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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자의 신앙고백 (욥기 23장 10-17절)

by 【고동엽】 2022. 1. 3.

수난자의 신앙고백/(욥기 23 10-17)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착하게 사는 사람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이땅에서 고생하며 그리고 유리하여 헐벗고, 저들이 그렇게 괴로워 해야 하는가? 이것은 일류역사가 생긴 이래 우리의 끊임없는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진 이후에 낙심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도 내겐 이렇게 재앙이 그치지 아니하며 이렇게도 나에게는 환란이 끝나지 아니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많은 착한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신음하고 사업의 실패로 고통을 당하며 사랑하는 착한 여인들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슬피 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착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을 고독하게 슬프게 탄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이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는 설명을 하지만 그것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가운데서 그러한 고민을 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그는 하나님을 경유하고 악을 떠난 사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욥은 행복한 가정을 가졌습니다. 아들이 일곱, 딸이 셋, 그리고 아담하게 가정 생활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는 당대 동방의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 낙타가 삼천, 소가 천마리 그리고 나귀가 오백마리였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대제벌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제벌이 하루 아침에 망합니다. 그것은 왜경이 쳐들어와서 재산을 약탈하고 종들을 칼로 죽이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서 양들과 종들을 불살러 버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됩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에 10남매가 맏형 집에서 생일 잔치를 하는데 태풍이 불어서 그 집이 무너져서 10남매가 몰살하게 됩니다. 세상이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환란을 당하면 보통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 죽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업드려 경배하면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질병이 욥을 덮쳤습니다. 온 몸에 종차가 나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도 가려움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는 알몸으로 벌거벗고 온 몸을 기와조각으로 긁어야 하는 그런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렇게 아내는 자기 남편을 저주하고 가정을 떠나 버립니다. 욥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어 버렸습니다.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잃어버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할 때에 그에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했든가? 어찌하여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했든가? 어찌하여 고난 당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어찌하여 마음이 고통하는 나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래도 오지 않는구나! 나는 음식을 앞에 놓고 탄식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이렇게 자기 탄식과 고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을 내 어이 태어났는고!"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여인에게 난 사람은 살은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낳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IMF로 말미암아 사업이 부도났습니다. 빚더미에 주저앉아서 저들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증을 섰다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뿐입니까? 자식들은 자살을 하는 사람, 사랑하는 아내는 도망가 버리고 몸은 병들고 이렇게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행한 사람들의 소식이 결코 이 성경에 나온 욥보다는 크지 못합니다. 욥은 인간의 모든 고통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보면서 욥은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기에 욥은 더 괴로웠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내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나? 나에게는 불의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고통이 나에게로 왔는가?" 괴로워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두종류가 있습니다. 알고 당하는 고난이 있고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이 왜 왔는지 이 고난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무엇 때문에 고난이 왔으며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죄값으로 받는 고통이 있습니다. 젊은 날에 지은 죄값으로 자기 인생에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자기 죄값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죄값으로 받는 고난이기 때문에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마땅히 받아야 할 일입니다. 젊어서 지은 죄 때문에 노년에 고생하는 사람들, 자기가 전날에 지은 죄 때문에 그 고통을 받는 사람, 젊은 날에 방탕해서 몸이 병드는 사람들 이게 다 죄값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알고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자기의 과거를 알고 받는 고난, 이게 죄값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알고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는 모든 고난, 미래의 하나님의 상급과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현재 고난을 받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믿기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난 자녀들, 남편으로 예수 믿기 때문에 시댁으로부터 학대받는 많은 여인들, 그리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직장에서 핍박을 당하는 많은 우리 남성도들, 이분들은 모두 미래의 하나님의 은혜에 약속을 알고 현재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자원적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난은 선하고 의롭게 믿음으로 살다가 받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데로 의를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과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린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가 복이 있나니 기뻐워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미래를 알고 받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모르고 당하고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여기 욥이라는 사람은 자기 고난을 받는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고난당할 때에 허물과 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매하게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 이게 억울한 것입니다. 자기는 차선을 지키어 갔는데 옆에 차가 덮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평생을 장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애매한 고난에서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이 고난을 어떻해 해야겠습니까? 욥은 세 친구가 와서 고난의 소식을 듣고 찾아와 위로를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서 일주일을 지냅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잘생각을 해 보아라. 죄없이, 고난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죄없이 왜 너를 고통 가운데 두겠느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잘 생각을 해보아라." 이때 욥은 더 괴로워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열자녀들을 위해서 혹시라도 생일날 잔치하면서 잘못한 일이 있을까봐서 하나님 앞에 아들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아간 사람이다." 욥의 친구를 통하여 비난과 충고, 때론 위로에 대하여 욥은 자신만이 받는 고통을 불평하면서, 때로는 무죄함을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수 없구나" (욥기 23 : 8)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야 겠는데 앞이나 뒤나 다 캄캄한 것입니다. 옆으로나 어디를 봐도 하나님을 만나서 변명도 질문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고난 중에서 고난의 깊은 신앙적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이라는 말은 나의 인생의 미래를 다 하나님이 아시오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것은 죄값으로 받는 고난도 아니요, 의의 고난도 아니요, 애매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고백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단련 받은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같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때 용광로에서 연단 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공동번역에는 날 털어보아라 먼지가 날 것이 없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최후에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깨끗하는 것을 그는 인정하시리라" 이런 자기 변명이면서 고백도 됩니다. 연단을 받아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더 깨끗한 자가 더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시련을 금에 연단으로 고백한 것은 깊은 우리의 고난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욥기 22 : 24-25)

