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3장 12-20절

by 【고동엽】 2022. 2. 14.

7 21일 주일예배 2_ 요한복음 13 12-20 (주와 스승이 되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급진적인 낮추심을 통하여 제자들을 경악케 한 사건의 후속입니다. 어떤 세상이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하여 몸을 낮추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주와 스승이라는 이 말의 무게를 충분히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주와 스승이 종이 되는 충격적인 여진을 우리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을 거느렸던 힐렐과 샴마이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힐렐과 샴마이는 예수님 당시 큰 양대 랍비였습니다. 이들이 제자들로부터 발 씻음 받은 이야기가 간간히 나오고, <탈무드>에도 스승이 제자들에게 발 씻음 받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서는 제자들에게 발 씻음 당하는 사랑의 수고를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걸 알려주시기 위해서 서로 발 씻어주는 훈련을 많이 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먼 거리를 걷고 왔던 사람들이 남의 집에 가서 식사할 때 반드시 종이 발을 씻어주는 걸로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갔을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냉대를 받았다고 섭섭한 마음을 피력하는 걸 봅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집에 가서 식사하실 때 마음이 상해서 예수님께서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냉대에 대해서 약간 상처 받은 마음을 피력합니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순식간에 쾌활하게 만들어준 사람이 소문난 탕녀, 행실이 아름답지 못한 여자가 와서 비싼 나드향,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은 겁니다. 발 씻김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아셨던 예수님께서 서로 발을 씻지 않고 누가 크냐는 논쟁 끝에 마음이 얼어붙은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 주는 겁니다. 사실상 누가 크냐는 논쟁만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서로 발을 씻어주면서 옛날처럼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크냐는 논쟁, 누가 주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되냐는 논쟁 끝에는 발을 씻어주는 몸 낮춤을 먼저 하는 사람이 기선을 제압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발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겉옷을 벗어야 하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여매야 합니다. 온 몸이 훤히 드러나는 몸 종 대형으로 자기 몸을 갖추면서 서로 스스로 종이 되는 결단은 이때 제자들 수준에서는 힘듭니다. 굉장히 지체 높은 고귀한 사람만이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존귀한 사람, 자기가 엄청 존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몸을 낮추는 건 굴욕이고 그건 죽음보다 못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귀한 얼과 정신이 가득차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을 씻길 수 없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행동을 모방하기 위해서 그대로 본받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다 온 자녀라는 의식이 분명해야만, 이런 고귀한 자의식이 가득 찬 사람만이 몸을 구푸릴 수 있습니다. 유연성이 나옵니다. 내가 고귀한 자녀라는 의식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라고, 몸을 낮추라는 말을 들을 때는 굴욕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생성자급 연합, 하나님 아버지와 내가 품속에 있었던 관계, 아버지 품속에 내가 있다가 나왔다고 생각할 만큼 깊은 연대와 연합 속에 있는 사람만이 몸을 구푸릴 수 있습니다. 본받고 싶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 본받자고 하기에는 아직까지 힘듭니다. 가만히 쳐다보자고 해야지 본받자고 하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고귀한 자의식으로 내가 하나님의 품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천인 무고한 신뢰관계를 누리는 사람만이 급진적인 자기 하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도 몸을 낮출 수 있고 자기 자녀에게도 몸을 낮출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몸을 낮추며서, 아들아 미안하다, 선제적으로 사과를 하면서 화해하는 아버지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놈이 내 유산을 받으려면 언젠가 굴복하고 오겠지, 이런 냉한 마음이 많지 먼저 선제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수가 조교에게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냉대하고 몰상식하게 굴었던 것 미안하다, 불러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한 이유, 이 세상의 모든 각축은 큰 자가 되기 위한 각축입니다. 큰 자가 되려는 유일한 목적은 큰 자가 돼야만 타자, 작은 자들을 마음대로 압류할 수 있고 부려 먹을 수 있고 온순하게 만들어서 내 욕망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이 세상을 활기차게 만들고 각박하게 만들고 야수적으로 만듭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을 예수님은 끝내겠다는 겁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바벨탑을 쌓았고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제국이 출연했는데, 모든 크려는 마음 지배하려는 마음, 남을 부려먹으려는 모든 사단적인 권력들의 종국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계를 마치 밥상을 엎듯이 엎어버린 겁니다. 