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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요 14:1-3)/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요 14:1-3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제 서기관과 제사장에게 넘기우게 될 것이고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희가 다 나를 버리게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은 숙연해 졌고 장차 주님이 안 계신 세상을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주신 말씀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불안해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노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60억이 넘는 인류가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타깝게 찾고 있는 평안이 없습니다. 오히려 평안 대신 어두운 그림이 우리말을 가지고 있는이 현실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지식을 많이 얻으면 평안하리라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은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면 평안하리라 믿습니다. 정치인은 권력을 잡으면 평안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도 사양치 않고 권력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평안! 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 평안이 쉽게 얻어 집니까? 이것이 인간이 직면한 비극입니다. 평안은 원하는데 평안은 점점 더 멀어지고 우리 눈 앞에는 불안과 공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전에 다 가난하게 살 때는 밥 먹는 것이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괜찮게 사는 사람을 말할 때 "밥걱정은 안하고 삽니다"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눌때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진지를 잡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그런 이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생활 수준이 전에 비하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밥 한숫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형제끼리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가난은 면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다 평안 하십니까?

 

권력만 잡으면 평안 할 줄 알았던 분 계십니까? 이제 권력을 잡으셨으니 평안 하십니까?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돈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학문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권력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육신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환경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평안은 영원한 평안이 아닙니다. 형편 따라 변하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이 아닙니다.

 

인류역사상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평안을 누려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발트가 한번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유엔에서 특별 강연을 하게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적인 석학인 칼 발트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유엔 대표들을 향하여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각 국을 대표하여 이곳에 모여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이 아무리 연구하고 토의하고 결의한다고 해도 여러분을 통해서는 세계평화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세계의 평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우리에게 평안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갔습니까? 죄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니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불안과 공포가 찾아 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순간부터 불안이 찾아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잠언에도 '악인은 좇아 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왜 도망갑니까? 두려워 도망갑니다. 왜 두렵습니까?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어디에 숨었습니까? 동산나무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동산나무뒤에 숨는 것이 숨는 것입니까? 인간이 죄를 범하면 이렇게 어리석어 집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있습니까? 바다건너 저 밀림에 가면 숨을 수 있습니까? 숨을 수 없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말할 수 없는 갈등과 가책 속에서 하나님께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요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유독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전에는 평안도 만족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짐승들은 주위환경 때문에 평안할 수 있고 물질적인 것이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수여 받은 사람은 물질적인 것이나 주위환경 때문에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물질적인 풍성이 절대로 평안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세상 적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잃고 밤에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심령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주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참 평안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심령이 하남께 돌아오기를 바래서 사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안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들이 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말라버리고 마는 치마, 인간이 무슨 방법으로 우리의 지은 죄를 가리울 수가 있습니까? 수치 밖에 드러나는 것이 없고 두려워서 숨으려고 애쓰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기에도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를 거리울 수가 없습니다. 가리운다고 해도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치마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죄를 가리워 주고 용서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어떻게 만듭니까?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짐승을 잡으면 무엇이 흐릅니까? 피가 흐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그리고 그의 보혈의 그림자입니다. 죄범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가죽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양이 속죄양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의 검을 대신 지시고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무섭고 아무리 더럽고 아무리 큰 죄를 범했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좋은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놀라운 이적만 행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생활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원수가 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을 때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기 위해 화목의 제물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케 하는 상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는 양팔을 벌리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큰죄, 아무리 더러운 죄, 아무리 악한 죄라도 죄의 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다 벗겨 주시고 가벼움과 평안함을 주십니다. 요한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천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갈보리산 언덕위에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등에 있던 무거운 짐이 벗어지면서 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얼마나 몸과 마음이 가벼운지 날아 간 것 같았습니다. 죄악 벗은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찬송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며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면 하늘로부터 유해하게 되는 날이 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흘린 보배 되로 씻음 받고 사함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여러 가지 신령한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죄 사함 받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사함 받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참평안이 여러분 심령위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므로 회개만 하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성령말씀 이사야 5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로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생각과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죄사함 받는 유일의 길입니다. 이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역사를 보면 종 종 다른 생각들이 들어와서 이 진리를 흐리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좋은 일을 해 죄 사함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산다고 그것으로 되사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이 나시고 자라신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은 죄를 사해준 때도 있었습니다. 혹은 예배당을 짓는데 돈을 많이 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옛날 중세시대에 보면 십자군에 종군하는 청년에게는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짓고 형무소에 가서 복역 중에 있는 사람이라도 죄를 다 사해 준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돈을 내고 속죄 표를 사면 그만한데 해당되는 죄를 사함 받는다고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은 성경에 어긋나는 잘못된 생각이요 풍습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는 그 길 하나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참 평안을 원하십니까? 죄 사함 받으셔야 합니다. 아직도 죄의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며 불안하게 사시는 분들 안 계십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께 나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십니다.