여기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말을 합니다. “욥이 너! 금과 은을 많이 잃어버렸는데, 네가 마음으로 금과 은을 탐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걸 진토해 버리고 그런걸 강가에 버리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금이 될 것이고 은이 될 것이다." 그런 대답을 할 때에 욥이 이 말로 고백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연단 받은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길 바란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금이나 은으로 비교하겠느냐? 나는 이렇게 비교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정금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고난을 가져올때 중요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고난이 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그 이유의 원인은 모르나 결과는 분명히 하나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냐? 고난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정금같은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풀무불에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비교 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불처럼 오는 것입니다. 불이 오면 다 태워 버리고 소멸해 버립니다. 때로는 환란이 재산을 순식간에 불살러 버립니다. 이게 환란입니다. 환란이 우리 명예를 건강을 공들인 사업을 불태워 버립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의 잿가루만 남는 것이 바로 환란입니다. 환란의 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울고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잿더미만 보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나면 불 앞에서 불타버리고 잿더미만 보고 다 잃었다. 망했다. 나는 끝장났다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나의 환란으로 왔는데 나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거기서 정금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이 지나갈 때 잿더미를 보는데 욥은 정금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고난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환란이 와서 잿가루를 잿더미를 붙들고 탄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환란의 불이 지날 때 잿가루만 보는 것이 아니요. 잿더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금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환란이 망하게 하는게 있고 새로운 축복을 약속하는 것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댈때 그 태풍에서 쓰러져버리는 새가 있고 태풍에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가는 새가 있습니다. 독사가 물려고 달려들 때 독사에게 물려 죽는 사람이 있고 독사를 잡아서 고아서 보약으로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이 불 때에 타 버리어 끝나는 사람이 있고 그 속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최대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기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연단이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내가 알 수 있다. 뭐냐? 하나님이 주신 연단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이라는 것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도 시험을 칩니다.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만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치면 칠수록 시험이 연단인데, 연단 받아서 계속 자기에게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시험을 포기해 버리면 안됩니다. 시험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은 더 좋은 것을 약속하고 받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을 받으신 후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생명의 연류관을 얻을 것이다."

