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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평 P1 룻4:13~22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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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평 P1 룻4:13~22

 

 

 

◑나는 생명용품, 장례용품?

 

▶저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단상들이 있습니다.

장례용품에 대한 단상들입니다.

 

죽은 자의 시신은 수의를 입힙니다.

수의는 삼베에서 명주를 거쳐 비단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천차만별입니다.

제일 비싼 수의는 그 가격이, 제일 싼 수의의 수십 배, 심한 경우 1백 배에 이르기도 합니다.

 

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동나무, 홍송, 향나무로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관도

그 형태나 가격이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장례용품은 그 특성이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면 아무리 비싼 장례 용품이라 할지라도

장례용품은 단지 썩어지기 위해서 제작됩니다.

 

같은 산에 같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건축 재료로 쓰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가구로 쓰여집니다.

그런데 장례 용품으로 만들어질 관은, 오직 썩기 위해 존재합니다.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되지만, 오직 썩어지기 위해서

오직 죽은 자를 위해서 제작되는 장례용품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생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연인, 모든 인간은 그 인생이 일회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두 장례용품과 동일합니다.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더불어 사는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긴 안목에서 본다면, 오직 공동묘지를 향해서

자기 평생을 전력으로 질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의 인생이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용품으로 자신의 인생을 일구는 것이라면

후자의 인생이야말로 자기 인생을 장례용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출세를 하고,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남보다 1백배 비싼 ‘수의’, 1백배 비싼 ‘관’으로.. 으스댄다 하더라도

그래도 ‘관’이요, ‘수의’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비싼 ‘관’이나, ‘수의’라 하더라도,

남이 한 번 썼던 것을, 다시 재활용해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례용품의 재활용품은.. 그저 줘도, 안 가집니다.

 

예수 밖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인생도, 그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공해봤자.. ‘장례용품’ 중에 고가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첫째, 한 인간이 자기 인생을 평생생명 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

결국은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갈 것인가는 철저하게 결정권이 개인에게 있습니다.

 

결정권을 그 당사자가 지니고 있기에

자기 인생을 스스로 장례용품으로 일구어 가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없고

그 인생보다 더 추한 인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3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저는 목사입니다.

가령 이를테면 예를 들어 제가 몇 분과 성경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목사인 제 이름을 걸고 저와 함께 성경 공부하시는 분 가운데서

단 한 분도, 그 인생이 실족하는 분이 없도록, 제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재철 목사와 성경 공부하다가, 내 인생 버렸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용납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믿다가 장례용품 되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후패합니다. 반드시 노쇠합니다.

그러나 내 속에 진리에 기인한 생명이 차 있을 때

내 육체가 아무리 쇠잔해진다 할지라도

내 육체는 날로 새롭게 ‘생명 용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의 체험적 고백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이름만 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여인이

단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여인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부인이었던 다이애나 비였습니다.

또 한 여인은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들과 한 평생 살았던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다이애나 비는 3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몸에 걸친 모든 것들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최정상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례 용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같이 썩었습니다.

 

그 젊은 여인에 비하면, 마더 테레사는 노파였습니다. 80세 노파였습니다.

재산이라고는 하루마다 번갈아 빨아 입는 사리 옷, 그것도 두 벌밖에 없었습니다.

온 얼굴, 손등에 깊이 주름이 패어 있었습니다.

미모라고는 어디라도 찾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 노인이야말로 후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넘치는 생명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생명용품’으로 살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 외에 어머니를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길 원합니다.’

 

룻이, 이방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생각할 때, 그 연로한 여인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여인이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남의 나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 시어머니가 ‘그래, 너 그런 결심으로 나를 따라왔으면

죽을 때까지 내 수발이나 들다가 세상 떠나거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어머니는 그 젊은 며느리의 중심을 아름답게 보고

자기가 앞장서서,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룻이 개가를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룻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를 잉태께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바로 이 구절만 보면, 룻이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신앙을 위하여 시어머니를 좇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정을 주시고, 아들까지 주셨구나, 해피 엔딩이구나.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룻이 나온 성경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로 16~1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은, 자기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시어머니가

아이 키우는 기쁨을 누리시게끔 하기 위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로 하여금, 아이를 키우게 했습니다.

