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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4:1-12

by 【고동엽】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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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4:1-12

제목: 강한 자의 미덕=연약자를 섬기는 겸손

 

로마서 14장 말씀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갈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는 ‘먹는다’는 동사가 참 많이 나옵니다. ‘먹는다’ 동사. 왜 오늘 이것이 문제가 됐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옛날 바울 당시에 교회는 예배를 부잣집에서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당시 교회라 함은 독립된 예배당 공간이 없었고 유력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력 교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예배당을 제공하는 유력 교인이 은근히 평신도 대표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유력 교인 집은 대개 정원이 딸려 있는 큰 빌라입니다. 정원이 딸려 있는 큰 빌라에 다락방 같은 데가 있습니다. 일종의 사랑방이죠. 거기에 한 7-8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실내 공간, 약간 반실내 공간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께서 로마에 가보면은 로마에 압비오 거리라고 하는 곳에 가보면 옛날 빌라가 남아 있습니다. 그대로. 옛날 로마의 빌라가 반 하늘이 열리는 반쪽 공간인데 예배드리기 아주 좋습니다. 잔디밭이 있고 거기에 실내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했기 때문에 거기가 아주 중요한데, 이방인 출신 유력 시민인 경우에는 로마인들의 기본 식단에는 고기가 들어가거든요. 이 고기가 들어가는데 고기를 시장에서 사오면은 그 시장에 파는 고기의 대부분이, 아침 고기의 대부분이 로마에 있는 22신들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입니다. 이게 참 놀라운데 로마 시민들이 아침과 저녁에 먹는 고기가 그 전날 또는 그 당일 날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상상외로 고기가 많이 바쳐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은 옛날에는 엄청난 양의 육류가 소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만 하더라도 신전이 한 20 또는 22의 신들을 예배하는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때 바울 당시만 하더라도 로마의 전통 신들이 다 예배를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고기가 엄청나게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로마 출신,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일상적으로 사먹었던 고기가 정말 당일 날 또는 그 전날 신전에 바쳐진 고기인 것을 공공연히 다 압니다. 그리고 그 신전에 바쳐졌던 고기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 갖다 팔지 않으면 소비가 안 됩니다. 시장에 고기를 갖다 파는 일종의 도매상인이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은 바쳐진 제물들을 다시 육류 시장에 갖다 팔고 그것을 사 먹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 1장 8절에 따르면은 다니엘이 이방 신전에 또는 이방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단호한 결기가 나옵니다.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하는 이 다니엘적 정결을 바리새인들이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환상을 경험합니다. 그때 신명기 14장 레위기 11장 정결음식 규례 등에 따르면은 먹지 못할 야생 짐승들이 보자기에 싸여진 채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 그런데 베드로 보고 이것을 먹으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성경이 금지하는 불결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나는 먹지 않겠습니다.” 단호하게 이렇게 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말은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일조는 못할지라도 정결 음식법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정결음식, 코셔(Kosher) 음식만 먹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청주에 있는 한 교회 권사님들이 예루살렘 호텔에, 유대인 랍비가 관장하는 예루살렘 호텔에 순창 고추장을 이렇게 펼쳐 놓고 밥을 먹다가 랍비가 불같이 성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순창 고추장 묻었던 모든 그릇을 그 한국 관광객 보는 앞에서 다 깨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출신 신자와 이방인 출신 신자가 로마의 유력 시민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음식을 먹는데 문제는 이 음식을 먹는 과정에 이방 신전에 바쳐진 제물이 많이 들어오는데 이것을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먹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고기가 이렇게 일상화된 식사인데 유대인 신자들은,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유대인 신자들은 그런 고기를 일체 먹지 않으니까 채소밖에 안 먹습니다. 한 번 보세요. 오늘 본문에 보면은 채소만 먹는 사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이때 믿음이란 말은 뭐냐 하냐면 이제 하나님의 율법은 더 이상 축자적으로, 문자적으로 안 지켜도 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다니엘서 1장 8절의 전통에 따라서 이방인의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지 못하니까 채소만 먹는 겁니다. 그러니까 채소만 먹으니까 처음에는 견디었습니다. 그런데 채소만 먹는 사람들이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기 먹는 사람들을 막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고기 먹는 사람이 다수고, 채소만 먹는 유대인 출신 신자가 소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수가 다수파를 막 공격하니까 바울이 개입한 겁니다. 이 문제가 고린도전서 8장에서 다시 나옵니다. 로마서 14장은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그래서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런데 먹는 자가 다수파인데 이 다수파 먹는 자가 먹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아~ 고기도 못 먹어?” 이렇게 하면서. 그러니까 여러분, 로마 교회에 같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이 고기를 막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채소 먹는 사람들이 더 화를 내면서 아마 비난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유대인, 이스라엘 출신 신자입니다.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그러니까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방 신전에 바친 고기를 먹는다 하더라도 그 일로 실족하는 일은 없다, 실족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굳세어질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저 이방 신전의 제물을 먹는 사람도 굳세게 붙들어 주니까 걱정하지 말라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5절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음식 문제로 한 번 갈등하더니 이번에는 금식 문제로 갈등합니다. 유대인들은 매달 월삭, 매달 첫날에는 월삭 기도회 또는 월삭이라고 그래서 첫날을 더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첫날. 그다음에 금식 절기 때는 금식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날에도 금식합니다. 