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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2권-9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241-275

by 【고동엽】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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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평화의 그림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미술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면서 평화라고 하는 제목을 내 주었습니다. 졸업생마다 자기가 구상하는 대로 평화의 그림을 한 장씩 그려 왔습니다.
그 여러 가지 그림 가운데 특별히 대조되는 두 그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한 가지 종류의 그림은 산골짝의 호수를 그린 것입니다. 그 옆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그 풀 위에는 소 ,나귀, 말, 산양 이런 짐승들이 한가하게 풀을 먹고 혹은 누워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몇 사람이 한가하게 작은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합니다. 산이 조용하고 물이 잔잔하고 바람이 없고 모든 것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림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다른 성격의 그림입니다. 바닷가에 절벽이 있는데 때 마침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밀러와서 그 벼랑에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거품을 뿜으면서 흘러갑니다. 바람이 심하니까 나무가 꺾여져 내려옵니다. 나뭇잎이 춤을 추며 달아납니다. 얼핏보면 평화가 아니고 전쟁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절벽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어다 보니까 그 속에 갈매기가 한 놈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갈매기 둥지 옆에는 어미 갈매기가 가만히 앉았는데 둥지 속에는 깐 지 며칠 안 된 갈매기 새끼들이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은 불거나 말거나 물결은 세거나 말거나 낮잠만 잘 자고 있습니다.
선생은 둘째 그림에다 일등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림은 평화는 평화인데 그건 인간의 이상뿐입니다. 이 세상엔 그런 평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폭풍우 가운데서 얻을 수 잇는 평화입니다. 사실 그런 줄 압니다. 이 세상은 요란합니다. 언제나 혁명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냉전이 계속 됩니다.

 

 
 



242. 나환자 수용소‘소생원’

제가 두 주일 전에 전주에 집회에 가갔었는데 그 주일날 오후에 전주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소생원’이라고 하는 데를 갔었습니다. 거기 있는 수 천명의 나환자가 꼭 한번 와서 예배를 바 달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가보니까 여기 저기 솔밭 사이에 아주 잘 지은 건물이 있고 예배당도 벽돌로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오후 서너 시 반쯤 우리가 거기 도착하였는데 벌서 세시부터 그 분들이 다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을 불러서 예배당 가까이 가니까 찬송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이 가득 모였는데 어떻게 찬송을 부르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분의 얼굴은 나병으로 말미암아서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이 그때 493장 찬송을 부르는데 어떻게 잘 부르는지 제가 그 사람들을 위로할까 하고 가긴 갔지마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참 귀한 것은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다. 이들이 주 예수 님을 알지 못했던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희색이 만면에서 찬송을 부를 수가 있겠나? 몸은 비록 불치의 병에 걸렀어도 마음속에는 질병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가 있구나!”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놀라운 평화>에서

 

 
 



243.성도와 환난
스토익 철학자 에픽테투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거기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와서 토론하는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헬라 철학자 가운데 소위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모든 것은 운명인데 우리 인간이 별 수가 잇느냐? 그저 인간의 의지로써 견디어야 한다 아무리 아파도 견디고 슬퍼도 견디어야 된다”이렇게 주장하고 행한 것입니다.
그때 종으로서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에픽테투스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철학으로 일생을 사는데 한 번은 악한 사람들이“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 것을 견디나 보자”하고 이 사람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아프도록 비틀었지마는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계속 힘껏 비트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비틀면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 이 한 마디밖에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꽤 견디다 하고는 바짝 더 비트니까 그만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은 안하고“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하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한 일은 장한 일인데 그렇게 견딘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244.윌리암 E. 헨리와 김 소월

19세기 말엽에 영국에 윌리암 E. 헨리라고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폐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했고 뿐만 이니라 다리 하나는 절단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그후에도 일생토록 몸이 약해서 수술을 많이 받았지만 아주 천재적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활 철학이 바로 스토익 철학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써 온갖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그런 시도 썼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도 저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시를 쓰고 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격려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자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한국에 유명한 김 소월이 이와 비슷합니다. 이 김 소월군은 참으로 천재적 시인입니다. 저와 오산학교 동창인데 학생 때부터 아주 시를 잘 썼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245,엎어놓아야 바로 가는 시계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선한 목적 때문에 이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친구는 탁상시계를 하나 갖다가 그것을 엎어놓았습니다. 누가 몇 시 나고 물어보면 제쳐보고 다시 엎어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왜 그 시계를 엎어놓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바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더러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반드시 눕게 한다”
우리는 사업도하고 이것저것 하느라고 분주해서 실상 위를 처다 볼 사이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반드시 눕게 되면 자연히 위를 처다 봅니다.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할 때가 있습니다.

