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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아도니야를 통해 주시는 교훈(왕상 1:5-10, 46-53)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왕자 아도니야를 통해 주시는 교훈
열왕기상 1:5-10,46-53


인도에서 귀한 선교 사역을 하여 현대 선교의 성자라 일컬음을 받는 스텐리 존슨 선교사님은 삶이 매우 경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 가까이 사는 것 같은 그를 보고 한번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스텐리 선교사님, 바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같이 선교사님도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으십니까?”


“아니오, 나는 일생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을 통해 날마다 듣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 생활입니다.


성경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셨지만, 성경이 이루어진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설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도 우연한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과 제게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 말씀의 영양분이 필요해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가정 주부는 기분 내키는 대로 식탁을 마련하지 않고 메뉴를 짜서 영양의 밸런스를 맞추듯이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셔서 우리 영혼을 살찌고 건강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 낮, 주일 밤, 삼일 세 끼 말씀만 잘 먹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건강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도니야가 누구입니까?


다윗 왕의 넷째 아들입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은 이복누이 동생을 끌어들여 폭행한 그 잘못으로 그 이복누이의 친오빠인 압살롬의 칼에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길르압은 다니엘이라고도 불리웠는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낳아준 아들입니다. 병들어 일찍 죽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는 유명무실한 사람으로 사라졌습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켜 칼에 죽었습니다. 요압이 그의 심장에 칼을 세 개나 꽂고 또 군사 열 명이 난도질해서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니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의 살아 있는 여러 아들 중 가장 큰아들입니다. 아도니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용모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여기에 숨어 있는 뜻을 찾아보면 지혜와 슬기도 뛰어납니다. 그는 잘 생겼고 똑똑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윗 왕은 심히 늙어서 거의 정치를 하지 못합니다. 아비삭의 보살핌을 받으며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는 ‘솔로몬이 왕이 되리라.’고 한 아버지 다윗 왕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솔로몬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생긴 것도 평범하고 슬기와 지혜도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솔로몬 왕이 처음에는 얼마나 부족했는지 모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지혜를 받은 후 비로소 유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솔로몬이 평범한 왕이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너무 평범한 솔로몬과 여러 상황을 볼 때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은 자기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높였습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


그는 왕이라야 탈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 아주 화려한 옷을 입은 기병들을 세우고 전배 50명도 세웠습니다. 그가 마차를 타고 달리면 양쪽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기병들이 달리고 앞에서는 50명이 에스코트하며 달렸습니다. 그 행렬이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아도니야는 그러면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군대 장관 요압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제사장 아비아달과 신복들 중 많은 사람도 자기 손안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사독은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을 제외한 모든 왕자도 자기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소헬렛 돌 곁에 모여서 모의를 했습니다.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잔치를 배설하고 “아도니야 왕 만세!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부른 후 왕이 된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사실을 다윗 왕은 몰랐습니다. 밧세바도 몰랐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알게 되었습니다.


‘큰일났구나. 우리 나라에 비극이 시작되었구나.’라고 나단은 생각했습니다. 내일 모레 다윗 왕이 세상을 떠나면 밧세바도 솔로몬도 죽임을 당하고 아도니야에게 합세하지 않은 모든 신복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니 나단이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나단이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지금 굉장히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께서 솔로몬 왕자를 왕으로 세운다고 하셨는데, 아도니야 왕자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빨리 왕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저도 따라 들어가 돕겠습니다.”


밧세바가 선지자 나단의 말대로 왕의 침실에 들어가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나단도 들어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왕께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셨나이까? 어찌 이런 일이 있나이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이까?”


충격을 받은 다윗이 생각합니다.


‘아하! 이제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되었구나’


다윗 왕이 명령합니다.


“어서 제사장 사독을 불러라. 경호원들도 다 불러라. 나의 신복들도 다 불러라.”


그들이 오자 다윗 왕이 말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 그리고 ‘솔로몬 왕 만세!’하고 외치라.”


사독 제사장과 나단 선지자와 신복들과 경호원들이 솔로몬과 함께 기혼으로 갔습니다. 다윗 왕의 경호원들은 해적 출신으로 아주 무섭게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다윗 왕은 해적들을 포용해서 자기 경호원으로 삼았는데, 그 경호원들이 함께 갔습니다.


