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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귀한 존재 시편 8:1-9 |

by 【고동엽】 2022. 1. 3.

당신은 귀한 존재/시편 8:1-9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 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을 어느 때인가 자신에 대하여 질문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깨워주는 일을 시간 시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고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제자훈련이요, 사도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자기 존재를 일깨워주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 존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늘 심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성도들 마음속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합니다. 자기 존재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합니다. 자기 존재를 비천하게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은 비천하게 인생을 삽니다.

자부심과 자만심은 다른 것입니다. 자부심은 자기 존재에 대한 신성한 자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대한 긍지입니다. 자만심은 자기로부터 가지고 있는 우월감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는 귀한 존재다이 사실 하나를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만약에 내 존재를 귀한 존재로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존재가 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실직해도 그것 때문에 자살하지 않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해도 내 존재가 귀한 존재라고 확신한다면 자기 존재를 완전히 패인처럼 만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2년전 한신 4차 아파트 204동에서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자살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아이가 고층에서 떨어져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먼저 갑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소원대로 인문계에 진학할 수 없어서 부모님에게 얼굴들 낯이 없기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저는 평소에 기술자가 되어 많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누가 될까 해서 떠납니다. 바라기는 담임 선생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자기 선생님까지 생각하면서 사연을 써 놓고 고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고 어머니는 약사였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존재가 성적으로 평가되는 모멸감을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존재가 성적보다 귀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너는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귀한 존재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4)

다윗은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이렇게 고백하면서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 이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지만 결국 우리는 천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천사가 우리를 섬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섬기는 천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죄인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사가 할 수 없는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한 것 아닙니다. 직장이 나를 창조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하는 창조적 존재라는 신성한 창조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치관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요, 하나는 절대적 가치관입니다. 상대적 가치관을 비교 가치라고 말하고 절대적 가치를 창조적 가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각 창조했기 때문에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은 상대적 가치관 때문입니다. 사는 생활을 비교하고, 학위를 비교하고, 재능을 비교하고, 각각을 비교하다가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열등화시키고 비화시키면서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한다면 그 사람과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나대로 창조하셨으니까요.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 때문에 내 인생이 거기에서 비교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의 귀중성을 하나님의 창조라고 말합니다. ‘너는 창조된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교의식, 상대적 가치 비교에서 빨리 해방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옷 입은 것, 인물, 사는 생활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창조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계획이 무엇인가이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때 우리는 자기 존재의 가치성과 존엄성, 존귀성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었으나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닙니다. 프랜시스 피세이프는 타락한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지만 그것이 다른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속성을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동물과는 다릅니다. 버러지가 아닙니다. 물론 다윗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22:6)고 했지만 이 말은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죄지은 상태는 벌레와 같다는 것입니다. 벌레는 한 번 지나가면 더러운 흔적을 남겨놓습니다. 한 번 남긴 흔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벌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지은 상태를 벌레적 존재라고 말한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똑같은 다윗이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이렇게 자기 존재를 높이 인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절대적 존재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귀중한 존재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귀중하게 인정하느냐?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수백년 전 위대한 학자 모레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블란서로부터 추방되어 이태리 조그만한 시골에서 지내다가 중병이 들어 빈민 병원으로 옮겨갔습니다. 거지처럼 아주 초라하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의사들이 이 사람이 라틴어를 잘 모르는 줄 알고 이런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거 가치없는 존재 실험용으로나 쓰지이 말을 듣자 모레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당신들 뭐라고 했소 사람 똑똑히 보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야 나는 예수 값을 지불하고 산 사람이야 사람 똑똑히 보시오.” 의사들이 무식한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존재적 가치를 인정해야 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유명한 존 디빈스의 당신은 얼마나 가치 있나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가치있느냐에 대한 대답에 따라 내 운명은 결정된다.

내가 행복한지 슬픈지 기쁨에 차 있는지 우울한지

인생을 사랑하는지 자살하고 싶은지

내가 귀중한 존재라고 아주 많이 생각하면 나는 살 맛이 나고

가정이 평화롭고 늘 마음이 부요하다네.

