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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학에 대하여 1

by 【고동엽】 2021. 12. 3.
종교개혁 신학에 대하여 1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기초 위에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받아들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 중시와 운동 법칙 영향으로 행위를 중시합니다.
종교개혁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등 스콜라신학을 폐기하고 신플라톤주의자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비판 없이 그대로 계승합니다.
그 결과로 개신교신학은 플라톤 관념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신학을 이어받은 개신교 신학은 칸트 철학과 독일 관념론으로 세웠습니다.(1)
믿음이 칸트의 도덕철학으로 인해 도덕주의가 되었고, 관념론에 의해 믿음이 이땅에서의 하나님나라 구원이 아니라 피안의 내세적 구원이 되었습니다.(신학교에서 칸트를 배웠는데, 기독교와는 다른 길인 도덕 철학을 공부한 것은 신학자들이 예수께서 제시한 계시가 인간 가치체계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신학이 아니라 사회 개혁을 위한 신학에 집중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 핵심인 사랑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닙니다.
루터는, 가톨릭 지배체재인 위계제도(hierarchie)에 대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이신칭의' 교리로 반발하여, 하나님 선택받은 신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회 원리를 삼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권리 회복을 사회 변혁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루터 종말론은 내세 종말 입니다. 복음서와 바울은 지금 이 땅에서, 예수께서 옛 시대 가치체계와 현저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을 종말로 증언하는데 반하여,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저 세상 피안을 종말로 인식했습니다.(2)
후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믿음에서 사회 윤리와 삶 중심성을 외면하고 이러한 루터 신학을 영혼 구원에 대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기독교 삶 중심성은(실존 요소), 종교개혁자들 자신이 아닌 후계자들에 의해 루터 칭의와 칼뱅 예정 교리를 강조하다가 상실되었습니다.
데카르트가 인간을 생각하는 주체로 삼았듯이 특히 한국 개신교 대세인 장로교 칼뱅주의와 그 분파들에서 인간이 점점 추상적인 도덕 주체로 변해갔습니다.
도덕, 합리, 과학으로 무장된 주체가, 많은 갈등과 절망으로 점철된 실존 주체(삶의 중심 주체)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습니다.(3)
특히, 도덕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 계시(예수사역과 가르침)를 제치고 믿음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지배층이 대중을 지배하는데 도덕만큼 좋은 구실도 없습니다.
개신교 중심 신학인 복음주의는(하는 짓은 이상하면서 좋은 이름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역사 실증주의에 의해 성서가 분석되고 비평되는 현실을 신앙 타락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서 문자주의로 가게되고,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보다는 교리에 대한 이해와 동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로 성서가 증언하는 삶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헌신하는 '구원의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4)
개신교 대세인 개혁주의(복음주의) 신학에서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지 않고 앎, 동의, 신뢰라는 연속된 3 가지가 필수가 되었습니다.(5)
루터 신학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인, 칭의에 대해 루터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6)
1. 의롭지 않은 인간을 하나님은 의롭다 하셨다.
2. 이것은 예수그리스도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 것이다.
3. 칭의 교리는 교회 존폐를 가늠하는 중요한 교리다.
루터는 성서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공로 구원을 주장하며 면죄부(죄용서받는 표식)를 파는 가톨릭을 공격하기 위해 믿음 구원 교리를 세웠습니다.
성서, 즉 바울 의도는 루터와 전혀 다릅니다.
루터가 행위 구원이 아닌 믿음 구원 교리를 세운 로마서 3 장 28 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에서,
의롭다는 의는 히브리어 '체다카'로서 '미슈파트'와 함께 이스라엘 천 년 이상 내려온 다양한 개념 입니다. 하나님 의는 심판, 판단, 자비, 자선, 구원 등 다양한 개념 입니다. 또한 그 단어에 '관계'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용어가 신약 성서 언어인 그리스어 '디카이오슈네'로 씌였습니다. 이 그리스어 뜻은 '옳음' 혹은 '정의' 입니다. 루터는 그리스어 뜻을 따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옳은 사람으로 인정하셨다는 의미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대인이므로 히브리어 의미로 사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로 읽을 수 있습니다.(김창락)
바울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칭의를 로마서 2 장 4 절을 시작으로 여러곳에서 '받아들임' 즉 용납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말한 (율)법 행위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용납하지 않고 자기들 정체성을 주장하는 할례, 음식규정, 절기 지키기에 한해서 입니다. 행위 일반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3 장 31 절에서 이점을 설명합니다.