연단은 신비한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이 오면 땅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불살러 버립니다. 나무나 풀이나 그리고 집이나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돌에서 나온 것만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다 돌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견고하게 더 정금같이 됩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썩어질 땅에서 나온 것, 이것은 환란이 오면 불타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에 나온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이 세상의 환란의 불로 올때에 정금으로 바뀌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이 터는 곳 그리스도라. 만약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린도전서 3:12)

자기의 모든 환란이 어떤 것인가를 불로 한번 건드러 버릴 것이다. 시험해 볼 것이다. 불이 들어갈 때에 타서 다 망했다고 하는 사람과 정금같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딱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망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한 육신적인 신자, 육신의 정욕을 가진 신자는 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이 환란의 시련이 올때에 정금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라고 말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윤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편 7)

인간이 병들고, 이별하고 죽고, 실패하고, 배신을 당하고, 고동하게 살아야 하는 많은 인생고의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윤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러분! 일생을 통해서 최고의 배움이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는 유일한 학과목이 뭐냐면 고난이라고 하는 학과목입니다. 그런데 고난이라는 과목은 선택과목입니다. 아무나 주는 거 아닙니다. 필수과목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이 선택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모든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지 자원하지 말고 일생동안 편안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고난이 올때에는 정금같이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한 간증입니다마는 일생을 회생을 하면, 우리말로는 팔자에 고생이 많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고, 하나님의 섭리로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고생을 많이 시켰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더 이상, 이 종을 고생시키지 말아 주시옵소서. 너무 고생이 힘드오니, 이제는 신비로, 은혜로 깨닫게 하소서. 그동안 몰라서 넘어지고 병들게 하고 주님께 수 없는 시련을 보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계시로, 영감으로 깨닫게 하시옵소서. 어렸을때는 굶주린 고생을 했고 또 소년시절에는 폐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목회자로 출발을 해서 가난한 농촌에서 지내면서 병고의 수술을 했고 또 개척하기 위해서 청계산에서 6개월동안 바위 위에서 그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세월을 보내고 또 개척교회를 하기 위해서, 개척교회 목사는 온통 밤마다 빛에 쪼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대는 손이 손끝까지 기능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빛에 쪼달리고 있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척할때에 목사의 고통입니다."

수없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뭐냐?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대해 주신게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고난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는데, “주께서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그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곡이 깊어야 이슬이 많이 내리고 물이 깊습니다. 산도 아름다운 것은 야산같이 평평한 산은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골짜기가 깊고 또 깍아 세운 바위가 있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순탄하게 사는 사람들은 작품이 없습니다. 병고에 시달리고 고난에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연단을 시켜서 그 인생을 만들어서 작품으로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더러 있게, 그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을 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시범조로 쓰시는 것입니다.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큰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쓸데없이 기도를 잘못해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권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병들게 하더라도 우리 남편을 구원시켜 주시옵서." 그래서 암병이 들었습니다. 병이 들어 남편이 간호를 하게 됩니다. “여보 내가 죽거들랑, 당신! 내 소원좀 풀어 주오." “뭔데요." “내가 믿는 예수, 당신이 믿어서 천국에 함께 오시오." “그래, 내가 믿을테니까 아무 걱정말고 병이나 나소." 낳기는 어떻게 낳습니까? 기도대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남편 예수 믿게 구원받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뭣하러 그렇게 합니까? 또 어떤 부인은 남편이 사업이 망하더라도 무슨 입에서 나온 말이 그렇습니까? 주여! 내 남편이 전도받아 구원받게 하시옵소서."

