회적 현상을 치유할 수 있다.

여기에 교회는 통합적인 지원체계 구축으로 국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질문, 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구하고 합리적으로 투자해 효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 앞서가는 교회들은 선진 행정체계를 배워 합리적 서비스의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생명존중을 향한 사회문화적 환경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국민적 봉사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는 예방이 가능해지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도 다시 한 번 시각 전환이 일어나 전도 효과도 나타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살예방을 위한 대응책을 다뤘다. 대응책이라고는 하나 예방 교육이 대부분이다. 이런 문제는 교회의 실천 사안이므로, 얼마나 필요성을 의식하고 노력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적 상황은 분명히 교회의 일정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기독교가 유입될 때 우리나라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피폐한 상태였다. 그 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 국민을 도탄에서 구해내고 정신자세를 가다듬게 만들었다. 이런 결과는 교육 발전으로 드러났다. 이제 국민들이 자살 위험에 빠지고, 몇몇 교인들마저 자살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교회가 가만히 두손 맞잡고 있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런 상황을 기회로 선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교회가 앞장서서 자살을 예방하고 있다는 뉴스를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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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만 하던 자살, 교회 내 공론화돼 고무적”
자살 관련 특별기고 ‘살자’ 완결한 김충렬 박사

교계 최초로 본지에 33차례에 걸쳐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자살’에 대해 연재한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김 박사의 칼럼 <살자>는 ‘자살하면 지옥에 가는가’ 하는 해묵은 논쟁에서 탈피, 성경과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자살과 자살의 여러가지 원인과 유형, 예방과 교회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며 교계의 자살 논쟁을 음지에서 끌어냈고,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교회적으로 풀어야 함을 강조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일조량이 적어지는 가을철이 되면서 자살 위험이 다시 높아지고 있는 이 때, 김 박사에게 연재를 끝낸 소감과 함께 주위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살예방법에 관해 들었다. 김 박사는 “자살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데 중점을 두고 연재를 계속했다”며 연재를 묶어달라는 요청이 많아 내용을 다소 보강해 책으로 인사드리겠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10월부터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이자 인간을 가장 깊이있게 이해하게 하는 ‘중독’에 대해 새로이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김 박사와의 일문 일답.

-자살 연재가 33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연재를 마치고 인터뷰를 하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연재가 끝나 상당히 홀가분합니다. 연재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웃음). 물론 더 정성스럽게 연구해 서술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요.

처음 연재를 부탁받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때만 해도 상당히 회의적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연재 자체도 쉽지 않지만, ‘누가 읽겠느냐’는 의문이 들었지요. 그 때 신문사에서 ‘누군가는 자살을 기독교적 차원에서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지요. 그 말이 저에게 일종의 사명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래 맞다! 비록 인기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자살이 문제가 되는 지금 힘들더라도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지요. 그렇게 시작한 연재가 벌써 8개월이 지났군요. ‘시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자살 연재 중 전직 대통령의 자살, 전문가 입장에서도 ‘충격’

-연재 중에도 유명인들의 자살이 계속됐습니다. 특히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맞습니다. 유명인들의 자살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됐습니다. 그것이 더 열심히 연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인 흐름과 유형을 정리해야 했고, 그에 따른 원인을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줄곧 자살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매주 A4 6페이지를 써야 했으니까요.

OECD 국가들 중 우리나라가 자살 1위라는 통계가 발표돼 사회적 관심이 더 높아졌을 때는 ‘연재를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특히 연재 중 강원도에서 일어난 동반 자살에 몇몇 매스컴이 대단한 관심을 보이면서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는 어느새 저 자신이 전문가가 됐다는 느낌도 가졌습니다(웃음).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는 글을 쓰는 저도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인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나라가 ‘자살 국가’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으니까요. 자살이 일반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알려진 것이,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사회 보편적 현상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혼자 이상한 생각에 깊이 잠기기도 했고, 산책하면서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자신이 상당한 우울감에 빠졌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을 연재하면서 스스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아 빨리 빠져나오고 싶은 심정도 느꼈습니다. 아무튼 연재 도중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일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자살위험에 무관치 않고, 역사적으로 수도원에서 자살이 빈번했다는 사실에 독자들이 꽤 놀랐습니다.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그런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수도원에서의 빈번한 자살 사실에는 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더 기술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자살 예방’에 역점을 뒀기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을 위해 수도원에 몰려든 그들의 자살은 어떤 형태로든 신앙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자살했을까 생각하면, 그 자체가 어쩌면 신앙인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되는 점에서 이미 해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세상과 벽을 쌓고 오로지 신앙에만 정진하려던 마음이 역설적으로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세상과 신앙 두 영역에 적절한 균형이 있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부정적인 무의식이 문제임을 보여주는 실례도 됩니다. 죄악된 세상을 지나치게 편중되게 생각하는 성도들의 정신적 문제는 잘못하면 생각지도 않은 우울증이라는 복병을 만나 극단적인 죽음을 불러올 위험이 있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이 세상을 탈출해 저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만들어 세상을 등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곳이라는 긍정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에게 허락된 이 땅의 삶이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기회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교회가 자살통계 정직하게 발표해야 예방도 가능해

-이번 기고는 사회적 금기였던 자살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무엇보다 반가운 일입니다. 합동 총회에서 자살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에 따른 총회 입장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몇몇 신학대학은 자살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열린 분위기는 아니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교회가 자살한 교인 통계를 내고 정직하게 발표해 자살을 막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미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교회가 침묵을 지키는 일은 사회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가을이 되면서 자살이 다시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보건기구(WHO)가 ‘자살예방의 날’을 제정하고 지키는 데 비하면 아직도 우리 사회와 교회는 자살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는 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자살을 아직 남의 일로 여기는 것 같은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더욱이 가을에는 일조량이 적어 우울증이 높아지기에 자살이 더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가을에는 가급적 혼자 있지 말자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대개 외롭습니다. 유난히 외로운 이 계절에, 우리는 혼자 있으려 하는 사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슬픔이나 우울 성향이 있으며, 이를 조절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자살에 이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살예방에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셨습니다. 교회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활동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제 교회는 성도들의 자살을 예방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자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에서 이는 교회 역할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자살 예방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봉사 체제를 갖춰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 중 각종 정신병원이나 정신과 의사 및 상담 전공자들로 일정한 그룹을 형성해 도울 수 있습니다. 주일 오후에는 자살 위험군을 대상으로 강의와 상담이 가능할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실직이나 사별을 경험한 사람, 큰 사고로 낙심한 사람,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상실을 경험한 사람 등을 교육하거나 상담하는 일입니다.”

자살예방, 규칙적인 생활과 긍정 에너지 축적으로

-자살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많은 독자들이 칼럼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열혈 독자 여러분들께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도움을 받으셨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자살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자살자들은 모두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거나 극도로 좌절된 심정에서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는 이유가 어떻든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매일 규모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분수에 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빚을 지거나 무리하게 사업을 시도하거나 확장하는 일과, 특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긍정 에너지를 축적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부정 에너지를 축적하면 자신도 모르게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정 에너지는 특성상 상황이나 사건에 반드시 정상적이 아닌 부정적으로 대응합니다. 이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분노는 자신을 파멸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악입니다. 이런 악의 세력에 휘둘리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위해서라도 신앙생활을 매우 긍정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두 긍정적이 되기는 어려우므로 스스로 이를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 자살하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살한 사람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성경을 운운하며 비판하기 일쑤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마땅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자살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유가족들에게도 좋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유가족도 동일한 죄인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물론 일말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할 수 없었던 점을 인정하고 더 힘을 내어 열심히 살도록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자살 살자 -김충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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