기독교 초기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까지는 법으로 의롭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는 바울 진술은 신학화하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는 기독교에서 바울 영향이 미미했습니다.(7)
그래서 4 세기에 바울 서신 중심으로 성서가 정립된 것은 부활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과 함께 기적 입니다.
5 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의롭다는 바울 진술이 신학화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최초로 자아에 집중하는 영적 자서전 고백록을 저술한 인물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 따라서 인간성 회복을 구원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내면 성찰을 강조하는 서방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받아들이도록 적용한, 혈통이나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는 바울 진술을 개인 양심 문제에 처음 적용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입니다.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콥트교회(아프라카), 마르 도마교회(인도)는 이러한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양심은 서구에서 발견된 것이며 서구인 질병 입니다.(
루터에 의해 발굴된 바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에 의해 신학화된 바울 입니다. 이들은 죄에 대한 성찰을 바울이 시작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오해 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용서를 3 장 25 절에서 한 번 말할 뿐이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칭의를 50 번 말합니다.(스텐달)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인간을 의롭다 하셨다는 칭의를 통해,
1. 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합니다.
바울은 이제는 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로마3:21)
2.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화해 문제를 새롭게 했습니다.(9)
하나님이 아방인을 믿음으로 용납했으니 너희 유대인도 이방인을 용납하라 입니다.
아우구스타누스와 루터는 바울이 말한 할례, 음식규정, 절기 지키기 같은 구체 행위를 일반 행위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법 준수를 인간 행위와 공로 구원을 얻는 '율법주의'로 해석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화해하고,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바울 고찰이 근원적 곤경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해석되었습니다.(10)
바울 취지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시니 즉 이방인을 용납하시니, 너희 유대인도 이방인이 유대 혈통이 아니거나 할례받지 않고 유대 규정을 안 지킨다고 차별하고 배제하지 말고 용납하라는 것 입니다.
바울이 칭의를 말한 의도는, 유대인과 세계인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우리 해석은, 세계인과 연대와 평화를 위한 해석이 바울 의도와 같습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셨다는 용납은 완전 구원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뜻 입니다.
바울 십자가 이해 특징은, 예수 십자가가 완전 구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백성 삼을 수 없는 우리를 예수 십자가 죄용서로 하나님 백성 삼으셨으니 그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의미 입니다.
십자가 용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루터 해석은 개신교 교리로서 지금도 유효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고백이 적절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자기 행위로 인한 교만과 자랑으로 인해 불화, 차별,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 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에서 그 믿음이 행위와 구별된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위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갈5:6)
또한 그 구원은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습니다.(마태7:21-27, 로마2:6)
예수그리스도 사역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서, 어떠한 상황과 현실에서도 그분이 주시는 의미있는 삶(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기쁜 삶이 구원 입니다.(로마14:17)
다음회 칼뱅신학합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시길 기도합니다.
1. 서남동 민중의 신학탐구 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동연 2018, 209p
2. 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게베르크 C 헤넬 엮음 송기득 대한기독교서회 2020, 356p
3.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예영 2012, 169p
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2019, 248p
5. 같은 책, 252p
6. 니콜라스 페린 리차드 헤이스 예수, 바울, 하나님의 백성 최현만 에클레시아북스 2013, 307p
7. 크리스터 스텐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 김선우 이영옥 감은사 2021, 176p
8. 같은 책, 65 - 67p
9. 같은 책, 177p
10. 같은 책, 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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