 

바로 룻이 낳은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름이 오벳이었다라고 성경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태어난 것은 오벳 한명 밖에 없는데

성경은,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오벳의 아들 이새, 손자 다윗의 이름까지 거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성경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룻 한 여인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었을 때

그 조그마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지금 미래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핏덩이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핏덩이를 통해서, 새롭게 될 역사의 지평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인지 성경은 다시 반복합니다.

 

룻4:18~22,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다시 바로 그 오벳을 통해서 이새와 다윗이 태어났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의 지평이 새로워졌음을, 한번 더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래는 창조의 대상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을 어떤 용품으로 일구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창조됩니다.

 

나의 삶은 절대로 내 개인과 내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소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느낀다.. 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보잘것 없다 할지라도

여러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나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여러분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과부되고 늙은 시어머니 따라 국적까지 바꾼

룻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 용품이 될 때

미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할 수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내 인생을 나의 욕망 때문에 썩어질 장례 용품으로 만든다면

나로 인해서 미래 역사의 한 부분은 반드시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내 인생의 진리 안에서 생명 용품으로 일굼으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일구는 하나님의 이 시대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요.

우리는 나오미와 룻의 삶을 통해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룻보다도 먼저 내가 생명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 오르바, 룻. 룻기에 등장하는 이 세 여인의 특징은 공통점은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남편이 죽었죠. 두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는 사람은 오히려 편하죠. 고통은 산 사람의 몫입니다.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죽어서, 슬픔을 가슴에 묻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절하게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오르바,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죠. 시동생 죽었습니다. 처절한 경험입니다.

 

룻,

시아버지 돌아가셨죠, 시숙 돌아가셨죠, 남편 죽었습니다.

 

세 여인 모두,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알기 때문에, 도리어 쾌락주의자, 염세주의자, 세속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르바는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하고나서도

어떤 연유인지 세상을 쫓아 갔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죽음을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접촉점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국 나의 욕망의 도구로써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죽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 다는 거에요. 반드시 죽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크게 직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지점마다 아주 대표적인 무덤이 있습니다.

 

오른쪽 꼭지점에는 이집트가 있죠.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2.5톤짜리 석회암 230만개를 정교하게 쌓아올렸습니다.

밑변이 230m, 높이가 144.6m입니다. 인간이 만든 무덤 중에 가장 거대한 무덤입니다.

그 앞에 서면, 압도당한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프리카 왼쪽 꼭지점에는 모로코가 있습니다.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 가면, 모하메드 5세의 영묘가 있습니다.

2년 전에 타계한 핫산 2세가, 자기 부왕을 위해서 만든 묘입니다.

묘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묘가 아니죠. 멋진 궁과 같은 묘입니다.

 

들어가면 2층 발코니에서 속을 볼 수 있습니다. 1층 바닥에 관이 있죠.

핫산 2세가 죽은 뒤에, 바로 그 묘에 들어갔습니다.

그 발코니에 서서 그 영묘를 쭉 둘러보면,

그 묘실 내부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있는지

만약 바닥에 관만 보이지 않으면, 무덤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멋진 왕궁의 왕비의 내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하메드 5세의 영묘를 ‘아프리카의 타지마할’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죠.

 

아프리카 직삼각형 제일 아래쪽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습니다.

그 남아공화국에 흑인 빈민촌 속에, 흑인 빈민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나라를 가던지, 처음 가보는 나라나 도시를 가면

꼭 그 도시의 공동묘지를 찾아가봅니다. 공동묘지에는 교훈이 많거든요.

 

저는 전 세계 어디에 가서도,

남아공화국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처럼, 초라한 묘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묘지라고 부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곳은 쓰레기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피라미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가장 아름다운 모하메드 5세의 영묘.

가장 지저분한 쓰레기장 같은 흑인 빈민촌 공동묘지.

그 형태는 완벽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뭡니까.

죽음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무엇을 시사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자? 가장 거대함을 누린 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 세상에서 제일 미모를 지니고 있는 자?

세상에서 제일 비천한 천민? .. 모두 동일하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우리 오늘 하루 살았죠? 그 말의 의미가 뭡니까.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하루를 죽은 것입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30세면, 30년 죽은 겁니다.