 

참 평안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는 화평하고 형제와는 화목해야 합니다. 시편 133편 1절에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형제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인류의 조상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 이후 인류역사는 전쟁과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비중이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가 화목하는 것은 마땅히 애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느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1-24)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도, 혹 기도를 드려도 형제와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형제는 같지 않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였지만 그렇게 대조적으로 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다른 형제가 화목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조화를 이루면 아름답습니다. 서로 다른 음이 화음을 이루면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같은 종류의 꽃도 정확히 말하면 다 다르다고 합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나 빗방울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무엇이 소중하다 소중하다 하여도 사람의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천상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나요, 너요, 우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두가 귀한 것입니다. 나만 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귀합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개성이 있습니다. 저마다 얼굴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릅니다. 몸매가 다르고, 동작과 표정이 다릅니다. 이것은 신체적 개성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천분과 재능이 다릅니다. 이것은 정식적 개성입니다.

 

베에토오벤의 음악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다릅니다. 고호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이 다릅니다. 그것은 그들의 예술적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이 다르고, 칸트의 철학과 사르트르의 철학이 다릅니다. 그것은 학문적인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의 신앙과 베드로의 신앙이 다르고 요한의 신앙과 야고보의 신앙이 다릅니다. 그것은 신앙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깊은 의미는 개성에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뛰어난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발휘하는데 인생의 사는 보람이 있고 깊은 맛이 있습니다.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개성이 있어야 하고, 단체는 단체로서의 개성이 있어야 하고, 민족은 민족으로서의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멋은 개성에 있습니다. 뛰어난 개성일수록 뛰어난 맛이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면서 다른 교회와 다른 개성이 있습니다. 우리 독립교회연합회에 가입한 교회를 보면 교회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독립교회연합회의 멋입니다. 사실 가장 개성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입니다. 개성이 없다는 것은 멋이 없다는 것입니다. 멋이 없다는 것은 개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성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성격과 생활이 일색으로 물들어졌다면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제 말을 하고, 제 노래를 부르고, 제 빛깔을 들어내고, 제 향기를 나타내고, 제 개성을 표현하는데 삶의 의미가 있고 사는 것이 즐거울 것입니다. 인간은 저마다 저답게 살아야 합니다. 자유사회는 다양성의 사회요, 민주사회는 개성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자유사회에서 사는 기쁨이 있고, 민주사회에서 사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구호, 하나의 의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행동방식,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제되어 개성의 자유가 전혀 없는 획일주의 사회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는 자유의 청신한 바람과 다양한 개성의 미가 없기 때문에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생의 기쁨이 없고, 사는 보람과 멋이 없습니다.

 

자유와 개성과 다양성은 민주사회의 생명입니다. 공자선생은 화(和)의 원리와 동(同)의 원리를 구별하고 우리는 화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자는 和하되 同하지 않고, 소인은 同하되 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이상적인 인간을 의미하고, 소인은 수양이 부족한 사람을 말합니다. 和는 조화주의를 의미하고 同은 획일주의를 뜻합니다. 和는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것이고, 同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성과 다양성 속에서 조화·화목주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에쥬메니칼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unity in diversity입니다. 다양성 속의 단일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이 화목하며 지낼 수 있습니까? 서로 존중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얼굴을 한번 보세요. 우리 이마는 넓은 바다 같고 파도가 치면 눈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눈썹을 방파제로 설계하셨습니다. 눈썹아래 눈은 전자동입니다. 이것이 만일 수동이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얼굴 한 가운데 코를 보세요. 구멍이 둘인데 구멍만 있으면 될 터인데 콧등은 왜 만들었을까요? 보기 좋으라고, 여러분 코등이 없이 번번한 얼굴 한 가운데 구멍만 둘 뚫고 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징그러울 것입니다. 이런 말을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눈이 코가 될 수 있습니까? 귀가 입노릇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지체마다의 기능이 다릅니다. 모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면서 어떻게 화목할 수 있습니까? 서로가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아주 다른 것은 저들은 和의 정신으로 삽니다. 그래서 일본 음식을 화식(和食)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나 싸우기를 잘합니다. 지난번 미국목회자 세미나에서도 이민교회 부흥비결이 무엇이냐? 한마디로 싸우지 않으면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몇 해전에 미국 예일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한국 민족 전부를 미국에 이민을 시킨다 해도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가 싸우기 때문에 아주 힘이 없다." 가슴 아픈 말아닙니까?

 

참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 맺고, 이웃과 화목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 앞에 범한 죄 있으면 회개하므로 용서함 받고 하나님 주시는 참 편안을 누립시다. 형제 사이에 가로막힌 담이 있으면 서로 용서하고 존경하므로 화목하게 참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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