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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요 16:25-33)/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7.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요한복음 16:25~33

 

 

 

시편 23편 4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몇 시간에 걸쳐서 우리는 목자와 양 사이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이는 살수 없는 짐승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심령은 자기 혼자서는 살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참 목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인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될 때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로 인해 다툼과 알력이 생길 때도 목자 되시는 주님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배고픔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영혼이 자빠져서 도저히 나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이 발버둥질 치다가 맥이 빠지고 지쳐서 죽을 수밖에 없을 때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능력의 팔로 붙드셔서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의 팔이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기 때문에 오늘의 이 시간이 있는 것을 체험하신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말씀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인데 현대어로 사용하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목자 시라면 부족함이 없이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잔잔한 시냇가에서 쉴 수 있고,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될까요?

 

이것도 양을 직접 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알 수 잇는 진리입니다. 양은 목장에서 목자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습니다. 더구나 무더운 여름철에는 목자의 치밀한 간수가 필요합니다. 양은 털이 긴 짐승이기 때문에 보통 해발 300m쯤 되는데서 키우는데 여름이 되면 털이 긴 짐승인 양은 체질이 약해지기 쉽고, 여러 가지 해충에 시달리게 되고 병들기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이끌고 고지를 향해 올라갑니다. 그런데 고지를 향해 올라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얼마나 위험하지 모릅니다.

 

미국의 서부 지방이나, 팔레스틴 지방의 유능한 목자들은 여름철이 되면 양들을 이끌고 먼 산으로 갑니다. 여러 날이 걸려서 목적한 곳 산간목장을 향해 갑니다. 양들은 길가에서 자라나는 풀을 뜯으면서 천천히 이동합니다. 양들의 여행은 힘들고 지루합니다. 그러나 목자의 인도를 따라 여러 날이 걸려 힘들고 지루한 여행을 하며 산간목장에 이르게 되면 산밑에서 그렇게 더워서 맥을 못쓰던 양들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 동안 골짜기를 걸어오며 흘렸던 땀이 식고, 피곤했던 것이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양들은 산간목장에 오면서 힘들고 위험해서 목자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평하던 것이 다 살아지고 '아, 일서 목자가 우리를 여기까지 힘든 길로 인도했구나'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성과 경험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하나님은 그의 기르시는 양을 절대로 손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모르나 장차는 알리라"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목자가 양들을 인도하고 봏하는 한 양들이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환경에 처할지라도, 절대로 양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양들이 살아가는데는 선한 목자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 시편 23편이 1인칭으로 표현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상관이 있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를 제외하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기가 직접 목자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어쩌면 그렇게 실감 있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양을 몰로 산악지방으로 가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떼를 데리고 여름 목장이 있는 높은 산으로 자꾸만 올라갔습니다. 다윗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무리 험한 길이지만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범람하는 냇물과 산사태, 독이 있는 풀들과 맹수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 깜짝 놀라게 하는 뇌성 벽력 속에서도 익숙하게 길을 인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어떤 악 조건에 처하든지, 내가 어떤 시련을 당하던지, 내가 어떤 곤경에 빠지던지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과 좀 더 가까운 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높은 곳 여름목장에 올라가는 길이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면 헬리콥터를 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양들이 산간 목장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골짜기를 통해 걸아 올라가야만 합니다.

 

모든 산에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어떤 골짜기는 깎아 세운 것처럼 가파른 협곡입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디면 몇십 미터가 되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스러운 길목도 있습니다. 그런데 산악지방에 익숙한 목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양떼를 이끌고 어두운 골짜기 옆으로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작은 산길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기 있게 올라 깁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이 말씀은 내가 그 곳에서 죽는다거나 그곳에서 걸음을 멈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역사를 통해서 문자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죽음이라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할 수 잇는 더 높은 생의 차원에 들어가는 입문에 불과 한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낙원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골짜기의 입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좀더 환전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여사를 통해 보아도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 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무섭고 어두운 골짜기를 잘 통과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을 보세요.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17살 소년 때부터 예기치도 못했던 어려움의 골짜기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고, 억울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늠름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13년간이나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고 시련의 골짜기를 묵묵히 걸었더니 종래는 광명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원수 갚는 것이 두려워 요셉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하셨으니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요셉이 그 말을 전해 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들이 와서 용서를 청할 때 요셉이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간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브갓에살 왕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베벨론 나라 여러 도에서 중책을 지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출신 동관들은 유대인 포로 신분으로서 자기들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이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꾸몄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에게 "이 땅의 온 국민이 대왕만을 존경하고 섬기는 표로 신상을 만들어 세우고 풍악이 울리면 바벨론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신상에게 절하므로 대왕에 대한 충성심을 표하게 합시다."