이 자리는 우리 주님이 겸손한 성격을 길러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정책의 문제, 이 세상이 돌아가는 운영원리전체를 뒤집기 위해서 주님께서 시범 보여주신 겁니다. 본을 보여주신 겁니다. 어떤 본?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서 몸을 구푸려 종의 형태를 갖는 본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건 모든 높아지려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컷 높아졌는데 결국 다시 가장 작은 사람들의 종이 돼야 하니까 그 종이 되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밤낮 공부하고 높은 정점에 섰는데 권력의 정점에 선 그 사람이 다시 또 참다운 인간이 되려면 포물선처럼 자기 몸을 굽혀서 자기가 떠나왔던 무지랭이 같은 인간에게 그들의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 큰 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타자를 지배하고 다른 사람들을 종처럼 부려 먹으려는 사단적인 권력 자체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한 겁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드러운 접촉을 경험한다면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종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훨씬 더 우세해진다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을 많이 경험할수록 자기를 낮추는 유연성, 자기 하강의 능력이 커지고 신장된다는 뜻입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주님이 몸을 구푸려서 나의 오물 가득 찬 자아를 씻어주셨단 기억이 분명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고상한 도덕으로 인생을 시작한다 할지라도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몸을 구푸려서 피조물의 발을 부둥켜안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이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수습하기 위해서 냄새나는 악취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역겨운 자아 인격을 주님께서 보듬고 씻어주셔서 다시 재생시켜주는 종교는 기독교, 복음만이 이렇게 합니다. 결국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이것입니다. 주와 스승되신 예수를 본받는 사람이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느냐, 이것이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기독교는 think tank가 아니라 action tank입니다.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탱크 같은 추진력과 저돌적인 힘으로 전진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기독교의 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성서신학, 모든 신학적인 담론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구푸려서 사랑의 섬김과 종노릇하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서 신학이 필요한 것이고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유연해지도록 몸을 낮출 수 있도록, 정신과 몸이 가벼워지도록 우리를 낮추어지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모든 예배와 종교적 부수적 행동들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낮추지 못하고 신학과 신앙서적들이 우리를 낮추게 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면, 기도가 우리를 겸비한 자기 비움, 신성의 겉옷을 벗고 신적외양을 벗어던질 만큼 탄력성 넘치는 상상력 넘치는 자기 탈피를 도와주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는 거죠. 저는 기도를 하다가도 가끔 시험이 듭니다. 제가 본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은 고집이 얼마나 센지, 저 자신도 항상 기도를 많이 할 때 실수를 합니다. 제일 무서운 말이 이겁니다. 담임목사가 40일 금식기도를 들어간다는 말은 완전히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담임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갔다 오고 나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로는 8천만 원 김권사는 5천만 원, 이런 말이 막 튀어나옵니다. 40일 동안 안 먹고 나면 이런 정신없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정상식사한 사람의 기도가 더 낫습니다. 40일 금식한 사람의 말보다 40일 꼬박꼬박 밥 먹은 사람의 말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은 일종의 계엄령을 선포한 폭군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안 하면 안 됩니다. 딜레마입니다. 모든 교회의 분란에는 기도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헌금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들어갑니다. 제일 목사님에게 좋은 사람은 죄 많이 짓고 와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진짜 목사가 다루기 쉽습니다. 목사님이 손만 잡아도 전율하면서 은혜 받고 영혼의 세척을 느낍니다. 그런데 기도 많이 하고 심지어 목사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은 사람은 잡아도 얼마나 기도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젯밤에 술 고주망태가 돼서 간신히 끝자리에 와서 앉아 있는데 손을 잡아주면 은혜 받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많이 부린 사람들일수록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꼬박꼬박 하고, 가짓수 방울토마토까지 세어가면서 십일조 하는 사람, 그렇게 꼼꼼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미운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모든 행동들이 사단에게서 옵니다. 