기혼에서 나단 선지자와 사독 제사장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솔로몬 왕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나와서 함께 “솔로몬 왕 만세!”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마치 성이 갈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 백전의 노장 요압은 잔치 음식을 다 먹어갈 때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니 낌새가 좋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직 철부지와 다름없는 아도니야는 좋은 소리겠거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비아달 제사장의 아들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와서 말합니다.


“내 주 다윗 왕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온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께서도 침상에 엎드려 ‘내가 살았을 때 내 아들 솔로몬을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하시며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모든 신복들은 솔로몬 왕이 다윗 왕보다 더 빛나고 높아지기를 원한다며 복을 빌었습니다.”


요나단의 말을 듣자 요압 장군으로부터 아도니야와 함께 한 모든 신복들이 ‘위기에 봉착했구나. 잘못되면 우리는 죽게 되겠구나.’하며 제 갈 길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아도니야는 죽을 것이 뻔하니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제단 뿔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오자 그는 “솔로몬 왕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오늘 맹세하게 부탁을 좀 하라.”고 말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뉘우쳐 선한 사람이 된다면 그의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에게 악이 보이면 그는 죽임을 당하리라.”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성전에서 아도니야를 끌어내게 했습니다. 제단 뿔을 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가 솔로몬 왕 앞으로 끌려나온 그가 솔로몬 왕에게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집으로 가라.”하는 솔로몬 왕의 말을 듣고 그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기병과 50명 전배를 거느리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달려가서 왕이 되었던 그가 이제는 죄인의 괴수가 되어 우울한 얼굴로 덜덜 떨면서 돌아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결국 그는 얼마 후 그의 악이 드러나 솔로몬 왕의 칼에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는 거울이고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아도니야가 조용히 순리대로 살았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백성들과 신하들도 왕의 친형인 그에게 왕 같은 대접을 했을 것이고, 솔로몬 왕도 하나님 뜻이지만 형을 제쳐 두고 자신이 왕이 되었으니 미안한 마음으로 형 아도니야를 늘 존경하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일생 존귀하게 살았을 왕자 아도니야, 하늘의 별 같은 사람인 그가 생각을 잘못했다가 거름터 같은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제명에 죽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도니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자는 더 높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왕자 아도니야는 지금도 높은데 더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조심해서 그 자리를 지켜야 되지만, 하나님께서 높여 주지 않으시는데 스스로 올라가는 것은 성경을 보면 내려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나는 높아질 거야.’하면 낮아지게 되고, ‘나는 낮아질 거야.’하면 높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지, 겨울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지, 봄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네 계절의 법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물은 100도가 되면 끓고 0도가 되면 업니다. 0도에 끓는 물은 없습니다. 이 법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창조 세계에도 법칙이 있듯이 인간 사회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마음을 스스로 겸비하고 겸손하면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난 체하면 낮아지게 됩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식당에 여행객들이 몰려와서 설렁탕을 시켰습니다. 그것을 먹던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어서 깍두기 더 갖고 와! 깍두기!”


깍두기가 빨리 나오지 않자 그 사람이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왜 깍두기를 빨리 갖고 오지 않는 거야. 빨리 갖고 와! 내가 누구인지 알아? 사장이야 사장. 70명의 사원을 거느리는 사장이란 말이야.”


70명 사원을 둔 기업체를 경영하는데도 그 정도이니 만일 사원이 700명이나 7000명쯤 된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치사하고 아니꼽습니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선생님 나라에서는 사장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깍두기를 얼마나 많이 드릴까 적게 드릴까, 빨리 갖다 드릴까 늦게 갖다 드릴까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이 말은 ‘당신이 사장이라고 이 식당에서까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거만합니까?’하는 뜻입니다.


그 사장에게 아르바이트생이 깍두기를 많이 갖다 주었겠습니까?


어디에서나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선비가 주막집에 들어가 요기를 한 후 자리에 누웠습니다. 먼길을 걸어오느라 지친 선비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충청 수사 출두요!”하는 소리와 함께 주막집이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아이고, 어떻게 합니까? 방이 없습니다.”


“죽고 싶나? 충청 수사께서 오셨는데 방이 없다니! 썩 방을 내놓지 못할까?”


주인은 선비가 자는 방에 와서 말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충청 수사(도지사)께서 오셔서 그러니 방을 좀 비워 주세요.”


