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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0:5-15 /제목: 입술로 시인하여 주를 고백하여 얻는 구원

by 【고동엽】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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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0:5-15

제목: 입술로 시인하여 주를 고백하여 얻는 구원

 

오늘 본문은 이신칭의와 이행칭의, 이신칭의와 이행칭의를 대조합니다. 이신칭의란 말은 뭐냐면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으로 감화, 감동된 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그리스도 후파생적 의입니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신할 때 신은 우리 믿음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다. 1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율법 순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게 율법을 지키셔서 우리에게 의가 미쳤습니다. 의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파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한 그 의로움으로 율법의 요구를 행하여 의로움을 채워갑니다. 그것을 이신칭의라고 그럽니다. 이신칭의. 그래서 6절에 나오는 이거,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 의 이겁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 의는 로마서 3장 24절에 말한 그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모든 사람, 믿는 사람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의, 그 의가 바로 이 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신자의 그 의, 이런 뜻입니다. 이걸 이신칭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신칭의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핵심입니다. 이신칭의의 핵심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셔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능력을 창조해 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그런데 이 이신칭의 반대말이 뭐냐 하냐면 이행칭의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그럽니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도 원리적으로 가능했습니다. 이행칭의 또는 이할칭의입니다. 할례를 통하여 의롭게 됨. 이행칭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됨. 자, 이행칭의가 얼마나 어렵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시키는 것처럼 힘들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는 그 일, 하늘까지 올라가는 일,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가 앉았던,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는 일 만큼 힘 드는 일이고, 죽음에 처했다가 음부에 굴러 떨어졌다가 음부에서 다시 돌아오는, 살아 돌아오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이행칭의의 불가능적 어려움입니다. 이행칭의의 불가능적 어려움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는 만큼 충분히 의로워져야 되고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 굴러 떨어졌다가 음부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만큼 충분히 의롭게 되는 것이 이행칭의입니다.

 

그래서 이 이행칭의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시킬 정도에 충분히 의로움,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게 할 만큼 충분히 의로웠던 그 그리스도적인 그런 정도의 의로움을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행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 행할 수 없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0절입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나니,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뜻은 뭡니까? 그것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3절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례를 받는 사람들은 율법 613가지를 다 지킬 의무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야고보서 2장 10절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 하냐면 율법을,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다 범한 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이행칭의는 영원히 인간에게 매우 불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0절, 갈라디아서 5장 3절, 갈라디아서 3장 10절들은 율법에 속한 자들은 근원적으로 저주 아래 있는 자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음부에 굴러 떨어졌다가 다시 살아나야 될 만큼 어려운 일이고, 율법을 지켜 거룩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엄청난 가빠른 상승에, 가빠른 상승길, 너무너무 영혼을 피곤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행칭의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니까 이신칭의는 얼마나 쉽냐 하냐면 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관한 말씀이라

 

이런 뜻입니다. 요것이 신명기 30장 8절이에요. 8절. 그런데 신명기 30장 8절이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닙니다. 정선희 교우님께서 30장 6절을 읽어주십시오. 신명기 30장 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예,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이런 상태란 말이에요.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게 바로 뭐냐 하냐면 성령으로 새 언약의 인침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 에스겔 36장 우인숙 교우님 읽어주십시오. “네” 26절, 27절. “네 알겠습니다”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예, 내 영과 내 율례, 영과 말씀, 율법을 우리 마음에 두는 것, 새겨 주는 것, 그러니까 마음 먹으면 바로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것, 마음에 율법이 있는 상태이거든요. 마음에 율법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새 언약, 예수님이 새 언약을 우리에게 인을 치셨잖아요? 누가복음 22장 20절에 내가 흘리는 이 피는 새 언약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그죠? 예수님이 바로 예레미야, 에스겔, 신명기 30장 6절이 예고하는 마음 할례시대, 성령 할례시대, 성령으로 새 언약 맺는 시대를 예수님이 지금 구약의 예언자들이 약속했던 그 시대를 지금 예수님이 계시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은 아~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 하는 그런 불가능적 측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성령의 감화, 감동이 오기 때문에 불가능한 느낌이 든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내 마음 속에 생긴다는 말이죠. 예레미야 31장 33절입니다.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 그 우리 김수연 자매님 로마서 8장 15, 16, 17절 읽어주십시오. 그래서 마음의 할례라 함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새 언약을 인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 영과 율법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영과 율법이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 새겨졌기 때문에 마음먹자마자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5, 16, 17절입니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한다는 말은 이것은 부인할 수 없이 내적 확신을 준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자녀가, 자녀답게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 자녀임을 계속 증거 하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그래서 영과 말씀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받은 것이고, 말씀이 역사하면 영이 역사하는 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령이 내게 역사하는 증거는 내가 말씀을 사랑하고, 내가 말씀을 준행할 열망에 가득 찬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캘빈의 기독교 강요 제 1권 7장, 8장, 9장 이 세 장이 너무너무 성령, 성령의 역사와 말씀 역사를 잘 설명하면서 캘빈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추구하는 갈망이 생기고, 말씀을 준행할 갈망이 생기고,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긴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타는 갈망이 솟구치지 않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성령 경험이다’라고 말하거든요. 캘빈 기독교 강요 1권 7장, 8장, 9장이 너무너무 중요한데 이게 정확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역사하는 곳에는 말씀이 역사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가 뭘 인용하냐 하면은 고린도후서 3장 8절을 인용합니다. 영이 역사하는 곳에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성령 받았다는 주관적인 경험이 될 수 없는 것이 성령 받자마자 마음에 하나님 율법을 준행할 열망이 생기기 때문에요. 그래서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순종할 의지가 가득 찬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뜻을 세밀하게 순종하고 싶어서 말씀을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는 8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관한 말씀이라

