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복음

요 13:34-35 서로 사랑의 복음으로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6.
 
전체 목록가기 복음 목록 돌아가기
   

 

서로 사랑의 복음으로

창세기21:9-21,요한복음13:34-35

 

 

 

요즘 우리는, 조금 일찍 찾아온 ‘겨울 같은 11월 초순’을 보내고 있습니다. 11월을 보내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여유를 부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겠지만,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11월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저에게,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할 때입니다"라는 사랑하는 친구의 인터넷 아이디가 자꾸 마음에 와 걸렸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마땅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해야 하는 때입니다. 물론, 높은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우리 목회자들은 11월이 되기 전부터, 이미 10월 초부터 개척 1년 된 우리 교회의 목회를 나름대로 평가하고, 새해 목회를 위해서 준비하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년도 목회를 위한 큰 틀은 거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금년 11월을 보내면서 왠지 고민스럽고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마다 연말연시에 해야 하는 ‘목회적인 과제’를 풀기 위한 연례적인 부담감 때문이 아닙니다. … 저와 여러분이 다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보통 믿는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는 ‘나는 누구보다도 예수 잘 믿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면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못지않은 ‘신앙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정말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스러운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일어납니다. 그에 대한 부담감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해 묵은 그릇된 신앙의 자화상’이 있습니다. ‘모순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자가당착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비 복음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섬기는 열심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가장 잘 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이라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신앙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기준이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 가정의 문제를 복음적으로 다시 조명하므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브라함 가정에 있었던 하갈과 사라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葛藤)을 영적인 것이라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영적이라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하는데, 여러분들께서 쉽게 이해하시도록 편의상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영적이냐? 육적이냐?라는 이원론적인 시각에서 이해되는 흑백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것을 ‘복음적인 입장’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그 갈등과 그 갈등으로 인한 가정의 깨어짐과 상처와 아픔, 아니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후손인 아랍과의 대립과 싸움, 갈등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 대하여 상당히 유감이 많은 목사입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부인 하갈과 사라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으로 힘은 많이 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가정목회, 가정사역(家庭使役)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음적으로 잘 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역사적인 대립과 갈등,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전쟁과 싸움, 죽음이 없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는 분이라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느 가정 예외 없이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가족들에 대한 아픈 痕迹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우리도, 6.25전쟁도 치렀고,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도 받았고, 전쟁 후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과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그 아픔과 눈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픔입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은 경험하셨겠지만, 육로로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거나 비행기를 이용해 공항을 출입국을 할 때, 세계에서 이스라엘나라만큼 검문검색이 철저하고 까다로운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끝없는 대립과 갈등과 싸움, 전쟁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풀지 못한 갈등의 뿌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린 과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린 아브라함 가정의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모순적이고, 비복음적인 그릇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실수와 역사적인 과오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歷史)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에게 서로 사랑과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아브라함은, 그저 아브라함으로 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믿음의 선진(先進)이고, 많은 인생의 굴곡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믿었던 한 사람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저와 여러분과 모든 인류가 본받아야 하는 ‘신앙의 모델’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저와 여러분 모두의 궁극적인 신앙의 모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도 하나님을 믿었던 극히 불완전하였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볼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인생과 그의 삶과 그의 가정의 갈등들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재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볼 때, 그의 한쪽 면만을 집중적으로 보아왔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포장된 아브라함의 시각, 하갈과 이스마엘을 가정에서 쫓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종교적인 관점(Judaism)에서 본 아브라함을,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추종(追從)하고 맹종(盲從)해왔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복음적인 것인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장점과 단점 양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양면(兩面)을 보는 눈,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갈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화해(和解)를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주셨던 숙제입니다.

 

 

 

 

 

2.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주 귀한 분 두 분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전북 완주에 있는 세인고등학교 명예교장으로 계시는 원동연 박사님이고, 또 한 분은 일산에서 장애인 사역을 하고 계시는 선배 목사님입니다. 일산에서 농아인을 위한 장애인 사역을 하고 계신 선배 목사님을 뵙고 대화를 나눌 때는, 마음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고, 말할 수 없는 빚진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두 분을 만나면서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분들의 삶과 가슴 속에는, 모두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귀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귀히 여깁니다. 이 사회에서 낙오하고, 실패해서 소외된 버림받은 자들을 귀히 여기는 분들이었습니다.

 

 

 

세인고등학교는, 공교육이 포기한 아이들을 맡아서 교육하는 학교입니다. 세인고등학교는 3 가지 중요한 입학자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학교 성적이 최하위권인 학생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깊은 상처를 입고 실패한 인생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셋째는, 위와 같은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意志)가 있는 학생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열등생과 문제아만 학생으로 뽑는 학교입니다.

 

 

 

그런 학생들만 뽑아서, 5차원전면교육을 통해서 공교육이 포기한 아이들에게 대안적인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입니다. 저는, 세인고등학교만 좋은 학교이고, 우리 시대의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학교의 교사들과 운영하는 분들이 가진 정신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사람을 귀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귀히 여기기 때문에, 소중한 자신들의 인생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헌신하는 땀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정신이, 절망에 빠진 자들을 살리는 복음(福音)이 아닙니까?

