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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0:1-4 /제목: 율법의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고동엽】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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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0:1-4
제목: 율법의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2장 13절 말씀하고 똑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이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말뜻이 뭘까요? 이 말뜻이 뭐냐 하면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 사람,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은 율법을 지켜서 의를 행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그런 사람이라는 거죠. 5절에 바로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하도록 기대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는 율법의 요구를 100% 순종하여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의로운 순종을 보고 예수 믿는 자들도 의롭다고 먼저 선언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는 역순입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는 삶을 완성해서 의롭다는 말을 들었던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신자인 우리는 예수 이름을 믿는 우리는 먼저 예수 이름을 믿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먼저 의롭다는 선언을 먼저 받고 나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나서 그 뒤에부터 의로운 삶을 채워가는 사람으로 분류가 된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내용적으로 아직까지 의롭게 될 사람인 거예요. 우리는. 이 차이를 알겠죠?


그래서 로마서에서 믿음이라고 번역되는 대부분의 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1장 8절처럼 접미사가 붙어있지 않은 믿음 있죠. 로마서 4장 같은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죠. 아브라함의 신실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1장 8절 보세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은 로마 성도의 믿음이죠? 그다음에 1장 5절 보세요. ‘예수 이름을 이방인들이 믿어 순종하게 된다’ 할 때, 이때 믿는 것, 이방인들의 교회의 믿음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은 모든 믿음은 ‘믿음직스러움’이라고 번역되어야 마땅한 번역이라는 거죠. 그러면 믿음직스러운 것이 뭘까요? 율법의 요구를 신실하게 실천하고 준행하는 것을 믿음직스럽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도 사람들을 다 그렇게 평가할걸요. 그죠?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의 말을 보고 믿음, 믿었다고 말합니까? 그 사람이 말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믿었다고 말합니까?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합니까? 후자이지요? 후자.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여러분들을 지금 의롭다고, 믿음, 믿음직스럽다고 여러분을 믿는 자라고 제가 예를 들어서 평가한다고 생각할까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을 믿는다고 할 때 여러분이 저한테 단 한 번도 말로 믿는다는 말을 막 이렇게 수다를 떨듯이 말 안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삶을 몇 년간 쭉 지켜보다가 ‘이분은 믿는 분이 틀림없다! 왜? 저렇게 십수년간, 20년간, 30년간 긴 시간동안 저렇게 사람을 볼 때 저분은 믿는 분 맞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우 중에 한 분은 2001년부터 제가 본 교우입니다. 2001년부터 본 교우가 지금까지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는 제가 마음속에 ‘저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붙들린 자가 아니면은 저렇게 믿을 리가 없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부축되고 붙들려 하나님의 압도적인 신실함에 의하여 사로잡힌 바 된 그 수동태 상태에서 신실하게 사는 능력을 덧입을 때 그것을 ‘믿는 자’라고 그럽니다. 믿는 자. 자,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직스러움입니다. 그러니까. 번역은 전부 다 믿음직스러움이라고 번역해야 됩니다. 믿음이라고 번역하면 왜 안 되냐 하면은 믿는다는 그 동사는 우리나라의 동사 ‘믿는다’는 이 동사는 히브리 동사 ‘아만’ 동사 ‘믿는다’라는 말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동사 ‘믿는다’는 이 말은 말로 먼저, 말로 먼저 후려치는 식의 ‘믿는다’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단어의 ‘믿는다’라는 말 가지고는 히브리어 단어 ‘아만’ 동사, 히브리어의 그 ‘아멘’이라고 하는 그 믿음을 표현을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믿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그 문장의 완성은 언제 되냐 하면은 그 문장이 발설되는 그 순간에 나오는 게 아니고 그 문장이 발설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여 그 생애가 마지막에 종료될 때 그때 ‘믿는다’는 문장, ‘믿는다’는 그 발설 행위가 완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네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100세가 된 자기 몸의 죽음 같음을 알고도 90세 된 아내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녀가 천하 만민에게 복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하 만민의 복이 될 이 자녀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요구했습니다. 즉 네 아들을, 네 혈육의 사랑으로 애착하며 지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그 결단까지 갈 때 네 자녀가 천하 만민에게 복이 된다. 이런 원리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제일 마지막 순간에 22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임을 알겠다. 이것은 굉장히 하나님이 마치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거든요. 이 말은 인간의 수준에 맞게 표현하는 거거든요. 아브라함아 네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그 믿는 행위의 최초로 시작된 그 믿는 행위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던 그 최초의 믿는다는 그 발설 행위는 모리아 산에서 완성된다. ‘갈대아의 믿음은 모리아에서 완성 된다’ 이런 뜻이거든요. 갈대아에서 내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 이 믿음의 완성은 모리아 산에서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제가 김회권이가 예수를 믿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 아직까지는 모르는 겁니다. “김회권은 전공을 영문학해서 신학을 해가지고 저렇게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 아닐까? 저 사람.” 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우리 유급 성직자들은 항상 그렇게 일반 성도들과 다르게 평가 받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그냥 예수 이름으로 그냥 생계 유지하는 사람 아닐까?’ 이렇게 얼마든지 우리는 의심을 받을 수 있어요. 겉으로 볼 때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여러분들, 평신도들은 이런 의심을 안 받죠. 저렇게 30년간 한 교회를 섬기고, 20년간 저렇게 신실하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힘쓰는 저분들은 지상에서 어떤 보상도 없는 거죠. 진짜 하나님만 믿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제가 79년에 믿었다는 이 선언은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이 최초의 신앙 고백의 발설 행위는 언제 완성 되냐 하면은 제가 죽을 때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메가 포인트에서. 