 

 
 



246.축복을 위한 환난

이태리에 가보면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월렌시안 처치라고 하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에 설립한 분은 피타 월터라고 하는 분인데 이 사람도 젊었을 때는 보통 이태리 청년들과 같이 허랑 방탕 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어떤 날 저녁, 한 친구 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친구 하나가 쓰러져 생명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함께 즐기든 이 청년은 그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다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상에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오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환난이 아무리 아프고 어려운 것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축복이 따랐습니다. 요셉에게 만일 그 환난이 없었던들 그 후의 축복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축복이 따른 환난이었습니다. 종노릇 10년과 감옥살이 3년 후에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그 환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247.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큰 부자로서 큰 공장을 가지고 잘 사는 분이 있는데, 한 번은 홍수가 나서 재산이 전부 물에 쓸려 떠내려갔습니다. 집과 공장이 모두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며칠 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잔잔해지고 다시 해가 나서 물이 준 다음에, 이 사람이 자기 집 자리에 가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고 돌작 밭과 모래밭뿐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씻고 않았는데 사방을 가만히 돌아보니까, 이상스럽게 모래와 돌작 밭 사이에 광채가 나는 모래알이 있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조그마한 금싸라기들입니다. 그 곳은 사금 밭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금을 많이 캐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기도는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릅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를 연단 시킨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난의 날과 신앙>에서

 

 
 



248.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하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모든 부패와 부정을 일소하고 깨끗한 질서가 있는 사회를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사상을 제거하고 이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번영과 통일이 있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바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내일 우리가 맞이하는 3.1절의 정신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시간, 우리가 받은 재능, 우리에게 있는 지식, 우리에게 있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사용할 책임이 우리 청지기에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249.옳은 삶

제가 옛날 북한에서 고아원을 할 때에 믿는 사람 가운데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을 찾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신의주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없어서 안 됐는데 이런 기관을 세워서 어려운 이들을 돌보자고 하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해서 참 좋은 일이니 나도 얼마든지 돕겠다고 하여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보다도 돈도 더 많은데 이러한 사회사업 예기를 하자, 이 핑계 저 핑계하면서 결국은 못하겠다고 하는 이도 더러 만나 보았습니다. 그때 한 오 백원씩 좀 내자고 권했는데 그때 오 백원은 지금은 오십만 원쯤 되겠습니다.
그후 몇 해 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공산당이 들어왔습니다. 돈이나 좀 있던 사람들은 전부 숙청을 당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다 쫓겨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아원을 위해서 돈 낸 사람도 넘어오고, 권면은 받았으나 내지 않은 사람도 넘어 왔습니다. 이런 분들을 다 내가 만났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이런 예기를 한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내가 신의주에서 살던 경험을 생각해 보니 10여 년 동안 돈 벌어서 옳게 쓴 것은 고아원 위해서 오 백원 쓴 것밖에 없어요. 그 때 권면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저런 예기 하다가 혹 그런 말이 나오면 미안해서,“지금은 크게 후회합니다. 그 때 그 돈을 꼭 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아까워서 안 내다가 공산당에게 다 빼았겼어요.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저는 흔히 대답하기를“그거야 알겠습니까? 남한에 와서 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면, 이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꼭 씁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에서

 

 
 



