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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말씀이 생각났더라 행11:15~18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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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아서 실패했던 베드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 하시니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베드로는,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지.. 부인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26:74~75

 

 

닭이 울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비로소 뒤늦게 생각났던 것이다.

그 말씀이 미리 생각났더라면, 아마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말씀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만 베드로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이해심 많게 해석할 수도 있다.

뒤늦게나마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그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고

그는 이후로 아주 겸손한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만약 그 날 새벽에, 닭이 울 때에, 그 시간에도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날 새벽에 통곡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교만과 거짓된 정의감 속에서 계속 살아갔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그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어져 갔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큰 역사를 이루었던 베드로

 

예수님을 면전에서 3번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하던 베드로가

그 후에 오직 예수님을 쫓아 살게 된 것도,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그 후에 도리어 예수님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마저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도,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그 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들을 지금 기억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게 보통 사람처럼 전개되다가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사는 것은.. 이렇듯 매우 중요하다.

 

 

▲고넬료 복음전도의 사건의 중대한 의미

가이사랴에서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까지 베풂으로써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즉 교회가 그 선교명령을 공식적으로 처음 수행하는, ‘물꼬를 트는’ 사건이

바로 고넬료 일행에게 세례를 주었던 사건이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지경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데

가교bridge역할을 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앞서 구스 환관에게 빌립이 복음을 전했지만, 가교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 이후로

안디옥교회는 정식으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사도행전 13장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들을 통한 이방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이었던 ‘세례 베풂’

 

 

 

 

 

 

 

 

베드로가 이윽고 초대교회 본거지가 있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베드로는 ‘교회의 교회다움(선교활동)’을 확립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환호나 칭송보다는,

소위 할례파인 유대교출신 그리스도인들의 혹독한 비판이었다.

 

 

베드로가 유대교의 관습을 어기고

이방인의 집을 찾아가서 교제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게다가 세례까지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더욱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복음 전파’는 어쩌면 용인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허무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례 베풂’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그 차이를 허물어버리고, 이방인을 유대인과 대등한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평소에 이방인을 짐승이나 지옥의 땔감 정도로 인식하며 살던 문화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말씀이 생각나서.. 세례를 베풀었다.

베드로 역시 엄연한 유대인이었고, 그런데도 베드로가

어떻게 그런 충격적인 일을 행할 수 있었는지 베드로 자신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임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행11:15~17

 

 

뜻밖에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이방인들이, 성령세례를 받게 되자

베드로는 불현듯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5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서 행1:5절이 생각났는데,

그 말씀은, 예수님이 승천 직전에 가르치신 말씀이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1:5

 

그리고 이 말씀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1:8절과 저절로 연결되어진다.

 

 

즉, 베드로는 그날 고넬료의 집에서,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서

행1:4~8절까지 연결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눈앞에서 행1:5~8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마28:19절도 당연히 생각났을 것이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무엇보다 이방인인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예수님의 분부’라면

당연히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마땅했다.

 

 

이를테면 그 날은, <이방인을 위한 오순절>인 셈이었다.

주님의 그 말씀이 기억나는 즉각,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베드로가 과감히 행하였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날이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형식적인 물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았다.

자기들은 물세례 받고나서, 성령세례 받았는데,

지금 이방인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있는데, 물세례 받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그 때,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했겠지만

세례까지 베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교회의 교회다움’이

베드로에 의해 확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 혁명적인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베드로에게 생각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함이었다.

 

 

 

 

◑나중에 성경의 예언이 생각났던 제자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가지고 나와서, 예수님을 환호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도다. 요12:13~15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이, 슥9:9절의 성취임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비로소 생각이 났다.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2;16

 

하지만 제자들은 평소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죽음을 깨드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모습을 직접 목격한 후에,

제자들은 비로소, 슥9:9절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적용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서...

 

어느 교회의 그 날 설교 요지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품고 본받는 사람이 되자> 였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이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어떤 차 한 대가 좁은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즉 차 주인이 빨리 차를 빼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차들이 그 뒤에서 늘어서서, 그냥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한참이 지나서, 그 차 주인이 나타나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면서

자기 자동차로 뛰어가서 시동을 걸었다.

아마도 피치 못한 무슨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한 중년 남자가 자기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막 삿대질을 하면서 욕설을.. 그 늦게 온 사람에게 퍼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표정이었다.

더군다나 교회 주차장이 아닌가! 그래도 경건한 장소에서 막 혈기를 부리다니...

 

 

마침 그날 예배의 설교 주제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품고 본받는 사람이 되자> 였다.

그런데 그 성급한 남자분이, 그런 혈기를 쏟아낸 것은

방금 전에 들은 말씀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방금 전에 설교시간에 들었던 ‘그 말씀이 생각났더라면’,

그는 예배당 구내에서 그렇게 심하게 남에게 욕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한다 하더라도

우리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필요할 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야 하는데,

만약 그 말씀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의 삶 역시, 위에서 ‘삿대질하며 욕하던 그 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모든 말씀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제가 아내와 27년간 결혼생활을 해 오면서

‘신뢰’를 부부지간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 어느 날 새벽에 어머니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씀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말고 정직하라’

 

 

하지만 제 어머니께서 제게 그 말씀만 해 주신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려서부터 제가 48세 때 소천하시기 까지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을 얼마나 많이 해 주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많은 말씀 중에 99%는 제 기억 속에 다 지워지고 말았다.

그 중에 제가 아직까지 ‘기억’하는 말은 1%도 되지 않는데,

가장 대표적 말씀이 바로 ‘아내에게 정직하라’는 말씀이었다.

 

 

성경책에도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많이 적혀 있다.

우리가 그 많은 말씀을 다 기억하거나 암송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내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때에, 적절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야 한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서만 가능한데...

 

 

 

◑성령님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는..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기억나게끔

또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게끔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태만하거나 소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우리 마음속에 담지 않으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깨닫게 해 주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그 이전에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에 담는.. 즉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는

전제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치는 말

주님을 세 번 씩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베드로가

-닭이 울 때 뒤늦게나마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 것도,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 것도

<보혜사 성령님의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였다. 요14;26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 노력도 없이

무조건 성령님만 의지하고 살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말씀이 생각나게 되리라'는 요14;26절이 성취되려면,

그 전제는,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내 생각 속에 말씀을 차곡차곡 저축해 놓아야 한다.

 

바로 그 때 성령님께서 필요한 때, 필요한 말씀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다.

고넬료 집의 베드로처럼...

 

 

그때부터, 베드로처럼, 타파되어야할 잘못된 종교적 습관들이 타파될 것이다.

그때부터, 베드로처럼, 나로 인해 누군가의 가정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베드로처럼,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나 자신을 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09.01.25. 설교 녹취 *원제목 : 생각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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