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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용사들의 생명과 같은 물(삼상 23:13-17 ) / 지용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6.
용사들의 생명과 같은 물
사무엘하 23:13-17


빨랫줄에는 전류가 흐르지 않아서 빨랫줄로 등을 켤 수도 없고 공장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선에는 전류가 흘러서 등을 밝히고 공장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우상 종교의 가르침은 빨랫줄 같아서 빨래를 척척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조금 편리해 보일지 몰라도 거기에 생명이 없습니다. 불을 밝힐 수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만 생명의 능력이 흐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한 빛을 발하시고 예수님이 들어가시면 변화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우상의 가르침에는 능력이 없어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킵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제가 설교하지만, 설교에는 주의 능력이 흘러서 오늘 처음 나온 분이라도 구원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서 괴로워하는 자가 힘을 얻게 되고 해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자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한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굴을 진지로 삼고 그 곳에 있는데, 블레셋이 너무 강해져서 다윗의 고향을 점령했습니다.


다윗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인데,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이라는 마을인데,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서 나신 마을 베들레헴에서 다윗도 태어났습니다.


그 고향 땅을 블레셋이 점령해서 진지로 삼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내 고향이 적에게 점령되고 적의 진지가 되었을까?’


그때는 추수 때라 굉장히 더웠는데, 상처 받은 고향, 빼앗긴 고향을 보니 고향 마을의 우물이 생각났습니다. 어릴 때 뛰어 놀다가 목마르면 달려가서 시원하게 목을 축이던 그 우물이 생각났습니다. 날씨는 덥고 목은 마르고, 또 어린 시절이 그립고 샘물이 그리워서 무심코 그는 탄식어린 말을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부하 장수들이 달려가서 물을 길어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윗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고향의 우물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또 빼앗긴 고향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냥 탄식조로 해본 소리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세 장수, 한 장수는 요압 장군의 동생 아비새이고, 또 한 장수는 브나야이고, 다른 한 장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세 장수가 서로 눈길을 맞추고는 한 조가 되어서 쏜살같이 베들레헴으로 진격해 갔습니다. 그 많은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의 진지로 달려갔습니다.


세 장수가 창과 칼을 잡고 한 조가 되어서 쳐들어가니 적군의 졸개들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세 장수의 칼과 창에 닿으면 쓰러지고 닿으면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주춤주춤 물러갔습니다.


성경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샘을 중심으로 세 명이 착착 치니까 적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두 장수가 적들을 막고 있는 사이에 한 장수가 신속히 그 우물물을 퍼서 쏜살같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떠온 물을 다윗 왕에게 바쳤습니다.


아주 신출귀몰한, 아주 아슬아슬한, 스릴있는 장면입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감격했습니다. 그냥 탄식조로 한 마디 던져 본 말입니다. 그런데 부하 장군들이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에 순종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적군의 진지로 달려가서 물을 퍼 온 것을 보고 감격한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실없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없이 말을 했다가 세 장수를 잃을 뻔했습니다. 저들이 저를 사랑해서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이렇게 샘물을 길어 왔으니 이것은 저들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결코 다시는 이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 내가 오늘 정말 실수했구나. 내가 어떻게 내 부하 장수들의 피같은, 이 생명의 물을 마시겠느냐?”


그는 고마워하기도 하고 후회도 했습니다. 그는 아비새와 브나야, 또 한 장수를 늘 사랑하고 귀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아비새 장군은 경호 대장을 삼아 늘 자기 옆에 두고 브나야는 사령관으로 세우고, 좌우간 다윗이 그들을 특별히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세 장군, 세 챔피언, 세 영웅, 세 장수의 충성심입니다.


다윗 왕이 그냥 탄식조로, 한 마디 시를 읊듯이 그렇게 말한 것 뿐인데도, 그들은 다윗을 사랑해서 그의 말에 순종하여 생명을 걸고 물을 길어 왔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 왕을 섬기는 부하 장수들도 이렇게 충성한다면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요, 여러분과 저를 위해 살을 주시고 피를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할 때마다 그것을 기념으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성찬식에 참석한 우리들의 살 중에 어느 부분이 주님의 살이고 어느 부분이 내 살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우리 혈관에 흐르는 피 중에 어느 피가 내 피이고 어느 피가 주님의 피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까지 다 주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우리의 자세는 지금 어떻습니까?


다윗은 아비새에게, 브나야에게, 또 다른 장수에게 피를 준 것도 아니고 살을 떼어 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들의 상관일 뿐인데, 그들은 피도 살도 주지 않은 왕을 그렇게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다윗이 왕이 된 때가 아니고 왕이 되기 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던 때 같습니다.


어쨌든 왕이든 왕이 아니든 자기 상사, 윗사람을 그렇게 섬기는데,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 앞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를 돌아봅시다. 이대로 그냥 살아도 되는지 생각해 보고 다른 삶의 자세를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는 중에 ‘그래, 이 세 장수가 다윗의 소원을 알았을 때 생명을 걸고 소원을 이루어 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되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할렐루야!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소원을, 주님의 소원을 생명을 걸고 이루어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 주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소원은 성경이 가르쳐 주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멸망으로 치달아 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태어나면 지옥으로 달리고, 태어나면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는데 그들이 그렇게 멸망하는 것이 마음 아프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을 얻고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17절) 할렐루야!


그냥 두어도 심판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심판이 없고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면서까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란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찾은즉 벗들을 불러놓고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노라.’하며 잔치를 벌이지 않겠느냐?”