250.미국 건설의 밑거름

제가 지남 여름에 미국에 잠깐 들렸을 때 바쁜 일정 중에도 박람회 하는 데 가서 토요일 오후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미국관에 들어가 보니 미국이 어떻게 오늘의 거대함과 번영을 가져왔는가 하는 경로를 보여 주는 그림, 사진, 도표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황무지 대륙으로 밀려오는 이민의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남녀노소가 여러 나라에서 적수 공권으로 이 대륙을 찾아옵니다. 황막한 들판, 우거진 수풀, 뛰노는 짐승들, 출몰하는 토인이 있는 이 대륙에, 이들이 적수공권으로 와서 무엇으로, 어떻게 하여 오늘의 미국을 이루었겠는가? 그 열쇠가 어디에 있겠는가를 생각하여 그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말을 안 해 주지마는 누구니 한 가지는 깨닫고 나옵니다.
그것은 일입니다. 그들은 일, 일,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도끼로 일했습니다. 호미로 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도저로 일했습니다. 트랙터로 일했습니다 산림을 베고 토지를 개간하고 길을 닦고 땅에서는 금, 은, 동, 철을 캐내고 석탄을 파내고 가솔린과 석유를 뽑아내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마천루를 짓고…일했습니다. 결국은 일입니다. 손으로 일하고 머리로 일하고 밤낮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결국은 이 일이 오늘의 미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첫 째는 건전한 마음의 자세로 일하려는 결심, 그 다음엔 일, 그 두 가지가 말하자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51.미국의 정신적 기초 뾰죽 집

지금은 작고하셨지마는 장덕수 선생께서 처음에 미국 가서 그 때 자기 눈으로 본 미국의 현상을 우리 어떤 신문에 연재 보도한 일이 잇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금까지 잊지 않은 것은“여기 미국에 와 보니 우리 한국과 다른 게 한 가지가 잇는데 아디 가든지 뾰죽 집이 많다(이 뾰죽 집은 물론 예배당을 가리켰습니다) 이 미국의 정신적 기초는 이 뾰죽 집에 있다. 기독교에 있다”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교회가 발전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252.애스베리 신학교의 벽화

미국 켄터키주에 잇는 애스베리 신학교에 가보면 제일 넓은 담에 큰 벽화를 그린 것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말 고비를 잡고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목사의 그림입니다.‘말 타고 순회하는 목사 써클 라이드(Circle Rid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미국 초창기에 유럽에서 많은 이민들이 건너와 이 곳에도 정착하고 저곳에도 정착하고 사방에 정착했습니다.
그 때에는 길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기차도 없는 때인데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말을 타고 정착지를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면 말을 타고 이 동네 외서 예배 보아주고, 다시 저 동네 가서 예배를 보아주고 했습니다.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날 미국 교회의 발전도 결국은 일의 결과입니다. 건전한 마음의자세로 스스로 굳세게 하면서 주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일하는 것 없이 교회는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하라고 권면합니다. 일은 인간에 천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일을 맡겼습니다. 일함으로 건강해 집니다. 일함으로 지혜가 발전됩니다. 일함으로 문화가 발전됩니다. 일하는데 모든 건설이 있습니다. 일하는 이에게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굳세게 하여 일하라>에서

 

 
 



253.참 회개

참 회개에는 열매가 따릅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 우선 그 손해를 갚아 주는 보상이 따릅니다. 삭게오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것을 우선 보상했습니다. 첫째 열매가 이것입니다.

 

 
 



254.예수 믿은 식모의 고백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어떤 젊은 여자가 일본 사람 집에서 식모 살 이를 했습니다. 처녀입니다. 주인 집 아주머니가 매일 찬거리를 사오라고 돈을 주면 이 식모는 매일 조금씩 거 기서 떼어내고 찬을 사오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 주인은 모릅니다. 그 후에 이 여자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자기 과거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도적질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회개하고 어떻게 했던지 아십니까? 그 떼었던 돈을 다 계산해서 그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가서 고백하고 다 갚았습니다. 적지마는 이것이 참회개의 열매입니다.