저는 우리 나이로 55살입니다. 55년 죽은 겁니다. (2003년 설교)

산다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매일 자기의 욕구를 따라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장례용품으로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알고 나면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은, 오늘 하루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아는 자만이 죽음 이후를 책임져주실

내 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그분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삶을 그분에게 의탁해드리기 위해서,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복음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구원의 십자가가

이스라엘 많은 동네 많은 장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골고다'라는 이름의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한 말인데.

굴골토는 해골이라는 말입니다. 해골이라는 이름의 지명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하나 그려봅시다.

해골바가지가 있습니다. 그 해골 정수리에 십자가가 세워져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타고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한 방울 한 방울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해골처럼 죽었던 인간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정말 복음을 이보다 더 좋게 표현할 수 있는 한 컷의 그림은 없죠.

 

그럼 그 그림에 의거해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진정한 구세주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겠습니까.

누가 그 분을 이용하려 함이 아니라,

그 분에게 내 삶을 의탁하기 위해서 그 분을 찾겠습니까.

 

오직 한 사람입니다.

내가 해골임을 아는 자입니다.

 

 

내가 오늘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산 것 같으나 결국 내가 해골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때

‘주여 제게로 오소서’ 그분을 모시게 됩니다.

바로 나는 그 분의 생명 속에서 ‘생명 용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세가 몇 세이던지 상관 없이, 여기에 젊은이들도 계십니다.

한 80년 잡을까요. 80년 후에 누가 살아있겠습니까.

80년 후에 다 우리가 뭐죠? 해골입니다.

80년 후에 우리는 땅 속에서 해골이 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 어떤 신문사에서, 직업 에이전트가 광고를 게재했는데

의사, 사무원, 이런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우리는 당신들의 직업을 죽을 때까지 보장합니다.’

이런 문구로 사진을 게재했는데. x-ray로 찍은 해골이에요.

옷은 다 입고 있는데, 속이 다 해골이에요.

 

그 사람들은 해골이 될때까지 직업을 보전하겠다고 사진을 게재했지만

대단히 신앙적인 그림이죠.

우리는 이렇게 서 있지만, 우리는 내일의 해골입니다.

그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을 생명용품으로 일구는 자가 됩니다.

 

나오미의 첫번째 자부 오르바는 죽음을 알긴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좋은대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공동묘지의 해골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추적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례 용품’이 된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역사의 지평 P2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나머지 절반)

 

 

◑나오미 가정의 자기 비움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는 생명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를 비워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나오미와 룻이, 우연히 역사의 지평을 뒤흔들게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남편 두 아들들이 죽은 뒤에,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두 자부를 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집을 나설 때는 분명히 두 자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한번 우리집에 시집오면 죽을때까지 내 집 사람이야.

내가 내 고국으로 가도 너희들은 비록 외국인이라도 나 따라와야 돼.

그런데 데리고 길을 걸어가다가 시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집을 떠나 길을 걸어가다가 나오미가 마음이 바뀐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생각하면 이 두 젊은 자부, 데리고 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두 자부에게 얘들아 집으로 돌아가거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해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보니, 내 일신의 안일을 위해서

이 젊은 두 여인을 평생 내 삶의 그늘에 멍에를 씌우고 머물게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자기를 비웠습니다. ‘너는 가라’는 말은 뭐죠?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랬더니 오르바와 룻이 울면서 ‘안 됩니다 시어머니.

우리는 어머니 따라가겠습니다.’ 두 자부도 자기를 비웠습니다.

 

시어머니가 다시 자기를 비웠습니다.

‘아니다 얘들아. 나를 따라와봐야 소망이 없다. 가거라.’ 두 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오르바는 그 길로 자기 길을 찾아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꼭 붙잡고 쫓아갔습니다. 자기를 또 비웠습니다.

 

시어머니가 세 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룻아, 그러지 마라. 너 가거라. 너 행복해져야 한다.’ 아까 우리가 봤죠?

룻이 뭐라고 자기를 비워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세번째로 자기를 또 비웠습니다.

 

할 수 없이 나오미가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 수발을 요구하지 않고, 룻을 개가시켰습니다.

그건 자기 "쑡º 일을 스스로 하겠다는 거죠. 네번째로 자기를 비웠습니다.

룻이 개가해서 보아스의 사이에서 오벳을 얻었죠.