그러자 선비는 “예, 그래야지요.”하며 방 밖으로 나와서 그의 일행과 함께 마루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그 선비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조판서 우암 송시열이었습니다. 이조판서와 충청 수사는 겨루어 볼 수도 없는 직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충청 수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만하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고, 겸손하면 얼굴이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목사님도 교회가 크다고 목에 힘을 주면 넘어지게 됩니다. 장로님도 조금 잘 산다고 힘을 주면 망하게 됩니다.


거만은 패망의 선봉, 넘어짐의 선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도 겸손한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장로님이 되고 권사님이 됩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장로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십니다.


아도니야도 겸손히 있었으면 왕처럼 살았을 텐데, 스스로 높아지려다가 죽게 됩니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이 법칙이 그대로 유효합니다.


가정에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언제나 겸손히 낮아지시기를 바랍니다. 동서들끼리 모였을 때도 내가 먼저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모여도 낮아지는 것입니다. 친구들끼리 모여도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디에 가서도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오, 너는 되었다.’하시며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끝까지, 끝까지 겸손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겸손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세움 받을 때는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숨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겸손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는데, 그가 나중에는 교만해져서 사무엘이 갖고 있는 영권까지 빼앗으려다가 버림을 받았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이 소개됩니다. 웃시야 왕이 처음에는 얼마나 정직하고 겸손한지 하는 일마다 잘 되었습니다. 농사와 가축이 잘 되고 국방력이 강해졌습니다. 왕이 복을 받으니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 16절에 보면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이 나라 왕인 내가 왜 교회를 다스리지 못하나?’하며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사랴 제사장을 비롯한 80명의 제사장이 몰려와서 말했습니다.


“왕이여, 이 일은 왕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한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니 그 일을 멈추시오”


그러자 웃시야 왕이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그의 몸에 나병이 발했습니다. 그는 별궁으로 쫓겨나 죽을 때까지 그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만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장래가 있습니다. 미래가 열립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오만 명이 모이고 예산이 오백억 원이 되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선한 일을 많이 하게 되어도 옛날 작은 교회의 그 겸손함을 갖고 나아가야 됩니다.


저는 제 책상에 우리 양곡교회의 옛날 사진을 두고 항상 봅니다. 제 책상 유리판 밑에 초가집 교회 사진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교회가 아니라 마치 창고 같습니다. ‘우리 양곡교회는 여기에서 출발했다.’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그 사진을 항상 봅니다. 그럴 때 더 낮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영영히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의 모든 계획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서실 자리가 없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여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한 다음, 군대 장관과 신하들, 왕자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는 것은 바벨탑입니다.


사람들이 벽돌을 구워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바벨탑을 쌓으면서 “우리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했습니다.


이 저의가 무엇입니까?


홍해 같은 것이 밀려와도 쓸어버리지 못하는 견고한 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바벨탑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도니야가 ‘하나님, 솔로몬은 지혜롭지도 못하고 어린데, 우리 아버지 다윗 왕은 연세가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제가 왕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꿈으로나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감동을 주셨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 같습니다.


“아도니야야, 상황으로 봐서는 그렇다. 그러나 내가 이미 솔로몬을 점찍었으니 너는 네 아우 솔로몬에게 잘 협력해라. 내 뜻은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니 네 욕심을 버려라.”


그랬다면 아도니야는 무사했을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계획해서 자기가 했다가 망했습니다.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3장 5절, 6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인생의 백사 만사, 큰 일 작은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 한국 교회 언론위원회의 상임위원회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바른 목회 실천 협의회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도 두 번이나 받았고, 또 노회 세계 선교부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일 제가 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어디로 갈까?’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이렇게 오라고 하는데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결정해야 됩니다.


어느 집사님이 제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 집사님이 10시에 저를 만나러 온답니다. 어떻게 상담을 해야 됩니까? 지혜를 주세요. 저는 상황을 몰라도 주님께서는 아시오니 좋은 길로 인도해 주세요.”


그리고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그 만남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장갑을 보십시오. 가죽 장갑이든 면 장갑이든 사람의 손에 끼워진 장갑은 여러 가지 일을 다 합니다. 운전도 하고 운동도 하고 기계도 만듭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에서 벗어난 장갑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장갑 스스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장갑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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