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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참 평안을 원합니까?(마 6:24-34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참 평안을 원합니까?
마태복음 6:24~34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평화입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는 사람도 돈 많이 벌어 평안하게 살려고 해서입니다.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권력을 차지해서 평안하게 살아보려 해서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잠을 설치며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좋은 학교에 다니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안정되게 평안히 살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원하는 대로 많이 벌면 평안하게 삽니까? 소원하던 권력을 손에 쥐고 세상을 흔들면 평안합니까? 공부 많이 해서 학위 얻고 안정된 직장을 얻으면 평안합니까? 다 누려보고 얻어 보아도 바라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입니다. 평안을 원하나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 말씀대로 하면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평안을 줄 것 같은데 실상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은 많으면 평안할 것 같지요? 그런데 많으면 많을수록 불안합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앉을수록 불안합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자인데 대통령의 자리가 평안한 줄 아십니까?






옛날 중국의 북경 자금성에 가보면 왕의 침실이 있는데 한 방에 동과 서로 침대가 둘 있습니다. 궁중에서도 왕이 어느 침대에서 주무시는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민정이 되면서 다 헐어 버렸습니다만, 군정시대에는 청와대 안에 안가(安家)가 몇 채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할 때 이 안가, 저 안가 이동해 가면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왜요? 불안해서요. 청와대 안은 평안합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전에는 한 사단 병력이 청와대를 경비했습니다. 그러면 평안하고 안전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어디서 시해 당했어요? 청와대 안가에서 안기부장에게 당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어디 가나 경호원이 따라다니며 보호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 예배당에 나오시면서 경호원 대동하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없으시면 평안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에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청년이 그의 생을 통해서 꼭 소유하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것들을 기록해 가지고 그가 평소에 존경하는 경험 많으신 어른을 찾아가 그가 적은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이 어른은 청년이 적어온 목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더니 그 청년을 향해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은 훌륭한 소원이야. 그리고 일리 있는 목록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는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어.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소유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 걸세." 그래서 이 청년은 "선생님, 제가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묻는 말에 노인은 연필로 청년이 써온 목록을 벅 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마음의 평화'라고 써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선한 충격을 받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이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청년은 나중에 {마음의 평화}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이 죠수아 리브만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평화에 대한 내용의 책이 얼마나 많이 출판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그런 책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세요.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세우신 근본적인 원칙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원리는 너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면 마음이 서로 싸우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싸움이 있는 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편으로 싸움의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의 참 평안을 위해서 내려질 근본적인 결정은 한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세상 재물,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십니다. 재물이라는 말은 우리 육신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 말입니다. 어느 곳에 우리의 마음을 바칠 것인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롯의 아내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요? 롯의 아내는 하나님과 세상 둘 사이에서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는 때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소돔성을 떠나가면서도,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했는데,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돔이 불로 멸망하는 순간 뒤를 돌아다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딸들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말도 했습니다. 그녀에게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롯을 따라 소돔으로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소돔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평생 이런 곳을 구경도 해 본 적이 없는 롯의 아내는 마음에 큰 동요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돔도 원했습니다.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소돔성을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돔성을 돌아보았습니다. 한 손으로는 별을 찾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더듬거렸던 롯의 아내는 마음이 둘로 갈라져 결국 불쌍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얼마 전에 경북 영덕군 강구면에 다녀왔습니다. 동해안 영덕 게의 본산지입니다. 그 바닷물이 얼마나 맑고 시원해 보이는지, 서해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탁 트이는 시원한 겨울 바다 그대로 멋이 있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밖에는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한데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바다는 왜 조용히 있지를 못할까? 그것은 둘로 갈라진 마음 때문입니다.


하늘의 목소리가 바다를 부릅니다. 바다는 하늘에 있는 달의 자력에 의해서 딸려 올라가지만, 이 지구가 "나와 함께 머물러 있자"고 소리치기 때문에 바다는 완전히 결정을 못하고 지구와 달에서 울려오는 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다는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주인을 결정할 때까지는 결단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주인이 되려고 싸우는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하고 신성하게 살려는 고귀한 삶에 대한 이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니다.






시인 괴테는 한 인간이 건달과 신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후회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 땅의 것을 택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마음에 참 평안은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 우리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찾을 때까지 참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때, 그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굳게 결심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아니하고 행동해야겠다는 주관이 섰습니다.


아무런 결심을 갖지 아니하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심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에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쿼바디스}라는 책을 읽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제목의 뜻은 "어디로 가십니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더 이상 전도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서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는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말씀드렸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가는 로마를 향해 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로마에 가서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교를 뜻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의 결정을 하는 순간 로마를 피하여 빠져 나올 때 느끼지 못했던 평안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면 용기가 생깁니다.


아마 우리가 십자가를 지시는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뵈었다면 주님에게서 어떤 두려워하시는 표정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요? 주님은 마음에 이미 결정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노련한 선장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선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폭풍을 정면으로 대하라. 언제나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폭풍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의 결심은 용기를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완전한 결정을 하기까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완전한 결정을 하고 나면 용기가 솟아나고 그 마음에는 평안이 깃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이 엄습하는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그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손에 나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그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반드시 고통스럽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시 37:25)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택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로 버림을 당하거나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먼저 찾는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빼앗기지 않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삶의 내적인 평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 내부의 긴장과 투쟁, 그리고 혼란으로 우리의 삶이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마음의 평안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이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평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이 평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죄를 자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해주시고, 죄사함을 받는 순간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우리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악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왜요? 두려워서입니다. 죄 지은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로 오는 끊임없는 공포가 마음이 평안을 얻게 하는 모든 기회를 앗아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범한 죄를 고백하여 내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뿐더러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범한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혹시 마음속으로 '글쎄, 다른 사람의 죄는 몰라도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려울 거야. 또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릴 염치도 없어' 하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분을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사해 주십니까?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용서하지 못하실 죄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참 평안을 원하십니까? 주님께로 나아오세요. 그리고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으세요. 그래서 죄로 인한 두려움, 불안을 말끔히 씻어 버리세요. 참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참 평안이 임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에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잠잠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놀라운 힘을 얻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호수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듭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어떻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어야만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기 때문에 장래의 일로 인해 불안해하지 아니합니다. 담대하게 힘을 얻어 평안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불안이 없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에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린애더러 어두운 밤에 먼길을 가라고 하면 혼자서는 무서워서 가지 못합니다. 그래도 가라고 하면 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하면 어린아이는 아까와는 반대로 평안한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캄캄한 밤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밤이 밝아진 것 아닙니다. 아버지가 같이 하시기 때문에 평안합니다.


갓난애가 엄마 옆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기가 잠든 것을 본 아기 엄마는 등불을 끄고 같이 잠이 들었습니다. 아기가 자다가 깨보니까 방이 캄캄합니다. 아기는 무서워서, 겁이 나서 웁니다. 그때 엄마는 자다가 깨서 아기 가슴에 손을 토닥거리면서 "엄마 여기 있다. 엄마 여기 있다" 하면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을 느낀 어린애는 평안한 마음으로 계속 잠이 듭니다. 밤이 밝아진 것 아닙니다.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을 의식할 때 방은 캄캄해도 평안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환경이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평안히 지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방에서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세상에 살면서 평안하게 살기 원하십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세요. 기독교의 복음은 불안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여 줍니다. 이 세상의 누가 빼앗을 수 없는 참 평안을 소유하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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