얼마 전에 전도의 일화가 있습니다. “아빠 교회 가야지." “나 사업에 바뻐" “너는 예수 잘 믿어. 내가 너 공부시킬려고 돈 벌러 다니잖아." “아니야! 아빠 예수 믿어야되." 한데 그아이가 아빠, 엄마와 함께 명절에 시골집에 가다가 빗길에 밀려가주고 자동차에 치워서 아들은 튕겨저 나가 죽고 내외가 조금 부상당해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아들의 방을 치우면서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다 뭐라고 쓰여졌냐면은 주님! 우리 예수님!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아빠를 예수믿게 하여 주시고 천당가게 해 주세요." 일기장에 그렇게 써 있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그 아빠가 그 일기장을 붙잡고 통곡하면서 아들의 소원대로 교회 나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입이 잘못돼서 고난을 가져오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저는 많은 고난을 받은 종이니까 여러분을 대표해서 받은 걸로 알고 여러분들은 모두 다 편안한 날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대표로 받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해서 정금같은 인격으로 나와야 합니다. 정금같은 신앙을 얻어야 하고 정금같은 사랑의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는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 : 2)

여러분!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게 신기합니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압니다. 예수님이 모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가 죄가 없음에도 시험을 당하는 것은 그가 시험을 받으므로 우리의 모든 인간들을 체율한다는 말은, 몸소 몸으로 함께 인간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굶주려 본 사람이라 굶주린 사정을 압니다. 병들어 본 사람이야 병든 자의 고통을 압니다. 빚쟁이한테 쪼들려본 사람이야 남이 빛진 그 아픔을 압니다. 지옥의 고통을 몸소 체험을 해본 사람이야 지옥 가면 안된다는 걸 압니다.

여러분! 부부가 살면서도 돈 잘 벌고 사업 잘 할때 백화점에 무엇을 사주면은, 그 사랑 좋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사랑은 그런 것도 다 살 수 없는 절박한 환경속에서도, 여보! 하면서 눈물 한방울 떨어뜨릴 수 있는 그 사랑은 이 세상의 화려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런것을 체험해 봅니까? 실직을 당해서 갈데 올데 없어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기는 사랑, 그것은 어디서 얻겠습니까? 제가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실직자가 뭐냐면은?, 목사가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청계산에 들어갈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잘다녀오오." 그 눈빛, 그 눈물 한방울은 지금까지 살아온 수십년의 생애에서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다 연단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우중 대우 사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대구에서 신문배달을 하고 밤에 들어갈때에, 고구마를 구워서 아랫목에 놓아두고, “얘야! 어서 너 먹어라." “엄마 잡수셨습니까?" “먹었다." 그날따라 신문이 팔리지 않아서, 미리 돈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사먹어야 되는데 피난길에 형제들은 벌써 아랫목에 미리 다 눕혀서 억지로 잠을 재우고, 고구마를 들고 벌써 그 마음에 엄마와 형제들이 먹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먹으면서 눈물로 돌려서 먹으면서 그는 ! 어머니의 정, 자식을 생각하면서 굶고도 먹은 것처럼, 그런걸 생각하면서 눈물 흘립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먹는 빵의 맛도 아닙니다. 하늘의 신비를 담은 고난중에 담은 빵의 맛입니다. 유명한 괴테의 말 가운데 눈물의 빵을 먹지 않으면 빵맛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천년 교회사에 역사를 봅시다. 사도바울이 만고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경의 편지를 남긴것은 편안한 별장 침대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춥고 배고프고 어두운 감방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영혼의 메세지를 전해준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죽음의 고비로 넘어가는 절망적 고난이 없었다면 바울서신시 정금같은 바울서신이 나오질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불처럼 우리의 인생행로에 휘말아 올때, 우리는 불로써 삼키지 말고 정금으로 나와 역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인생 과정에서 성공만이 좋은건 아닙니다. 실패할때도 좋은 것을 얻어야 합니다. 건강만이 좋은것이 아닙니다. 병들때도 더 좋은 것을 받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자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소망의 약속을 고난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고난속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하늘나라의 정금같은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주님의 놀라운 약속 신비한 비밀, 하나님의 영광, 그것은 미래의 면류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생고의 고난속에서 정금같은 믿음으로 정금같은 사랑의 신비로 정금같은 소망으로 받아서 내 생을 온통 화려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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