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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김명혁목사 명설교(55편)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

by 【고동엽】 2022. 2. 11.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         

                        1905~1988

 

18차 정암신학강좌 (06.11.07)         김명혁 목사

 

 

 

지난 30여 년 동안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이시다.

 

내가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의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다.

 

그 이후 나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다.

 

나의 한 평생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등이

나에게 깊은 신앙적 감화를 미친 분들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다.

박 목사님도 나를 퍽 좋아하셨다.

 

박 목사님은 시간에 상관 없이 나에게 전화를 거시고

그리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라고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다.

박 목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박 목사님의 입장을 교수들 앞에서 내 세우곤 했다.

 

따라서 나는 박 목사님과의 친근한 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반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다.

 

박 목사님은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었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었다.

 

박 목사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별세하시기 얼마 전 안만수 목사가 박 목사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간 일이 있었다.

원숭이나 호랑이를 보여드렸지만 박 목사님은 그것들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 만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들이 함께 모일 때 피차 농담하는 것을

박 목사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다.

 

교수 세미나를 할 때도 언제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으로 가느냐?”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학문보다 체험쪽으로 가는 것이냐?'는 뜻인듯)

 

박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 목사님은 이와 같은 편지를 쓰셨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다.

“내가 주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를 떠나서 우정으로 주를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 생활과 말씀 연구 생활로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기도를 생활화하신 분이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도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곤 했다.

 

박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다.

 

1979년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하셨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좀 불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기도회에 참석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박 목사님보고 “제가 기도회를 인도할 터이니 집에 가시라”고

하고는 밤 기도회를 인도하곤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다.

 

기도 일관의 박 목사님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 라고 새롭게 감탄하며 나는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다.

 

행정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기 전에 기도로 일관하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길선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보여준 삶의 자세요 스타일이었던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된다.

 

나는 마지막 1주일간 세브란스 병원에 계신 박 목사님을 거의 매일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기도로 일관한 기간이었다.

 

나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간 미국 휫튼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 목사님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 목사님께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박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박 목사님은 매일 기도로 일관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다.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쳤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쳤다.

 

박 목사님은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말씀했다.

 

나는 지금도 박 목사님의 주석들을

세상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는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토를 달곤 한다.

 

박 목사님은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다.

 

박 목사님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다.

 

박 목사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또한 겸손과 진실과 착함의 인격으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하고 순박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은 박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시기도 했다.

 

박 목사님은 종존 나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주시곤 했다.

“김 목사, 마음에 기쁨을 잃으면 안돼!” “힘을 내!”

“강의 준비를 더 잘해야 돼!” “주님을 바라봐!”

 

겸손과 진실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셨다.

 

박 목사님은 또한 인간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다.

 

기도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면서 박 목사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다.

 

그리고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성인 이동주 교수가 합신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박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한국 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박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님은

결국 현세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기도하면서

한 평생을 사신 분이었다.

 

내가 개나리 아파트에 사시던 박 목사님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려고 하면 박 목사님은 의례히 나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열쇠 잊지 마!”

 

내가 박 목사님과 이야기를 할 때 거의 매 번

내가 가지고 다니는 열쇠 뭉치를 소파에 놓고 (대화에 집중하다보니 정신이 팔려)

그대로 놓고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박 목사님은 나보다 더 건망증이 많으신데

나더러 열쇠 잊지 말라고 매 번 당부하신 것이었다.

 

나는 나의 평생에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박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박윤선 목사는 1905년, 평북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 오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을 다 마쳤고

예기와 주역 외에 사서삼경을 암송할 정도로 통달하였고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까지 다 외웠다고 한다.

 

18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섭리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숭실전문대 4학년 때 자신을 주님의 일을 위해 일생을 드리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학 시절과 평양신학 시절에는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인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던 그는

평양신학교를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신앙을 붙들었다. 그는 성경 주석을 저술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의 주석 저술의 동기는

나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안 후에

이 성경을 올바로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성경대로 믿음을 가지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 진리를 바로 전하려는 간절함 때문에

나의 마음은 항상 성경에 머물러 있었고, 동시에 성경 주석 저술에 기쁨이 있었다."

 

그는 '성경의 참뜻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또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할 열정이 깊었는지,

처음으로 유학의 길에 올랐던 그가 태평양을 건너는 17일 동안

요한계시록을 암송하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매일같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은 바다와 하늘뿐이요, 때로는 풍랑도 심했는데

주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면서 요한계시록을 1장부터 암송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17일간의 항해는 나에게 있어서 지리한 시간이 아니라

도리어 진리를 습득하는 단맛 있는 여행으로 바뀌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에는 18장까지 암송한 것으로 기억된다."

 

나머지 부분인 19장부터 22장까지는 학교 다닐 때 아침마다 외워서 다 마쳤다 한다.

"나는 어느 때나 성경 주석 집필을 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언제나 성경에 머물러 있었고

내 머리는 성경 연구와 사색으로 골몰해 있었다."