 

이게 우리 믿음의 말씀 아닙니다! 접미사가 붙어있지 않는 모든 믿음은 전부 다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자, 9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이때 네 입이란 말은 뭡니까? 네 입이란 말은 앞에 8절에 있는 입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이때 이 입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입인데 우리 김윤진 자매님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네가 네 입으로, 이 어떤 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사로잡은 입, 하나님 말씀에 감동된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입만으로 시인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 절대로 그런 말 아닙니다. 입만으로 시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사로잡힌 그 입으로, 성령에 사로잡힌 그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예수를 주라 시인하자마자 뭡니까?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이게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너희 속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 12절 논리이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마음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 그것이 바로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면, 마음에 믿으면,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그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10절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종교재판관이 고린도전서 12장 3절 상태입니다. 자 읽어주십시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야~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는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직장을 잃고,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기존에 살던 그 우상숭배 사회의 일원이 돼서 삽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말은 내가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는 위태로운 순간입니다.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고백하면은 유대인들은 살려줬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면은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저주 받아 죽은 주, 저주 받아 죽은 자다 라고 하면은 바울이 로마와 그 바리새인 세계에서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아 죽었다가, 우리 때문에 저주 받아 죽었고 다시 사신 예수는 주 예수다 라고 고백 하면은 바로 모든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입으로 주로 고백하는 것은 최종적 고백이었고, 궁극적 고백이었고, 내 사회적 공민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초래하는 주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성령이 감화, 감동할 때만 일어납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사회적 공민권을 박탈당할 만큼 많은 손해를 봅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절대로 부당한 재테크에 몰입을 못합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절대로, 절대로 권력 남용을 못합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은 형제, 자매를 섬기는 그 일보다 재산을 축적하는데 몰두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은 사회적 공민권의 많은 부분을 손상당할 만큼 사회적으로 오지랖이 많이 축소될 것입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은 주류 사회가 우리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됩니다. 이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은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버림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 영접되고 구원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참 무서운 말입니다. 이 말이……. 예수를 진지하게 믿는 것은 진짜 무서운 일입니다. 이 무서운 일은 성령의 내적 감화, 감동을 지속적으로 받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 이 믿는 과정의 엄숙성을 한 번이라도 거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교회 다닌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성령의 내적 감화, 감동 모릅니다! 그래서 절대로 성령의 내적 감화, 감동 모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신비에 입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이 극적인 이 신분전환은 너무 극적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고 이것이 나의 삶의 터닝 포인트가 돼서 계속 하나님 나라 영토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영토에 거하는데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 영토에 들어오면은 여러분의 신앙을 앙양하고 도와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거룩한 우정의 교제권 내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거룩한 우정의 교제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할만한 사람이 나를 거룩한 교제권에 넣어 주면은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과의 교제가 재미없고, 신령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심드렁하고, 건조하고, 매우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아마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로마서적인 의미로 구원받은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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