진짜 하나님이 기도를 많이 시키면 기도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이 생기고, 금식을 진짜 많이 한 사람은 제대로 금식하면 굶주린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이 생깁니다. 진짜 십일조 하는 사람들은 십일조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적으로 하면 시궁창아래 굴러 떨어진 인생에는 도무지 상상력과 공감이 일어나지 않아서 냉혈한처럼 바뀝니다. 우리는 좋은 목사를 찾아야 합니다. 가향은 과도기입니다. 좋은 목사 찾기까지, 저도 좋은 목사가 있으면 그리로 옮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등록을 안 받는 이유는 오래갈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목사 있는 교회로 다 옮겨야 하고, 우리는 정말 영적 세척력을 가진 목사님 밑으로 가서 배워야 합니다. 절대로 목사가 돼선 안 됩니다. 제 수준으로 만일 한국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저는 진짜 좋은 목사가 없는가 계속 기도합니다. 감화력이 있는 목사님, 계속 기도하면서도 지배하지 않고 엄청 성경 많이 읽으면서도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고 우리 자유를 압류하지 않는 사람, 그런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교회를 옮겨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여의도건, 중구 저동이든, 우리는 다 옮겨야 합니다. 흡수통일 돼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끼리 독자적으로 세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 예수의 고귀한 얼과 영에 붙들림 바 되어서 냄새나는 형제자매의 발을 붙들 수 있는 고귀한 유연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필요하고, 부부는 친숙한 관계지만 겸손한 관계가 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아내가 만일 요리를 하면 형제가 설거지를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하는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나온 하나의 원칙이라고 봅니다. 아내가 설거지도 하고 요리도 하고 자기는 신문 보면서 TV보면서 폐인 모드로 트레이닝 복 입고 왔다 갔다 한다? 이건 기독교인이 아니라 인간이 아니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저는 사모님이 만일 사회문제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다고 하면 <시사인> <녹색평론> 잡지 같을 걸 보면서 계속 그쪽으로 공부를 하도록 도와줘야 하고, 형제는 요리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서도, 형과 아우 사이에서도 섬김, 냄새나는 발을 내 코 밑까지 가져가는 불가피한 친밀 공동체 안에서 발을 씻어주는 사랑이 쉴 새 없이 주간단위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조밀한 인격적 유대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저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멀찍이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발을 다른 사람 발밑까지 뻗어야 하는 reclining 유대인의 식사대형, 밀착대형으로 앉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발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위대한 겁니다. 저는 정말 주님이 엄청난 분임을 20대 보다 50대인 지금 더 무겁게 느낍니다. 살다보니까 진짜 목사 노릇하다 보니까 너무나 겸손하기 힘들다는 걸 느낍니다. 20대 때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겸손이 무언가 몰랐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저보다 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과 생활했기 때문에, 돈 없는 저보다 더 돈 없는 사람과 생활했기 때문에 겸손이 아무 필요가 없었습니다. 돈도 꽤 많고 훨씬 잘난 사람들 옆에 있을 때 내가 겸손하면 패를 보여주고 죽는 것 아닌가, 15분간은 뭔가 가오를 잡아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오만가지 복잡한 심리학적인 충동이 듭니다. 동료교수 사이에도, 우리 학교에 한 교수가 23년간 교수생활을 했는데 명예교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명예교수가 되는 그 심사위원에 제가 들어갑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왜 명예교수가 되지 못했습니까? 사유를 보니까 23년간 한 번도 덕을 세우지 못함, 식사나 섬김 같은 본을 보이지 못함, 논문에 공저가 너무 많음, 제자들 논문을 주로 자기 논문이라고 했음, 심지어 표절 시비도 한두 번 있었음,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을 명예교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한테는 매우 힘든 문제입니다, 23년간 우리 학교에 있다가 마지막 은퇴예배를 하고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에 1억 정도 헌금하실 분인데, 이를 갈게 만들어서 은퇴하게 만들면 우리학교 장사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재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내일 회의를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런 겁니다. 살살 꼬아서, 혹시 명예로운 근거가 없는가 잘 보라고, 이런 채플 지도를 많이 했다든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교수들 사이에 본을 보이지 못하고 은퇴하는 교수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분이 독실한 신자라는 겁니다. 실제로 본을 보이지 못한 아빠, 사장, 교수, 전부 다 인생의 짐들입니다. 내가 주와 스승으로써 본을 보였다는 이 한 마디가 우리 가슴에 박히는 못, 우리의 옛 자아, 우리의 권력욕, 우리의 지배욕구, 타자를 온순하게 만들어서 부려먹으려는 사단적인 우리의 본성에 못을 박는 행위가 주님이 보이신 본입니다. 벌거벗은 주님의 몸을 보는 순간 우리는 통곡을 하면서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저는 이걸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한 것 같은데 또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우리 아들을 가끔 보면 이 아이가 나보다 한 수 높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닌데 내가 이 아이를 좀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제가 다 큰 아들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또 가끔 제 조교를 가만히 관찰해볼 때, 배은망덕한 놈 아닌가, 우리 백정우 조교 아닙니다. 