그리고 누가복음 15장 7절에는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여자가 드라크마 열 개, 보석같이 생각하는 동전 열 개를 갖고 있다가 하나를 잃으면 그가 열심히 찾지 않겠느냐? 찾은즉 이웃을 불러서 ‘내가 잃은 나의 귀한 것을 찾았노라. 우리가 즐기자.’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주식 투자를 한 사람은 주식이 올라가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 이하를 보십시오. 제자들이 일어나 보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기도하러 가셨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소에 가니 찬이슬 맞으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여,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전도, 영혼 구원입니다.


오늘 교회가 세워진 목적도 구제하기 위해, 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회 봉사하려고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구라파 교회들이 교회를 세워놓고 사회 봉사나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만 힘쓰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니까 교회가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제도 하고 가난한 자도 돕고 사회 봉사도 해야 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복음 전도에 써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해야 그 힘으로 사회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를 도와 주시고 떡도 먹이셨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떡을 주러 왔노라.”라고 하지 않으셨단 말입니다. 세상에 빵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나는 전도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선 목적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께서 왜 부르셨습니까?


예수께서“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바른 성도에게는 내 직장, 내 사업은 부업이고 전도가 본업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업이 아니라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모든 성도들도 성령을 받으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업이고 자기 일은 부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복음 전하기 위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까지 예수를 믿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까? 하나님의 소원을 얼마나 많이 이루어 드렸습니까?


부천의 한 교회 목사님은 꿈에 큰 트럭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피했는데, 실제로 침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왼팔이 부러졌습니다. 왼팔에 깁스를 해서 오른손으로만 축도를 하니 교인들이 한쪽으로만 모이더랍니다.


그 목사님 교회의 한 병원 원장 부인이 얼마나 전도를 열심히 하는지, 60명, 200명씩 전도를 한답니다. 지하철에서도 전도하고 어디에서든지 전도를 하는데, 전도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병원 원장 부인이면 세상살이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 텐데 전도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요즈음에는 법이 바뀌어서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면 안 되는데 전도하다가 경찰서에 잡혀 가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나오면 또 전도를 한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소원, 영혼 구원을 많이 이루어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100만, 1000만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5만, 10만 교인이 되어야 하지만, 방송을 통해서 1000만, 2000만 명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양곡교회를 생각하시면서 기뻐하시고 시원해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소원은 억조 창생을 통하여 찬송과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 하리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찬송을 열 곡씩 올려 드립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찬송 열 곡을 올려 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삼일 예배와 새벽 예배, 가정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러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가 5일만 근무하고 2일간 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토요일에 “어디로 갈까?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강으로 갈까?”하다가 주일을 범하는 사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에는 생명을 걸어야 믿음 생활을 바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일간 일하고 2일간 쉬는 것이 복 같아도 복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 쉬다가 영생을 잃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다 망하는 것입니다.


즐기다가 예수님을 잃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First, 첫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라야 다 되는 것입니다. 1을 놓고 0을 하나 달면 얼마입니까? 10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열 가지가 붙어도 다 복이 됩니다.


1을 놓고 0을 두 개 붙이면 얼마가 됩니까? 백이 됩니다. 0이 세 개 붙으면 천, 네 개면 만, 다섯 개면 십만이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다섯 가지가 붙어도 다 복이 됩니다. 십만 가지 은혜를 받게 됩니다. 1이 앞에 있으면, 0을 여섯 개, 일곱 개, 여덟 개, 많이 달면 달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앞에 1이 없으면 아무리 0을 많이 달아도 0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제쳐 놓고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성공해도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모두 모래성이 되고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고 실력과 성공이 있을 때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먼저 예배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소원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다음에 순종하기를 바라셨는데 순종하지 않으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너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말씀을 귀히 여기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을 시원해 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우리 교회 지용덕 목사님의 아들 훈이가 방학을 맞이해서 저의 집에 왔습니다. 가을에 좋은 대학에 입학할 것입니다. 코피를 쏟으며 공부하더니 좋은 대학에 가게 되어서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가방을 열더니 제일 위에서 큰 성경, 자기가 집에서 읽는 큰 성경을 꺼내었습니다.


제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옷, 신발 서너 켤레, 화장품, 라면, 고추장 등 별것을 다 챙겨 넣고는 마지막에 ‘이 성경은 짐이 되겠다. 작은 성경이 없나?’하는 사람도 있는데, 훈이는 큰 성경을 갖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방이 무겁기는 무거웠습니다.


‘훈이는 복 받은 아이다. 태평양을 건너오면서도 큰 성경을 갖고 오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성경에 찬송가는 가끔 얹어 놓았지만, 다른 책 올려 놓은 기억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에 신문이나 다른 책, 볼펜 같은 것을 얹어 놓은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납니다.


성경은 우상이 아니지만 최고의 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서관의 책을 다 쌓아 놓아도 성경 한 권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논문을 다 읽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 한 권을 읽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킨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예배 드리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막 살면 하나님께서 답답해 하십니다. 순종할 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전도하자.”


“예배하자.”


“순종하자.”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세 장수는 생명을 걸고 다윗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생명을 거는 것은 자기 땀, 자기 시간, 자기 에너지, 자기 돈, 자기 생명을 다 쏟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받는 자는 복이 적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아내가 제일 행복할 때는 자기 몸, 자기 모두를 남편에게 다 바칠 때입니다.


‘나는 나. 당신은 당신.’ 그러면 그 때부터 그 부부는 불행해집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사랑을 다 쏟을 때 엄마가 행복합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데,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를 쳐다보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내 새끼. 내 새끼.”하면서 줄줄 빨다가 뽀뽀를 하다가 야단이었습니다.


그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주고, 목욕을 시키고, 그 아기 때문에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도 자기를 쏟을 때 그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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