 

 
 



255.보상할 수 없는 죄

톨스토이의 유명한‘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의 카추샤의 비화가 바로 그 예기입니다. 한때 청춘의 정욕으로써 다른 여자의 일생을 망쳐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여자는 아주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후에 이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안타까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녀교제를 삼가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가 있든지 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56.고해와 회개 증거

중세사회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에게 가서 좌를 고백하면 죄를 사해주기 전에 죄인에게 일을 시킵니다. 어디 순례를 다녀와라, 구제사업을 하라, 연보를 하라는 등의 일을 시키고 그것으로 회개한 증거가 있은 후에 야 죄를 사해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와서 죄를 고해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실수해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없는 예기를 퍼뜨려서 많은 명예를 손상시켰는데 그 큰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용서를 받겠습니까? 그 신부가 하는 말이 내일 아침에 큰 주머니를 하나 가지고 오는데 그 주머니 속에 닭털을 가득히 넣어 기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그 여인은 닭털 주머니를 가져왔습니다.
그 신부 하는 말이“전에 당신이 몇 집이나 가서 예기를 했는지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대문에 이 털을 하나씩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어 이 여인은 뛰어다니면서 털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이제 되었습니까?”“아니요 한 가지가 더 남았소”민 주머니를 또 주면서 그녀가 놓고 온 털을 다시 모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바람이 이렇게 부는 날에 그 털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는 꼭 다시 모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모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신부가 하는 말씀이“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기는 쉽지마는 한 번하면 다시 모을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얼마나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아시오? 당신 죄가 얼마나 큰지 당신은 아시오? 단단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어떤 죄는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257.코페르의 비문

예수 님께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불쌍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경고하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신 줄 압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코페르는 크스다 천문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한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유언에 의해서 그의 묘비에 이런 비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주여! 나는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도에 주신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지식과 과학이 문제가 아닙니다. 명망(名望)이 쓸데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죄 사함은 주님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온전히 과거의 생활을 청산할 때 받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고 부활절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회개와 그 열매>에서

 

 
 



258.그리스도인의 각오

우리 믿는 사람도 고통의 십자가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3·8선, 6·25, 천재지변, 사업의 실패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인생 고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우리 믿는 사람도 이 환난은 꼭 같이 받습니다.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각각 다 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잘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이 십자가에 반향하지 말고, 이 십자가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잘 지고 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내 주에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이 내게도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259. 나의 십자가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마음 가운데“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 텐데 여기 십자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하는 말입니다. 그래서“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습니다. 빛이 뻔적 뻔적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조그마한데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조차 어렵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거름 걷다가“이거 너무 무거워 못 지겠습니다”하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것 하나 골라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히 피어 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저 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 가시가 어떻게 잔 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니 걸을 수가 없습니다.“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잘 살펴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 놓은 지기의 십자가였습니다.“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그럼 네 마음대로 하라”자기가 벗어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 있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각오>에서

 

 
 



260.십자가에 대한 묵상

성 프랜시스가 큰 은혜를 받게 된 계기도 그가 성 다미안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온전히 그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어떤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님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아서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었고 그로부터 유명한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앞에 나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유식한 것과 무식한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제왕과 종이 다 같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대로 전 세계의 3분에 1되는 인구, 즉 10억의 인구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인력으로써 주님 앞으로 나와서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261.콘스탄틴의 십자가 깃발

십자가는 이 승리의 줄을 모든 사람에게 던져 줍니다.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지마는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로마의 첫 기독교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자기의 대적되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교회에 있는 멜비우스 다리 근처에서 일전이 있게 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싸움이 있기 전 날 밤에 그는 환상 가운데서 큰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라고 하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후에 콘스탄틴은 곧 십자가 기를 만들어서 그 기를 들고 나가 싸워 크게 승리를 하여 로마의 온전한 황제가 되었고, 황제가 되자 기독교를 핍박하던 것을 금하고 신교 자유령을 내린 역사적 사화는 우리가 다 상식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깃발아래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인력>에서

 

 
 



262.영생은 확실합니다.