 

느브갓네살 왕은 깊은 생각 없이 국민이 자기에 대한 충성심의 표로 신상에게 절하겠다고 하니 허락했습니다. 바벨론 동관들에게는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므로 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을 잡아 왕께 고해서 풀무에 잡아넣어 없애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상을 세워놓고 풍악을 울리는데 바벨론 동관들은 유대인 출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 지켜보고 있다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잡아 다가 왕 앞에 세우게 되고 결국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졌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던지기는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녔지만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셔서 머리털 하나 거슬리지 않고, 옷에 탄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가 점을 쳐서 수입은 있으나 그 심령에 평안이 없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점치는 여인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경우 귀신이 나가서 평안한 것은 좋은데 점을 칠 수 없이 되고 점을 칠 수 없으니까 수입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뒤에서 수입을 챙기고 있던 주인이 시 당국에 고발을 해서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고랑에 채워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 편에서는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성경에 보면 밤중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기고, 고랑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옥을 지키던 사람이 자다가 개어보니 이런 광경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간줄 생각하고 책임지고 자살하려는 것을 불렀습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때 바울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제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그 날밤 그와 그 가정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 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 '항상'이란 말씀에 뜻이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건가해도 병들어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젊어서도 늙어서도, 살아있을 때도 죽을 때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아무리 어렵고 힘에 겨운 일이 있어도 그것이 막다른 골목은 아닙니다. 우리의 앞날에는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실망과 낙심, 좌절과 미궁에 빠지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습니까? 이렇게 기도하세요. "아버지, 정말 저로서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의 심령을 더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과정으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어두운 날에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바로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이 내게서 떠나고 주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맛보면서 믿음을 통해 오는 마음의 평온한 안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친히 관리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확신에 도달하려면 모든 역경을 조용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야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더 많은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들의 생활을 더욱 활기 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고 갑니까?

 

골짜기에 신선하고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그때그때 마실 물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기가 회복되고 생수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역경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우리의 갈 하고 지친 심령이 원기를 회복하게 될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욥을 보세요. 욥은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사단에게 자랑 할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단이 시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 다 없어지고, 훌륭한 자녀 10남매가 몰살하고, 심지어 몸에 창질이 생겨 알아볼 수 없게까지 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수를 마시고, 새 힘을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어 더 힘차게 살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의 결론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신비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니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8)

 

여러분, 캄캄한 밤에는 내 몸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의 별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 갈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질 때 우리는 눈을 들어 우리의 선한 목자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왜 우리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하십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이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물은 골짜기를 통해서 흐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하나님의 생명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골짜기를 통해서 축복의 강물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가정적으로 사암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었습니다. 그것이 목회를 하는 동안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동안 흘러내린 축복의 샘물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샘물을 마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골짜기의 어두운 생활을 원치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불행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골짜기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목자가 양을 이끌고 골자기로 가는 이유는 골짜기에 아주 좋은 목초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짜기를 지내는 동안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골짜기를 걷는 동안 목자를 더 의지하게 되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면서 그 골짜기에 싱싱하게 자란 아무런 공해도 없는 풀을 뜯어먹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폭풍우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맹수가 우리를 공격할는지 모릅니다. 빗물이 범람해서 우리를 떠내려가게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바로 거기에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사실을 과거의 경험으로 믿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며 이웃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모양은 다르나 누구에게나 인생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골짜기를 걸어가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이 골짜기를 어떻게 자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을 기억하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오늘 주신 말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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