여러분 여기에서 아이를 키워보신 어머니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내가 몸이 아프지 않고 내가 정상적인 건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이를 내 품에서 키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룻은 그 사랑하는 아이 키우는 기쁨을 시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시어머니가 품에 품고 키우게 했습니다. 룻 역시 네번씩 자기를 비웠습니다.

 

시어머니 네번, 며느리 네번만 비웠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날마다 자기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 역시 자기를 비운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계대 결혼으로 자기 아내로 삼아주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계대 결혼이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을 계자에 세 대자. 이를테면 남자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중에 한사람이 죽어요.

그럼 남아있는 형제가 형님 혹은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아서 형제의 대를 잇게 해주는 게 계대 결혼입니다.

 

그런데 이 계대 결혼은 여자에게 굉장히 좋은 관습이죠. 보호자가 생기거든요.

그러나 계대 결혼을 당하는 남자에게는 책임과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아주 불리한 결혼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고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유산도 줘야 하는데

내 자식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대를 잇는 거죠.

 

그러므로 계대 결혼을 해야 할 당사자들은 원치 않는 겁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의 아들 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바로 밑에 동생 오난에게 유다의 아내 형수 다말을 데리고

계대 결혼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이 뭘 할려고 안하죠? 형수 데리고 자면서 아이를 낳을려고 안합니다.

출산을 하면 책임만 있을 뿐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거부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죠.

 

룻기를 이제 서서히 읽어보십시오. 룻기를 보면 이 룻이라는 여자를 위해서도

계대 결혼의 의무가 있는 남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자신이 첫번째 의무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데리고 평생 의무를 다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비워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의 지평은 새로워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내 중심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비우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중심을 버리지 않고 내가 어떻게 더불어가는 마음을 지닐 수가 있겠습니까.

 

비우지 않으면 채움이 없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관들이 PVC나 동관 이렇습니다.

그런데 아주 예전에는 모든 수도 파이프들이 다 쇠파이프죠.

그래서 오래된 집을 수리할 때 쇠파이프니까 몇년마다 갈아야죠.

 

녹물이 나오니까. 그때마다 파이프를 본 기억이 어떻습니까.

파이프가 밖에만 녹슬어있습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이 온통 녹물이 굳어진 것투성이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수가 흐를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비움이라는 이 명제를 생각할 때마다 예전에 보았던

쇠 파이프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의 속이 결국 그럴 거라는 것. 우리의 속에 뭐가 있습니까.

그 더러운 것들을 비우지 않고 어떻게 생명이 채워지겠습니까.

 

▶제 아이 중에 금년 2월달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있습니다.

졸업식에 갔습니다. 정해진 시간보다 졸업식이 한시간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유는 학생들이 안 오는거에요. 그래서 한 시간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졸업식장은 장터 아닙니까.

아무도 이 강단위에서 말하는 사람들 이야기 안 듣죠. 다 자기네들끼리 떠들어요.

 

한 학급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불과 두 세명밖에 안되는

이 체제에서 다 떨어진 아이 뿐인데.

그 학생들 앉혀놓고 경건한 졸업식을 하자. 그 제도적으로 무리겠죠.

그 졸업식장도 계속 시끄러워요.

그런데도 강단위에 선 분들은 엄숙하게 계속 진행하는 겁니다.

 

여러분을 또 다시 보내자니 마음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중에 나온 말입니다.

동창회는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 걱정말고 교문을 나서십시오. 백발이 허연 동창회 회장님 격려사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형님들이 없겠거니 생각하니 왠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재학생 송사지요. 존경하는 선생님, 사랑하는 후배, 정든 교정을 영영 떠나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졸업생 답사입니다. 아무도 안 들어요. 저만 들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웃으셨습니까. 이유는 하나지요.

이게 거짓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웃었습니다. 진심이 안 담겨있거든요.

 

어느 졸업생이 가슴이 미어져요. 어느 재학생이 눈물을 앞을 가려요.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믿지도 않고 떠드는 거에요.

저는 그날 졸업식장에 앉아서 그 가슴 아픈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 졸업식장이 오늘날 교회와 같겠다...

 

여러분 교회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선포됩니까.

여러분들 신자들끼리 얼마나 진리의 공부를 열심히 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 말을 믿고 있습니까. 믿으시면 나가서 그렇게 사셔야죠.

안 사시면서. 살 의사는 추호도 없으면서 너는 살지만

나는 살려고 하는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그 이야기만 서로 그럴듯하게 한다면.