첫째 이성에게 물어 보세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내게 의식이 잇습니다. 내 의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의 의식을 조정하고 내 생각을 지도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自我)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과 같이“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반드시 나라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는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영혼은 우리 인간의 육신이 죽을 때에 어떻게 되겠는가? 없어지겠는가? 그냥 있겠는가?
둘째로 과학에 물어보세요. 과학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여 줍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모양으로 변하기는 하지마는,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물질 분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죽으면 썩어집니다. 그것은 화학적으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되었던 물질이 우주에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서 가장 귀한 영혼이, 육신이 무너질 때에 없어질 수가 있겠는가? 미국의 미사일과 로케트의 유명한 권위자 브라운(Dr. Wernher Von Brown) 박사는 최근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즉,“과학은 무엇이든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오직 변화를 알뿐이다”
하나님께서 작은 물질에도 작용하시거늘 하물며 그의 최대 걸작인 인간의 영혼에 적용치 않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의 심령에게 깊이 물어보세요. 인간 심령 깊은 속에는 영혼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영혼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63.부활과 영생의 추구

왜 옛날 애굽 사람들은 죽으면 약을 발라 썩지 않게 하고 금자탑을 쌓아 놓고 영원히 보존하도록 힘을 썼습니까? 부활을 믿는 까닭입니다. 왜 진시황이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며 동남 동녀 500 명을 보냈습니까? 왜 한 무제가 승로반(承露盤)의 찬이슬을 받아먹기를 하였습니까? 다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왔나 요? 우리 인간 자체를 살펴볼 때 인간의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을 만족하게 하는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배고픈 본성이 있으면 먹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듣고 싶은 본성이 있으면 소리가 있습니다 보고픈 본성이 있으면 볼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본성에 대한 상대는 없을까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달이 있기에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은 달이 있는 증거입니다.
테니슨의‘인메모리아’에 있는 유명한 글귀와 같이“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습니까? 영생이 있는 까닭으로 인해 죽음의 세계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생은 확실하다>에서

 

 
 



264.가정 전도

내가 내 가정에서 전도하려고 하면 사실 참 믿음이 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믿노라해서 가정에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안 믿는 온 가족들이,“과연 우리 어머니는 과연 우리 아버지는, 우리 딸은. 우리 아들들은 참 진실하게 믿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믿음을 속이지 못합니다. 다 압니다.
얼마 전에 그의 아버지를 제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아버지는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교회를 잘 안나와요. 그래서 왜 교회를 잘 안나오느냐고, 잘 나오라고 하면서 장로 아들이 그래서 되겠느냐, 잘 나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예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 하는 말이“목사님 아직 나만큼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로이긴 하지만 실상 예수를 잘 못 믿습니다.”그 아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할 수 없습니다.

 

 
 



265.신앙 투표

사실인지 모르나 이미 세상 떠나신 대구의 이문주 목사님 가정에서는,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다 모여서 했습니다. 투표를 했더니 이 문주 목사님이 표를 제일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 참 목사입니다. 가정에서 표를 얻을 만큼 예수를 믿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면, 그 다음에는 전도할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을 만큼 믿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는 모든 일이 꼭 성경대로 하는 모범이 되어야 가정에서 감화를 받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 정성껏 기도하고 정성껏 권면하며 우리의 정성을 다하면, 제 경험으로 보면 그런 가정은 다 감화를 받습니다.

 

 
 



266.참 믿음으로 구하고 힘쓰면

우리 교우 가운데 어떤 자매는 상당한 가정의 자맨데, 그녀는 잘 믿으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도 있고 큰 사업을 하는 그 남편은 다른 면으로 실수는 없으나 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늘 위해서 기도하고 권해서 교화 나가자고 권면 하지마는 다른 것 다 하면서 이 말은 절대로 안 듣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온 가족이 감화 받게 되었냐고 하면, 한 번은 그 자매가 갑자기 몸이 약해져서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병이 중해서 사람 보기에는 다시 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남편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이 없게 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침상에 서서 “당신 나 보기에는 상당히 중한데 무슨 소원이 업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이 여자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소원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제 죽어도 한없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편이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권면도 하지마는 종내 회개하지 않는 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관머리에 앉아서 회개하는 아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참 믿음으로써 구하고 힘쓰면 결국은 온 가정이 감화 받게 됩니다. <너와 네 집의 구원>에서

 

 
 



