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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유(갈 5:13-15)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8.
<사랑과 자유> 갈5:13-15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비교적 짧지만 복음의 핵심과 복음의 빛 아래 있는 자녀들의 삶의 도리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13절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는 이미 같은 갈라디아서 5장의 첫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에로 부르심을 입은 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자유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유로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가히 다 이해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유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유는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고, 또 모든 사람이 마땅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진정 사람답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이 세상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갖는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그것을 모든 법과 통제로부터의 해방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법과 통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법을 온전히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절망과 그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양심의 자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이 죄의 지배와 정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아무렇게나 해도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곧 법이 되는 자율도 아니고, 아무런 법도 없는 무정부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는 그 어떤 주인도 아무런 법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란 오히려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고, 바른 법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바른 법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모든 법과 통제로부터 해방되면 곧 고삐 풀린 탐욕과 이기심과 죄에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즉 육이 활개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신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며 죄 가운데 빠져있는 옛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회"라고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군대에서 어떤 공격이 시작되는 작전기지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은 자유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온갖 범죄를 자행하는 출발점이나 동기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지를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그 죄의 노예상태에서 풀려났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자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유이지, 죄에 빠져있을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에는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도록 죄에 갇혀있었으나 이제는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 없이 그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조금 뒤인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말합니다. 앞서 "그리스도인"이란 "자유에로 부르심을 입은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유는 우리를 육체의 정욕과 탐심에다 내어줄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이 더 이상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못박을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하기에 바로 앞서 그 유명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속에 해방을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를 포함시켰습니다. 즉 자유란 법과 통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그 정욕과 탐심을 온전히 통제 또는 절제하는 데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단지 우리 각자의 내적 양심의 문제에만 관련된 개념이 아닙니다. 자유는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 후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자유함의 두 번째 의미와 목적은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차서 스스로는 절대로 남에게 종 노릇 하려하지 않을 우리를 그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키셔서 서로 섬기며 종 노릇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신 목적이며,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의 의미입니다. 여기에 "자유란 종이 되는 것"이라는 복음의 위대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앞서 "자유란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고, 바른 법 아래 놓이는 것"이라고 한 말의 의미가 여기서 다시 한 번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주인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바른 법은 다름아닌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눈멀게 하며, 모든 논리를 뛰어넘게 만들기도 하고, 자유인을 종 되게도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스스로 종 같이 되며 그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게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할 수 없을 일을 하게 됩니다.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차서 스스로는 절대로 남에게 종 노릇 하려하지 않을 우리에게서 그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을 녹여 없앨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한 것이며, 뒤따르는 14절에서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자유는 파괴되고 상실된 공동체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신 것은 다름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름 아닌 사랑의 왕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셨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새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삶의 도리는 바로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사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끝의 15절에서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서로 물고 먹으면서 피차 멸망하는 험악하고 냉혹한 어두운 세상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들 각자의 양심의 문제와 대인관계의 문제만으로 그치는 개념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 무엇에 앞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자유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자유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것이며, 하나님을 향해 등진 관계인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향해 풀려나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죄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것을 하나님의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봅니다. 특히 우리 개신교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신칭의"교리,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모든 율법의 행위가 이제 우리에게는 필요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예수만 믿고 그 다음에는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 복음이고 기독교신앙이지 그 외에 무슨 제약과 간섭이 있을 수 있느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큰 오해요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우리에게서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마5:17-20).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우리에게서 폐하여 주신 것은 율법의 정죄이지 율법 그 자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그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는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도 롬13:8-10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고,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 법칙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이며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 우리 자신을 매어놓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나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사랑 때문에 나의 자유를 기쁨으로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며 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자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그 어둠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갈5:1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랑과 자유, 이것은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두 단어일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 이 두 가지는 인간을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과 자유, 이 두 가지를 가장 그릇되게 이해하고 가장 잘못 결합시킨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free sex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가장 바르게 이해하고 잘 결합시킨 것이 "섬김"입니다. "섬김"이란 본문 13절에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섬김"은 바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자유에 기초한 섬김만이 어둡고 험악하고 냉혹한 오늘의 이 세상을 밝히며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빛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사랑의 관심으로 남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이웃을 섬길 때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널리 비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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