한 때 나의 조교였던 사람, 아무리 잘해줘도 감사가 없습니다. 이 아이는 영원히 나에게 교훈을 못 받고 계속 섬김만 받고 갑니다. 그러면 저는 진짜 인생 임자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편지를 쓸까, 쪽지를 써서, 야야 누구누구님 좋은 말 할 때 이렇게 살지 마십시오, 이렇게 써야 하나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충분히 본을 보여야 할 것인가? 이런 딜레마가 있긴 합니다. 우리에게 본을 보이고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보이면서 통째로 우리 양심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고, 높아지는 우리 마음을 산산조각 부서 버리는 주님의 이 부드러움 앞에 나의 야수적 권력욕구, 나의 지배욕구, 타자를 순하게 만들어서 내 마음대로 부려 먹으려는 사단적인 권력욕구들이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 앞에 다 녹아내린다는 것, 결국은 내가 주님의 부드러운 손앞에 많이 녹아내릴수록 타자의 행동과 상관없이 몸을 부단히 낮출 수 있다는 것, 타자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상관없이, 내 자녀 내 동료 내 조교가 어떻게 나오는지 상관없이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의 경험을 많이 할수록 더 낙차 큰 자기하강을 할 수 있고 더 진정성 넘치는 섬김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겁니다. 주님의 얼이 우리를 지배하는 경우는 타자의 행동과 상관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 직장에서 참 애매모호한, 법을 어긴 건 아니지만 나에게 굴욕감을 주는 언동들이 분명히 있죠. 묘하게 내 치마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 내가 머리를 왜 이렇게 했냐? 너는 왜 화장발이 약하냐? 옛날에 어떤 교회 담임목사 사모님이 부목사 부인들 화장발 가지고 논평을 계속했습니다. 목요일 밤마다 모여서, 그 애는 왜 화장이 그러냐? 그런 담임목사 사모가 있었습니다. 큰 교회 부목사님 사모님들이 왜 옷을 그렇게 입느냐? 우리 모두에게 아니꼬운 말들, 내 영혼을 축소시키는 말들, 이런 언어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그런 언동이 나를 마음 상하게 할 때, 내가 겸손하고 싶어도 내 자아가 손상당했기 때문에 겸손하고 싶을 수도 없는 굴욕 당하는 현상도 참 많죠.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예수님처럼 숭고하지 못한 채로 당하는 굴욕감도 여전히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신 주님의 행동이라는 포괄적인 범위 안에 있는 경험이라는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아주 고결한 목적으로 고개를 숙여서 굴욕을 당하고 겉옷을 벗는 그 일만 내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내게 아픔을 주고 내 자존심과 영혼의 존엄성을 훼손하면서 육박하는 무례한 행동들, 무례한 언동들, 무례한 comment, 이런 것들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겉옷을 벗고 종노릇하는 포괄적인 경험 안에 분류될 수 있으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직장생활이나 위계질서가 있는 모든 세상에서는 결코 우리가 파라다이스 같은 직장생활을 못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논평 당하고 심사 당하고 우리는 때때로 굴욕적인 comment에 노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우리가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협 받으시되 욕을 받으시되 대신 위협하지 않으시고 저주로 앙갚음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굴욕과 수치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겉옷을 벗고 대접 받지 못하고 발 씻김 받지 못하고 식사하는 자의 비애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발도 씻어주지 않는 제자들의 무례를 참으시면서 홀연히 겉옷을 벗고, 내가 이래선 안 되겠구나, 베드로를 원망하면서, 베드로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이렇게 하는 패를 버리시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 제자까지 포함하여 엉망진창 오합지졸처럼 앉아 있는, 철부지 똥을 싸서 으깨고 있는, 프로이드가 말한 항문기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어린 제자들 앞에서 홀연히 주님께서, 이들을 원망하는 마음 이들에 대해 냉정한 평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구나, 주님께서 결단하면서 베드로와 유다의 발을 끌어안고 과감한 action tank를 발동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마음이 안 들었겠습니까? 이 제자들이 언제 철들 것인가? 내가 얼마나 더 해야 제자들이 아이 같은 행동을 버릴 것인가? 베드로 너 언제까지 이렇게 철부지처럼 살래? 유다 나쁜 독사 같은 새끼,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는 억하심정을 과감하게 떨쳐내시고 주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주와 스승으로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런 분투가 필요했고 주님도 이런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서 결단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도 냉정한 마음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정한 마음, 계산하는 마음, 탓하는 마음, 그런 것이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할 때 action tank, 갑자기 겉옷을 벗고 홀연히 몸을 낮추어서 사랑의 종노릇하면서 내 코앞에까지 육박해 있는 냄새나는 자아, 언동들을 품고 씻어주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 안 됩니다. 바로 실습하다간 다치니까, TV에 보면 그런 말 나오잖아요. 