267.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내적 음성

내적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고요한 음성이 우리 성령 속에 들릴 수 있습니다.
금년이 선교 80주년 기념의 해입니다. 몇 달 전에 이 기념예배를 새문안 교회에서 볼 때에 제가 이런 예기를 했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본래 한국에 오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도에 가려고 생각한 분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말을 듣고, 자기 친구 가운데 한국에 갈 수 있는 이가 누군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의 심령 가운데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왜 네가 가지 않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한국에 오기를 원한다는 지원의 편지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회답은 지금 선교비가 없어서 선교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뉴욕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그를 목사로 청빙(請聘)하는 청빙서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가는 길도 막히고 인도에 가는 일도 잘 안되어, 이제 나는 교회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수락하는 편지를 써 가지고 우체통에 가서 넣으려고 할 때에 음성이 들리기를“한국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부치지 않고 내가 직접 선교부에 가서 이 일을 의논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선교부에 가서 의논하니 총무가 하는 말이“당신 참 잘 오셨소, 당신께 편지할 때는 선교비가 없었지마는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사업을 하시는 분이 한국 선교비를 6천불을 가져왔으니 우선 이것으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당신이 좀 가주시오.”해서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은 언더우드 박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쳐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종종 이와 같은 세미 한 음성이 그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서

 

 
 



268.인과 의

아마 40대 이상은 다 아실 줄 압니다. 옛날 서당에 다닌 사람은 맹자 읽어보지 못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맹자 첫 페이지는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맹자견(孟子見) 양혜왕(梁惠王)하신데 왕왈(王曰) 수불원천리이래(瘦不遠千里而來)하시니, 역장유(亦將有) 이리(以利) 오국호(吾國乎)이까”영감께서 이렇게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 나라에 오시니 장차 우리 나라에 이로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맹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이어 대답하는 말, "왕은 어찌하여 먼저 이익을 찾습니까? 나라에는 반드시 인과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는 말이 "왕이 이익을 찾으면 사대부가 이익을 찾을 것이요. 사대부가 이익을 먼저 모으면 모든 관리들이 이익을 도모할 것이며, 국민이 모두 이익만 찾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사화가 부정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요새 말로 하면 위에 있는 대통령이 이익을 도모하면 아래 있는 장관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장관이 이익만 도모하면 아래 국장들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과장이 이익만 찾게 되면 계장, 직원들, 마지막에 백성들이 이익만 찾게되고 나라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느 때보다도 부정과 부패가 많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동양사람으로서 다 기독교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첫 페이지는 배워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안 믿는 사람도 말입니다.

 

 
 



269.안 중근 의사의 ‘견이사의’

남산에 가면 안 중근 의사의 동상을 여러분이 보실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나라를 위해 처형되기 전에 귀한 글귀를 여러 개 썼습니다. 그의 글씨가 또 명필이었습니다.
여러 귀한 글귀 가운데 제가 항상 잊지 못하는 글귀는‘견이사의(見利思義)’라는 글귀입니다. 즉“이익을 볼 때에 의를 생각하라”고 이익 나는 일이 있을 때에, 내가 금전적으로 유익한 일이 있을 때에 의를 생각하라. 그것이 옳은 도리냐 아니냐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작정할 때에 이것이 이로우냐 해로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쉬우냐 어려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것이 의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작정하고 무엇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꼭 같은 원리인 갓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했습니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옳게 살기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에서

 

 
 




270.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

인생 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때에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가 잇습니다. 아무리 돌파구를 찾을 내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271.진강산에서의 기도

오래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에게서 그의 경험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장로님은 본래 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던 장로님인데 촌에서 그런 대로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마는 그러나 자녀들 교육이 힘들어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팔아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와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해보았지만 경험이 없고 해서 거듭 실패를 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는 촌에서 가져온 돈은 다 없어졌습니다. 자녀들을 더 많이 낳았습니다. 학비는 많이 듭니다. 마지막에는 끼니조차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새도록 무슨 궁리를 하지마는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잠은 한잠도 못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는 무슨 생각이 낳는지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안동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신의주에는 산이 없으나 안동에는 진강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를 올라갔다고 합니다. 올라가서는 어떤 소나무 아래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전에 교회를 다닌다고는 했지만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적이 없으리 만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생의 막다른 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어 달려 기도했습니다 종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날이 어두운 다음에 다시 압록강 철교를 건너오는데 다른 생각이 나는 것은 없으나 철교를 건너갈 때에는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철교를 건너올 때는 그런 마음은 없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후에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해서 가정은 안정을 이룰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도와주다가 이 장로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72.‘에벤에셀’과 ‘여호와 이레’신앙