우리가 이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웃듯이 하나님도 웃으시겠죠.

 

세상 사람들이 비웃겠죠. 비워야 합니다.

내가 비우지 않으면 그 말씀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우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런 집회를 일년에 몇번을 해도

교회 밖에서 여러분의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 보셨죠. 4월 9일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중앙에 있던 후세인 동상이 무너졌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약탈이 자행되었어요.

 

이라크 국민들은 백퍼센트 이슬람 교도들입니다

이라크 국민뿐만 아니라 이슬람 회교도들은 참으로 신앙심이 대단합니다.

 

제가 터키를 갔을 때 2주간 여행했는데 제가 여행할 때

그 운전하던 기사분이 터키분인데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죠?

이분이 나가서 기도 해요. 그럼 저는 그분이 기도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어쩔 때는 한번 들어가면 한 시간씩 있어요.

바그다드에서 약탈하던 사람들도 다 기도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믿음은 뭘까요?

그 사람들이 모스크를 찾아서 그렇게 열심히 하루 세번씩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는 걸까요?

 

저는 그 화면을 보면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저와 다를 바 있겠는가.

모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형태만 틀릴 뿐 만약 우리가 바그다드 사람처럼

내 욕망을 위해서 그처럼 뛰어다닌다면 역사의 미래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작년에 청년 사역자들 중심으로 한국에서 고지론과 미답지론 논쟁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들 알 것입니다.

어떤 그룹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높이 전파하기 위해서는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무조건 정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아니라는 거에요. 정상이 아니라 미답지론.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둘 다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고지냐 미답지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너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비우면 똑같은 시대 똑같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처럼 고지에 올리십니다.

 

다니엘이 원해서 간 것 아닙니다. 비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올리셨습니다.

에스겔은 똑같은 시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미답지로 보내셨습니다.

성 밖. 포로들이 있는 그 미답지에 보냈습니다.

 

고지나 미답지가 나의 목표가 될 때 나는 절대로 나를 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내 목적이 될 때 비울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치 기사가 바둑돌을 운행하듯 우리를 운행시키시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생명의 용품이 되기 위해서는 마라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나오미가 사랑하는 자부 룻을 데리고 고향 땅 베들레햄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고향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고 기뻐합니다.

그를 환영합니다. 그랬더니 나오미가 그 사랑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1장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왔다, 나오미야 반갑다, 하니까

우리말로 기쁨이 왔다, 기쁨아 반갑다. 이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나오미가 얘들아, 나를 기쁨이라 하지 마라. 나를 마라라고 해라.

마라라는 뜻은 고통,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내 처지가 지금 마라다. 고통이다.

그러니까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라.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다. 오래 전에 나오미가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들을

데리고 모아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청운의 꿈이 있었겠지요. 청사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민 끝에 실패를 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외국인 자부 한명만 달랑 데리고 역 이민,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오래 전에 꿈을 품고 걸어갔던 그 길을 마라의 쓰디쓴 가슴으로 되돌아옵니다.

 

똑같은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길의 의미가 날마다 똑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제는 나오미지만 오늘은 마라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 앞에 마라의 길이 펼쳐졌을 때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하지마라 마라라 하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나오미가 그 마라의 길을 내가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자존심 상하는

이 몰골을 동네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었던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어디 다른 곳을 가서 "막 일을 할지언정 그곳을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존심 상하는 그 마라의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룻도 그 늙은 시어머니 따라가는 것, 자신에게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마라의 길을 룻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라의 길을 거침으로 그들은 진정한 나오미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뒤에 사울 왕의 질투를 받지 않습니까?

사울 왕이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삼천 명의 특공대를 구성해서

온 이스라엘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죠.

다윗이 이스라엘 내에 숨을 곳이 없어서 바로 가드 왕에게 가서 자신을 의탁하다가

그 곳에서 자신을 경계하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시늉을 하고

겨우 살아서 나옵니다. 그리고 지은 시가 시편 34편입니다.

 

그 상황이라고 하면 하나님 원망해야죠.

그런데 시편 34편을 통해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곳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침을 흘리고 미친 짓하며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뭐죠? 지금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정황은 마라입니다. 부족함 투성이에요.

그 마라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의 부족함 때문에 그는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라를 통해서 그는 결국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나오미가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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