그가 성경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글이다.

 

"나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그 어느 시점에서든지 기회 관념으로 취급하고

그 기회를 바로 사용하고자 노력해 왔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시간 그 시간에 내가 할 일을 하려고 힘썼다.

그것은 물론 성경 주석을 저술하는 나의 사명과 관계된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여행 중에 자동차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그 안에서도 나의 할 일을 쉬지 않고 계속 한 것이다.

즉, 나는 그러한 시간들을 성경 연구와 기도하는 기회로 붙잡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기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힘써 온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일이란 시간을 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란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나의 할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하였다."

 

박윤선 목사의 생애를 이 자서전을 통해 접하면서

그의 신앙과 삶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었다.

일생 동안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를 원했고 설교하기 원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사명이라 여겼던 <박윤선 성경주석> 집필을 다 마쳤다.

 

하나님 중심 사상, 말씀, 기도, 묵상, 연구, 암송.

그리고 주석. 사명을 위해 살았던 삶 그것 자체였다.

 

그가 집필한 주석으로 많은 목회자와 목회자 후보들이 큰 도움을 얻고 있다.

영적 무식은 영적 부패를 동반하는 법이라 했다.

우리의 신앙이 영성과 지성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의 자서전을 읽고 바로 <박윤선 목사의 생애>(심군식)를 손에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과 또 다른 사람이 본 박윤선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다.

자서전에서 본 박윤선 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또 본인이 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세세하게 기록된 부분이 있어 도움이 되었다.

 

짧은 책이었지만 박윤선 목사의 숭고한 삶에서 느끼는 감동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박윤선 목사의 생애'를 읽다 보면 그 숭고한 삶에 머리가 숙여진다.

 

사명을 위해 살았고 사명을 다하고 갔는데,

지금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가 선천에서 중학 공부를 하던 시절의 체험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성경을 겨드랑이에 낀 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에 없이 마음이 울적했던 그는 둑길을 홀로 걷다가 시냇가에 있었다.

문득 그는 자신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오늘도 교회에 다녀오지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것일까? 살아 계시다면 왜 볼 수 없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였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세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네 옆구리에 끼고 있는 성경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성경이 있는 것이고 그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귀로 듣는 것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그에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어두웠던 마음이 밝아지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마음을 안개처럼 자욱이 덮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를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전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박윤선 목사의 생활은 변화되었고 기쁨이 충만하였다고 한다.

박윤선 목사가 신학자가 되고 성경을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이날의 체험 때문이었다.

 

그가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고 주석을 집필하게 된 것은 1939년의 일이었고,

1949년 4월에 요한계시록 주석 출판을 시작으로 43년 만인 1979년,

그가 74세 되던 해에 66권 성경 주석 집필을 완간했다.

 

그의 글 <주석 사업에 몸 바쳐 온 삶>(1983년1월호 신앙계)에서 박윤선 목사는

"나는 성경을 주석할 그 마음으로 늘 뜨거워 있다.

나에게 있어서 성경 주석 집필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그의 사명이 주석 집필이라 여겼고 그 사명을 완수하였다.

 

1988년 6월 30일 간암으로 하나님 앞으로 갈 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이 땅의 일 곧 그의 사명을 다하고 영원의 세계로 가기 전,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는 심금을 울리다.

"나의 하나님, 이제 족하오니 나의 생명을 데려가 주소서!"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

 

박윤선 목사와 관련된 책, <성경과 나의 생애>, <박윤선 목사의 생애>,

그리고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 이렇게 세 권을 며칠째 이어서 읽고 또 읽어도

감동 그 자체다.

박윤선 목사의 생애와 신앙, 신학관에 대해 책을 통해 만나면서 감화와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사명을 일찍 발견했고 그 사명을 따라 사명을 위해 살았던

정암 박윤선 목사의 신앙과 생애는 신행일치의 삶이었기에

깊은 감동과 울림으로 오래 남는 것 같다.

 

지성과 영성을 두루 갖춘 그의 삶은

성경과 기도, 진실성으로 산 삶이었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말씀과 기도의 종', '우리에게 있는 나다니엘' 등으로 불렸던 그는

한국교회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분의 신행일치의 삶을 지금에라도 만나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가.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합동신학교출판부)은 크게 박윤선의 생애, 박윤선의 신학 사상,

박윤선 신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에 따라 세분화되어 정리되어 있고,

그 외 신학 교수 방법, 목회자의 삶에 관한 박윤선 목사의 잠언적 교훈 등이 실려 있다.

 

세 권의 책 모두에서 발견되는 것은 목회자와 신학도의 태도와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짧지만 강조적인 교훈들,

그리고 박윤선 목사의 성경 주석 집필을 위한 삶,

목회, 신학교 교수로서의 가르침과 기도와 성경,

신행일치의 삶의 향기와 열정이 중점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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