 

 

 

신약신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아스(J. Jeremias)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종교적인 신분계층이 있었다고 합니다. 7 가지 상하 신분(上下身分)이 있었습니다. 1) 사제들, 2) 레위인들 및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 서기관, 랍비), 3) 순수한 이스라엘인(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백성들), 4) 사제들의 사생아, 이방인 개종자들, 성전노예의 개종자들, 5) 사생아들, 창기에게서 난 사생아들, 고의로 고자 된 자들, 6) 자연적으로 고자 된 자들(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의미로 천대받았습니다), 성불구자들, 양성소유자들, 장애인들 그리고 7) 이방인들, 세리들, 창기들입니다. 이들 중, 사제들과 레위인들(바리새인, 서기관, 랍비들), 그리고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만 상류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류계층에 속한 사생아들이나, 창기에게서 난 자들, 고자 된 자들은 상류층의 사람들과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최 하위계층의 신분이었던 이방인과 세리들, 창기들은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고, 상류층의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 같이 취급받았고, 공식적인 죄인들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통용되던 사회통념(社會通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하계층구조를 가진 그 사회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계층구조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얽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상류층의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먹기를 좋아하시고, 포도주를 잘 드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누구와 그러셨는가 하면 세리와 죄인들과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하기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 34 ; 마 11, 19)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식사하기를 즐기셨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장애인, 나병환자, 이방인, 사마리아인, 세리, 그리고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여인들입니다.

 

 

 

당시, 종교?사회적인 통념으로 보면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술을 즐기는 방탕한 분이셨기 때문입니까? 먹기를 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의 중심에는,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자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유대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귀히 여기시는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서자나, 적자의 구분도 없습니다. 본부인과 첩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다처를 긍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인생의 아픔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 상처를 가진 자들까지도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들도, 예수 안에서는 회복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인 것입니다(마 21, 31).

 

 

 

우리는 아브라함 가정의 갈등 속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는 것과 버림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는 유대주의(Judaism) 속에서, 사람들 철저히 구별하고, 계층화시키는 바리새적이고, 서기관적인 비복음적인 그릇된 신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유대종교적인 그릇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하셨습니다(마 9, 17).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낡은 가죽 부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생명처럼, 진리처럼 붙들고 있는 유대주의 신앙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라를 차별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갈등과 반목과 대립의 신앙인 유대주의(Judaism)를 말합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립과 갈등, 끝없는 싸움과 전쟁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사라를 통한 이삭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철저하게 그릇된 비복음적인 유대주의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도 유대주의적인 그릇된 신앙에 있습니다. 유대주의는, 상대방과 서로 싸우고, 대립하고, 죽이면서도,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된다는 이율배반적인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이라는 종교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과연 그런 하나님인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정말 열심히 예수 잘 믿는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남편은 장로님입니다. 시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순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한 번은, 제 설교를 듣고 제 방에 찾아오셔서 울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담을 하러 오셨습니다. 내용인즉, 친정 언니 되는 분이, 여호와의 증인 골수분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부딪히기만 하면, 언니하고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영적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언니는, 마귀야, 언니는 이단이야, 언니는 사탄이야”하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영적전투가 벌어져도,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점점 더 골 깊어지는 원수맺음 아니겠습니까? 누가 지고, 누가 이기는 게임이겠습니까? 그 권사님이 왜 언니하고 그렇게 싸웠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권사님이 옳고, 언니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니가 잘못되었고, 권사님의 신앙이 바르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영적전투를 해야만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권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언니가 여호와의 증인에 빠진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권사님이 언니보다 더 많이 잘못 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이 오히려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권사님에게는, 여호와의 증인에 빠진 언니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사님께 권면을 했습니다. “권사님, 이번 주일 되기 전에 언니 좋아하시는 좋은 선물 준비해서 언니를 찾아가시라” 고했습니다. “그러고, 가서 언니에게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그 동안 언니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정죄한 것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니와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언니를 정말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언니의 문제도 치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고, 잘못된 기도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무슨 서원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 그래도 제가 목사인데, 저는 앞으로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거나 같이 살면서 아이 낳은 사람들 결혼 주례 하지 않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는 목사로서 너무 당연하고, 마땅히 목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의로운 목사인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법을 세우는 목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첫 번 결혼주례 상대자를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런 분들의 주례를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서원을 했습니다. 그 서원 파기합니다….”

 

저는, 잘 못된 서원이라도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흑백논리적인 신앙은 잘 못 되었다고 봅니다. 잘못한 서원은 파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런 실수와 아픔이 있어도, 그런 아픔을 가진 부부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저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삭이 되어 배부른 신랑신부도 결혼주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갈과 사라가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가정 안에 일어난 그 갈등 속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갈과 사라가,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가정을 잘 다스렸다면 오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내 하갈과 장자 이스마엘을 버린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버림받은 하갈과 이스마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이 버린 ‘에서’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