그러니까 히브리 언어에서 ‘믿는다’는 말은 오메가 포인트, 알파 포인트에서 시작된 발설된 ‘믿는다’는 고백은 오메가 포인트 즉 삶의 고백이, 삶이 완성되는 그 시점에서 ‘믿는다’는 말이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문장은 일생에 걸쳐서 완성되는 문장이지 절대로 먼저 믿는다는 그 말로 하나님이 그 말을 선뜻 믿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다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왜 성령을 받지 못하냐 하면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은 진짜 믿는 사람이 아닌 겁니다. 믿는 사람이 아니란 말은 두 마음을 품고 교회를 왔다 갔다 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두 다리를 걸치고 양 다리를 걸치고 하나님께 전심을 바치거나, 일편단심을 바치는 일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 그런 사람에게 그런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이라고 아직까지 판단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령을 허락하시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이렇게 양 다리를 걸치면서 지속적으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두 마음을 품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왜? ‘뭐 예수 믿는 사람이나 나랑 똑같네! 저 사람도 사도신경, 나도 사도신경, 저 사람도 찬송가, 나도 찬송가, 저 사람도 직분 맡고, 나도 직분 맡네’ 직분 맡는 사람 중에서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 꽤 많단 말이죠. 왜? 아무렇게나 임명을 하는 거거든요. 목사님들이 아무렇게나 아무라도 임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알파 포인트에서 시작된 믿는다는 그 행위의 완성은 오메가 포인트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죠. 그런데 하나님 복음을 선포했던 예수의 행위는 골고다에서 완성이 된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은 뭡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완벽하게 성취했다는 뜻이죠. 율법의 613개의 조항입니다. 그 613개의 조항을 2개로 예수가 요약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했는데 문제는 그 하나님 뜻이 뭐냐 하면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돌보아 다시 언약백성을 모으는 그 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다가 종교권력자들에게 미움 받아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종교권력자들이 공연히 예수를 죽였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나사렛 목수를 공연히 죽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다가 종교권력자들의 그 위험한 권력 게임, 그 권력 놀이를 위태롭게 하니까 미움을 일으켜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초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권력자들이 내팽개친 사람들을 돕다가 예수님은 종교권력자들의 질투와 시기를 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하다가 죽음을 초래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초래했으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성취하다가 목숨을 바쳤으니까 가장 큰 사랑, 율법의 가장 완성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한 계명에 모든 계명이 달려있다, 예수님은 그래서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오늘 제가 설교 요약에 이것을 자세히 써 놓았습니다. 지금 아침에 써 놓았습니다. 한 번 나중에 보시기 바랍니다. 자, 로마서 3장 22절부터 28절 읽어주십시오. 지금부터 믿음이란 말이 뭔가 보겠습니다. 읽어주십시오.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는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예,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나중에 이도윤 목사님이나 김지영 선생님 찾아보세요. 나중에. 3장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런 단어 없는 단어입니다. 이것 없는 단어예요. 이것. 이 단어가 없고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피스티리스 피스테오스 예수스 그리스토수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음으로’ 를 우리 한국 사람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한국 신자의 믿음으로’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번역입니까? 자, 이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파생시키는 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그다음에 3장 25절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7절입니다.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함의 법으로니라’ 28절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되는 것인 줄 인정하노라’ 이때 율법의 행위를 한마디로 말하면 ‘할례’입니다. 할례.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으면 일단 의로운 자가 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할례 마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할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예수의 율법 순종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 예수의 신실함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나에게 파생시키는 신실함이 있어야 만이 의로운 자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미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자,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이때 미친다는 이 말은 동사가 아니라 에이스라는 전치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나에게 일으키는 파생 효과 때문에 나에게 발생하는 신실함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신실함 이것 때문에 내가 의로운 자라는 선언을 받는데 이 의로운 자라는 선언을 받고 나는 단박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아가서 마침내 내가 의로운 자로 선언이 됩니다. 마침내, 마침내!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5절입니다. 우리는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우리가 의롭게 될 것이다 라는 선언을 소망하고 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 5장 5절이 말하거든요. 제가 전에 말했지만 권연경 교수의 ‘갈라디아서 산책’이 이것을 아주 잘 풀어 놓았습니다.


자, 마무리 하자면은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의 논리를 이어받은 심화학습 갈라디아서 심화확장판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천히 또박또박 로마서의 내적 논리를 잘 깨달으면은 기독교 구원론의 신묘함, 신비함, 놀라움을 깨닫게 되고 엄청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결국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지 않으면은 기독교에 입문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세계에 입문한 것 아닙니다. 내 마음에 내가 하나님의 영인 것을 부단히 증거 하는 성령, 성령의 증거가 우리를 인치는 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율법의 마침 되시는 예수님의 그 의로우심이 여러분에게 미쳐서 여러분이 파생된 의로움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에 충실한 이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향 교우들이 로마서 복음을 옳게 깨달아 성령 충만한 로마서 8장 말씀처럼 끝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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