그러나 내가 가치없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일할 의욕을 잃고

나는 무엇이든지 실패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네.

 

자기 조재가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살 맛이 납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 이래뵈도 나는 귀중한 존재다이 생각을 하면 됩니다. 회사에 가서 어떤 때 천대를 받고 직장에서 무시를 당해도 자기 존재에 대하여 나는 이래뵈도 귀중한 존재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고백을 가질 때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여기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것은 천지 창조물입니다. 천지 창조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다스린다는 말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천지만물을 다스리면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했다다스리는 자는 주인입니다.

한 번은 큰 농장을 가진 분이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도 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큰 농장을 가졌다고 뽑내니까 얼마나 큰 농장이신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넓은 땅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을 타고 계속 달렸습니다. “! 큰대요점심 시간이 되어서 쉬는 시간에 얼마나 땅이 크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세계 지도를 보여주면서 어느 정도나 되십니까? 바늘로 한 번 찔러보시죠.” “바늘로 찌를만한 땅도 안됩니다.” “별로 크지 않으시군요.” “당신은 얼마나 부자기에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는 주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는 주인이요.”

이 역사의 센터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나 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면 역사가 바꾸어집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대통령보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농부가 이 민족의 애국자입니다.

이 의식을 하나 가지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청소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자리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할 때 세상이 내 집이 됩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있지만 주인처럼 일하면 그 사람이 사장이 됩니다. 노동자와 사장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누가 나보고 이 민족의 애국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제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 민족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역사의 주인이다.’ 가는 곳마다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시시하게 살면 안됩니다. 가정에서 설거지 할 때도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장과 노동자의 차이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장은 희생합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회사를 살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사장은 생명을 겁니다. 만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려고 자기 생명을 희생합니다. 공자가 못하고 석가도 못하고 아무도 못한 것을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내놓습니다.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순국자입니다. 유관순, 안중근, 이순신, 김구 생명 걸고 나라를 구한 자들입니다. 이승만은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역사 속에서 내가 이 몸을 희생하리라 내 재산을 팔고 내 모든 것을 팔아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리라하는 생각을 하면 주인이 됩니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주인이 못됩니다. 주님이 희생하여 주인되듯 누구든지 희생하는 자가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세익스피어가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모자를 벗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는 음식점의 한 소년이 한숨을 쉬면서 나는 언제 저런 사람이 되나했습니다. 그러자 세익스피어가 등을 두드리면서 , 소년 자네도 일할 때 내가 글을 쓰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그릇을 닦을 때 주인의 마음으로 닦게. 음식을 나를 때도 주인의 심정으로 배달해 보게 그러면 먼 훗날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네를 우러러 볼 것이네.”

여러분, 교회에서 우러러 보는 장로님이 되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교회에서 존경받는 권사님이 되고 싶습니까?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의 심정을 지니십시오. 교회에서 기념비적 집사가 되고 싶습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6)

만물을 발 아래 두었다.’ 이 말은 만물을 디디어 서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발로 디디고 서서 살게 했지 세상에 넘어지거나 세상을 부둥켜 안고 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만족하지 못합니까? 세상 것을 볼 때 아무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발로 디뎠기 때문입니다. 세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은 발로 디뎌야지 아무것도 가슴에 품을 것이 없습니다. 가슴에는 오직 하나님만 품어야 합니다.

만물을 발로 디뎌라이것은 승리자의 고백입니다. 자기 존재가 창조적 존재요, 예수의 피값을 지불한 별세의 존재라고 느낀다면 그때부터 이 세상의 주인이요, 발로 디디고 서서 승리자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귀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가지를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2)

마태복음 21 9절 읽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가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 가 보니까 돈 바꾸고 장사하는 자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무리들을 다 밖으로 내쫓으시면서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절 읽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21:15)

누가 성전 안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오래 믿은 무리들은 장사하고 돈 벌고 있는데 어린 아이들만 예수님을 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또 무리들이 분을 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1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이 바로 시편 8 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것을 못하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대적하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입을 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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