근대 선교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위대한 선교사의 전기를 우리가 많이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에 가서 선교하시던 분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분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라고 하는 분일 것입니다.
다른 분도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원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몇 해를 전도하는 가운데 하루는 영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회 총무가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당신의 월급을 매달 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섭섭한 일이지마는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하는 소환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멀고 먼 곳에 전도하려 왔는데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하자니 앞일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테일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 구약성서 중의 히브리말 두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서 나오는‘에벤에셀’이라는 말인데“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하는 뜻이요. 또 하나는 창세기 22정에 나오는 말로‘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입니다. 즉“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느니라”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이삭을 제사 드리려 올라갈 때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어보기를“아버지여! 제사들일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들일 양이 없으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그것을 준비하시느니라”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준비하시리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과연 하나님께서는 미리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테일러는 이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하는 말씀을 믿고 이 땅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중국 사람 입는 대로 옷을 입고, 중국 사람 먹는 데로 먹고, 중국 사람 자는데서 자고, 중국 시림과 꼭 같이 살면서 전도를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쓸 것 그냥 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은 일꾼들을 보내 중국 내 지선교회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헤이드 미tus이라는 테일러의 신앙에 의지한 전도운동이었습니다.

 

 
 



273. 천로역적의 저작과정

여러분, 앞이 보이지 않을 떼에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읽어보신 분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못 읽어본 이는 이제라도 사다 읽어보십시오.《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지요. 이것을 누가 어떻게 해서 썼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청교도 운동을 영국 성공회에서 핍박하였습니다. 한 청교도가 성공회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붙잡혀 가서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전도 못하고 감옥에 가서 젊음을 허송하게 되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이 존 번연(John Bunyun)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써서 12년 동안 다니며 전도하는 것 보다 책을 통해서 몇 배의 많은 생명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오산 학교를 창설한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실 떼에 신약성서를 백독(百讀) 하였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에서

 

 
 



274.여호와의 등불

한 번은 어떤 유물론자가 한 목사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인간 육체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는 대답하기를 “나는 사실인줄 믿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청년이 하는 말이“내가 아무 대학 부속 박물관에 가보니 사람을 분석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분이 몇 퍼센트, 광물질이 몇 퍼센트, 탄수화물이 몇 몇 퍼센트, 등으로 열 여섯 기지 종류로 나누어 실험 병에다 넣었는데 그게 인간의 전부이고 영혼이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목사 말하기를“그러면 당신에게는 그런 물질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까?”했더니 그이 대답이“나는 그런 줄로 압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당신과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왜? 토론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같이 물 얼마, 광물질 얼마, 탄수화물 얼마로 된 사람과 나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부정됩니다. 없어지고 맙니다. 과연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275.생각하는 갈대

파스칼의 말 가운데“인간은 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심히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신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입니다. 생각도 보통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창작을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천년 전에 지은 집이나 오늘날 지은 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당군 할아버지 때에도 굴속에 살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굴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시시대에 굴속에서 살던 혈거시대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지금도 삼성혈(三姓穴)이라고 하는 곳이 잇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아마 옛날 제주도의 삼성 조상들이 살던 굴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주도는 사람은 굴속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또한 몇 해 전에 지은 집과 요사이 짓는 집이 다릅니다. 여러분, 서울 주변을 다녀보세요. 얼마나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세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간단없이 새로운 것을 창작합니다. 이성의 빛이 과학을 발전케 하였습니다. 작은 현미경도 만들었습니다.
이 작은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세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많은 병을 알게되어 고치게 되었고 예방의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등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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