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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에서 죽은 모세 / 신 34:1-12

by 【고동엽】 2021. 12. 25.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

신명기 34:1-12

 

설교방송 (설교본문)

 

 

 

성경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느보 산에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참으로 섭섭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시고 매정하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신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평생을 헌신하며 살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는 일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보면 모세가 므리바에서 반석을 두 번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아니하였기 때문(신 32: 51)이라고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이 이해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것이 모세의 잘못이요 실수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실수와 잘못은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한 모세의 공적과 비교할 수 없고 므리바에서 실수한 그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지나치신 처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모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느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수아를 안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소개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가나안을 한번 바라보고 죽습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과 기도 후에 비로소 저는 그와 같은 모세의 행동이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모세의 삶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모세의 삶 모두를 다 합한 것 보다 묵묵히 느보 산에서 죽는 모세의 행동은 몇 배나 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하여도 모세가 느보 산에서 죽지 아니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는 절대로 가나안에서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워낙 큰 거목이었기 때문에 그 그늘이 너무 커서 누구도 그 뒤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의 그늘을 없이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느보 산에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그늘을 없이하였고 그 때문에 여호수아가 능히 모세의 뒤를 이어 훌륭한 백성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자기 밭은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던 사람으로서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교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권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회심하였다고 하여도 그와 같은 전과를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교회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보증과 후원이 없었다면 바울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 자리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 된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보조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의 보조자가 된 것만도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름을 쓸 때 언제나 바울보다 바나바의 이름을 먼저 쓰곤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의 사역을 돕는자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갑자기 그 이름이 바뀝니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와 바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이름의 순서가 바뀝니다.

 

 

 

이름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은 바울의 역할이 바나바의 역할보다 앞서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더 두드러지게 되고 바울이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바나바의 보조자가 아니라 바나바가 바울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바울을 바나바가 함께 계속하여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에 마가 때문에 의견이 갈려 결국은 헤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보다 더 중요해 졌기 때문에 그것을 시기하여 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보조자 역할을 잘 감당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 하는 것이었지 누가 더 높으냐 낮으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보다 바울을 더 좋아하고 바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인정하고 바울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바나바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바나바는 신약의 모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임으로 후배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줄 알았던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큰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은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많은 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 만큼이나 크고 기적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우리 한국 교회의 출애굽 역사에도 모세만큼이나 큰 일을 감당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 모세와 같은 사역자들이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고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모세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는 여호수아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모세와 함께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만 돌리는 훈련을 하여야만 합니다. 자기 혼자만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를 세우고 후계자를 키우는 것을 연습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조용히 느보 산에서 은퇴를 하고 기쁜 마음으로 여호수아를 축복하고 교회와 교인들 앞에서 세울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란 자기 자신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후계자와 백성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입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성공하였을 때 자기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대개 무너집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두 분이 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다고 생각하고 정치를 잘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분 다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를 잘 키우고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나라가 되지 않을 그런 나라를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두 분은 느보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나라가 다 불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고 지금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스타가 많습니다. 물러서야 하고 은퇴하여야 할 시점에서도 물러설 수 없고 은퇴할 수 없는 아니 물러서지 않고 은퇴하지 않는 스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여 자신을 교회의 유익으로 삼지 못하고 교회를 자신의 유익으로 삼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개인의 교회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의 수고와 헌신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나님께 버림받을지도 모르는 불쌍하고 위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한경직 목사님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적으로 완전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목회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는 그런 목회를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감각이 좀 부족한 분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독재자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에서 그를 축복하는 듯한 기도를 하신 것은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 중에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이였습니다. 그분만큼 한국의 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감당하신 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 모세와 같은 분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을 생각할 때 정말 훌륭하시고 위대하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정점에서의 은퇴입니다. 좋은 후계자를 세우시고 겸손하게 물러서실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훌륭하심은 당신이 목회 하실 때보다 후임이 목회 하실 때 교회가 더 성장하고 더 부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이 영락교회의 원로목사도 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신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10년 가까이 목사님을 가까이서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이 가나안에 들어가신 목사님이 아니라 느보 산에 올라가신 한국의 몇 안 되시는 훌륭한 목사님 중의 한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를 키워주시고 저의 영적인 스승이 되시는 임택진 목사님도 존경을 합니다. 그 분도 은퇴가 정확하신 분이었습니다. 스스로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가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식대로 느보 산에서 자신의 인생을 끝내시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임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게 되는 날 그 분에 대하여 느보 산에서 죽은 모세와 같으신 분이었다고 이야기 할 작정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일할 때가 교회와 세상의 정점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마음의 한 구석에는 제가 10년 동안 섬겼던 동안교회가 제가 시무 하던 때가 교회의 정점이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후임자가 저보다 목회를 더 잘하여 교회가 계속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왠지 좀 마음에 좀 걸립니다. 그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을 정점으로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무 하였을 때가 교회의 정점이었던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을 정점으로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계속 정점으로 이끌어 나가는 발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대신에 느보 산에 올라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를 우리 한국 교회의 모세같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도하신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중등부때 저를 가르쳐 주신 분이신데 작년에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될 것을 기도 중에 보신 분으로 저에게 신학을 하라고 권면하셨던 분이셨으며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저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 권사님은 제가 한국 교회의 모세 같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모세 같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제가 욕심을 내고 싶은 부분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자기 부인입니다. 느보 산에서 후계자 여호수아를 안수하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죽을 수 있는 그 훌륭한 겸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있는 원로와 공로제도를 없이하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대로 원로목사와 공사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직함 앞에 공로가 붙는다는 것은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입니다. 그리고 원로목사는 목사를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고 가나안에까지 들어가게 하는 좋지 못한 제도임으로 찬성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신경을 쓰려면 은퇴 목사의 안정적인 노후생활과 경제생활이나 신경써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모세와 같이 충성스러운 일꾼 되시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발 느보 산에서 죽어 주십시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물러 설 줄 아는 사람, 죽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욕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 손해'라고 저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난끼가 발동한 제가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거 걱정되어서 아직도 못 죽었냐? 걱정말고 죽어라. 내가 이래봬도 장례 전문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자기가 없으면 하나님 손해 보시고 높은 뜻 숭의교회가 잘못될까봐 걱정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제가 이번 구정 때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잘 파묻어 드릴 터이니 염려말고 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오늘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느보 산에 장사 지내십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십시다. 혹 앞으로 우리 높은 뜻 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한 유능한 모세가 그 어느 교회보다도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무능함에 잇는 것이 아니라 유능함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뜻 숭의교회를 정말 좋은 교회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죽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러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못 박으십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아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입니다. 모세는 느보 산에서 죽음으로 그 무덤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10절에서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느보 산에서 죽을 수 있음으로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큰 사람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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