집에서 함부로 따라하지 마세요, 다칩니다, 저는 이 본문이 그런 본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수준으로 삽니다. 좋은 목사님 찾아갑시다. 좋은 교회 찾아갑시다. 나는 항상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억하심정, 내 영혼의 굴욕감, 냉정한 계산, 냉정한 평가 등이 복잡하고 비등한 내 마음을 딱 끊고 겉옷을 벗고 몸을 구푸려서 action tank가 돼서 냄새나는 발을 씻는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앞에 와 있는 우리가 해야 할 과업들, 즉 주와 스승이 되셨던 주님이 걸어가셨던 굴욕의 낮춤, 굴욕감 넘치는 분위기에서 과감한 낮추심, 겸손한 섬김, 진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냄새를 천근의 침묵으로 빨아들이면서 행동으로 돌진하신 주님을 본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관계, 부부관계, 직장동료 선후배 모두 다 이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은 마음에 깊이 감동이 안 되도 행동을 잘하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적 교정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 정도 교회 짬밥 먹으면 이미 다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샘솟는 희열과 감동으로 우리에게 automatic 전자동처럼 행동이 우리에게 체질화 돼 있다면 그건 인식이고 굉장히 놀라운 파워가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가까워질 때 형제자매들의 냄새나는 자아가 냄새나는 발이 내 코밑까지 진출할 때 우리가 어떤 형제자매들의 약점을 비방 삼아 퍼트리는 게 아니라 나를 배신하고 내게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발마저도 씻어주는, 내게 거만하고 무례한 언동을 날렸던 사람들의 발까지도 씻어주는 우리 주님의 끝없는 사랑, 무모할 만큼 대담한 사랑, 홀연한 사랑이 여러분과 저에게 작은 모방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주님은 나이가 들수록 너무나 엄청나신 분인걸 깨닫습니다. 제가 20대 때는 이 본문을 읽고도 이 행위가 어떤 의미인가를 감히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100% 깨닫지는 못했지만 주님도 냉정한 계산이 있었고 제자들을 향한 한없는 좌절이 있었습니다. 3년 내내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이 모양인가, 비탄에 빠졌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도 하셨을 법 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철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하여 주와 스승이었지만 다른 스승들과 달리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기로 결단했습니다. 이 엄청난 주님의 모범이 세계 만민 교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통치원리가 되게 도와주시고, 주교와 보좌와 교황과 목사님들의 모든 높아진 권력들을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원천 해제할 수 있도록 부서뜨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십시오, 주님이여, 우리 주님을 닮아 본을 보이는 목사님들 훌륭한 영적지도자들을 찾아 순례하게 도와주시고 그들을 본받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험한 세상에서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를 감격과 감사 속에 바쳤사오니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 교회 안팎에 있는 백성들 먹여 살려주시고, 하나님 나라 위해 써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고단한 직장에서 영혼의 축소를 경험하면서 압류당한 내 인생의 연약한 모습을 불편해하면서 숨죽이며 참아냈던 형제자매들의 슬픔을 기억하여 주시고, 자생하는 영생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 비탄 속에서 비밀한 장막 속에 있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광장에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한 데나리온 일꾼들 있사오니 주님의 포도원으로 초청하여 주소서. 주님, 일터에서 온갖 곤고한 일을 당하며 참아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굳게 붙들어주시고, 굴욕당하시고 발 씻음도 당하지 못하시고 식사를 하셨던 주님의 냉대 받은 가슴 상처 쓰라린 마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부조리한 대우들을 참아내며 사랑의 자생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도록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하나님의 딸들에게 하나님의 새 생명을 위탁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탁 받아 양육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랑하는 주님의 딸들 부부가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 믿고 엄마 아빠 믿고 교회 믿고 감히 세상에 나오기로 작정할 때 그들의 길을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간 하나님의 아들딸들에게 배필을 만나는 감격을 주시고, 가정을 이루는 순종의 도를 허락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새 교우들이 많이 왔지만 저희가 심히 부족하여 마음 속에 있는 친절과 환대와 기쁨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기뻐 받으신 줄 믿습니다. 가향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들을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몸이 아파서 과료중인 하나님의 아들딸들 있습니다. 민지 자매님 부친과 정아 자매님 모친을 기억하여 주시고 진웅 형제님 어머니 기억하여 주시고, 이들이 여러 가지 앓고 고통 속에서 생명의 쇠잔을 경험합니다. 이들이 생명의 노쇠를 경험할 때마다 부활의 새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역진하는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부드러운 발씻어주심의 역사가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지체들과 그들의 일터와 가정과 자녀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