그다음 대속죄일날도 금식합니다. 이런 몇 가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종교적 역법상의 금식일들이 있는데 월삭, 매달 첫날도 이방 출신들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죠? 그다음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예레미야애가에서 눈물 흘렸던 예레미야 예언자가 눈물 흘렸던 그 애통의 날도 이들은 모르죠? 그러니까 점점점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유대인 출신 신자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과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금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냥 모든 날은 하나다, 똑같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6절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이것 황희 정승같이 판정을 내렸습니다.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은 바울 사도입니다. 그래서 7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런데 이 유대인 출신 신자들과 이방인 출신 신자들의 이런 권리 담론, 먹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먹고, 먹지 않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먹지 않는 자기들의 권리에 있어서는 자기들의 관심사를 충족시켰으니까 잘 한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 출신 신자들,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자기 양심껏 할 수 있는 대로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되는데 상대방을 위하여 배려하며 자기 고집을 꺾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다른 사람의 양심 때문에 내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유대인 출신 신자들보다 더 한껏 위에 있는 신자가 누구냐? 내가 먹을 수 있지만 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내가 먹는 자유 때문에 걸려 넘어진다면 나는 먹지 않으리라 결단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 부인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본받는 신자가, 제3의 신자가 이 두 갈등하는 신자들을 통합하는 신자가 되는 거죠. 어떻게요? 내가, 먹지 않는 것이 내 양심상 옳지만 내가 먹지 않고 이렇게 좀 거룩한 경직된 모습으로 앉아 있는다면 저 음식을 먹는 저 이방 출신 신자들이 양심에 부담을 느껴서 음식 맛을 잃고 식사 시간이 불쾌한 시간이 된다면 안 되니까 나도 가서 먹어주는 이것이 자기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거죠. 그러니까 프란체스코가 1507년경에 아주 중요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금식 아마 사순절날인 것 같습니다. 사순절날 육식을 하지 말자고 약속을 하고 한 40여명의 제자들과 프란체스코가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고기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프란체스코가 출장 갔다 올 때, 노방 전도 갔다 올 때, 몰래 수도원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39명 정도의 수도사 동료들과 스승 프란체스코가 다가오니까 이 어린 제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와~ 어쩔 수 없이 막 엄청난 정죄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은 고기를 먹자” 하면서 금식을 깨면서 그 한 명의 제자의 그 파랗게 질린 양심을 구원하기 위해서 같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게 프란체스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수도사는 누구입니까? 죄가 아니라면 먹어주는 것. 츠빙글리가 사순절날 소시지를 먹었던 사람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같이 소시지를 먹어주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자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경직된 자기만의 정결을 추구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양심에 부담을 준다면은 그 양심을 십자가에 못 박자 뭐 이런 겁니다. 결국 그래서 마무리 하자면은 8, 9절입니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자, 결론적으로 뭡니까? 로마 교회 여러분, 여러분들은 각각 자신이 지키는 양심을 형제를 얻기 위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 양심과 자유를 일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주를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죽는 예수님처럼 되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내가 로마 신자 형제를 얻기 위하여 내가 고기 먹는 자가 되는 결단을 하게 하시고 내가 저 유대인 신자 형제를 얻기 위하여 고기 먹지 못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되어라, 이것이 바로 로마 교회 균열을 치유하는 제3의 신자들이다, 이렇게 이제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판단하는 나도 심판대에 가고, 나를 판단하는 너도 심판대에 간다, 우리가 모두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런데 예수가 보인 삶의 모범이 뭐냐? 내 자유를 십자가에 못 박고, 형제를 살리는 것 아니냐, 따라서 예수님에게 무릎 꿇고 자백하는 날이 온다면 앞서서 한 번 예수님께 무릎 꿇어보자, 그게 바로 뭐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먹는 자처럼 한 번 행동해 보고 먹는 자들은 먹지 못하는 자처럼 행동하여 형제, 자매들을 얻기 위하여 내 자유를 일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보자, 이것이 바로 뭐냐? 예수님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구현한 그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니냐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각 옳은 신자들보다 한 단계 더 옳은 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각각 옳은 신자 A와 B가 서로 갈등한다면 A와 B가 각각 옳지만 그러나 갈등을 경험하는 이때에 A와 B 모두를 아우르는 신자가 C라는 신자인데 이 C라는 신자는 뭡니까? 내가 A로 살았지만 B처럼, B를 얻기 위하여 B가 되려고 하는 사람, 내가 B처럼 살았지만 A라는 신자를 얻기 위해서 내가 A가 되고자 하는 즉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예수님처럼 살면은 이 갈등은 해결할 수 있다, 이런 함의가 있는 거죠. 우리 교우는 아직까지 친밀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친밀한 공간에만 갈등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머리를 맞대다가 갈등이 일어나지 주님의 일을 도무지 하려고 하지 않으면 갈등 자체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가향교회는 갈등이 없는 이유가 아직까지 진짜 주님을 위해서 살갑게 바짝 모여서 교회 일을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중에 진짜 친해지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이 이때 갈등하는 당사자가 각각 50%씩 옳은 신자들이 갈등할 때 100% 옳은 신자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냐면 내가 갈등의 당사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향교회가 아직은 진정한 갈등을 경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살갑게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의견이 충돌을 일으킬만한 그런 충성심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 각각 옳은 신자보다 내 옳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신자가 나타나서 형제를 얻는 신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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